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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ㅣ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기원전 1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총 14편의 서양역사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이다.
원제는 <Sternstunden der Menschheit>로 독일어 사전을 찾아보니 '인류사 운명의 순간들' 정도 될 거 같다.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면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 원제라고 하는데, 서양 역사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이며 극적인 순간들이 마치 내가 그 역사의 순간에 들어가 있는 듯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키케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드로 윌슨까지 총 14편의 이야기 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세계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이다.
1815년 일어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는 영국과 프로이센 군대를 상대로 싸우다 패배하는데, 여기에 부하 그루쉬의 판단 실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나폴레옹 군대가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군과 엎치락 뒤치락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가운데 그루쉬 군대는 퇴각하는 프로이센 군을 쫓는 임무를 맡는다. 영국과 프랑스 둘 다 먼저 지원군이 오는 쪽이 승리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루쉬 군대의 지휘관들은 황제를 도우러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루쉬는 황제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부하들의 간청에 그루쉬는 '1초 동안 골똘히 생각'하는데, 그 결정적인 장면을 츠바이크는 이렇게 묘사한다.
1초 동안 그루쉬는 생각에 잠긴다. 이 1초는 그루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나폴레옹과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발하임 농가에서의 이 1초가 19세기를 결정하는 셈이다. 이 역사적 순간은 정직하기는 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p.171)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융통성있게 나폴레옹 군대를 도우러 가야하는 순간, 그루쉬는 "내 임무는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부하의 간청을 묵살한다.
츠바이크는 유럽의 운명이 한 '소심하고 평범한 인물이 머뭇거린 덕분에' 바뀌었음을, 어쩌다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 거대한 운명이 찾아왔을 때 그것이 어떻게 안타깝게 비껴가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아문센과 남극 정복을 두고 경쟁을 벌였던 영국 해군 지휘관 로버트 스콧(1868~1912)의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남극 정복'이라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두고 벌이는 죽음의 행군, 그러나 스콧과 그의 대원들이 남극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경쟁자 아문센이 꽂아 둔 노르웨이 국기였다. 스콧에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달 차이로 2등이지만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하기에...스콧은 서글프게 남극점을 바라본다. 그리고 단 한 줄의 남극 묘사.
"여기에 볼 것이라곤 전혀 없다. 지난 며칠간 보았던 끔찍하리만치 단조로운 풍경과 차이 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p.314)
노르웨이 국기 옆에 유니언 잭을 꽂아 놓고 떠나는 스콧은 일기장에 "돌아갈 길이 두렵다."라고 쓴다.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리라는, 영국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희망으로 도착한 남극, 그러나 먼저 왔다간 사람이 있음을 알고 돌아가는, 무사히 귀환한다 해도 세계 최초라는 명예는 얻지 못하는 그 길을 이들은 헤쳐나간다. 그러나 자연은 이들을 '수천 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한 명 씩 무너뜨린다. 동이 난 식량, 연료는 다 떨어졌는데 기온은 영하 40도, 굶어 죽느냐, 얼어 죽느냐의 문제만이 남은 극한 상황에 나 또한 한기가 느껴진다.
마지막 각자의 침낭으로 들어가 당당히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을 츠바이크는 이렇게 칭송한다.
한 인간이 막강한 운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위대한 비극이다. 시인은 몇 차례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내지만 삶은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 (p.324)
이 외에도 혁명을 대변하는 노래이자 프랑스 국가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는 <라 마르세예즈>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뇌졸중으로 오른쪽이 마비되어 죽음 직전까지 갔던 헨델과 그런 그가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 쓴 불멸의 곡 메시아의 탄생, 어린 소녀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괴테, 미국과 유럽을 잇는 해저 케이블을 바닷 속에 설치한다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한 일을 기어코 실현해 낸 사이러스 필드 등 각각의 이야기가 다 재미있다.
츠바이크는 '들어가는 글'에서 역사의 '진실성을 나의 창작을 통해 왜곡하거나 강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E.H 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듯이 그가 들려주는 역사와 인물의 생생한 이야기가 조금은 진실에서 멀어졌다 하더라도 늘 재미있고 좋다.
특히 이 책은 중고등학생들에게 추천, 역자의 말대로 14편 중 어느 것이나 골라 읽어도 좋은 쉽고 재미있는 입문 교양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