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평화 발자국 9
김수박 지음 / 보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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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가족!

 

  한때 삼성이 밀었던 모토다. 고객을 가족처럼, 사원을 가족처럼 여기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져서 "오..저런 금쪽같은 슬로건을..."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삼성이 말하는 가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막말 김용민 선생께서는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을 "또 하나의 가좆"이라는 말로 패러디 하실 것이 분명하다. 김용민이라면 하고도 남았을 농담이니 분명히 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들어보지 못했겠지.

 

  잠시 19금 이야기로 흐를지도 모르겠지만 "또 하나의 가좆"이라는 말을 통해서 삼성이 사원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좆"이라는 말은 남성의 성기를 속된 표현으로 부르는 말이다.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어치우려는 습성이 있는 남성들에게, 특히 한국의 남성들에게 "ZOT"라는 것은 참 중요한 신체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어떨까? 만약 남자가 태어나면서 여분으로 "ZOT"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할까? 물론 보호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여분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가차없이 포기해버릴 것이다.

 

  왜 내가 19금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ZOT"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삼성에게 노동자가, 고객이 꼭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많은 대기업들이, 특히 삼성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과 동시에 욕을 먹는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기할 수 있다"는 태도에 있다. 기업에게 고객은 자기의 물건을 사주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의 need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다. 행여라도 고객이 클레임을 건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고객들의 불만에 대처할 것이다. 기업이 작을수록 더욱 이런 불만에 민감한 태도를 취한다. 그렇지만 선두 기업이 되면, 대기업이 되면 그러 불만에 대해서도 둔감해지게 된다. 왜 그런가? 굳이 그 고객이 아니더라도 대체할 수 있는 고객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국제 무역이 활발한 시대라면 국민기업이라는 말이 무상하게 자국의 고객들에게는 더 소홀할 수밖에 없다. 왜냐구? 단순하게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산다는 차원이 아니라 애국심이라든, 국민을 먹여살린다든지 하면서 다른 돌파구를 찾을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대기업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이것이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돈을 주고 자기 물건을 사는 고객에게도 그런데 자기가 돈을 주고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것을 막는 투쟁의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조직이 노조다. 그러니 이 노조라는 것이 기업가에게 얼마나 불편한 존재이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 또한 기업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족이 아니던가? 물론 자기들이 돈을 주고 고용한 노동자들이 자기업의 물건을 사주는 고객이 된다는 이해타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애증의 관계 속에서 공생하는 것이 기업과 노조의 관계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자회사의 노동자를 가족이 아니라 기계 부품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굳이 그 사람들이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고객을 충분히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면, 아니 그런 똥배짱이 있다면 둘 사이의 관계를 매우 달라진다.

 

  여기에 삼성 나아가 대기업이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비밀이 숨어 있다. 과거에는 자기 회사의 노동자들이 물건을 사주는 주 고객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우대하고, 보호해야했지만, 이젠 그들이 고객으로서 차지하는 비중과 구매력이 과거에 비하여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가좆이라는 개념으로 사원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보호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기할 수 있다. 이것이 대기업들이 사원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다만 삼성은 그 정도가 유달리 더 심할 뿐이다.

 

  과거의 기업의 태도로 본다면, 현대라는 기업에 밀렸던 그 시절의 삼성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라는 허울 속에서 행하여 지는 미행과 노조파괴와 해고가 이렇게 대놓고 행하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보루요,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다른 대안이 있다. 그러니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 거리면서 버릴까 말까 고민할 이유가 없다. 설령 고민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만지작거릴 이유가 없다. 그냥  한번 쓰고 버리면 된다.

 

  이것을 장기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장기를 둘 줄 아는 사람들은 졸과 차의 중요성이 다른다는 것을 안다. 차는 2개다. 위력도 막강하다. 졸은 5개다. 졸 개개의 능력은 정말 약하다. 그러니 둘 줄에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차대신 졸을 포기한다. 이것이 장기의 기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기를 오래두다보면 졸을 포기하는 것이 처음과 많이 달라진다. 처음 장기를 배울 때는 졸 하나를 포기할 때에도 심사 숙고를 한다. 그러나 몇 번 장기를 두면 습관적으로 졸을 포기하게 된다. 대용품이 많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막판에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졸이다. 졸이 몇개 남아 있는가에 따라서 판세가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그때 가서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왜 일찍 그렇게 버렸을까? 지금 삼성에게 사원은 쉽게 포기해도 되는 졸이다. 대용품이 아직 많이 있다. 그러나 막판에 이 졸의 무게는 전혀 달라지듯이 위기를 겪을 때 사원의 무게는 달라진다.

 

  삼성이 지금 잘나간다. 정말 잘나간다. 그래서 사원을 가족이 아니라 대용품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영 마뜩치 않다. 세련되기는 했는데 사람냄새가 안난다. 수더분하다고 하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온통 수치만 가득한 것 같다. 수출 얼마 달성, 한 주에 얼마 등등. 그래서 더 사람 냄새를 지우기 위하여 경영혁신이라는 향수를 뿌린다. 사람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삼성에 입사한 사람들은 오직 한가지만 생각한다. 젊을 때 바짝 벌어서 내 사업을 차려야겠다. 여기에 미래가 있을까? 삼성이 사원을 가좆으로 생각하지 사원도 삼성을 가좆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내겐 이 포장이 또 하나의 가족으로 대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을 구하겠으니 너를 포기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백혈병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다. 대상자들에게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지만, 관망자에게는 백혈병 문제는 병의 본질이 아니라 나타나는 증상이다.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연대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문제의 본질을 바로 잡아야 한다. 안그러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냄새 나지 않는 기업에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받게 될 것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대체될 것이다. 난 삼성에서 사람 냄새가 나길 원한다. 삼성은 물론이고 다른 기업에서도 사람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사람 사는 세상, 경제 민주화? 어려운 말로 빙빙 둘러서 표현하지 말자. 사람냄새라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이 필요한가?

 

  머리가 복잡해서 두서 없이 적다보니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의자 놀이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보면서 울컥 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꼭 한번씩은 읽혔으면 좋겠다. 황상기씨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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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12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님, 어쩜 이리 깔끔, 완벽, 임팩트 강한 글을 쓰시는지...
음미하면서 읽게 되는... 사람냄새 나라 하시는데,전 님의 인간적 글 냄새에 취해 그만^^*
내공 장난 아닌 게 보이니 또 한 수 배우고 갑니다.

saint236 2013-01-13 17: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썼는데 못다한 말들이 많네요. 시사인 삼성 백혈병은 산재가 맞다는 기사를 링크하려다가 그것도 못하고 말았네요.

transient-guest 2013-01-1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한 법제와 실행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의 법은 기득권의 것이죠. 이런 이슈는 결국 시민의식이 더 성숙해지면서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삼성제품이 좋아도 쓰기 싫어지는 이유가, 사원과 구매자를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saint236 2013-01-16 10:42   좋아요 0 | URL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는 노회찬 의원의 말이 가슴 속에 확 박힙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01-1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중에 삼성 다니시다가 퇴직하신 분이 있는데
삼성 드만두시고 거의 폐인이 되셨어요 ㅠ.ㅠ
그냥 갑자기 글을 읽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군요 ..멋진 서평 잘 보고 갑니다 ^^

saint236 2013-01-17 18:14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에도 삼성을 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모두 공통적으로 삼성을 평생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기업이 대우하는대로 직원들이 기업을 생각하는거죠
 
우표, 역사를 부치다
나이토 요스케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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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78년 생이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 치고 초등학교 시절에 우표 수집을 안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릴 적 집으로 날라오는 우표들을 보는 족족 살살 뜯어 냈던 기억이 있다. 풀로 붙였기 때문에 살살 뜯어 내도 찢어지기 일쑤였다. 찢어진 우표를 보면서 얼마나 아까웠던지... 나중에 우표를 안찢어지게 잘 뜯어 내는 방법을 알애 내곤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우표가 붙어 있는 부위의 종이를 약간 크게 잘라내어 물에 약간 담궈두면 우표가 깨끗하게 떨어졌는데 이것을 가져다가 손수건 사이에 넣고 다리미로 다리면 정말 감쪽같이 수집용 우표가 탄생했다. 초등학생이라 우표를 수집하기 위해서 산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었고, 우표 수집은 집에 온 편지 봉투에서만 뜯어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꽤 열심히 못았고, 1960년대 크리스마스 씰까지 모아진 우표 수집첩을 보면서 꽤나 만족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그 우표수집첩은 앨범과 함께 박스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요즘이야 우표 수집 취미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당시만 해도 취미의 3대 천왕은 음악감상, 우표수집, 독서였다. 요즘은 우표수집 대신에 영화 감상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그렇게 애를 써서 떼어낸 우표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우표만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인이 찍힌 우표가 붙어 있는 봉투째 모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소위 말하는 멘붕이라는 것을 겪었고, 우표 수집의 취미를 접게 되었다. 왜 그게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이유를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소인이라는 것은 그냥 사용된 우표입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안에 당시의 문화와 사회적인 흔적이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흔적을 밟아가면서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재구성해 나가는 것이 소위 말하는 우편학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우편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미라는 주제를 우표를 통해서 풀어나가는 모습이 꽤 흥미롭고, 쉽게 접하지 못했던 다른 나라의 우표에 대해서 알게 된 것 또한 소소한 재미이다. 거기에다 더하여서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우표들 중에는 통용이 금지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꽤나 흥미로운 사실들이다.

 

  이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우표는 단순히 우편행정의 매개물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홍보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우표 또한 정치수단이라는 말이다. 우표를 발행하고 사용하는 것, 우표를 수집하는 것들이 모두 알게 모르게 그 안에 숨겨진 정치적인 의도를 소비하고 동조하는 행위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표 수집책들을 가만히 훑어 본다. 쉽게 접해보지 못했던 중국 우표가 어느 순간인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대만이 아니라 중국과 수교를 시작했다는 외교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보현산 천문대 준공 기념 우표는 우리나라의 천문 과학 기술이 얼마만큼 발전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올림픽 우표는 자랑스러운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는 말할 것도 없고, 광복절과 삼일절 근처에 발행되던 유관순, 윤봉길, 광복기념 우표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도 분명하다.

 

  국가의 정책을 홍보하는 우표도 있다. 자녀정책, 독도우표, 자연보호 우표, 육영수 추모 우표 등등 각각의 우표가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는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 섬뜻하다. 육영수 여사라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던 사람들이 육영수 여사 추모 우표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문득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체국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을 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4대강 살리기 기념 우표다.  4대강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간과하고 넘어갔던 사안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부는 우표를 통하여 4대강 사업을 4대강 살리기라는 말로 잘 포장을 했다. 우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스탠스를 취하든 간에 4대강 정책을 홍보하는 1인 미디어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샘이다. 역시나 꼼꼼하다. 정치라는 것이 삶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도 증명된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춘다면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오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지금 당장 우편물을 살펴보시라. 혹은 우표 수집 책을 열어 보시라. 그리고 그 우표 안에 담겨진 의미들을 파악해 보라. 깜작 놀랄만한 내용들이 그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한때 우표를 수집했던 사람들이라면, 현실에 대해서 조금더 꼼꼼하게 의심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꽤나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글솜씨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니 지루함을 이겨낼 결심 또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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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김종배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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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8년에 개봉했던 영화 중에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다. 위에 있는 포스터를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것이다. 영화의 기본 포맷은 단순하다. 한 쇼프로그램 기획자가 기상 천외한 교를 기획한다. 한 아이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까지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하는 것이다. 거대한 세트를 만들고 트루먼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주인공으로 쇼를 진행한다.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그의 아내도,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배우다. 트루먼은 소소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설정이다. 다만 트루먼만 모를 뿐이다. 평범한 일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가 어느날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현실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끝을 향해 나가보기로 결정한다. 태풍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도 투루먼은 굴하지 않고 결국 세계의 끝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세계의 끝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목숨 걸고 뚫고 나왔던 풍랑도 사실은 사람이 만들어낸 장치일 뿐이었다. 만약 그가 눈 앞에 보이는 풍랑에 굴복하여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이 모든 것이 쇼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이 품었던 일상에 대한 의심은 그를 진정한 현실의 세계로 인도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팟캐스트가 유행했다. 주로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젊은 층들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뉴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땡전 뉴스와 대한 늬우스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MB헌정 방송은 의심을 품기에 충분할 정도로 저질이었다. 그들의 의심은 보다 진실에 가까운, 팩트에 근거한 뉴스를 찾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나꼼수가 있었다. 과거 컬투쇼를 들으며 낄낄대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나꼼수를 들으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나꼼수가 다루는 재료들이 컬투쇼와 비교할 수 없는 딱딱한 것들이다. 정치 경제, 종교, 외교 등등! 그런데 사람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술자리 뒷담화 같은 나꼼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과거 PD수첩을 꼼꼼하게 챙겨듣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장 비정치적인, 그래서 정치인들로부터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던 20대 들이 나꼼수의 업데이트를 목빠지게 기다리기 시작했다.(너무 과한 말이라 생각하는가? 절대과한 말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언제 20대를 위한 정책을 편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20대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표로 인식을 했더라도 그렇게 20대를 무시하는 정책을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지나면서 나친박, 나꼽사리 같은 유사 팟캐스트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나도 들어봤는데 꽤 재미있더라. 그런데 참 묘한 것이 나꼼수 나꼽살, 나친박 같은 방송을 챙겨듣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털남도 즐겨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처럼 라디오 방송을 타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이털남이 재미있나? 아니다. 솔직하게 재미없다. 요즘들어 진중권이 등장하면서 약간 재미있어지기는 했지만 이털남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팟캐스트들이 사용하는 비속어도, 욕도 사용하지 않는다. 다른 팟캐스트와 비교하면 이털남은 성인군자처럼 군다. 때론 그게 아니꼽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그게 참 묘하다. 아니꼽고,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면서도 지속적으로 챙겨듣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재미? 아니다. 속 시원함? 아니다. 듣고 있으면 더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런데도 왜 듣는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이슈들을 한번 꼬아서 그 속내들을 탈탈 털기 때문이다. 매일 접하는 일상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일이 비록 힘들고, 피로하기는 하지만 트루먼 쇼에서 탈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이털남을 책으로 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나꼼수처럼, 나꼽살처럼 방송 내용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털남의 기본 포맷과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제 있는 뉴스들을 한번 비틀어서 그 안에 담긴 팩트와 허구를 구분해 내는 방법들을 가르쳐 준다. 보수쪽에만 혹은 진보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김종배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팩트와 허구를 구분해 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방법이 투루먼 쇼와 같은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 꼭 필요함을 역설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주의를 가지고 네이버를 검색해 본다. 왜 하필 네이버인가? 다른 포털에 비해서 조작의 냄새가 유달리 강하게 나기 때문이다.(얼마전 네이버에서 행했던 검색어 조작에 대해서 여러가지 물증이 나오지 않았던가? 아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박근혜 콘돔"이라고) 중요한 이슈들도 많은데 초기 화면 기사의 대부분은 예능 방송을 보고 한두줄짜리로 작성된 기사다. 어느 여자 연예인이 옷을 벗었네, 아찔하네, 뒷담화는 이런 것이네 등등. 아무리 나영석 PD가 인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KBS에 사표를 내고 종편으로 간 것이 대선후보들의 정책보다 더 중요하기야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능으로 도배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한 우민화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오늘자 보수 신문의 기사들은 이정희에 대해서 깎아 내리기에 열심이다. 그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팩트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다. 박근혜가 불쌍하다, 이정희가 무례하다, 옛날에는 똑똑했는데 지금은 바보같다 등등. 게다가 묘하게도 문재인과 안철수의 지지율은 오르지가 않고 떨어지기만 한다. 박근혜가 민혁당 드립을 쳐도, 아버지의 과오를 시인하는 순간에도 박근혜의 진정성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박근혜가 그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고 울었다는 시덥지 않은 기사만 전면을 도배한다. 언론 조사 기관도 묘하게 조금씩 다르다. 문재인은 과거에는 노무현 꼬붕이요, 지금은 안철수하기 나름이라는 식으로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프렘임을 짜기에 급급하다. 그 어디에도 팩트는 없다. 제대로 된 기자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 유시민이 안철수에 대해서 쓴소리를 했다. 안철수가 정권 교체를 위해서 백의종군하겠다면서 후보를 탈퇴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문재인을 후원하지 않고 삐친 것처럼 한발 뒤로 물러나 있다. 이것을 보고 안철수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정권 교체를 위해서 백의 종군하겠다면 문재인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 옳다는 쓴소리를 했다. 내가 보건데 옳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안철수 지지자들에게 유시민의 말은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기사를 쓰자면 전자나 후자의 입장에서 팩트에 근거해서 기사를 써야 한다. 유시민의 말에 찬성한다면 왜 찬성하는지 반대한다면 왜 반대하는지를 서야 한다. 그렇지만 보수 언론들은 대부분 유시민은 원래 싸가지 없는 놈이었고, 지금도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썼다. 물론 직접적으로 싸가지 없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 그런 뉘앙스를 풍길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의심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박근혜를 편드는구나라는 타당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의 근거를 찾기 위해 그 신문사의 박근혜와 문재인 안철수에 대한 기사를 검색한다. 한시간내로 타당한 근거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가끔 이 과정이 귀찮은 사람들은 "어허 저런 유시민은 정말 싸가지가 없네. 문재인은 문제네, 박근혜 불쌍해라. 이정희는 종북이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안에 안주한다. 모 신문사들이 제공하는 트루먼 쇼 세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의심하는 것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그 힘든 일은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 보다 나은 미래로 우리를 인도한다. 더군다나 이렇게 언론이 엉망인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팩트를 구별하라. 다음으로 거기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라. 그 일이 비록 폭풍을 뚫고 가는 것처럼 힘들지라도 당신을 트루먼 쇼 세트장 밖으로 인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마지막 1/3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부분은 괜히 어설프게 들어갔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면 이보다 얼마든지 좋은 책들이 널려 있으니 말이다. 물론 김종배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도 나는 이털남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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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8 0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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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8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1 0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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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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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12-18 10:25   좋아요 0 | URL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 것만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근본주의라는 것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개지기 마련입니다.

숲노래 2012-12-0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신문도 방송도 안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가면 되리라 느껴요..

saint236 2012-12-10 18:09   좋아요 0 | URL
앗...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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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구요!"

 

  "정통 시사 주간지!"

 

  주진우에 대해서는 이 두마디면 족하다. 나꼼수에 얼결에 등장했다가 김총수의 찰거머리에 걸려들어서 주저 앉은 주진우! 매번 나올 때마다 "부끄럽구요"를 말하던 그는 말 그대로 부끄럽지는 않다. 그의 학식이나 실력이야 잘 모르겠고, 내 관심사도 아니고. 확실한 것은 그는 꽤 양심있는 기자라는 것이다. 자기 수입에 대해서 주진우 기자가 했던 말을 보고 이 사람 대단하군, 꽤 양심있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 월급은 기사 써서 받는 돈 20퍼센트, 사회에 보탬 되는 일 하고 받는 돈 30퍼센트, 나머지 50퍼센트는 약자 얘기 들어주는 것으로 받는 대가다."

 

  투철한 기자 정신의 발로요, 이게 진짜라고 보여주는 말이다. 기업의 꼬투리를 잡아서 삥을 듣어가는 기자가 있는가 하면, 어던 사람들은 어떤 이득을 바라고 권력에 아부하고, 재물 앞에 꼬리를 친다. 그러면서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알량한 펜의 힘을 믿고 한없이 뻣뻣하다. 그런데 주진우는 반대로 행동한다. 가진 자들에게는 한없이 뻣뻣하다. 그게 마초주의에 근거한 것이든지, 아니면 똥폼이든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는 그렇게 돈과 권력 앞에서 뻣뻣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없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한없이 유하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들어주기만이라도 한단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욕이라도 해준단다. 그러면서도 전화해서 욕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언론 파업을 보면서, 조중동을 보면서 무슨 기자가 저러냐 실망하던 나에게 주진우는 기자다운 기자다. 노종면과 같은 부류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기자란 어떤 사람인가? 기자가 아닌 내가 학적으로 기자에 대해서 논할 수도 없고, 논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독자인 내가 생각하는 기자, 성인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기자는 사회에 제대로 짱돌을 던지는 사람이다. 조용한 호수에 진실의 돌을 던져서 파문을 일으키는 사람이 기자요, 절대 권력과 자본 앞에 짱돌을 던져서 아직 너희들이 이 사회를 전부 차지한 것은 아니라고 찍 소리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 기자다. 이런 객기가 없고, 이런 무모함이 없다면 기자라고 할 수 없다. 권력이 불러주는 대로, 예 맞습니다라면서 글을 쓴다면 그게 무슨 기자겠는가? 그런 받아쓰기는 초등학생도 하는 일인데...

 

  주진우는 짱돌을 집어들고 절대 권력에 대항한다. 그들을 거꾸러 뜨리지 못해도 흠집이라도 내 준다. 자기가 고소를 당하고, 피해를 봐도 절대로 가만히 있지 못한다. 절대 타협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 주진우가 기자이면서도 연예이처럼 사람들에게 자기 책에 사인을 해 줄 수 있는 비결이 아니겠는가? 자기 책을 내는 기자는 많다. 그렇지만 그 책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 책에 사인을 해 줄 수 있는 기자는 극소수다. 게다가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팬을 몰고다니는 기자라면 주진우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인기를 가지고 주진우는 오늘도 짱돌을 집어든다. 흔히 인기를 얻으면 다른 길로 빠지기도 할텐데 빠지지도 않는다. 외곬이다. 큰 기업에 대해 짱돌을 던지고, MB가카에게 짱돌을 던진다. 큰 목사님에게도 거침없이 짱돌을 던지고, 큰 주먹에게도 쫄지 않는다. 그게 내가 주진우를 좋아하는 이유고, 그게 이 책을 읽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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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2-12-06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짱돌을 집어들지 않더라도, fact에 근거한 정확한 기사를 써내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원, 언론사에 기자들보다는 매설가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는 세상이잖아요. 저도 주진우의 강단과 정신이 부럽습니다. 이 시대의 협객같아요.ㅎㅎ

saint236 2012-12-06 07:31   좋아요 0 | URL
주진우의 짱돌이 아픈 이유는 fact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주진우는 뭐랄까? 우루루 조직을 몰고 다니는 김두환이나 이정재 보다는 혼자 독고다이로 돌아다니던 시라소니 같은 느낌이랄까요?

transient-guest 2012-12-08 03:15   좋아요 0 | URL
네, 좀 독고다이 기질이 강하죠. 이 사람이라면, 만약 나꼼수와 딴지일보가 권력화되어 조중동화 된다면, 이를 파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 같아요. 진짜 언론인,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죠.
 
감동을 남기고 떠난 열두 사람 -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그 두 번째 이야기
오츠 슈이치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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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화장실에서 자주 보는 문장이다. 그렇지만 화장실에서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말이다. 바람직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잘살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 한문장의 말로 대신하고 싶다. 열심히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겨진 자리가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먹는 것도 웰빙, 입는 것도 웰빙, 사는 것도 웰빙! 모든 것이 웰빙이다. 웰빙이라는 말이 과연 이 뜻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곳곳에서 웰빙이라는 단어가 오용되고 있다. 잘 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웰빙이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은 웰빙이라는 말로만 충분하지 않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웰다잉"이라는 말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웰다잉이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란 것이 둘이 아니며, 죽는다는 것이 어느날 날벼락처럼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충분히 준비해야하는 인생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것, 이것이 웰빙이다. 그래서 어느 복지 회관에서는 죽음준비학교를 시작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이 모든 프로그램의 기본은 동일한다. 언젠가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노인교실팀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일흔이 넘으신 분들이다. 매일 팔다리 허리 안아픈 곳이 없다는 말을 하시면서도 왠만해서는 빠지시는 법이 없다. 그 분들이 노인 교실에 와서 하시는 일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냥 즐겁게 노래 부르고, 특강 듣고, 각 반별로 흩어져서 영어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고 이러시다가 식사하고 돌아가신다. 그런데도 참 즐거워 하시고, 봉사하는 이들에게 감사하신다. 자기들같은 늙은이들하고 시간을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그저 아깝지만은 않다. 그분들의 얼굴과 인생의 스토리들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분들은 얼굴에 고집이 잔뜩 묻어있다. 인생을 그렇게 고집스레 살아오셨고, 앞으로 고집스레 사시다가 돌아가실 것이다. 아마 자손들에게 그분은 고집스러운 분으로 기억이 될 것이다. 어떤 분은 힘들고 어려운 와중에서도 항상 웃으시는 분이 있다. 아마도 그분은 앞으로도 그렇게 사시고, 웃음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분들처럼 이 세상을 떠날날이 가까이 다가오게 될텐데 그 때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인가 한번씩이라도 더 생각하게 된다.

 

  지은이는 호스피스다. 의사로서 자기 환자가 치료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고 회의적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여러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바뀌어져 간다. 그들의 인생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자기가 옆에서 돕고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얻게 되는 인생의 귀한 깨달음은 그로하여금 자기의 직업과 인생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그는 최선을 다해서 환자들의 마지막을 돕고 있으며 지켜보고, 보낸다. 이 과정 속에서 자기에게 큰 감동을 남기고 떠난 12명의 사람들의 마지막을 이 책에 담았다.

 

  인생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하면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혹 호스피스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자기 가족이나 친구를 지금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사족을 달자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남겨진 자리가 아름다운 자리로 기억되기를 원하고 꿈꾼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로 기억된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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