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한경arte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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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서법에 관한 다양한 책을 쓴 일본의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독서력>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교양서는 한층 광범위한 지식 체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준다. 한 권을 읽으면 보다 수준 높은 책을 두 권, 세 권 더 읽고 싶어진다."


지난 달에 전원경의 <예술, 도시를 만나다>를 읽고 유럽 역사, 그 중에서도 650년에 걸쳐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느꼈다. 오스트리아의 빈과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여행하며 알게 된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분량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다채로워 더 알고 싶다는 독서욕을 유발했다.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무서운 그림>시리즈로 유명한 나카노 교쿄의 책으로 일본에서는 2008년에 발표되었다. 이 책은 앞으로 출간될 예정인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시리즈 첫 번째 책으로 10월 25일부터 내년 3월 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에 맞춰서 이번에 국내에 출판된 듯 하다. 

사실 조금 가볍지 않을까 싶어 도서관에서 빌려 보려고 하다가 명화가 실린 책이라 소장 가치가 있을 듯 하여 구입했고, 거의 다 읽어 갈 무렵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말대로 좀 더 깊이가 있는 '보다 수준 높은 책'을 갈망, 올해 7월에 나온 합스부르크 가문 통사를 다룬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를 또 구입했다. 


유럽 최고의 가문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 북동부의 시골구석'(p.12)에서 시작되었다. 시골의 보잘것 없는 호족이었던 합스부르크가가 유럽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13세기 초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백작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부터 였고, 이때부터 650년에 걸친 화려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7명의 선제후가 선거로 결정했는데, 이들은 '최대한 무능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될 만한 남자'(p.16)를 찾았고 그렇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55세의 루돌프는 우연히 찾아온 이 행운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만큼 그 누구보다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마르히펠트 전투(1278년)의 승리로 보헤미아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일대를 손에 넣었고, 이후 본거지를 스위스 산속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겼다. 그는 오직 합스부르크가를 지키고 확장하는 데 남은 10년의 인생을 쏟아부었으니 합스부르크가의 왕조 성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또 한 명의 영웅으로 15세기 말, 독일 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1459~1519)가 있다. '중세 최후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었던 그는 26년 중 25차례나 원정을 떠났고 항상 최전선에서 싸우며 영토를 부르고뉴, 에스파냐, 헝가리까지 확장, 국호를 '독일 국민의 신성로마제국'으로 바꾸는 등 합스부르크가를 명문가로 끌어올렸다.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막시밀리안1세는 당시 최고의 신부감이었던 부르군트 공국의 마리아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을 통해 '애쓰지 않고도 합스부르크가에 막대한 부와 영토가 굴러들어왔던 것'(p.37)을 계기로 혼인 외교를 중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녀들을 에스파냐 왕가와 결혼 시키는데, 이 이중 결혼의 조건은 '어느 한쪽의 가계가 단절될 경우 남은 쪽이 영지를 상속한다'(p.37)는 것. 

이 조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가문에 돌연사가 잇달아 일어나고 이로 인해 미남왕 펠리페의 아내이자 카를5세의 어머니인 후아나는 '광녀 후아나'라는 명칭까지 얻게 되니 출발부터 참 흥미롭다. 


아래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막시밀리안의 요청으로 그린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로 1519년 막시밀리안이 서거한 직후의 작품이다. 재위 내내 최전선에서 싸웠으니 말년에 얼마나 지쳤을까...그림으로도 그 피로감이 전해진다.



이 아름다운 아이는 누구일까? 순간 나의 눈을 사로잡은 10장에 나오는 명화 <라이히슈타트 공작>이다. 조지3세의 궁정 화가로 '모델을 실물보다 매혹적으로 그리는 재능 덕분'(p.176)에 전 유럽 왕족, 귀족들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았던 화가 토머스 로런스(1769~1830)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보정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소년의 용모가 매우 뛰어나 이로부터 10년 뒤 186센티미터의 아름다운 청년이 된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한숨짓게 했다고 하니까. 


합스부르크가에 이토록 아름다운 인물이 있었다니 궁금하지 않은가?

힌트를 주자면 아버지는 '유럽을 뒤흔든 희대의 영웅'(p.177)이었고, 어머니는 합스부르크가의 황녀로 이 소년은 '혁명의 아들과 고귀한 순혈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p.177)이다. 


맞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니 조금 민망하지만) 바로 나폴레옹과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태어나자마자 바로 '로마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나폴레옹 2세(1811~1832)이다.

그러나 소년의 일생은 짧고 불행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자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아들을 데리고 빈 친정으로 돌아간다. '합스부르크가 입장에서 나폴레옹은 너무나 증오스러운 적'(p.184)이었는데, 그의 아들이니 아무리 합스부르크가의 피가 섞여있다 해도 마냥 예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메테르니히 재상은 그를 '작은 나폴레옹'이라며 귀찮아했고 자연스럽게 그는 '합스부르크의 고귀한 죄수'(p.185)로 거의 감금되다시피 한다. 게다가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 남편 나폴레옹과 아들을 버리고 파르마에서 새 살림을 차렸으니 참으로 비호감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츠2세는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끊게 할 의도로 그가 7세 때 라이히슈타트 공작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그러나 공작은 후에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를 숭배하며 아버지와 같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폐결핵을 앓다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영웅과 고귀한 혈통 사이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태어나 크게 될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던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이 짧고 불행한 삶이 나는 참 인상적이었다. 저 아름다운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니 신기하게도(당연한 일이지만) 나폴레옹의 그 총명한 눈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얼굴은 나폴레옹을 몸매는 호리호리한 엄마를 닮은 듯 하다.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처음엔 쇤브룬 궁전 내의 합스부르크가 묘지에 묻혔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지배 하에 있던 프랑스를 회유하기 위해 공작의 유해를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옮겼다. 그래서 현재 '나폴레옹 부자는 파리의 앵발리드에서 영원히 함께 잠들어 있다'(p.192)니 아버지를 숭배했던 아들과 유일한 자식을 죽어서라도 만난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얼마나 다행인가...


저자 나카노 교쿄는 13세기 루돌프 1세부터 20세기 프란츠 요제프까지 12장에 걸쳐 알브레히트 뒤러, 베첼리오 티치아노,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에두아르 마네 등 유명 화가들이 그린 명화를 소개하고 명화 속 인물들의 다채로운 삶을 재미있는 일화를 곁들어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미술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는 합스부르크가의 이야기인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는 진입장벽이 낮은, 합스부르크가 입문서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과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이 협력하여 개최하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홍보 엽서가 책 속에 들어 있었다. 이 엽서를 가지고 오면 작은 선물을 준다고 해서 얼리버드로 할인 티켓을 사뒀다. 언제 갈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그림 구경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실 걸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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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1-02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포그 뮤지엄에 가봤지만
정작 가서는 윈슬로 호머의
그림들과 조각들 구경에
넋이 빠져서 미처 미소년
그림은 못 보았네요...

* 덧 : 조각가 이름이 이제야 기억났네요.
오노레 다미에 !!!

coolcat329 2022-11-02 19:15   좋아요 2 | URL
오! 포그 미술관에 가보셨군요~
저는 호머 그림하면 민음사 호손 단편집이 떠오릅니다.
표지가 호머 그림이거든요. 근데 재미가 없어 몇 년을 붙잡고 있다보니 표지만 매일 보네요.ㅎ

오노레 도미에의 작품 중 조각도 있군요. 화가들이 다 쟁쟁하니 토마스 로렌스 그림은 묻힐 수도 있겠어요.

페넬로페 2022-11-02 1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650년동안 왕조가 유지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국립박물관 전시 저도 가보고 싶어요.
얼리버드는 아깝게 놓쳤어요^^

coolcat329 2022-11-02 19:46   좋아요 2 | URL
그러고 보면 조선왕조 오백년도 대단한 거 같아요.ㅎㅎ
전시회 내년 3월초까지니 기회되시면 가셔도 좋을 거 같아요. 고종이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물한 갑옷과 투구도 전시되어 있다더라구요~

바람돌이 2022-11-02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합스부르크가 진짜 특이하죠. 유럽 대부분을 호령했는데 국민국가를 이룬 건 또 아니고.... ㅎㅎ
한동안 나가노 교코의 책을 많이 읽었었는데 요즘은 좀 너무 가벼워져서 안들게 되더군요.그런데 쿨캣님덕분에 이 책은 또 살짝 관심이 가네요. ^^

coolcat329 2022-11-03 08:31   좋아요 1 | URL
네~나카노 교코 책 쉽고 명쾌해서 좋은데 다 읽고 나면 좀 가볍다? 라는 느낌이 있어요. 근데 참 재밌기도 해요~ 앞으로 나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시리즈(부르봉, 로마토프 등등 나올 예정)도 흥미로워 모아 볼까도 싶고요.

새파랑 2022-11-02 2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쿨캣님의 독서는 대단합니다 ㅋ 꼭 작은 선물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coolcat329 2022-11-03 08:35   좋아요 1 | URL
사실은 올해 제 독서 목표가 전쟁사와 관련된 책들 읽는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합스부르크로 넘어왔네요. ㅎㅎ 작은 선물이 뭘까 저도 궁금합니다.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scott 2022-11-03 0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그림 구경하고 고 밥 먹고 커피 마실 걸 생각하시닌 쿨켓님의 행복한 모습이 마구 그려집니다 ㅎㅎ

깊어 가는 가을에 전시장 나들이 !
이보다 더 좋은 나들이가 없죠 ^^

coolcat329 2022-11-03 08:37   좋아요 1 | URL
아 더 추워지기 전에 갔다 와야하는데 말이요~~그러고 보니 가을과 전시회 참 잘 어울립니다. 스콧님 감사합니다~

mini74 2022-11-03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쿨캣님 혼자서 밥 막고 그림 구경하고 커피 마시다니 ㅎㅎ 이 책 고민중입니다 ㅎㅎ

coolcat329 2022-11-03 08:40   좋아요 1 | URL
미술에 관심 많으신 미니님 이번 전시회 보시면 좋을텐데 멀리 사시죠?
이 책은 제 수준에는 참 적절했으나 미니님에게는 조금 가벼울 수도 있을 듯 하네요. 근데 나카노 교코가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니 재미는 보장입니다.
아참! 저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미니님께 땡투하고 샀습니다. (샀다가 땡투안해서 취소하고 다시 샀다는 말을 굳이 하겠어요~ㅋㅋ)

mini74 2022-11-03 12:03   좋아요 1 | URL
앗 고민되네요 쿨캣님 리뷰가 너무 좋아서 ㅎㅎ 고맙습니다 ~~

라로 2022-11-03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볼드체로 인용하신 글, ˝교양서는 한층 광범위한 지식 체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준다. 한 권을 읽으면 보다 수준 높은 책을 두 권, 세 권 더 읽고 싶어진다.˝ 정말 제 경우에는 맞는 말인 거 같아요!! !! 책도 읽고 전시회도 가시게 되면 두 배로 오래 기억하실 것 같아요.^^; 암튼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다음에 전시회에 대한 글을 올리시면 이 리뷰를 기억할게요. ^^

coolcat329 2022-11-03 18:43   좋아요 0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읽기도 큰 즐거움입니다. 다만 큰 맘먹고 세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게 문제에요~^^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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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p.11)]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1940~)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 A와의 사랑, 정확히는 불륜을 담은 작품으로 1991년 발표되었다. 

67쪽의 짧은 소설로 늘 직접 체험한 것 만을 쓰는 작가 답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다. 

A는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의 직원으로 '나'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부남이다. A는 작가가 10년 후 2001년에 발표한 <탐닉>에서도 나오는데, 작가가 A를 만나며 적은 일기들을 모은 책이다.  


'나'는 하루종일 그를 기다린다. '나'에게 미래란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p.13)일 뿐이며, 그 사람이 오기 전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가 떠난 뒤엔 그가 '내게 남겨 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p.17)는다. 늘 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자신을 꾸미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그와의 관계를 수월히 하기 위해 아들들에게도 오기 전에 미리 연락 해줄 것을 당부해 놓는다. 또한 그의 전화가 한참 동안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의 전화가 오기를 빌면서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기도 한다. 그와 함께 있던 날 커피 포트가 떨어져 타버린 카페트를 볼 때면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p.24)할 뿐이다. 


나는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나 자신과 소설 속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소설 속 '나'가 지금의 내 나이와 거의 같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책은 단순 소설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내 나이의 여자가 이런 중독과도 같은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니...그에 비하면 난 거의 노인이 아닌가 싶어서...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랑에 빠져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적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다. 무엇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열정을 발산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웠고 내가 너무나 늙은 느낌이 들어 순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ㅠ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달콤하지만 막상 사랑의 본 궤도에 오르면 행복보다는 고통이 따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 역시,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하는, 일종의 인간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내밀하면서도 감정에 기반한 특수한 인간 관계이기에 더 큰 고통을 수반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자신의 내밀한 감정들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단순한 열정>의 '나'도 그렇다.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p.65,66)]


사랑의 쾌락과 기다림의 고통, '버려졌다는 상실감'과 같은 내면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글로 써내려 간 '나'는 이 과정에서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p.52)이라고 하지만, '나'가 글을 쓰면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자신과 만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아픈 일이겠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나' 즉 인간 아니 에르노는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작가는 다음의 멋진 문장으로 글을 끝맺는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p.67)]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라는 말에서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자신을 갖다 바치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은 흔하지 않기에 사치가 맞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치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사치라는게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난 작가처럼 이런 기다림을 할 자신도 없고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을 잃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 상황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불륜일 텐데 생각만 해도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사랑을 솔직히 기록함으로써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졌다고 하지만 나에겐 그런 에너지도 없을 뿐더러 이렇게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할 재주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치는 부리고 싶다. 어쩌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 채 타인의 사랑에 자신을 옭아매려고 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이고 건강이며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열정적인 사랑은 소설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작가의 용기와 당당함이 인상적이었고 이어서 작가의 첫 작품 <빈 옷장>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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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0-30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댓글 달아서 죄송합니다만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매냐님 서재에서 댓글 다신 것 봤지만 이렇게 님의 서재에 글을 읽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덕분에 단순한 열정이 읽고 싶네요! 짧은 책이라는 리뷰를 보고 스킵했던 책인데.^^;;;

coolcat329 2022-10-30 20:52   좋아요 2 | URL
라로 님~반갑습니다. 죄송하긴요~저야 말로 라로님 글 몇 번 읽은 적이 있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동네 도서관에서 아니 에르노 책 구할 수 없어 몇 권 예약해 둔 상태인데 이 책이 가장 먼저 연락이 와서 읽게 되었습니다. 저도 짧아서 좀 놀랐는데 내용은 강렬합니다. 🤭

라로 2022-10-31 06:37   좋아요 2 | URL
님께 땡투하고 사서 읽으려고 했더니 이미 산 책이라고 나와요!!ㅠㅠ 제 기억이 이렇습니다요.^^;; 어쨌든 정식으로 반갑습니다. ^^

coolcat329 2022-10-31 07:36   좋아요 0 | URL
아~마음 감사합니다. 이미 산 책이라고 알려주니 참 좋습니다.😅

레삭매냐 2022-10-30 2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예전에 교보문고에서
선 자리에서 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히 충격적이었더라는.

coolcat329 2022-10-31 07:38   좋아요 2 | URL
저도 첫 문장부터 움찔했습니다.🤤

새파랑 2022-10-31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움찔했습니다 ㅋ 이 책 좋았고 다른책도 한권 더 읽었는데, 그 이후로는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ㅎ

전 개방(?)적인 인간이 아닌걸로 ㅋ

coolcat329 2022-10-31 21:11   좋아요 1 | URL
ㅋ 저도 프랑스 여자가 아닌 한국 여자라 참 버겁습니다.

scott 2022-11-01 23: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런 상황, 이런 감정을
이런 문장으로 쓸 수 있는 작가는 아니 에르노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아니 에르노 첫 작품도 충격적인데
읽다보면
아니 에르노가 들려주는 여성의 삶, 엄마의 삶, 그리고 아버지의 삶으로 나눠진 각기 다른 세대들이 관통한 시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coolcat329 2022-11-02 08:49   좋아요 2 | URL
빈 옷장 곧 읽으려고 대기 중인데 마음을 열고 읽어야겠네요.

scott 2022-11-09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이달상 진심으로 추카합니다!
아니 에르노 <세월> 사알짝 추천 합니다^^

coolcat329 2022-11-09 18:06   좋아요 1 | URL
오~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받으니 기쁘네요~
<세월> 그렇잖아도 진작에 스콧님께 땡투하고 사뒀답니다.
이따가 <빈 옷장> 리뷰 쓸 예정입니다.

페넬로페 2022-11-10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요즘 계속 아니 에르노 작가의 작품 읽으시네요.
저도 어서 이 작가에 입문하고 싶어요**

coolcat329 2022-11-10 21: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마 샀으면 또 책장에 꽂아두고 안 읽었을 거에요. ㅋ
올해는 에르노 책은 그만 읽구요, 내년에 또 읽어볼까 합니다. 단순한 열정 짧아요. 한 번 🔥맛 느껴보세요. 😁
 
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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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는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르 클레지오(J.M.G. Le Clézio 1940~)가 199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의 후기 대표작 중 하나이다.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p.112)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세상을 떠도는 흑인 소녀 '라일라'의 고난한 여정을 그리고 있는 <황금 물고기>는 르 클레지오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이 빛나는 작품이다. 

한 소녀의 거친 인생 역정을 다루고 있지만, 차분하면서도 서정미 넘치는 문장 덕분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책 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라일라가 고향에 도착해 자신이 태어난 땅을 만지며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는 장면에서는 보잘 것 없는 물고기에서 '황금 물고기'로 거듭난 라일라의 모습에 눈이 부셨다. 모든 성장은 이처럼 눈부시지 않을까...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 P9

처음으로 나는 멀리 떠나고 싶었다. 저 산들을 넘어 힐랄의 나라로 가 내 엄마와 내 부족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고, 나 자신이 귀고리를 들여다보며 지어낸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84

나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고 싶었다. - P112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그물로 잡으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끈끈이에 들러붙게 했다. 그들을 그들 자신의 감상과 그들 자신의 약점으로 내게 덫을 놓았다. - P116

밤이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되었다. 그리하여 톨비아크, 오스테를리츠, 레오뮈르 세바스토폴 역으로 다른 바퀴벌레들을 만나러 갔다. 우리만이 아는 길을 통해 지하철 통로 안으로 들어서면 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마술적인 소리였다.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음악에 이끌려 바다와 사막을 건넜다. - P154

나는 위험한 사람들은 마르시알이나 아벨이나 조라나 들라예 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험한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조자이기 때문이었다. - P205

이제 나는 음악을 귀가 아니라 내 온몸으로 듣고 있었으며, 전율이 나를 감싸고, 살갗을 자극하고, 신경과 뼈까지 아프도록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들을 수 없는 음들이 내 손가락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나의 피와 나의 숨결, 그리고 얼굴과 등에서 흘러내리는 땀과 한데 섞였다. - P264

나는 다른 이름, 다른 얼굴을 가지고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이제 나는 내가 받았던 것을 되돌려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오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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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10-28 2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요! 밤이면 바퀴벌레가 되었다니...카프카 증후군인지 이런표현에 솔깃솔깃ㅎㅎ 말씀대로 서정적인 문장들도 좋네요^^*

coolcat329 2022-10-29 07:35   좋아요 3 | URL
문장이 서정적이면서도 흡입력이 있어 굉장히 잘 읽힙니다.☺️

Falstaff 2022-10-28 2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휴, 압도적으로 즐거웠던 클레지오였습니다.
원래는 ˝압도적인 대표작˝이라고 썼다가요, <사막>, <섬> 같은 것이 생각나서... <아프리카인>도? ‘대표작‘은 뺐습니다. ㅋㅋㅋㅋ 하여간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coolcat329 2022-10-29 07:39   좋아요 3 | URL
클레지오가 작품이 많더라구요. 예전 골드문트님 강추로 읽었는데 서정적인 문장에 푹 빨려들어갔습니다. <사막>도 있는데 이 소설도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로 비슷한 거 같아 나중에 읽으려구요.

새파랑 2022-10-29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인공이 물고기인가요? ^^ 표지가 물고기 비늘 같아보입니다 ㅋ

coolcat329 2022-10-29 22:00   좋아요 2 | URL
아프리카(모로코로 추정) 흑인 소녀가 주인공입니다~ 소녀가 세상을 표류하는 모습이 마치 물고기가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다니는 모습 같아 제목이 황금 물고기인 듯 합니다~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구로카와 유지 지음, 안선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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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러시아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들려왔을 때 '설마 전쟁이 일어날까?'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2월 24일 침공을 시작으로 8개월이 흐른 현재, 전쟁은 장기화 양상을 보이고 있고 러시아는 핵 사용 가능성을 보이며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를 떠난 난민이 600만이 넘었고 무고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전쟁 하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다.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우크라이나 주재 일본 대사와 니혼 대학 국제 관계학부 교수 등을 지내고 현재 우크라이나 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구로카와 유지(1944~ )가 2002년에 발표한 책이다. 저자는 1996년 우크라이나 대사로 임명되면서 '농업국에 부임한다는 생각으로 우크라이나로 향했'(p.5)으나 대사로 일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대국'(p.5)임을 실감하고 자신의 그 '발견'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썼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역사의 관점에서 풀어냈'(p.9)는데, 그 역사는 기원전 8세기 '기마와 황금의 민족 스키타이족'까지 거슬러 올라가 10~12세기 키예프 공국을 거쳐1991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후 까지 다룬다. 


우크라이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키예프 루스 공국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공국이라고 하면 작은 나라를 떠올리지만 키예프 루스 공국은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p.41) 키예프 루스 공국이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17세기 코사크가 중심 세력으로 자리를 잡는다. 


한편 키예프 루스 공국이 쇠퇴해 가던 시기, 우크라이나 동북쪽에 위치한 모스크바 공국은 강대해지기 시작한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모스크바는 자신들을 '제3의 로마'이자 '전全 루스의 군주'라 칭하며 키예프 루스 공국이었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싸워 조금씩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 후계자'(p.42)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논리는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 나라 자체가 소멸해 계승자가 없었으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당시 모스크바는 민족도, 언어도 달라 16세기가 되어서야 슬라브어를 사용했고,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p.44)였으며,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붕괴 이후에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볼린 공국으로 계승'(p.44)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p.44)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크라이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키예프 루스 공국 다음으로 코사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코사크는 15세기 경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자치적 무장집단으로 16세기에는 드네프르강 하류에 자포로제 시치를 건설한다. 코사크는 헤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조직으로 이들의 삶을 로맨틱하게 그린 것이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타라스 불바>(1835)이다. 율 브리너가 주연을 맡은 영화 <대장 부리바>로도 유명하다.


17세기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코사크는 크림 타타르와 동맹을 맺고 폴란드와 대적해 왔는데, 1651년 다시 시작된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타타르군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전쟁에서 지게 된다. 당시 코사크의 헤트만이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1595~1657)는 폴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모스크바와 보호협정을 맺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1654년의 페레야슬라프 조약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하나의 독립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부로 보는 것도 바로 이 조약을 근거로 하는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그저 '단기적 군사 동맹일 뿐 흐멜니츠키도 코사크도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모스크바에 영구히 맡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128)는 것이다.

아쉽게도 조약 원본이 남아 있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러시아 주장에 따르면 이 조약에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고 하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페레야슬라프 조약은 우크라이나에게는 결과적으로 파멸의 첫걸음이 됐지만 모스크바에게는 제국으로의 길을 내딛는 큰 한 걸음'(p.130)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크라이나는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p.279)을 가진 나라이다. 면적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도 5000만 명으로 프랑스에 필적한다. 세계 흑토의 30퍼센트를 차지해 '21세기에 세계가 식량 위기에 처할 경우, 위기에서 구해낼 잠재력을 지닌 나라'(p.279)이다. 철광석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지를 자랑하고 과학 기술의 수준도 높다. 

또한 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로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세력이 우크라이나 땅을 탐냈고 저자는 이를 두고 '풍요로운 땅을 가진 자의 비극'(p.218)이라고 말한다. 


천 년에 걸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개괄하고 나니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을 알 듯 하다. 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지, 왜 키예프가 아닌 키이우로 불러 달라고 하는지,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로서 '루스'라는 이름마저 러시아에게 빼앗긴 우크라이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지켜온 우크라이나. 더 이상은 이 풍요로운 땅이 강대국에 의해 유린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고 안정되는 것은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있어 중요하다'(p.280)고 말한다. 

부디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길 바란다.


1962년 영화 《대장 부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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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0-22 1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우크라이나 전쟁이 8개월이 지났군요. 시간이 참 빠르면서도 기간이 길어지니까 감정도 무뎌지는거 같습니다 ㅜㅜ 끝나기는 할까요? ㅎㅎ

coolcat329 2022-10-22 21:04   좋아요 2 | URL
우크라이나인들이 화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거 같습니다. 부디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얄라알라 2022-10-24 01:27   좋아요 2 | URL
저도 coolcat님 이 리뷰 읽으며, 아, 8개월이 흘렀구나...하면서 초창기에는 전쟁 빨리 끝나라는 마음으로 아침이면 해외속보 찾아보던 제가 8개월인지도 모르게 관심 낮춘 데 반성했어요..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문 읽으며
coolcat님 말씀하신, 그 엄청난 힘을 느꼈었는데...

양 국 사람들에게 오래 남을 정신적 상처가 몸으로 드러날텐데......

경제적 군사적 차원 외에, 정체성(정통성?)의 측면에서 이 전쟁을 생각해보게 해주는 리뷰, 감사드려요 coolcat님!

coolcat329 2022-10-24 09:55   좋아요 1 | URL
얄라님/저도 8개월이나 지난 걸 알고 놀랐어요. 우크라이나에 대해 전혀 몰랐었는데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성스런 댓글 감사해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페넬로페 2022-10-23 0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길어지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치네요 ㅠㅠ
저는 미친 푸틴이 핵을 터뜨릴까 걱정됩니다. 우크라이나에 빨리 평화가 오기를 기대해요^^

coolcat329 2022-10-23 07:56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미친 독재자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고통받으니 참 ...

레삭매냐 2022-10-26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대장 부리바의
주연이 율 브리너 아재
였군요 !!!

션한 대머리~

우쨌든 전쟁은 반대합니다.
속히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길.
 
카르멘 펭귄클래식 123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송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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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파탈의 대명사 카르멘은 비제(G. Bizet 1838~1875)의 오페라로 유명하다. 오페라 《카르멘》중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를 유투브에서 보다가 원작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 1803~1870)는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하여 푸시킨의 작품을 번역하고 투르게네프와 교우하는 등 프랑스에 러시아 문학을 알리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분야는 고고학으로 26년 동안 역사 기념물 총 감독관으로 재직하면서 고고학 답사를 위하여 이탈리아, 스페인, 코르시카 등을 여행했는데, 이 때의 경험이 그의 대표작인 <카르멘>과 <콜롱바>로 결실을 맺었다. 


이 책에는 표제작 <카르멘>과 <콜롱바> 두 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1845년 발표된 <카르멘>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배경으로 집시 여인 카르멘과 군인 돈 호세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보수적인 바스크 출신의 돈 호세는 성실한 군인으로 세비야의 담배 공장에서 경비를 서다가 공장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 카르멘을 알게 되고 그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돈 호세는 그녀가 악녀임을 알지만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은 그를 점점 파멸로 몰고 간다. 카르멘이라는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돈 호세와 목숨보다 자유를 중요시하는 카르멘의 이야기가 메리메의 절제된 문장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그려진다. 

카르멘이 어떤 여자인지 대사 몇 개를 적어본다. 


"특히 명령은 질색이야. 내가 원하는 건 자유로운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 나를 막다른 길로 몰지 마."(p.70)


"우리는 양배추나 심자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 팔자는 이방인들의 돈으로 사는 거야."(p.71)


"조심해. 누군가 나한테 어떤 걸 금지하면 나는 그걸 바로 행동에 옮겨."(p.72)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당신은 남편으로서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하지만 카르멘은 언제나 자유로울 거야. 보헤미안으로 태어나서 보헤미안으로 죽을 거야." (p.77)


<콜롱바>는 메리메가 1840년 발표한 작품으로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를 배경으로 한다. 카르멘이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여인이라면 콜롱바는 복수심에 불타는 여인이다. 


["제 상복을 벗기는 사람은 저쪽 여자들에게 상복을 입혀야 해요."(p.162)]


델라 레비아 가(家)의 딸 콜롱바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 바리니치 가에게 복수할 날만을 고대하는데, 오빠인 오르소 중위가 고향으로 돌아 오자 이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오빠에게 방데타(vendetta 친족에 의한 복수)를 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프랑스에서 지낸 오르소는 코르시카의 오랜 관습인 방데타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주저하고, 여동생의 비난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콜롱바는 이런 오빠를 복수에 끌어들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데, '코르시카의 옛 관습을 대변하는'(p.124) 콜롱바의 활약이 흥미롭다. 


두 소설 중 나는 <콜롱바>를 더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코르시카 섬이 복수의 피로 얼룩진,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을 품고 있는 땅이며, 그것을 온 몸으로 표출하는 콜롱바가 카르멘 못지 않게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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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0 15: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메리메의 <비너스의 반지> 어렸을 때 동화책인 줄 알고 읽었다가 충격적인 결말에 오싹 ^^ 메리메 콜롱보를 비롯해 다른 단편들도 재밌습니다 ^^

coolcat329 2022-10-20 18:54   좋아요 3 | URL
메리메 소설 캐릭터들이 대체로 다 센거같아요. ㅎㅎ

레삭매냐 2022-10-20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담이지만 이번에 신곡을 발표한
여돌 지아이들의 NXde에서 카르멘
의 멜러디가 느껴지더라구요...

coolcat329 2022-10-20 18:55   좋아요 1 | URL
여돌은 여자아이돌을 뜻하나요? 지아아들 nxde ? 다 첨 듣는거라 당황했습니다. ㅋ
유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새파랑 2022-10-20 18: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카르멘이 악녀였군요 ^^ <모피를 입은 비너스> 가 생각이 나네요 ㅋ 비슷한 악녀가 등장하는데, 저도 그 책에 별 세개 줬거든요 ㅋ

coolcat329 2022-10-20 18:57   좋아요 3 | URL
네~ 막돼먹은 여자인데 남자에게 엄청 치명적입니다.ㅋㅋ

바람돌이 2022-10-20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9세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여성은 당연히 당대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겠지요.
저 말만으로는 카르멘 완전 멋진데요. ^^

coolcat329 2022-10-20 19:11   좋아요 1 | URL
앗 저 말만 다시 읽어보니 멋지네요!😮
가진게 아무 것도 없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생이라 저렇게 말할 수 있나봐요.ㅎ

mini74 2022-10-20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쁘니까 막돼먹은 것도 치명적인 매력이 되는거겠죠 ㅎㅎㅎ 그러고보면 내용이 너무 유명해서 정작 원작 읽지도 않았는데 읽은 착각이 ㅎㅎ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

coolcat329 2022-10-23 09:08   좋아요 1 | URL
오페라에선 카르멘이 풍만한 중년여인 느낌인데 원작을 보니 작고 날렵한 미인이더라구요.ㅎㅎ
오페라가 워낙 유명하니 카르멘 이미지도 오페라 속 카르멘으로 굳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