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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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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디녜 부!> 새해벽두에 들은 말이다. 우리말로 ‘분노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재 93세인 프랑스인 스테판 에셀이 한 말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인물이다. 30쪽 정도의 이 작은 책이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는 무관심과 냉담은 가장 나쁜 태도라고 일갈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주변을 돌아보라고,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찾아,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자”고 촉구한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프랑스의 68혁명이 떠올랐다. 저항해야할 대상은 다르지만 분노의 성격은 같은 것이 아닐까. 정치적 급진주의를 세계화한 68혁명은 촘스키와 푸코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어연구에 관해 독창적인 접근을 했던 두 사람이 언어분석으로부터 정치 평론으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68혁명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71년 미국인 촘스키와 프랑스인 푸코가 네덜란드에서 대담을 가졌다. 한사람은 영어로 한사람은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이것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르스가 사회를 봤다고 하는데 그는 영어로 말했을까, 불어로 말했을까?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다. 인간본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언어에 대한 출발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지 좀처럼 합의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사회자가 말하듯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상대방이 서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르다. 내가 촘스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인간은 언어습득능력을 타고 난다는 변형생성문법이라는 말밖에 없다. 거칠게 얘기하면 인간은 자기가 사용하는 모국어에 대해 생득적 지식을 갖고 있어서 하나의 문장을 통해 그와 비슷한 다른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을 알면 나는 엄마를 사랑해, 아빠를 사랑해는 물론이려니와 너는 나를 사랑해 혹은 ‘나는 사랑해, 너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을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에도 적용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성의 바탕에는 진정한 정의 관념이 깔려 있다. 인간은 바로 이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혁명도 불사하지만 어떤 집단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수단으로 혁명을 해서는 안 된다. 또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그에 따르면 미국은 범죄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 이것에 대해 시민은 국가가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을 권리가 있으며 범죄자가(국가) 시민의 행동에 불법 딱지를 붙인다고 해서 그 행동이 불법이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촘스키가 말하는 정의는 궁극의 정의로서 국가, 법 너머의 정의다. 현실을 넘어 관념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반면 푸코는 모든 사회적 투쟁에 정의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의를 이루기 위해 사회투쟁을 벌였다기보다는 사회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의를 내건 것이라고 반박한다. 투쟁에서 이기고 나면, 이긴 자가 곧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정의이고 진리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정의와 진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생각은 감옥의 탄생을 설명하는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18세기말 감옥이 탄생하게 되는데 푸코는 감옥이 왜 생겨났나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감옥이 생겨났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에 주목한다. 그러니까 죄인에 대한 고대의 형벌은 신체적이었던 반면 감옥이 생기고 나서는 감금형으로 바뀐다. 신체형으로부터 감금형으로의 이행은 휴머니즘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것은 죄를 저지른 인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범죄성 즉 정신의 영역을 문제 삼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푸코는 다양한 영역에 이러한 생각의 메스를 들이댄다. 동성애에 가한 의학적 담론뿐만 아니라 성욕, 유아, 가족, 친족 등 그의 사유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러한 모든 곳에는 권력이 작동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못하게 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하도록 하는 생산적 권력이 된다. 로봇처럼 공부를 해야 하고 의사의 말에 복종해야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생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돈벌이에 매달려야한다. 이 책의 4장에는 진리와 권력에 관한 푸코의 생각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등을 읽기 전에 보면 관념에서 나온 철학이 아니라 실천으로부터 나온 이론임을 되새기게 될 것 같다.





 P.S : Youtube에서 찾아보니 동영상 몇개가 뜬다. 푸코가 불어로 말을 하면 영문 자막이 뜨고, 촘스키가 영어로 말을 하면 불어자막이 뜬다. 이 대담의 재기발랄한 사회자가 어떤 말을 쓰는지 궁금했는데 동영상 두개를 봐도 사회자는 안나온다. 나는 왜 이렇게 쓸데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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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1-27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겠네요 ㅋㅋ
푸코의 책을 한창 흥미롭게 찾아 읽던 때가 1993년인가 1994년 무렵인데
그동안 절판된 책도 있고 다시 나온 책도 더러 있는 걸로 아는데
전집이 나왔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네요. 저만 모르고 있는 건지...
혹시 알고 계신가요?

반딧불이 2011-01-27 02:37   좋아요 0 | URL
엉? 저도 금시초문인데요. 이 책 재미있어요. 최근에 디디에 에리봉이 쓴 푸코 평전이라고 해야하나...아무튼 <미셸푸코>를 들여다보는데요. 재미있네요. 근데 웃기게도 1권만 있고 2권이 없어요. 출판사에 전화했더니 돈이 안된다고..아주 퉁명스럽더만요. 한군데 도서관에 책이 있던데..제본을 해버릴까해요.

 
史記本紀 까치동양학 22
사마천 지음 / 까치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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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성립되기 전 5년 동안은 항우와 유방의 시대였다. 두 사람은 태생도 다르고 생긴 모습이나 성정, 사람을 다루는 방법,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 등도 판이했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진시황제의 행차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항우는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 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의 의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미래지향적인 반면 유방은 “아! 대장부란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라고 한다. 부러워하는 듯하면서 수동적이다. 그러나 그 속은 의뭉스럽다.

항우는 초나라 장수가문 태생이고 유방은 평범한 가문의 자식으로 그가 범상치 않음을 뜻하는 것은 교룡이 몸 위를 올라갔다는 어머니의 꿈뿐이었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정을 들어 올릴 만했으며 재기가 범상치 않아 모두들 항우를 두려워했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으나 “글은 성명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할 따름이며, 검은 한 사람만을 대적할 뿐으로 배울 만하지 못하니, 만인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라는 말처럼 글을 익히거나 검술에 뜻이 없었다. 병법도 처음에는 크게 기뻐하였으나 이 또한 끝까지 배우고자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인문학적 소양은 전무하고 오로지 자신의 직관과 마음 그리고 상황에 따른 판단만을 중요하게 여겼던 듯싶다.

유방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튀어나와서 얼굴 모습이 용을 닮았으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평소 원대한 포부를 품고 농사일이나 일상사에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 술과 여색을 좋아하고 주점에 가서 외상으로 술을 마셨으며 취하여 드러누우면 몸 위로 용이 나타났다. 유방은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깔보고 멸시했을 뿐만 아니라 큰소리만 치고 거짓말도 잘했으며 실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은 뛰어났고 또한 유방을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항우와 유방은 서로 상반된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성격을 가진 듯하다. 이것은 초군과 한군이 광무산 계곡에서 오래 대치할 때를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항우는 유방과 단독으로 자웅을 겨루기 원한다. 지친 병사들을 대신해서 왕끼리 맞짱을 뜨자는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성격대로 항우의 열 가지 죄상을 조목조목 읊으며 반박한다. 이에 화가 난 항우가 쇠뇌로 유방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유방은 가슴에 맞고도 발을 더듬으며 “저 역적이 내 발가락을 맞혔구나”라고 떠벌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방이 말하는 항우의 열 가지 죄목은 유방 스스로에게도 대부분 해당되는 죄목이기도 하다.

위기에 처했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은 더욱 볼만한다. 항우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해하에서 항우는 한군이 사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다. 그는 장중에서 술을 마시며 비통한 마음으로 시를 읊는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時運이 불리하여 추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시는 정녕 이러한 순간에 나오는 것이니 그 절절함 끝에 놓이는 것이 물음표뿐이라니 야속하기만 하다. 오강의 나루에서의 항우의 마지막 말은 뜨겁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서 무얼 하겠나? 또한 내가 강동의 젊은이 8000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아준다고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나? 설사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삶이 강 건너에 있다. 그러나 그것에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는 모습이다. 또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마지막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지만 5 년 동안 자신과 생사를 함께했던 말은 차마 죽이지 못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 안타깝다.

반면 팽성에서 항우에게 쫓겨 달아나던 유방의 모습은 전혀 다른 뜻으로 인간적이고 안타깝다.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진 유방은 쫓기던 중 그의 아들과 딸 호혜와 노원을 만나 수레에 태웠다. 그러나 초군의 기병에 쫓겨 다급해지자 두 자식을 수레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다. 한 번도 아니고 세 차례나 된다. 그렇게 데리고 온 호혜를 유방은 바로 태자로 세우고 죄수들에게 대사면을 내린다. 아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전쟁 중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 후사를 세운 것일까? 하늘의 뜻을 받은 자는 인륜을 저버려도 되는 것인지 가족에 대한 개념이 현대와 다른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 진평의 계책을 써서 항우로 하여금 범증을 의심하게 만들거나 형양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부녀자에게 갑옷을 입혀 초군의 화살받이로 쓰고 자신은 탈출하는 등 군주답지 못한 행동들이 많이 보인다. 황제에 올라서는 개국공신들을 모조리 삼족을 멸하는 벌을 내리면서 토사구팽하는 행동을 한다.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한나라의 고조로 등장하기까지에는 장량, 소하, 한신, 번쾌 등 능력이 빼어난 인재들의 역할이 컸다. 유방의 능력은 그들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고루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방 스스로 말하듯이 “나는 장량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 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 하느냐 하면,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안다. 반면 항우(項羽)는 단 한 사람, 범증(范增)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것이다.”그러나 유방도 큰일을 도모하기까지는 이렇게 자신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다른 사람의 능력으로 대체하는 수완이 빼어났으나 집권이후에는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항우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움 없이 처리했다. 그 결과는 잔인했고 그를 잘 아는 주위의 몇몇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반면 유방은 과정은 더티한 부분이 더러 보이는데 사후처리에 아주 너그러웠다. 심지어 항우를 위해서 발상하고 흐느끼기까지 했다고 한다. 유방이 널리 인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유방은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그것을 널리 이용했던 듯싶다. 유방과 항우가 서로 화합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서로 대립 했고 전혀 다른 인간의 모습을 후세에게 보여주고 있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인다. 다만 내게 항우는 매력을 유방은 권력을 생각하게 한다. 
 

p.s 위의 인용한 내용은 모두 까치 출판사의 <사기 본기>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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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1-01-1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뭇 사람들이 <열전>만을 얘기하는데, <본기>가 생각보다 흥미롭죠.
사마천이 한무제를 혹평하는 대목도 재미있구요. 쓸 데 없는 말 속에 한무제 역시 쓸모없는 인간임을 야유하고 있는 듯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맹추위에 별고 없으신지요?

반딧불이 2011-01-17 23:23   좋아요 0 | URL
사기는 본기 세가 열전을 함께 읽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항우는 거의 본기에만 나오지만 고조본기에서 유방에 대한 얘기는 별로 안나오는데 열전에서 오히려 유방이 재구성되고 있는것 같았어요.

저는 별일 없어요. 닥나무님은 어떠신지요?

파고세운닥나무 2011-01-18 10:36   좋아요 0 | URL
저는 <본기>를 읽고나서 <열전>을 읽었는데 각 인물의 묘사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을 주무르는 작가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보이는 글쓰기라는 의미에서 <사기>를 읽어도 흥미로울 듯 합니다. <사기> 이전의 중국 고전엔 그런 모습이 거의 없거든요.
이리 저리 바빠 책도 못 읽고 지내는 요즘입니다. <사기> 서평을 대하며 <사기> 읽던 시절이 생각나 즐거웠습니다^^

반딧불이 2011-01-18 12:44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인물묘사가 본기 세가 열전에서 다 달라요. 고조본기에는 유방이 화내는 모습이 전혀 안나오는데 열전을 보면 거기에는 그런 모습이 더러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한 인물을 살피더라도 책을 다 읽어야 한 인물이 구성되게 되어잇는 형식이죠. 읽을때마다 사마천에게 감탄하고 있답니다.

양철나무꾼 2011-01-18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왕지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항우와 유방의 잔인함에 혀를 내둘렀었는데 말이죠.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님이 페이퍼에서 명확하게 정리해 주신 그 방법)으로 사람을 다스렸고, 결국 자신들도 꼭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 말예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1-01-18 12:46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께서는 늘 새로운 정보를 주시는군요. 저도 찾아보고 싶네요. 사기에 빠지면 너무 오래 갈것 같아서 조심하려구요. 밀린일이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뜨거운데 이러고 있네요.
 
<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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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출구여론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투표를 행사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도덕적 가치’가 표심을 좌우했다는 얘긴데 테러리즘이나 이라크 전쟁 같은 주요현안은 도덕과 무관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같은 투표결과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CNN의 한 기자는 ‘언제부턴가 우리 모두는 도덕적 가치의 이슈를 놓치고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공공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미국의 유권자들은 테러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현직 대통령이 풍기는 안정적 이미지와 도덕적 확실성에 손을 들어주는 선택을 내린 것’으로 판단한다. 『왜 도덕인가?』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부터 촉발된 듯하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다양한 사안들, 즉 온실가스 배출권의 거래, 배아복제, 존엄사, 낙태, 동성애, 교육의 시장논리, 공공기관의 상업적 브랜드화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잣대로 도덕적 가치를 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복권사업과 카지노에서의 도박의 예는 비교적 명료하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는 총수입금액의 90%를 손님에게 돌려주는데 정부가 독점 운영하는 복권은 50%정도만을 되돌려 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익을 얼마만큼 환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복권을 홍보하고 그것의 구매를 부추긴다는데 있다. 또 그 대상이 노동자계층, 소수민족, 빈민층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한탕주의를 정부가 앞서서 조장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복권이 야기하는 가장 중대한 해악은 공공영역의 타락이라고 진단한다.

1997년 교토 기후변화협의회에서는 세계 각국이 모여 온실가스 배출 규제협약을 맺었다. 이때 미국은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는 것이 오염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배출한계량 이상 온실가스를 내게 되면 배출량이 적은 나라로부터 배출권을 사서 배출하자는 얘기다. 지구전체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전지구적 목표를 잠시 잊고 어떻게 해서든 의무감축량을 피해가려는 행태로밖에 볼 수가 없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것을 반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세 가지란 배출권 거래제가 선진국들이 의무 감축량을 피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준다는 것, 배출권이 매매의 대상이 되면 지구오염행위에 수반되어야할 도덕적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 갈수록 국제사회 공조가 늘어나는 오늘날 인류공동의 책임감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 등이다. 저자가 미국정부의 주장을 반대하기위해 내세운 도덕적 가치는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나머지는 기후변화협의회에서 다시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면 그것은 만족스러울까? 모를 일이다. 도덕적 가치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불변의 법칙은 아니잖은가.

존엄사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죽음을 돕는다는 행위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지키면서 존엄사를 존중해줄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켜줄 만한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나는 하루빨리 방법이 찾아지기를 바라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자가 미국정부나 정책을 대상으로 할 때는 비교적 명료해지던 사안들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나 개인적 문제로 돌아오면 그 답을 어디에서 구해야할지 오리무중이다. 나만 이런 걸까?

미국의 학자가 미국에서 일어난 법적문제들을 예로 들어서 하는 설명들은 비교적 잘 읽혔다. 또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들을 비교하는 것, 실현되지 못한 케네디의 정책, 경제세력을 민주주의의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 등은 내 관심의 영역을 넓혀주었고 나름대로 미국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내나라에 대해서는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미국 정부의 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공부한 셈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면 내나라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2부의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가는 부분은 내 능력의 한계 를 벗어난 이야기이므로 저자에게 맡겨두기로 한다.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는 3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정치의식을 자꾸만 떠올리게 되었다. 정부는 정책이나 법률을 제정하면서 그것이 어떤 부류의 시민을 만들어낼지 고민을 했을까? 옳음은 과연 좋음에 우선하는가? 국가와 정부가 제한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대의란 과연 무엇인가? 논술교재에서나 다루었던 문제들이 꼬리를 무는 끝없는 질문으로 확장 연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 궁금하다. 도덕적 가치라고는 들이댈 곳이 없는 요즈음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단지 이 책 때문만이라고 말하지는 말자. 저자는 전통적 공동체가 사라진 지금 개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통찰력을 제시했다.그가 제시한 몇가지 사항들이 실현되어 내가 실감할 수 있을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를 생각하니 나는 왠지 떠돌이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세상의 유목민이 된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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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7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2-27 10:00   좋아요 0 | URL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시다니..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2-2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란 무엇인가>를 띄엄, 띄엄 보고 있습니다. 센델은 윤리학자라 봐도 무방할텐데요, 여자친구와 함께 번역하고 있는 책이 센델과 비슷한 부류의 윤리학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존 롤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죠. 같은 대학에서 가르침을 받았구요. 물론 센델은 롤스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큰 테두리 안에선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문제는 '우리'겠죠. 저도 더불어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반딧불이 2010-12-29 00:10   좋아요 0 | URL
이런책 자꾸 읽으면 만수무강에 지장있을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자꾸 비교하게 되거든요. 이거 읽고나니까 문학작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오더라구요. 내친김에 사르트르 책을 모조리 꺼내놓고(그래봐야 몇권되지도 않지만요)문학작품에 버금가는 <말>부터 다시 보고있어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2-29 15:03   좋아요 0 | URL
저도 새해엔 <말>을 서둘러 읽어봐야겠네요^^ <구토>는 읽다 정말 '구토감'을 느꼈던 소설인데요^^;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제겐 가장 기억에 남네요. 영향도 많이 받았구요.

반딧불이 2010-12-30 00:01   좋아요 0 | URL
저도 구토는 던져두었어요. <문학이란...>도 밑줄 그어놓은 부분만이라도 다시봐야할까봐요.

라로 2011-01-0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그동안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더군요. 뭐 아직 다 읽지도 못하고,,아니 다 읽기는 커녕 지금 초반부를 읽으면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ㅎㅎㅎㅎ
암튼 님의 이 리뷰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님이 어서 빨리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를 써주시면 그 리뷰를 읽고 정의란,,을 읽고 싶다는,,,,음,,늘 이렇게 쉽게 길을 가려고 하는 근성부터 새해엔 없앨 각오를 해야겠지요??^^;;
님은 새해에도 열심히 글을 써주시고 저는 열심히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애정을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해서 그래요,,,)

반딧불이 2011-01-06 01:11   좋아요 0 | URL
최근 천정배의원 발언관련과 관련지어 예전 한나라당 의원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모델로 한 '막 말'연극 동영상을 보았는데요. 이 나라의 '정의' '도덕'관련책은 몽땅 딴나라당 의원들한테 던져주고 싶었어요. 언제다시 샌델의 책을 보게 될지..쩝

제 글은 별 재미도 없어요 나비님. 우중충하잖아요? 나비님 글이 훨씬 발랄해서 기분좋아지니까 바쁘시다라도 혼자만 귀여워하지 마시고 가끔 해든이 소식이라도 전해주셔욤.
 
<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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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역사관련 서적들을 뒤적이면서 미슐레라는 이름을 자주 접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헤겔, 부르크하르트, 니체, 벤야민 등과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던 참이었는데 『바다』 때문에 미슐레의 글을 생각보다 빨리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것도 인연이라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만 그의 이름을 몇 번 입에 올렸을 뿐인데 그는 이미 내게 와 있었으니 말이다.

1860년에 쓴 그의 글이 150년을 흘쩍 뛰어넘어 나와 조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사』를 비롯해 방대한 역사서들을 남기고 중세사를 다졌다고 하는데 프랑스혁명사도 아니고 중세사도 아닌 바다史를 먼저 접하게 될 줄이야.

어쨌거나 이 책은 미슐레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서른 살이나 아래인 아내와 여기저기를 전전하던 시기에 쓴 책이라고 한다.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가 『바다』에서 보여주는 것들은 참으로 많다.

미슐레는 바다를 다각도로 살피고 있었다. 나는 지름 15cm정도 되는 스텔라노바 지구본과 아메리카 대륙이 오른쪽에 있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이 책을 읽었다. 그가 지구 밖으로 나가서 지구를 바라보면 나는 지구본에 전원을 넣어 그윽하게 빛나는 지구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선 화산들을 더듬었다. 그가 바다 속으로 깊이 침잠하거나 바닷가를 거닐면 나는 세계지도를 더듬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과거 속으로 들어가 인간이 어떻게 바다를 정복해 가는지를 살피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바다의 항로를 알려준 것은 따뜻한 바다를 끔찍이 싫어하는 고래였다. 대서양에서 상처를 입은 고래가 태평양에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북쪽에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발견은 바다의 지리와 지구의 형상에 찬란한 서광을 비추었다.

이어 이탈리아의 유식한 서적상이었던 콜럼버스, 희망봉을 지나 황금사과가 열린다는 신화의 나라 인도로 가고자 했던 바스코 다 가마, 난파와 침몰, 암살위험 등으로 끔직한 삶을 살며 수백 개의 섬 사이를 배회하다가 태평양을 발견한 마젤란 등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물론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했던 이유는 황금 때문이었다. 황금을 찾는 인간들은 인간을 죽여 가면서까지 황금만을 원했다. 콜럼버스는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금은 어디 있지? 누가 갖고 있을까?”라며 끔찍한 솔직함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모두 금의 노예로 만들어버렸고, 12년 뒤 그의 일기에는 그곳 인구의 7분의 6이 감소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고 한다.

미슐레의 바다 이야기는 생생하면서도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하다. 그는 바다 생물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인간의 횡포를 고발하는가 하면 진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황홀해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는 어느새 자연보호자가 되어 ‘과거의 낡고 특수한 연안어업 규정은 더는 현대 항해에 쓸모가 없’으며 ‘다자간의 공동규약이 필요’하다고, ‘인간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바다를 모든 생명의 기원으로 보는 그는 ‘우리는 죽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이빨과 위장이 죽음을 필요로 하는 운명’이긴 하지만 바다 자원의 파괴는 모든 것의 조화와 질서에 비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바닷물을 분해하여 얻어낸 중수소로 플라즈마를 만들어 인공태양을 만드는 시대, 예정된 임무시간을 완료한 인공위성이 우주의 쓰레기로 떠도는 시대를 살면서 150년 전 역사학자가 발부한 옐로카드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본다.


사족: 책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마치 바다에 관한 사전을 통째로 한 권 읽은 느낌이다. 정보도 많았고 문장도 아름다웠다. 하나의 글이 시작될 때마다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파란 바탕의 그림은 그 글의 내용에 대해 미리 짐작해보게 해주었다. 오자도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317쪽 아래서 두 번째 줄 ‘천박’은 의미상 ‘척박’이 되어야 할 듯싶다. 366쪽 위에서 세 번 째 줄 ‘바다에’는 ‘바다의’가 맞지 않을까.



밑줄 긋기

세상의 큰 운명인 굶주림은 육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바다에서 굶주림은 예방되므로 있는지조차 모른다. 식량을 찾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삶은 마치 꿈처럼 떠다닌다. 그런 힘을 무엇에 쓸까? 힘의 소진을 불가능하다. 그 힘은 사랑을 위해 비축한다. -103


사랑은 자기 존재를 넘어, 또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존재하려는 노력이다. -111


진주는 하렘의 여인이 속옷으로 걸치는 비단 속치마 같다. 다 해져 떨어질 때까지, 힘을 잃고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면, 결코 이 애첩을 떠나지 않는다.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의 자극이자 부적이다. -178


아이를 학교에 가두어놓지 말고 어려서부터 일과 운동과 항해를 시켜야지, 앉은뱅이처럼 책상 앞에 앉혀 공부나 하게 해서는 안 된다. -310


여자들은 얼마나 남자를 모르는지! 여자들이 모르는 것은 사랑의 가장 큰 특징, 가장 생생한 자극은 미모가 아니라 격정이라는 사실이다.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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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26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여기저기서 리뷰를 보게 되는데, 이 리뷰는 새로운 관점인걸요.
전 불어는 까막눈인데, 어디선가 주워들은 '라 메르'는 너무 예쁜 것 같아서, 자꾸 발음해 보게 되거든요~

1860년에 쓰여진 글이라니, 진짜 바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겠는걸요~^^

반딧불이 2010-12-26 10:08   좋아요 0 | URL
비행기도 없었던 당시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게 놀라웠어요.

비로그인 2010-12-26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의 리뷰 덕분에 미슐레의 책도 욕심이 나지만 갑자기 지구본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반딧불이 2010-12-26 10:16   좋아요 0 | URL
후와님.제가 갖고 있는 건 요거에요.

http://gift.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7060910155

저는 큰것도 싫고 바다가 시퍼렇게 나오는건 천박해보이더라구요.

제 맘에는 들지만 글씨가 작은 게 흠이라면 흠이에요. 전원을 넣으면 별자리가 뜨는 것도 있어요. 저는 가끔 어스름이 생각나는 저녁이면 대신 이녀석을 돌리기도 해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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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행한 강연을 속기한 것이다. 당시에 사르트르가 발표한 소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사르트르를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라고 비난했고, 사르트르가 가까이 하고자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역사적 요구에 일치하는 인간, 현실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인간에 대해 정의하기를 원했으나 사르트르의 소설 속 인물들과 그의 실존주의는 당시 사람들의 관심에 역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르트르에 대해 안티휴머니스트가 되어버렸다. 사르트르가 이 강연을 행한 것은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기 철학의 정합적이고 보다 올바른 개요를 대중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정의, 실존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에 대한 반박 그리고 실존주의야 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는 부분이다.

사르트르는 우선 실존주의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기독교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그것이다. 양자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평가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선험적인 본질이 있고 그에 따라 신은 창조자로서 자신의 기술과 개념으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전대(前代)의 철학자들이다. 18세기의 무신론 속에서 신의 개념은 제거되었지만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개념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전대의 철학이나 무신론과는 다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만약 신이 없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실존하는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으로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부르며 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인간은 먼저 실존한다는 사실을 즉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요, 미래 속에 스스로를 기투하는 일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대신한다.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투로서의 인간에게는 선택과 책임 그리고 자유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은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신이 없다면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결코 응고된 채 주어진 그 어떤 인간 본성에 의존하여 설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초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이란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의 자유란 나의 자유를 원하는 동시에 타인들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타인들의 자유를 목적으로 취할 경우에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신을 부정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은 매순간 선택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가치창조의 장본인이며 인간 공동체의 창조 역시 가능하다.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실존주의는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사르트르는 이 비난에 대해 그가 말하는 실존주의는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독트린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모든 진리와 행위가 그 어떤 환경과 인간적인 주체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휴머니즘을 고전적 휴머니즘과 실존적 휴머니즘으로 나눈다. 고전적 휴머니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며 사람들이 행한 고귀한 행위에 비추어서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만들어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이런 종류의 모든 판단을 배제시켜버린다. 실존적 휴머니즘은 인간 그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가 없다는 사실, 인간은 자기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결정한다는 사실, 인간은 자신 밖에 있으면서 자유이자 특수한 실현인 어떤 목표를 찾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이 실존은 결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며 인간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관점에 맞춰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꾸만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벤야민은 역사속의 불연속성에 주목하면서 ‘성좌구조’로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인간은 천둥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글이 더해지자 자기연민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면서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는, 햇빛 한 오라기 들지 않는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떠오르면서 가엽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어느새 그렁그렁 눈에 수평선이 차오른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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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12-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하여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경계에서 엄청난 고민과 사색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던 것 같아요. 결국 약간 무신경한 교조적 결론으로 끝을 맺지만요. 반딧불이님이 인용하신 무신론이 가지는 도덕적 한계를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나요. 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끌립니다. 신을 믿어도 인간은 어차피 내던져진 존재인 것 같아요. 선택하고 만들어 가고. 근데 요새는 이 과정도 하나의 숙명으로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반딧불이님이 느끼는 연민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아요. 저도 자꾸 요새 그런 감정에 젖어요. 나도 불쌍하고 다들 불쌍해요--;;
저는 아직도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반딧불이님의 페이퍼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믿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12-23 00:58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의 초기사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곡해된 경향도 있고 한계도 있다고 해요. 요약하느라 가능하면 사르트르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고 말이 많았지만 어렵지는 않았어요.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하면서 낙관주의라는 말도 덧붙여두었어요. 이사도 있고...분주하실텐데..나중에 시간되시면 봐도 좋으실듯해요.

비로그인 2010-12-23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참 정갈하게 정리된 느낌입니다. 좋은 강의를 들은 것 같달까요. '실존'해야만 하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 공감하지 않을 수 없군요. 또 배우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12-23 10:58   좋아요 0 | URL
배우시다니요. 후와님은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신걸요.

cyrus 2010-12-2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책에서 사르트르의 책이 소개된 글이 있었는데, 사르트르의 사상은
저에게는 좀 어려운거 같습니다. 뭐부터 읽어야할지 모르겠지만, 먼저 이 책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12-23 23:35   좋아요 0 | URL
학부때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었는데 아무 기억이 없구요. 얼마전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은 재미있게 봤어요. 짧지만 사르트르의 일생이 집약적으로 쉽게 설명된 책이에요.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가끔 들여다봐요.

2010-12-2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