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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는 1995년 발표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4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탄압이 심해지자 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 뇌샤텔에 머물게 된다. 난민 신분으로 시계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하면서도 헝가리어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당시를 <문맹>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문맹> (p.89,90)
<어제>의 주인공 토비아스도 시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낯선 나라의 말로 글을 쓴다.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과거를 가슴에 묻은채, 그는 타국에서 상도르라는 이름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도둑이며 거지이며 창녀였다.'(p.27)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은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훅하고 내 가슴에 꽂힌다.
이 소설은 150페이지쯤 되는 짧은 소설로 작가의 글이 늘 그렇듯이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작가가 낯선 타국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공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살던 그 시기가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 삶이었을지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망명자들이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보고 술집의 종업원은 토비아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네 외국인들은 맨날 조의금을 걷고 맨날 장례식을 하는군요."(p.63)
또 이런 대화.
"나, 안 죽었어?
"네가 왜 죽어?"
"가스를 열어놓았는데."
"일주일 전부터 가스가 끊겼어. 돈을 내지 않았거든. 전기료도 마찬가지야. 그것도 곧 끊기겠지."
(p.127)
이 세상은 이들에게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들은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가야 하는 길은 '집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 '끝이 없는, 넓고 곧은 길'이다.
낯선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 (p.121)
이들의 삶에 다른 대안은 없다. 꿈과 희망은 '현재'의 걸림돌일 뿐이다.
오히려 꿈을 내려놓는 순간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을 거야." (p.145)
사랑을 모르고,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기에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삶, 그래도 신조차 필요없는 삶...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망명자, 이방인의 삶이다.
역시나 내 눈앞에 예고없이 불쑥 나타난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쓸쓸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p.149)
작가가 되고자 한 그의 꿈, 한 여인을 향한 애절한 사랑은 그저 '어제'일 뿐이다.
그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