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조한 마음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초조한 마음>은 츠바이크가 나치를 피해 망명생활 중에 쓴 작품으로 1939년에 출판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이기에 아끼는 마음으로 모셔뒀다가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드디어 읽게 되었다.
1913년 11월, 오스트리아 기병대 장교인 안톤 호프밀러 소위는 헝가리 국경 작은 주둔지로 발령을 받는다. 적은 월급을 받는 군인으로 빠듯하면서도 늘 똑같은 지루한 생활을 하던 호프밀러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4년 5월, 우연히 그곳의 부유한 실업가 케케스팔바의 만찬에 초대를 받는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귀한 음식들, 궁정처럼 화려한 저택,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춤까지 그는 행복에 도취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자신이 이 집의 딸(에디트)에게 춤을 청하지 않은 실례를 범한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찾아가서 "아가씨,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라며 춤을 청하는데...이것이 사건의 서막을 여는 말이 될줄이야!
이 책은 정말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내용을 말하고 싶지 않다. ^^
츠바이크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 중 하나인 연민이라는 감정이 어떤 다양한 얼굴을 감추고 있는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인 이 감정이 숨기고 있는 인간의 이기심, 자기위안, 우월감, 인정욕구, 나약함 등을 예리하고 깊이있게 (정말 소설로 이보다 더 깊이 있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묘사한 작가의 글에 탄복하며 얼마나 숨가쁘게 읽어 나갔는지 모른다.
호프밀러, 케케스팔바, 에디트 등 초조하고 결핍이 있는 인물들과 당시 오스트리아가 처해 있던 전쟁 전 불안한 상황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 나 또한 초조함을 느꼈다.
나는 '연민'을 인간이 가진 몇 안되는 선한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독한 인간도 연민을 품을 수 있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연약하고 순수한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연민은 많을수록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연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p.17)
아무리 못된 인간이라도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인간은 누구나 연민의 주체이자 대상이 될 수 있다. 연민에는 책임이 따르니 '나 이제부터 연민 안해! '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뿌린 연민에 늘 책임을 져야 하는가? 희생할 각오 없이 연민이라는 감정을 품으면 안되는 것인가? 자연스럽게 연민과 책임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정말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만약 상대방이 내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처음에 품은 연민의 마음은 부담으로 바뀔 것이다.
인간이기에 연민의 감정이 우러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비록 자기만족, 우월감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그러나 일단 내가 누군가에게 동정과 연민을 갖게 되어 상대방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다면 그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구세주가 될 수 없음을, 나 또한 마음이 수십 번 바뀌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며 지금부터 내가 하는 행위에 그 어떤 댓가나 주위의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나의 작은 도움에 너무나 고마워하는 상대방을 보며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에 도취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황홀함에 도취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지키지 못할 약속과 거짓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연민의 마음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저 나 또한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알고 넘쳐 흐르려는 그 연민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한다. 어떤 감정이든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넘쳐 흐르면 화를 부르게 되어 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츠바이크가 말한 '창조적 연민'은 나를 희생하고 타인의 아픔에 끝까지 함께하는 마음이다. 나는 이렇게 할 자신이 없다. 다만 자기 만족에서 오는 '감상적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나 자신을 자주 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인 이 소설은 이렇게 인간의 약한 본성인 '연민'이라는 감정이 '양날'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콘도어 박사는 연민에 사로잡힌 호프밀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 연민이라는 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p.235)
이 책은 북플에서 애독하는 몇몇 님들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작년에 사 둔 책이다. 드디어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읽었는데, 작가의 이런 장편이 더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그가 쓴 여러 전기와 평전도 소설 못지 않게 재미있기에 아쉬움과 기쁜 마음이 함께 든다.
또한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처음 읽어 봤는데, 다른 세계문학전집보다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을 주는 이런 전집에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은근히 이 책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거 같다.
인간의 마음 속을 헤엄치고 싶으신 분들, 재미있는 책에 푹 빠져 끌려가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