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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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면 읽을 책을 한 달이나 방치한 이 심보는 무엇이었나? 알라디너분들께 추천 많이 받다 보니, 읽은 듯 친숙했던 탓일까? 자전적 소설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에너지가 소모된 후의 폭풍을 미리 걱정했던 것일까? 




 [누런 벽지]를 읽고, 두 가지 점에서 안도했다. 


1. 먼저, 아름다운 한글에 "누렇다"라는 형용사가 있어 다행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아픈 역할 sick role"을 수행하며 미쳐가는 여성을 그려낼 때, 그 배경이 되는 방의 벽지색상은 "누런 색"이어야 했다. 상큼한 레몬색이나, 때 안 탄 병아리깃털 색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변색된, 들끓는 불결을 담은, 전반적으로 칙칙한, 군데군데 폭력적일만큼 선명한 오렌지 색이 섞여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매케한 유황을 떠올리게 하는 (37)" 누런 색이어야 한다. 



"The color is repellant, almost revolting; a smouldering, unclean yellow, strangely faded by the slow-turning sunlight. It is dull yet lurid orange in some places, a sickly sulphur tint in others (36)"



2. "월간내노라"라는 작은 출판사의 기획이 성공예감이라 안도했다. '내노라" 팀(?)은 한달에 한 편, 영문 단편 소설을 번역해서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선정해내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내는 이들은 페미니즘, 영문학, 문화비평을 넘나드는 지적 모험가들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누런 벽지]를 읽고 분노했다. 


[누런벽지]가 자전적 소설임을 모르고 읽었다면 가스라이팅 실시간 중계 스릴러라고 착각했을까? 


아내는 "방 안에 갇힌 다 큰 아이"로 길러진다. 배려심 많은 남편이 돌보고 길러준다. 그 남편은 아내를 "꼬마 아가씨 little girl"이라 부르고, 아내에게 "바라는 만큼 한껏 아프라"고 축복을 내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의사이기까지 하다. 아내에게 신선한 공기와 양질의 먹을 것, 휴식을 선사해주며 아내의 건강 회복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는 역할에 푹 빠져 있다. 이 연극이 잘 수행되려면, 아내는 아파야 한다. 남편의 돌봄을 더 격하게 필요하기 위해서는,  더 취약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노동(?)은 금물이다. 쉬어야 한다. 글을 써서도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시선과 기대, 자신에게 기대된 "환자역할"을 잘 안다. 역겹다. 누런 벽지만큼이나 닳아빠진 고정관념이 역겹다. 놀랍게도 이런 "방구석에 가두고 쉬게하기"가  19세기 특히 여성에게 많이 제안되었던 "휴식치료법 The Rest Cure"라 한다.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주체인데, 그 아내는 돌봄받아야만 온건해지는 환자, 객체로 좁혀진다. 존재는 확장이 아니라 오그라든다.



"사회적 단절", 2~3마디의 문장만으로 충분히 삶이 가능한 하루하루를 진공 속에 반복하던 때, 일하고 싶었다. 긴 문장을 뿜어내며 진공 밖 세계의 요철과 압박감을 느껴보고 싶었다.허나, 나를 방 안으로 끌여들였던 목소리는 노기를 띠었다. "네 그 욕심이, 애정결핍증후군 낳는다. 노란 바나나를 탐닉하는 걸 보니, 엄마됨의 부족함을 바나나의 달달함으로 채우려는 걸 보니, 너는 더더욱 집 안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바나나를 최근까지도 먹지 않았다. 못 먹겠다. 누런 벽지를 다 뜯어낸 들, 세포 자체에 수분이 빠져나가는 이제 "집안의 천사"는 감지덕지의 역할인가? 바나나를 탐닉해야하는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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