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인적 능력이다."


"울컥" 포인트가 엉뚱하다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문장에도 울컥하다니! "울컥"이 올라와서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읽다가 잠시 쉬었다. 인간 본연의  성향으로서 돌봄. 단위시간당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어 팔리는 상품으로서가 아닌, 생명 있는 존재들끼리 서로 보듬고 살리는 본능. [선언 manifesto]되니, 무게감의 더해진다. 



코로나19 덕분(때문)에 공론의 장 중심으로 치고들어온 이슈가 바로 돌봄 아니던가?  2020, 2021년  '돌봄 경제' '돌봄 위기'를 주제로 한 웨비나와 컨퍼런스 찾기가 쉬워졌다. 언론과 학계가 '돌봄' 이슈를 띄워 주니, 일상에서도 이 용어가 새로운 뉘앙스를 담는다. "돌밥 돌봄해야 해서....(시간 약속 못 지킵니다), 제가 돌봄 담당이라 코로나 특히 조심해야 해요." 요새 카톡방 일상 대화에서 이런 표현을 자주 접하면서, 얼떨떨해진다. '애 봐야 해요. 애 보는 사람'이 반세기 전 표현인양 아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물론 '돌봄'은 '아이 돌보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훨씬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의 저자들(더 케어 컬렉티브 the care collective)은 "보편적 돌봄 Universal Care"가 상식, 즉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 이들이 정의하는 보편적 돌봄은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 되는 것(41)"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돌봄의 상호의존성과 호혜성을 살려 전지구적 차원의 돌봄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할 필요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코로나 19는 인간이 바이러스 및 비인간 존재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생존해왔다는 걸 각인시켜줬다. 돌봄 대상의 범주를 확장시켜 '내 새끼, 내 핏줄 관계'뿐 아니라 (그동안 약탈해온) 지구를 보듬어 안아야할 필요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전개되는 현실은 다르다. 그걸 사람들은 '돌봄의 위기'라고 말한다. 백신은 개발되었지만, 국적을 선별하고 건강권을 모두에게 고루 나눠주지 않는다. 국경은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더 강화되었고 '회색지대'에는 돌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비통함이 커진다. 당장 4단계 방역지침이 내려지면서 대한민국의 많은 어머니들은 "돌밥" 상비군으로서의 책무 다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화된 돌봄'에 대한 비판의목소리가 꾸준히 출력을 높여왔어도 여전히 위기상황에서 돌봄 상비군은 '여성,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고 빈곤하게 상상되고 실천된다. 저자들은 [돌봄 선언]을 통해서 "어머니와 여성뿐 아니라 모두가 돌봄 역량을 가지고 있고, 서로 함께 돌봄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 (85)"고 말한다. 


저자들은 인간의 돌봄 성향을 시장논리로 길들이고 왜곡시켜서 '우리 같은 사람, 내 것과 내 편 돌보기'가 마치 건강한 생존전략인양 응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저항한다. 저자들은 타인의 고통, 타인의 돌봄 필요에 대한 무관심에서 깨어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신자주의 자본주의 기업의 위장술인 "무늬뿐인 돌봄carewashing"을 가려내고, 전통적으로 비시장 영역이었던 돌봄조차 아웃소싱하려는 흐름에 저항하라고 촉구한다. 


나아가 [돌봄 선언]은 "보편적 돌봄"을 실현할 행동 강령도 제시한다. 한 마디로 "일상화된 무관심"이라는 마취에서 깨어나 돌봄 성향을 일깨우라는 것이다. 이는 돌봄이 개인 차원의 문제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관심한 친족, 무관심한 정치, 무관심한 국가, 무관심한 경제"라는 큰 틀 자체를 뒤흔들라는 제안이다. 예를 들어, 저자들은 "내 새끼, 내 가족과 친족' 챙기기의 편집증에서 벗어나 친족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옮긴이 정소영 박사도 지적하듯 "난잡함 promiscuity'이라는 개념이 의미 전복을 일으키며 저항의 의미로 쓰였다. 저자들은 핵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난잡한 친족promiscuous kinship'을 돌봄 대상으로 확장시키라고 제안한다.  '돌보는 공동체 만들기' 위해 지역도서관을 적극 활용하라는 제안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새로 정책이나 공공공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지역도서관을 거점으로 활용하라는 실용적 제안이니까. 도서관을 거점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책뿐 아니라 다양한 자원, 기술과 지식 등이 있다. 


혹자는 이런 제안을 들으며, 자본주의 논리와 돌봄 윤리의 타협점을 찾느라 머릿 속이 뜨거워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선을 긋는다. 결코 타협할 수 없다고! "낸시 폴브레가 말했듯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하라고! 


선언문을 읽기만 해도 심장이 뜨거워진다. 뜨거운 심장의 연결. 책에서는 이를 "돌보는 관계의 글로벌 동맹" 확장이라고 표현했다. 부족하나마 지금 [돌봄 선언] 리뷰를 공유하는 것도, "확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뜨거움을 또 누구와 나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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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고정순 그림, 배수아 옮김, 김지은 해설 / 길벗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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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모 댁 방문이 즐거웠던 이유는 이모 댁 서가에는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의 작품 중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 담소가 계속되길 바라며 사촌들과 놀지도 않고 탐욕스럽게 읽어댔는데, 정작 책 제목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중 한스 안데르센의 [그림자] 도 읽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나이테가 훨씬 두꺼워진 후 읽었어도 정서적 충격이 큰데, 유치원생 때 읽었다면 분명 또렷하게 기억했을 것이다. 


고 나니 씁쓸하고, 음울하고, 섬뜩한 느낌이 확 올라온다. 

마지막 문장이 압도적이다. "학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학자를 죽인 것은, 학자의 그림자이다. 물질적 부, 명예, 생존에 필요한 교활한 셈법과 다중인격의 무기화라는 면에서 학자 본인을 능가하는 제 2의 자아다. 자기 자신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이라니! 


학자는 세계의 진실, 아름다움, 선함을 글로 써왔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다. 학자의 그림자는 시의 여신의 뜨락에 잠입해서 많은 것을 알았고 사람들의 이중성도 간파했고, 그 이중성을 어떻게 역활용할 수 있는지도 알아냈다. 그림자는 세속적 명성과 부를 얻었고 주인이었던 학자에게 일종의 침묵수행을 요구했다. 관계 역전. 그림자는 점점 세력이 커져갔고 학자는 그림자의 어둠이 세계를 덮칠까봐 진실을 밝히려했다. 그런데  "학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 문학 평론가 김지은의 해제를 읽어보니, [그림자]야 말로, 한스 안데르센의 내면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 있는 작품이라 한다. 김지은은 이렇게 말한다. "그림자의 힘이 커질수록 피폐해지는 학자의 모습은 작가로서 정점에 오른 1846년의 안데르센과 명망을 얻자 위축되어버린 진실한 예술가 안데르센의 자화상"이라고. 그림자와 학자의 지위역전에서 김지은 평론가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목숨을 건 인정투쟁을 이야기한다. 


안데르센의 작품이 화려하면서도 삶의 핵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림자]를 읽고나니 그동안 내가 안데르산 작품의 표면만 훑어왔나 자기검열 하게된다. 그림자의 힘이 초심을 압도해감을 감지할 수 있었던 안데르센의 순수함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작가 안의 도플갱어가 확산형 파워를 발산하며 명성을 먹는 나방이 된다는 두려움, 지켜야할 '순수(?)한 초심'이 그런 확산형 욕망과 싸우는 경험, 아무나 못해보는 것 아닌가!  안데르센급, 이름 자체가 주석이 되는 작가들의 고민 영역이지 않은가. 부럽다. 그리고 작가로서 안데르센을 더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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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7-08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구미가 화악 당깁니다. <목숨을 건 인정 투쟁> 이 표현 넘 멋지고 무서버요. <명성을 먹는 나방> 캬!! 나를 잡아먹는 그림자의 다른 버전. 북사랑님 어록 터짐요. 저 역시 안데르센은 작가로 인간으로 알고 싶은 분. 같이 알아나가 볼까요??^^

얄라알라 2021-07-08 11:11   좋아요 2 | URL
ㅎㅎ 별말씀을요. 5월 6월 읽은 책이 다섯 손가락 꼽을 지경이라 어록은 커녕 기초어휘도 잊었어요^^7월엔 분발각!!!

같이하자는 말씀은 언제나 정겹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달 째 서가에 모셔만 둔 책들 뽀개는 날. 6월 22일. 각 잡고 읽기.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면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 나는 통증의 개념보다는 통증을 왜 연구해야 하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왜 금기시되어 왔으며, 왜 덜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정희진 32)"



정희진 선생님이 "통증 연구, 연구"라는 단어를 썼기에 여기서 생각을 이어가 본다. 경험 나눔의 차원이 아닐 때, 즉 논문의 형식미를 갖춘 "연구"일 때도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가? 조작적 정의 시도라도 해야 다음의 절차가 풀리지 않는가? 일단, "연구"의 장에서는 용어에 대한 정교한 구분을 하지 않고서는 논의의 신뢰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어렵지 않던가?  고백하자면, 나는 "고통, 통증, 아픔," "질병, 질환, 병" 이 용어들을 구분해서 적재적소에 쓰고 있는지 자기검열하다가 잘 몰라서, 그냥 '아몰랑' 하기도 한다. 


▶정희진 선생님 말씀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선생님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왜 금기시되어 왔"는지 궁금하다 하셨는데, 통증이 화제어로 금시시 되어 온 것이 시대나 사회를 떠나 보편적 경향인가? 통증이 너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굳이 '언어화' '문제시화' 하지 않는 사회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통증을 수반한 통과의례를 일종의 문화적 '주민등록증' 삼는 사회에 대해, 외부자적 시선들은 호들갑을 떨고 새디스트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느니 하는 주석을 남기지만, 정작 그런 통증을 살고 있는 이들은, 그 통증을 대상으로 '논문'을 생산해내지 않는다. 



"고통과 몸은 내 인생과 공부의 평생 동지인데 '동지'들은.... (정희진33)"

- 올리버 색스

- 엘라지베스 퀴블러 로스

- 오오누키 에미코 

 


정희진 선생님도, '동지' 리스트에 올리버 색스 선생님을 맨 앞에 올리셨습니다. 2021년 1분기를 올리버 색스 글들 탐닉하며 보냈던 저에게도 이 분은 경이로운 마인드 그 자체. [중독 인생] 읽고 난 지금에서 생각해보니, 이 분이 마약에서 벗어난 것도 기적이네요. 깊은 탐닉에서 어떻게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경이로움. 


▶ 오누키 에미코, 정희진 선생님 덕분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봅니다. "쌀"의 상징적 의미 연구한 짧은 책만으로 끝낼 뻔했는데,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동하시는군요. 게다가 연구 영역이 굉장히 폭 넓으시네요. 제목만 봐도 당장 읽고 싶어집니다.


        





 "지금 이 글도 작은따옴표와 괄호투성이인데 일종의 협상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몸에 대한 소유격이나 대상화가 전제된 나'의' 몸, 몸에 '대한'.... 같은 표현을 최대한 피하려고자 노력하지만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43)'


▶"문화" "신'  "종교".....소유격을 씀으로써, have동사 be동사를 씀으로써 산으로 바다로 가는 추상어들이 많죠. 그럴 때마다 작은따옴표를 친다면, 바다 너머 안드로메이다로.....저도 마찬가지의 고민 종종 해보았기에 격 공감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탈코르셋' 운동과 거리가 있다. '탈코르셋'은 기본적으로 젊은 (중산층) 여성의 몸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여성주의 실천이지만 통념과 달리 모든 여성이 규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44)"


오호! "탈코 탈코"하는 친구들 이야기에, 제가 심드렁한 태도를 감추기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용서의 또 다른 어려움은 사건은 구조적이되(정치학), 용서는 개인의 몫(심리학)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56)."

"나는 용서 지향적 사회보다 '평등한 복수'가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먼저다. (57)"










 "모두가 작가인 이 시대에 고통이라는 주제는 '사연팔이'라는 최근 출판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60). 이 책의 문체에는 당사자, 연구자, 운동가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무너져 있다. 여성주의 글쓰기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연구'가 아니더라도 취약한 처지에 있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63)." 


"돌봄 윤리를 제안하는 여성주의 연구와 여성주의자의 일상 사이에 생기는 불가피한 괴리 (61). 보살핌 노동의 가치와 보살핌 노동자의 처지는 다른 우주이다. 논문을 쓰고 있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생계 활동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 아버지, 자녀를 간병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다 (66)." 




▶ 언어의 맛이라는 것이 참 신묘합니다! 최근 "질병서사 illness narrative"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많이 쓰이더라고요.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갑자기 "사연팔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니  흥미롭습니다. 텍스트의 홍수라는 현상은 동일한데, 한 편에서는 "서사narrative"로 장르화해주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사연팔이"라고 편히 불러주기도 하네요.


 "고통의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강조해 온 상황적 지식 situated knowledge여야만 한다. 맥락 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84)." 

"글쓴이의 위치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팔거나 나의 고통만 중요한 글이 된다. 고통의 공감 불가능성 때문이다. (86)"


"나는 당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고 우울하다. 10퍼센트의 사람들은 근자감과 조증 기운이 넘친다. 자신감이 물리력, 폭력, 권력인 시대다 (93)"






"주체는 개별성으로 인식되지만 타자는 집단으로 지칭된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자체가 성차별이다." (150)

















"학문과 사회 공동체의 관계는 늘 논란거리지만, 논문의 내용과 주장을 사회적 의미, 역할, 기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논문과 '잡문'의 차이는 글의 형식이 아니라 '품질'로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 (191)"




"각자의 '봉쇄 일기'를 기다리며: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노동(살림)을 비하하고 자연파괴(죽임)을 추구해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209)."





"남성 중심의 근대 국가는 여성의 몸을 자기 실현의 그릇으로 삼았꼬, 이처럼 남성의 시선에 갇힌 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능력'이 아니라 여성을 기아와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 였다 (230)."


"근대 국민 국가의 성립이 여성의 성과 재생산 통제를 가져온 것은 필연이었지만, 여성주의 연구자가 탐구해야 할 것은 젠더가 근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여성 억압 현실이 어떻게 근대와 자본주의를 만들었는가?"로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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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2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각잡고 읽으셨습니까?ㅎㅎ

얄라알라 2021-06-23 07:30   좋아요 0 | URL
네^^ 어제 책 3권 읽었거든요. 눈동자가 잘 안 돌아가더라고요. 눈에 각을 잡았나봐요^^;;;;; 쉬엄쉬엄해야하는디, 20대때로 착각했어요 ㅋ툐툐님 굿 모닝 하시어요^^

미미 2021-06-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장 깨기아닌 모셔둔 책 깨기 입니까? 멋져요!!!😆

얄라알라 2021-06-23 07:29   좋아요 1 | URL
50일 정도 책을 안 읽었더니, 모든 책들이 ˝모셔둔 책˝이 되버렸네요. 미미님 좋은 아침 시작하시길^^

단발머리 2021-06-22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딱 각잡고 준비하셨는데요!! 통증연대기는 반갑고요ㅋㅋㅋㅋㅋ 저도 다른 책 찾아봐야겠어요!

얄라알라 2021-06-23 07:29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에서 소개해주신 책 중 2권만 이전에 읽어보았더라고요 통증 연대기는 단발머리님께서도 추천하시는 거니, 오늘 목차라도 꼭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요^^
 
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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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면 읽을 책을 한 달이나 방치한 이 심보는 무엇이었나? 알라디너분들께 추천 많이 받다 보니, 읽은 듯 친숙했던 탓일까? 자전적 소설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에너지가 소모된 후의 폭풍을 미리 걱정했던 것일까? 




 [누런 벽지]를 읽고, 두 가지 점에서 안도했다. 


1. 먼저, 아름다운 한글에 "누렇다"라는 형용사가 있어 다행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아픈 역할 sick role"을 수행하며 미쳐가는 여성을 그려낼 때, 그 배경이 되는 방의 벽지색상은 "누런 색"이어야 했다. 상큼한 레몬색이나, 때 안 탄 병아리깃털 색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변색된, 들끓는 불결을 담은, 전반적으로 칙칙한, 군데군데 폭력적일만큼 선명한 오렌지 색이 섞여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매케한 유황을 떠올리게 하는 (37)" 누런 색이어야 한다. 



"The color is repellant, almost revolting; a smouldering, unclean yellow, strangely faded by the slow-turning sunlight. It is dull yet lurid orange in some places, a sickly sulphur tint in others (36)"



2. "월간내노라"라는 작은 출판사의 기획이 성공예감이라 안도했다. '내노라" 팀(?)은 한달에 한 편, 영문 단편 소설을 번역해서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선정해내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내는 이들은 페미니즘, 영문학, 문화비평을 넘나드는 지적 모험가들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누런 벽지]를 읽고 분노했다. 


[누런벽지]가 자전적 소설임을 모르고 읽었다면 가스라이팅 실시간 중계 스릴러라고 착각했을까? 


아내는 "방 안에 갇힌 다 큰 아이"로 길러진다. 배려심 많은 남편이 돌보고 길러준다. 그 남편은 아내를 "꼬마 아가씨 little girl"이라 부르고, 아내에게 "바라는 만큼 한껏 아프라"고 축복을 내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의사이기까지 하다. 아내에게 신선한 공기와 양질의 먹을 것, 휴식을 선사해주며 아내의 건강 회복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는 역할에 푹 빠져 있다. 이 연극이 잘 수행되려면, 아내는 아파야 한다. 남편의 돌봄을 더 격하게 필요하기 위해서는,  더 취약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노동(?)은 금물이다. 쉬어야 한다. 글을 써서도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시선과 기대, 자신에게 기대된 "환자역할"을 잘 안다. 역겹다. 누런 벽지만큼이나 닳아빠진 고정관념이 역겹다. 놀랍게도 이런 "방구석에 가두고 쉬게하기"가  19세기 특히 여성에게 많이 제안되었던 "휴식치료법 The Rest Cure"라 한다.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주체인데, 그 아내는 돌봄받아야만 온건해지는 환자, 객체로 좁혀진다. 존재는 확장이 아니라 오그라든다.



"사회적 단절", 2~3마디의 문장만으로 충분히 삶이 가능한 하루하루를 진공 속에 반복하던 때, 일하고 싶었다. 긴 문장을 뿜어내며 진공 밖 세계의 요철과 압박감을 느껴보고 싶었다.허나, 나를 방 안으로 끌여들였던 목소리는 노기를 띠었다. "네 그 욕심이, 애정결핍증후군 낳는다. 노란 바나나를 탐닉하는 걸 보니, 엄마됨의 부족함을 바나나의 달달함으로 채우려는 걸 보니, 너는 더더욱 집 안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바나나를 최근까지도 먹지 않았다. 못 먹겠다. 누런 벽지를 다 뜯어낸 들, 세포 자체에 수분이 빠져나가는 이제 "집안의 천사"는 감지덕지의 역할인가? 바나나를 탐닉해야하는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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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 삶이 바뀌는 신박한 정리
이지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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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500여 권 처분하면서 이별 리스트에 올릴까 말까 망설였던 책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도 [공간의 위로]는 버릴 생각은 단 일초도 안 했다.원제가 더 멋진데, [SoulSpace]이다. 마음에 그리는 삶을 현실화하는 데 공간이 얼마나 마법적인 힘을 발휘하는가 설득하는 책이었다. 위로와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저자 소린 벨브스가 운영하는 'Xorin Homes' 홈페이지 https://xorinhomes.com/를 둘러보면알 수 있겠지만, 그는 상위 0.1% 금손들을 위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tvN "신박한 정리" 프로그램 시청자들도 비슷한 뉘앙스의 불편감을 후기에 담기도 한다. 정리정돈 귀찮아 할 뿐인 연예인들 집 정리해주는 프로그램이라고. 하지만 "신박한 정리"는 뉴스 외에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프로페셔널리즘을 순박한 미소로 겸손히 가려왔던 이지영이 책을 냈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라는. 한 두달을 기다려서 대출했다. 이 책은 여전히 도서관에 대출예약자가 6인씩 꽉 차있다. 삶을 변화시키는 공간의 정리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들이 많나 보다. 


서문에서 이지영은 본인이 IMF를 겪으며 온 가족 뿔뿔히 헤어져 살다가 단칸방이라도 가족이 모여살았을 때의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저 가족이 함께 한다는 자체로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에게 큰 행복을 준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당신의 공간을 정리해드립니다]에는 18평에 여섯 명이 사는 의뢰인이 등장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3가족이 한 집으로 모여 살다보니 살림살이가 많고 어수선한 집이었다. 그 집의 막내따님이 이지영에게 '가진돈 100만원이 전부'라며 의뢰해왔을 때, 이지영은 12명의 직원과 하루를 꼬박 들여서 그 18평 집을 변화시켰다 한다. IMF 때 '이산가족'으로 살았던 기억이 의뢰인에게 투영되었을지 모르겠다. 

낮은 자세로 겸손한 이가 이지영 뿐인가? 신애라의 긍정 에너지는 의뢰인들을 전혀 기죽이지 않는다. 내가 "신박한 정리"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 



[당신의 공간을 정리해드립니다]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담아가는 지적은, 아파트 한국 사회, 욕망도 비스무리해진 이 땅의 사람들, 평형과 아파트 브랜드로 구별되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심지어 공간을 꾸미는 방식도 안타까울 만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지영은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우선시하여 공간에 역할을 부여하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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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2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북사랑님 그 화분 도착했나요 요롷게 작다니!
전 저 식물 사진상 산세베리아 종류로 보임~
천장에 닿을정도로 키움 ^ㅎ^

얄라알라 2021-02-22 1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희집이 저렇게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지 않아요 public domain사진이고요. 그 아라카야자는 매일매일 제 사랑을 받아서 정글을 꿈꾸고 있답니다. 제 키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