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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p.11)]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1940~)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 A와의 사랑, 정확히는 불륜을 담은 작품으로 1991년 발표되었다.
67쪽의 짧은 소설로 늘 직접 체험한 것 만을 쓰는 작가 답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다.
A는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의 직원으로 '나'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부남이다. A는 작가가 10년 후 2001년에 발표한 <탐닉>에서도 나오는데, 작가가 A를 만나며 적은 일기들을 모은 책이다.
'나'는 하루종일 그를 기다린다. '나'에게 미래란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p.13)일 뿐이며, 그 사람이 오기 전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가 떠난 뒤엔 그가 '내게 남겨 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p.17)는다. 늘 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자신을 꾸미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그와의 관계를 수월히 하기 위해 아들들에게도 오기 전에 미리 연락 해줄 것을 당부해 놓는다. 또한 그의 전화가 한참 동안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의 전화가 오기를 빌면서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기도 한다. 그와 함께 있던 날 커피 포트가 떨어져 타버린 카페트를 볼 때면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p.24)할 뿐이다.
나는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나 자신과 소설 속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소설 속 '나'가 지금의 내 나이와 거의 같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책은 단순 소설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내 나이의 여자가 이런 중독과도 같은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니...그에 비하면 난 거의 노인이 아닌가 싶어서...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랑에 빠져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적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다. 무엇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열정을 발산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웠고 내가 너무나 늙은 느낌이 들어 순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ㅠ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달콤하지만 막상 사랑의 본 궤도에 오르면 행복보다는 고통이 따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 역시,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하는, 일종의 인간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내밀하면서도 감정에 기반한 특수한 인간 관계이기에 더 큰 고통을 수반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자신의 내밀한 감정들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단순한 열정>의 '나'도 그렇다.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p.65,66)]
사랑의 쾌락과 기다림의 고통, '버려졌다는 상실감'과 같은 내면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글로 써내려 간 '나'는 이 과정에서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p.52)이라고 하지만, '나'가 글을 쓰면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자신과 만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아픈 일이겠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나' 즉 인간 아니 에르노는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작가는 다음의 멋진 문장으로 글을 끝맺는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p.67)]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라는 말에서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자신을 갖다 바치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은 흔하지 않기에 사치가 맞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치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사치라는게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난 작가처럼 이런 기다림을 할 자신도 없고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을 잃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 상황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불륜일 텐데 생각만 해도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사랑을 솔직히 기록함으로써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졌다고 하지만 나에겐 그런 에너지도 없을 뿐더러 이렇게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할 재주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치는 부리고 싶다. 어쩌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 채 타인의 사랑에 자신을 옭아매려고 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이고 건강이며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열정적인 사랑은 소설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작가의 용기와 당당함이 인상적이었고 이어서 작가의 첫 작품 <빈 옷장>을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