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p.430)


이 작품은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5~2011)의 3부작 소설이다. 

1부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86, 1988,1991년, 2~3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각기 독립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작품이 동시에 번역되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나오게 되었는데, 1부와 2, 3부는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나 세 작품이 내용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부 2차 세계대전부터 2부 구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3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현재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부는 대도시에 살던 쌍둥이 소년이 전쟁을 피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 K라는 소도시(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지면서 시작한다. 

처음 보는 손자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포악한 할머니와 생활하며, 전쟁이 가져다 준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쌍둥이 형제는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단련한다. 

폭력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서로를 주먹으로 때리고 급기야 혁대로 서로의 알몸을 갈기며, 할머니가 소리 지르면 차라리 때려달라고 할 정도로 폭력에 익숙해진다. 또한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을 하고, 굶주림에 익숙해지기 위해 단식연습, 구걸,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등, 더 나아가 생명을 죽이는 잔혹연습까지 하며 모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죽일 게 있으면 저희를 불러주세요. 이제부터 죽이는 일은 저희 몫이에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 짓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엉?"

"아니에요, 할머니,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저희는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에요." (p.62)


소년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 폭력으로 응징하기에 동네 아이들에게도 '미친놈들'로 통한다. 누군가가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한치 망설임없이 죽여주기까지 하는데, 쌍둥이에겐 그것이 살인이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일을 해줬을 뿐이다. 


1부는 쌍둥이들의 이런 여러 에피소드들로 구성, 전개되는데,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문체와 충격적인 내용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짧은 장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잔혹 동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런 과장되고 자극적인 우화는 참담한 전쟁 상황 속에서 이 어린 것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았을지를 알게 해주기에, 나는 이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서 묘한 슬픔을 느꼈다. 


살인, 강간, 약탈, 폭력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인간성과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이런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작가는 1부에서 강렬하게 보여준다. 


1부 <비밀 노트>에서는 그 어떤 고유명사도 나오지 않는 반면, 2, 3부에서는 쌍둥이를 비롯해 모든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1부가 단순한 우화 형식인데 반해 2, 3부는 1부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감정은 묘사되지 않지만 내용은 보통 소설의 형식으로 훨씬 복잡한 구성을 갖는다.


이 책은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고 말을 아껴야 할 듯 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5분도 안되서 몸 속으로 강렬하게 흡수되었던 1부의 이야기만 살짝 해 보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은 '삶은 결코 쉽지 않아.' 였다. 그렇다. 그 어떤 슬픈 소설도 인생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인 슬픔과 고통을 능가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허구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 (p.430)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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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20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데..‘하다가 제목보고 ‘에그머니나!‘했습니다ㅋㅋㅋ잔혹동화며 그로테스크한 것도 더없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덕분에 정리가 잘되었어요!😊

coolcat329 2021-03-20 11:51   좋아요 3 | URL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ㅎ그냥 읽어보세요~~이 말만 맴돌았어요. 빈약한 글인데 쬐금이나마 정리가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3-20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이게 더 좋네요 (게다가 양장~!)
아직 읽기시작 안했는데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1-03-20 13:5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에곤 쉴레 표지로 사셨죠? 기대하셔도 좋을 작품입니다~😊

얄라알라 2021-03-20 14: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고유명사를 배제한 글쓰기의 이유는, 저런 고통과 폭력이 누구나의 이야기이자 경험일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coolcat님의 멋진 리뷰 읽으며 혼자 궁금해해봅니다

coolcat329 2021-03-20 16:39   좋아요 1 | URL
네~저도 얄라님 의견에 동감이에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마음에 작가가 고유명사없이 우화 스타일로 쓴거같아요. 리뷰 읽어주시고 댓글까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