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담요처럼 자아를 덮어 주는 두꺼운 최신 신학책을 안고 소파에 몸을 누이면, 하나님을 어떤 개념이나 철학 혹은 사상 체계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충격적인 사건은, 우리가 신학 서적에서 보던 하나님, 종교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던 하나님이 어느 날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등장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매력은 이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풍성한 잔칫상을 좋아했던 그분은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잘하는 분이었다. 물론 사람들 역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해했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상징과 예언을 구체적인 행위로 ‘실연‘하신다.

그분은 구약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는 동시에 자신이 최종적으로 예언을 성취하는 분임을 드러내신다.

구원이라는 주제를 관념화하는 대신 살을 붙여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이야기[나병환자, 혈루증 여인, 야이로의 딸]의 방점은 예수님이 이들을 치유하셨다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이 이들을 만지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정치 ·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 곧 창녀와 세리, 사마리아인, 이방인, 병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들을 끌어안으셨던 것처럼, 이들도 두 팔 벌려 끌어안으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고통과 죽음, 낙인, 배척, 혼란이 없는 미래를 예시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고 포용하며 치유와 화해, 사랑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바로 오늘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맛보라고 권유하신다.

예수님의 기적은 개종자를 얻기 위한 마술이 아니며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도 아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명령이며 도전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소망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믿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언젠가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은 뒤따르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원수를 사랑하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고 비폭력의 길을 걸음으로써 이 사치스럽고 포악스러운 제국을 한낱 조롱거리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종교적인 위선과 배척을 마음껏 비웃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도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지 우리에게 쓰인 것은 아니다.

서신서는 예수님을 따랐던 최초의 제자들이 외적으로 박해에 시달리고 내적으로 논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적용했는지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현대 독자들에게 엄청난 유익을 안겨 준다.

어떤 면에서 서신서는 지혜 문학을 쏙 빼닮았다.

지혜는 단순히 무엇이 참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것이 참이 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서신서의 지혜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보편적인 진리와 엉켜 있는 문화적 요소를 풀어내는 일이 현대 해석학의 임무일진대,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서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가 교회 안에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실제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났는지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바울은 교회나 도시의 상황에 따라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고 또 약화하기도 한다.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여성의 리더십을 권장하는 반면, 분열과 혼란을 야기할 때는 만류했다.

우리는 답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좀처럼 답을 주시지 않는다. 그 대신, 그분은 부드럽고 편안한 당신의 품에 우리를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자,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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