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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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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열심히 봤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오랫만에 역사책을 본다는 설레임으로 봤다. 제목도 "밖에서 본 한국사"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무지 힘들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책을 읽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 350페이지가 안되는 책을 읽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서 딴짓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이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김기협이 도대체 누구냐? 결론이 뭐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서평을 찾와 봤다. 마음에 꼭 드는 책이라고 하는데 난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하지? 내가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것일까?

  국사의 해체를 바란다고 하면서 한국사는 동아시아사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을 하더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동아시아사에서만 한국사를 바라보다 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다 보니 내용을 잃어버렸다고 할까? 이 책을 보면서 저자의 논점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다. 한국이 살아남은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 때문이고, 그 문화에서도 고구려의 것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고, 강대국들과의 관계 가운데에서 모질게 살아남은 것이 한국사라는 의미인가? 만일 내가 파악한 것이 옳은 것이라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 한 순간에 한국사가 축구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고구려사가 내 것이 아닌데도 마치 그것이 내것인양 붙잡는 파렴치범이 되는 것이요, 주체 의식 없이 이리저리 채이는 축구공 신세가 되는 것이요, 문화로 오늘까지 살아남은 별종 중의 별종인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한국사인가? 국사라는 국수적인, 애국적인 모습을 버리고 동아시아사에서 바라보는 바람직한 한국사의 모습인가? 웃기는 일이다.

  뉴라이트에서 나오는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가 극우적이라 문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교과서나 이 책이나 그렇게 차이가 없다.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국사의 국수주의적 모습을 벗어버린다고 하나 책의 중간중간에 던지는 이야기들이 요즘 보수층들이 말하는 논리와 교묘하게 겹치고 있다. 친일파에 관한 문제들이 그것이다. 항일운동한 사람들을 무작정 영웅으로 볼 것도 아니고 친일파들을 무작정 매도할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얼마전 친일 인명 사전이 발표된 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이명박 대통령의 이야기와 놀랍도록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외 4.19 민주화 운동, 군사 정권에 대한 평가들을 보면서 어이없어서 픽픽 웃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의 한국사의 위치, 세계화에서 화이부동이라는 말이 이 책의 논점이라 말하는데 왠지 합종연횡으로 들리는 것이 무엇일까? 합종연횡의 마지막이 어떠했는가? 교묘한 말로 국가들의 연합을 꾀했고,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마지막은 어땠는가? 그렇게 경계했던 진에 의한 통일로 합종연횡이 얼마나 실패한 정책이었는지 드러나지 않았는가? 밖에서 본 한국사를 외치다가 그나마 안에 있는 것도 잃어버릴까 두렵다. 더구나 요즘은 국사마저 선택으로 배우는 시대 아닌가? 르네상스도 모르는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무슨 동아시아사요, 국사요, 세계사인가? 동북공정, 독도 문제 이걸 도대체 어떻게 풀 것인가? 책을 덮는 마음이 씁쓸할 따름이다.

ps.역사 에세이가 도대체 뭔지? 논란거리를 피하기 위해 살짝살짝 말만 던지는 비겁함으로 느껴진다. 차라리 욕먹어도 당당하게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한다. "이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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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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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총선을 바라보는 마음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냥 답답한 마음이 느껴지던 선거였다. 정책도 없고, 인물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선거였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친박연대라는 이상야릇한 당을 바라보면서 요즘은 개나소나 다 국회의원이야라는 생각을 해봤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 친박연대라는 이름은 당명이 아니라 이기적인 이합집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느껴지고 있다. 조금은 과격한 말이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쓰레기"이다. 정책이 없는 당이 과연 당이던가? 정책과 공약이 없는 정치인이 과연 정치인이던가? 박근혜씨와의 친밀함을 그렇게 강조하는 친박연대의 모습은 영 마뜩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그들이 그렇게 기대는 박근혜씨의 이름값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박정희 전대통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던가? 이책에서 표현된대로 전 세계적으로도 버림받은 독재자, 경제에 실패하여 무너진 그 정권에 기대고 있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그저 우습기만 할 뿐이다. 죽은 뒤에 의도적으로 영웅화가 되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망령이 아직도 우리 사회 가운데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한 얼굴이 바뀌지 않는 민노당의 행태를 보면서 진보가 아닌 수구로 전락했구나 생각하면서 심기가 불편해 있었다. 권영길씨가 갑자기 JP의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였다. NL계 그 중에서도 골수 주사파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노당을 바라보면서 저러니, 저렇게 북한 분제에 대해서는 금기시 하니 좌빨이라는 소리를 듣지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진보신당이 갈라져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름 기대를 갖기도 했던 선거였다. 그러나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정책이 없으면 여당이 유리하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역대 최저의 투표율, 거기에 대하여 정치적인 무관심,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말도 안되는 성장주의, 시간을 마치 30년전으로 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잡한 마음으로 선거 기사를 읽던 중 어느인터넷 뉴스에서 위의 사진을 발견했다. 역사가 후퇴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결코 아니다."라는 마음을 심어준 사진이었다. 아직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진이다. 어느 선거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세명의 후보가 경선을 하는 곳인데 내가 보기에도 정말 찍을 사람이 없다. 이번 선거의 특징이 아니던가? 찍을 사람이 없는 것. 그 가운데에서 어쩔수 없이 표를 던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분은 아니었나보다. 선거는 국민의 의무이기에 꼭 해야하지만 맘에 안드는 사람에게 어쩔수 없이 표를 던지는 야합과 현실 포기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거는 하지만 찍을 사람이 없으면 기권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일 것 같다. 투표율이 적으면 정치인들은 국민을 우습게 본다. 그렇다고 어쩔수없이 표를 던지면 지들이 잘한 줄 안다. 이것에 제동을 거는 방법은 투표는 하지만 맘에 안들면 가차없이 기권표를 던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몇번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옥석이 구분되지 않을까?

  이 책이 나름 재미가 있었던 이유는 한국 근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선거라는 새로운 렌즈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 속에 선거는 부정과 부패가 가득한 진흙탕이라 생각을 해왔는데 저자는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반대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 가운데 선거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역동적인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얻은 자유는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몇번의 선거를 통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선거의 역동성에 대해서, 선거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광복 이후의 사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얻게 된 것은 책을 읽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역사상 치러진 선거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에서부터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까지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신물난 국민들이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며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가 있었고, 박정희 독재에 신물난 사람들이 갖고 있던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 말이지만 국민들이 공감했던 구호일 것이다.)는 구호는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렸다. 신군부는 "요즘은 박사 위에 육사 있다더라"는 구호로 무너졌다. 모두 민주화를 염우너하던 국민들이 선거 시에 외치던 구호들이었다.

  그러나 4자 필승론이 나오는 혼란기에서 오늘까지(나는 이때 민주주의가 오히려 쇠퇴했다고 생각한다.)를 사로잡고 있는 구호는 "우리가 남이가"이다. 충청도에서 김종필, 전라도에서 김대중, 경상도에서 김영삼이라는 지역주의로 대변되는 3김시대가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가 가득하다.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한다. "혈연, 지연, 학연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학연이아." 무슨 말인가? 한국 사회만큼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에 목매달고 있는 사회는 없다는 말이다. 서로 돕고 산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약자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사용된다면 긍정적이겠지만 이것이 정치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 이번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이것들을 여전히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통합신당의 전라도 표 공략, 한나라당의 경상도 표 공략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문제이다.

  여기에 더하여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말도 안되는 구호는 박정희의 망령을 오늘에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근혜이즘, MB노믹스라는 말이 쉽게 나오는 시대, 한반도 대운하라는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비상식적인 정책들, FTA, 금산법 완화 및 궁극적으로는 폐지, 삼성 특검 등 중요한 사안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우리나라가 박정희 정권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발끈하시는 어르신들, 경제만 살리면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경제 우선 논리, 기업인이면 선처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사법부, 과연 이것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선거밖에 없다.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합법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막는다면 그 어떤 정권도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제는 선거는 함부로 만질 수 없는 제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 것이다.

  비록 이번은 실패한 선거이지만, 그래도 참고 기다리련다.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마음에 안든다면, 실정을 한다면 다음 심판에서 철저하게 심판하면 된다. 그저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지친나머지, 실망한 나머지 투표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투표율이 90%가 넘는 시대가 오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정치인이 정말 머슴이 되는 날이 오기를, 국민 알기를 무섭게 아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ps. 강의안을 가다듬은 책이기 때문에 강의를 녹취한 듯한 느낌이 든다. 조금은 생소한 필체이긴 하지만 그덕에 읽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어설픈 역사 교과서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이 책을 읽게 하는 것이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잡는데 더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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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칼집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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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합도라는 검술이 있다. 검술의 한 분파로 쉽게 말해서 발도술이라고도 불리운다. 검집에 들어 있는 검을 뽑음과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초스피드의 검술이다. 이 발도술이 가능하려면 가장 중요한 요건은 검이 검집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도술의 요체이다. 만일 발도술의 대가와 겨루기를 할 때에 검이 이미 검집 밖으로 나와 있다면 최소 30%는 이기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거합도에 있어서 검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검이 더 위력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정말 잘 벼려진 칼이란 칼집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칼집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칼집의 역할이란 단순하게 칼을 가지고 다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칼을 보관하고, 보호하며,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칼에 칼집이 없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칼로서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든지,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막장을 생각한다든지. 어느쪽이 되든간에 칼집이 없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람을 칼에 비유해 본다면 마찬가지로 사람이 가장 빛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정말 제대로 된 칼집이 있을 때이다. 사람에게 잘 맞는 칼집이라 함은 절제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절제력이 없다면 이미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헤픈 사람, 실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고수들은 함부로 자신의 실력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어설프게 초단을 딴 입문자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내 보이고 싶을 뿐이지, 진정한 실력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친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 태권도가 4단이다. 승단 심사에서 5단으로 승단한 친구이다. 나중에 밥벌어 먹고 살 것이 없다면 태권도장 차린다고 농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친구인데 도장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시비가 붙고 화가 날 때에도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 겁이 난다고 하더라. 잘못 때리면 어떻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하더라. 이게 진정한 실력자들의 모습이다.

  진짜 리더는,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 대하여 끔찍할 정도로 엄격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 대해서만은 엄격하다. 자신을 한자루의 잘 벼려진 칼로 만들고 있지만 결코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다. 자기 절제라는 칼집안에 자신을 담아 두고 있다. 그러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진짜 리더의 모습이요, 진짜 실력자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에서 진짜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음식도 진짜로 만드는 음식점은 망해가고 있다. 명품도 이미 짝퉁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짜 실력자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빈수레가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빈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굴러가고 있는 시대에 조용히 자신을 갈고 닦으며 절제라는 칼집 안에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진짜배기들은 어디에 있을가? 언제나 진짜 배기들이 대접받는 시대가 올까? 실력 지상 주의 시대에 성품과 절제라는 아름다운 칼집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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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권력
아서 제이 클링호퍼 지음, 이용주 옮김 / 알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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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커다란 보물 찾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의도는 명백하다. "독자들이여 보물을 찾아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지도는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세계지도를 메르카토르 기법에 의하여 작성된 것인데 우리는 어릴 적 부터 이것을 보고 배워왔기에 원래 세계는 이렇게 생겼나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원래 세계는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지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도가 항해를 위해 만들어진 대항해시대의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항해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데 있다. 만병통치약처럼 국경을 나눌 때, 인구의 분포와 문화의 영역을 나눌 때에도 이 지도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잘못된 시각을 갖게 해준다.

  몇 배이상으로 크기가 과장된 유럽, 남반구는 항상 북반구의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로 갈라져서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은 지도의 양끝, 상대적으로 크기가 줄어든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진 유럽, 북아메리카, 러시아를 포함한 중앙 아시아는 사실이 아니라 힘의 크기, 영향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중앙에 배치된 유럽은 유럽 중심주의를 심어주는 아주 좋은 교보재가 된다. 물론 이것이 메르카토르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유럽에 필요한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왜곡이요, 유럽중심주의일 것이다. 이 지도를 만든 메르카토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제는 무엇이냐? 이 지도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말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이 항해에는 유리함은 이미 말했다.그러나 항공이나 기타 다른 면에는 불리함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 없이 단순하게 이 지도를 사용하여 교육을 하면서 우리에게 이지도가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불손한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지도의 이면에 숨어 있는 유럽 중심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야욕 등 여러가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렇게 선명하게 알 수 없었을 사실들이다.

  믿기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지도를 펴보라. 그리고 그 지도를 중심으로 각 국가들의 정치와 이슈들을 살펴보라. 미국의 아프간과 이라크 침략, 한국과 일본에서의 군사동맹 강화, 대만을 향한 지지, 유럽과의 동맹이 과연 어디를 겨냥하여 이루어지고 잇는지 살펴보라. 유럽과의 동맹은 냉전 시대에는 소련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의 독주가 이루어지면서도 여전히 유럽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는 아프가니스탄을 빈 라덴을 잡는다는 이유로 들어가 아직도 철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량학살 무기가 없다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엉덩이 깔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이다. 중국을 포위하는 전술이다. 이러한 것들을 지도를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전술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메르카토르도법의 가장 큰 문제점일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 지도가 살아남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가끔 독도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옛날 지도를 찾았다고, 독도가 한국 땅임을 표시하는 지도를 찾았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기사를 본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도는 단순하게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과 다른 지도를 보여주면서 일본의 주장이 틀리고 우리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이렇듯 지도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지도는 객관적인 산물이 아니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고 사용된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지도는 한국의 의치를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국가주의적 전략을 계속 심기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여기에 휩쓸려 맹목적인 애국, 국가에의 충성, 권위에의 복종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지 않겠다.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의 국민이라면 이 정도의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이라는 사고에 물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사고를 우리에게 심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제국주의적 사고에 젖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3류 인종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도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라. 아니 지도에 숨겨진 야욕과 정치적인 계산을 찾아라. 그리고 거기에 물들지 않도록 유의하라. 지도를 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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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 '88만원 세대'를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 찾기
우석훈.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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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만원 세대"를 정말 재미있게 본 사람이다. 그 책 한권은 나에게 우석훈이라는 이름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 우석훈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기에 고민을 하다가 샀다. 책 제목도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이기에, 그리고 부제로 88만원 세대 해설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사게 되었다. 나름 기대를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이 과연 다작이 좋다지만 이렇게 다작을 내는 것이 바른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왠지 사기를 당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달까?

  일단 책이 무척 쉽다. 보통 사회과학 서적들은 읽기가 난해한 경우가 많이 있다. 번역서들은 번역자체가 어려워서 일테고, 국내 학자들의 저서는 대개 자신들의 학식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알량한 자만심 때문에 어려운 것일게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것이 없다. 정말 쉽다. 중고등학생이 읽는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전혀 없을 정도로 쉽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들을 쉬운 말로 풀기 위해 노력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지승호씨의 질문 또한 날카롭다. 두 사람이 공통의 시각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현 상황에 대하여 거침없이 난도질을 했달까? 있는 그대로 까발렸달까? 이런 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별 하나를 더 줘도 될 것이다. 원래는 3개릐 별점을 주려고 했지만 책이 쉽게 읽히고 소설책 넘어가듯이 쭉쭉 넘어간다는 그 이유만으로 별 한개를 더 매겼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자세히 뜯어보면 날카롭다. 이야기 꺼리도 많다. 우리 사회의 워낙 여러가지 분야를 총망라하기 때문이다. 정치 하나만 해도 많은데, 거기에 경제에 문화에, 생태까지 모든 부분들을 망라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야기 꺼리는 많은데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이야기들이 계속 열거 되고 있다. 이 글의 서평을 쓰면서 드는 생각이 딱 맥가이버 칼이다. 위에 사진으로 올렸는데 일명 맥가이버 칼로 통하는 다용도 칼은 정말 여러가지 공구가 다 들어 있다. 포크에, 칼에, 가위에, 펜치에, 톱에, 어떤 경우는 도끼까지 있기도 하다. 칼 하나를 샀는데 여러가지 공구가 들어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이것 하나만 가지면 무인도에 가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여러기지를 신기하게 만져보지만 그것도 며칠이다. 며칠지나면 시들해진다. 칼만 주로 사용하게 되는데 칼을 사용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이렇게 투박하지? 너무 무겁다. 이런 것들 다 없고 칼만 있었으면." 대체로 맥가이버 칼이 이렇다. 이것저것 많은 것 같은데 정작 사용할 것은 없다. 이책이 그렇다. 이것저것 많은데, 담론도 많고, 꺼리도 많고 날카로운 질문도 많은데 정작 쓸만한 건 없다. 다 합쳐 놓으니 군살이 너무 많이 붙었다. 꺼리의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또 문제는 명확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꺼리가 많다보니 한가지 타이틀에 십여개의 질문과 답변이 전부다. 그 개개의 질문들도 족히 책은 한권 쓸법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이렇게 모아놓으니 명확한 결론이 없다. 그저 주절거리는 것 같은 글이다. 예전에 선배들이 술먹고서 하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 같다.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술에 취해서 던지는 이야기들은 정말 들을만한 것들이 많았다. 신학에서부터, 철학, 사회학, 맑스에서 사구체, 소비에트 연방까지 온갖 이야기들을 총망라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며 밤을 샌것이 며칠인지 모른다. 그런데 들을 꺼리는 많은데 왜 그리 설득력이 없던지. 워낙 주제가 많다보니 그저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다. 한가지들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몇날 며칠을 밤새도 그거 겉에만 머물러 있을텐데 그것들을 하룻밤만에 훑어 버리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라고 할까? 솔직하게 드는 생각은 우석훈이라는 이름값에 기댄 평균이하의 책이라는 것이다. 넓기는 한데 깊이가 없다. 지식이 습자지라고 할까? 넓기만 하고 깊이는 극히 얇은 지식. 그래도 저자가 다음에는 인터뷰를 안한다니 한번의 실수였겠거니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가 책의 주제인데, 솔직히 희망을 찾지 못했다. 온갖 절망적인 이야기들은 다 해놓고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다. 서울 시내 미세먼지를 조절하기 위해서 2년 동안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앞으로 공사 총량제를 시행하는 것이란다. 본인도 이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고 있다고 차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이기에 들었지만 대체로 이렇다. 무엇인가 비판을 많이 해놓는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대안이 없다.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하단다. 과연 무엇으로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희망이 있기는 한가 생각이 든다. 오직 눈에 절망만이 들어온다. 차라리 안봤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본걸 어쩌란 말이냐? 희망이 없는 상황을 다 보여주고 이제부터 우리 희망을 말해야하지 않겠냐 그러는데 무엇인 희망인지 보이지도 않는데, 아니 희망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가는데 희망을 말하라고 한다. 새장에 갇힌 새에게 자유를 노래하라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음 속의 근심이 더 깊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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