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 - 요리, 사랑, 문자로 플어낸 동서양 문명의 발달사
잭 구디 지음, 김지혜 옮김 / 산책자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잭 구디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의 전장으로 내몰렸고 그곳에서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 제임스 프레이져의 <황금가지>와 고든 차일드의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우연은 훗날 그의 관심을 문학에서 고고학 및 인류학으로 바꾸어놓았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현지조사로 인류학자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연구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했던 것들은 문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요리, 꽃의 문화, 상속, 가족의 역사 등인데 특히 내게 놀라웠던 것은 요리법의 세분화나 꽃을 심미적 용도로 사용하는 데에 경제적인 계층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이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꽃 문화가 없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꽃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이유만으로 꽃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꽃을 선물하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이미 내 무의식은 계층화 계급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은 이런데다 쓰는 거라고 자위해본다.

이미 적었지만 잭 구디는 역사학자이면서 인류학자다. 역사학과 인류학의 차이점은 뭘까? 역사학이 문헌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면 인류학은 현장조사로 연구하는 차이일까? 역사학이 시간성을 전제로 시간 안에 법칙과 리듬을 부여한다면 인류학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연구하는 것인가?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학이든 인류학이든 언어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역사학자든 인류학자든 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세계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어의 지시기능뿐만 아니라 세계를 절단하는 기능으로 본다면 이들 학자들의 견해는 세계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절단하는 것이리라.

잭구디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절단한 것을 보자. 그는 서양 중심주의에 비판의 메스를 대고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산업화, 근대화라는 말의 배경에 유럽인들에 의해 이러한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과장된 주장이 들어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고 서양=역동적, 동양=정태적, 서양=문명, 동양=야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서구는 문명사적으로 동양보다 우위에 있으며 온 힘을 다해 따라가야 할 모델이 된다.

인류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관여한 서양 중심주의에는 특히 사회가 원시적 형태에서 고대적 형태 - 봉건적 형태 - 자본주의적 형태로 순차적 발전과정을 거친다는 마르크스는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집단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향하여 발전의 순차가 놓여 있다는 것 역시 마르크스 사상의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농촌사회의 확대가족은 개인주의의 등장과 함께 근대사회의 핵가족으로 이행한 것이 된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루면서 개인주의라는 낱말을 사용했는데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동료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거리를 갖게 한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근대화, 기업정신에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세계적 팽창에 관한 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잉글랜드에서 유럽의 어휘 속에 처음 ‘개인주의’가 등장했을 때 우파는 당시 사회의 원자화를 뜻하는 의미로, 좌파는 사회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입장이나 사회조직보다 개인의 책임을 우선시한 청교도적인 입장 등 ‘개인주의’를 바라보는 입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마르크스의 발전 순차를 따른다면 현대사회는 단자화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복지나 연금 등 사회제도나 투자 자본의 축적을 위한 혈통집단 등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현대사회는 훨씬 더 집단적이다. 이들이 말하는 개인의 의미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입장 등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좀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은 문명이나 제도에 대한 논의 이외에 인간의 감정, 특히 사랑의 감정에서 조차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보이는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나 욕망이라고 여긴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역사학적 접근이 요약 제시되고 있다.

로맨틱한 사랑은 근대적인 것이고 근대성은 유럽적인 것이므로 사랑은 유럽적이라는 기든스의 입장. ‘반쯤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로맨틱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레이크의 정신분석학적 관점. 사랑을 위한 결혼이 증가한 것은 소설의 소비 증가 때문이라고 말하는 역사학자 스톤은 ‘사랑이 커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지면 위에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커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글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사랑을 구분하면서 은연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의 사랑의 감정을 욕정이나 욕망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동서양 문학에 나타난 사랑의 감정을 예로 들면서 이에 대한 비교거리를 제공한다. 또 아프리카인의 노래나 관습에도 사랑은 표현되고 있고 심지어 결혼한 여자나 남자의 연인까지도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잭 구디는 서구가 자본주의 혹은 근대화를 향한 어떤 특별한 경향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위해 각 분야의 다양한 이론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그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는데 많은 부분이 논증이나 제시보다 요약 정리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또 저자는 서양의 독특성보다 유라시아의 독특성, 특히 아시아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아프리카의 문화를 소개한다. 이것은 문자로 하는 일 못지않게 말로 하는 일(구술)의 가치를 재평가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서양/동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아프리카를 위치시킨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을, 또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가장 원초적인 행위의 하나인 먹기와 사랑, 그것을 확장하는데 기여한 문자를 키워드로 문화사를 조망하는 일은 가장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거시사를 다루는 효과를 낸다. 한쪽 눈으로만 보던 역사를 비로소 두 눈을 뜨고 보는 것 같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으로서 문학을 알려고 하는 것은 피로써 피를 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역사를 알려고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역사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지리적 국경의 개념을 넘고 공간적으로도 우주 밖에서 지구를 조망하는 듯 넓은 시각을 확보하게 해준다. 잭 구디의 언어로 단절한 세계를 통해 내 시각은 새로워 진 셈이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성에 대한 논의도 또 그에 대한 반박도 모두 서양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학문은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눈꺼풀에 씌운 콩깍지를 벗겨내고 있는 것인지 헛갈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0-10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0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10-1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서구중심적인 세계사에 대한 논의들은 읽어보았지만, 역사인류학이라는 것은 또 그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넓은 세계인 것 같네요. 아마도 이 역사인류학이라는 것이 폭넓게 연구된다면 지금의 어떤 틀에 박힌데다가 유럽중심적인 세계사보다는 훨씬 넓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듯도 싶구요. 유럽중심적인 세계사를 넘어서자는 책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 책처럼 역사인류학이 아닌) 기존 역사학의 방법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니까요.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1-10-11 01:19   좋아요 0 | URL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지요. 저는 특히 벤야민의 관점이 새롭게 보였어요. 역사내부에도 기존역사서술에 대한 비판들이 있구요. 인류학적으로 역사를 보니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지만 뭐랄까..순환론을 생각하게 된다고 해야할까요. 고대세계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할까요...맥거핀님께서 살파신 몰락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보게되는것 같아요
 
황금가지 1 - 을유세계사상고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박규태 역주 / 을유문화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곳은 ‘숲의 디아나’라고 불리는 성소이다. 이 성스러운 숲속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둘레에는 밤낮 없이 잔뜩 긴장한 한 사람이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모른다는 듯이 긴장된 자세로 늘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는 사제인 동시에 살인자이다. 그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도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의 사제직을 계승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하려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이 성소가 바로 사제직을 계승하는 장소로서, 사제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전임자를 살해하여야 하고, 황금가지를 꺾어야만 그 직을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성소의 엄격한 율법이다.”


이 성소의 율법에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제는 왜 살해 되어야 하는가? 사제를 살해하려는 사람은 왜 반드시 황금가지를 꺾어야 하는가? 또 황금가지란 무엇인가? 프레이져의 『황금가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안락의자 위의 인류학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는 프레이져의 황금가지는 총 13권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후대를 위해서인지 그는 스스로 1권의 축약본을 만들기도 했다. 아직도 나오고 있을 것만 같은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 쥐만큼이나 방대한 자료들은 지루함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를 통한 그의 이론은 더러 흥미롭기도 하고 가끔은 탄성을 자아내게도 하며 꽤 설득력이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고대사회에서 사제나 왕, 추장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이들은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고 예기치 못한 자연의 폭력 앞에서 그들이 무너질 때 이 재난은 그들의 죄과로 돌려져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살해당하였다.

황금가지는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의 다른 이름이었다. 겨우살이의 가지를 잘라두면 잎뿐만 아니라 가지까지 황금색으로 변해 그야말로 황금가지로 보여 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어 참나무가 그 잎을 다 떨어뜨려도 이 겨우살이는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죽은 참나무의 정령이 그 겨우살이에 거처를 정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땅에도 하늘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다. 황금빛과 노란색은 동종주술의 원리에 의해 불씨 혹은 태양을 상징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듬해 참나무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고 겨우살이에 깃들었던 참나무의 정령이 겨울을 잘 보내고 참나무로 거처를 옮겨간 것으로 여긴 듯하다. 황금가지는 불이나 태양의 상징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축제를 통해 악령을 제거하는 정화의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프레이져의 연구는 디아나 숲의 사제 살해 모티프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다. 그러나 왜 참나무여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도 대답도 없다. 우리는 흔히 새 중의 새를 참새라 하고 나무 중의 나무를 참나무라 한다. 북부 이탈리아의 디아나 숲의 그 참나무도 내가 알고 있는 이 참나무라면 그곳에서 이 참나무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이져는 캐임브릿지 대학의 자기 서재 안에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섭렵한 다음 그것을 정리했다. 그의 범위는 유럽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지리적 경계를 망라하고 농경민족과 유목민족 등 인류의 생활양식도 함께 고찰한다. 그는 원시인의 주술, 신화, 입사의식, 터부, 수목의 정령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 살해, 축제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를 비교 정리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프레이져는 유사의 법칙에 의한 ‘동종주술(모방주술)’과 접촉, 전염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 ‘감염주술’로서 인간이 가진 본질적 유사성을 추출해 낸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부정, 그리고 영혼불멸의 신앙이다. 프레이져는 마치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순환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일정불변의 법칙을 가진 것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그 계절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반복과 차이/엘리아데의 영원회귀). 자연은 친숙하고 다정한 얼굴로 찾아오기도 하고 폭력적인 재앙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들기도 한다. 처음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자연적 힘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의 이 같은 믿음은 주술을 낳았다. 주술사는 자연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해결사였다. 그러던 인간이 자연의 폭력 앞에 무릎 꿇어야 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는 어떤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자비심을 구하는 일 뿐이었다. 인간은 초자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종교가 생겨났다.  

 

프레이져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사유는 이렇게 주술에서 종교를 거쳐 과학으로 진행되어왔다고 결론짓는다. 과연 그의 말대로 주술은 종교보다 앞서 존재했고 종교는 과학보다 앞서 존재하면서 진화론적으로 발달하는 것일까? 문명화의 식민지와 같고 과학에 대한 믿음이 망상으로까지 치닫는 현대에도 여전히 주술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주술과 종교의 차이는 다만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방법적 접근의 차이로서만 설명될 수 있을까? 과학은 진보하지만 주술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효력이 극대화되었다. 혹시 프레이져가 말하는 미개인에게는 주술이 과학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독교에 대한 프레이져의 생각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불 축제에 대해 고찰하면서 크리스마스가 태양의 탄생에 관한 고대 이교도의 축제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교회에 의해 제도화되었다고 했을 때 기독교도들의 비판을 받을 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25일이라는 날짜가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 즈음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우주만물의 순환과 농경사회에서의 태양의 의미, 주역에서의 괘 등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한 가지 불편한 심사가 뒤따른다. 프레이져가 말하는 미개인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뚜렷한 경계의식을 두지 않았고 또 자신이 죽이는 동물에 대해 아무리 경건한 의식을 갖추고 존경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인간 우월주의, 인간 중심주의, 힘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살육이고 이론의 확립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배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예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나 맛좋은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은 경건한 의식으로 존중되고, 무섭지도 않고 맛도 없는 동물은 멸시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숭배하기 때문에 살해하지도 먹지도 않는가 하면 바로 그 숭배 때문에 살해하고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헌령비헌령이 따로 없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무생물이나 동물 심지어 같은 인간에게까지 옮기는 행위, 속죄양을 만드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스스로도 이런 행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을 때, 또 끝내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때 넘을 수 없는 벽을 맞닥뜨린 것 같고 암담한 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사물을 비추지 않으면 거울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을 비추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황금가지는 나를 비추는 종이거울이며 프레이져는 인간의 형상을 한 거울과 다르지 않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1-09-3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이 쉬시다가 저와 같을 때 리뷰를 남기셨네요. ㅋㅋㅋ 뭔가 왠지 모를 동지 의식을 느낍니다. 휴! 어려운 책을 읽으신 것 같아요. 속죄양을 만드는 행위라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네요. 항상 정치도 그렇고 속죄양을 만드는 것에 능숙한 것이 지금의 사회이지 않나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물을 비추지 않으면 거울이 아니다'란 표현 음~확 와닿네요. 전 이런 문장들이 좋아요. 뭔가 가슴을 후벼 파는 문장 말이죠. 개인적으로 너무 긴 책은 읽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데 <황금가지>를 쓴 저자를 보면 참으로 반성이 되네요. 대단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 오셔서 너무 반가워요. ㅋㅋ

반딧불이 2011-10-03 13:37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습니다. 저도 다시뵈어 반가워요.

속죄양.말씀을 듣다보니 고대사회에서의 속죄양과 현대사회의 속죄양은 좀 다른의미로 쓰이는것 같네요. 아주 중요한 것을 짚어주셨어요.

프레이져는 좀 심하게 길어요. 저도 이런책 별로~ 안좋아한답니다. 앞으로 종종 뵐 수 있기를 바래요.


비로그인 2011-10-01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동을 재개하신 건가요? 그럼 이제 반딧불이님의 글을 읽을 수 있겠군요ㅎㅎ
저는 한겨레출판에서 낸 <황금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그럼 축약본이겠군요.
암튼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반딧불이 2011-10-03 13:43   좋아요 0 | URL
활동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후와님께서 즐겨 읽으실 가치도 별로 없는 글인걸요. 뭐
<황금가지>는 나와있는 것이 모두 축약본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1980년에 출간된 삼성출판사 책을 가지고 있는데요. 혹시나해서 을유문화사본을 도서관에서 빌려 함께 보았습니다. 이 책이 참고사진이나 주석 등을 통해 다양한 설명을 곁들여 놓아서 도움이 되더라구요. 늘 필요한 부분만 찾아보다가 통독을 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씁쓸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cyrus 2011-10-0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셨나요? 오랜만에 서재에 들리게 되었어요.
저는 축약본이라고 해도 과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몇몇 서재 이웃분들 사이에서도 이 책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시던데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
이제부터 날씨가 쌀쌀해진다고 하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


반딧불이 2011-10-03 13:46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영감을 얻는다고 해요. 대표적인 사람이 T.S.엘리엇이죠.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그의 시 <황무지>가 이 책을 읽고 쓰여졌다고 하네요.
책도 인연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니 언젠가 인연이 되면 읽으시겠지요. 환절기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래요.

맥거핀 2011-10-0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 점점 발달하고, 미개인이 모두 사라지고, 언젠가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주술이 사라질까요? 종교도 사라질 수 있을까요? 글을 읽다보니 궁금해집니다.

컴백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글 자주 볼 수 있기를..

반딧불이 2011-10-03 13:51   좋아요 0 | URL
다시 뵈서 반가워요. 맥거핀님. 이 책도 그렇고 레비스트로스도 그렇고 나카자와 신이치도 그렇고 엘리아데도...신화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랄까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했어요. 이 세계가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는지 잘 모르겠지만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에게서 주술이 사라질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이네요.

릴케 현상 2011-10-07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방가방가 계속 띄엄띄엄 인사드리게 되네요^^ 합리성 속에 언제나 신화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나네요. 저도 긴 책은 통 읽기 어려워요. 두꺼운 책 한 권 들고 잠적하고 싶은 밤입니다요

반딧불이 2011-10-07 10:32   좋아요 0 | URL
산책님~~ 재앙같은 여름을 견디고 절 기다려주신건가요? ㅋㅋ
산책님께는 짧으면서도 겹겹인 시가 있으시잖아요~ 그나저나 논문쓸때 되신거 아니유?

릴케 현상 2011-10-0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저도 여름 내내 납작 업드렸다가 반딧불이님 돌아올 때 쯤 된 듯해서 들렀어요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툴루즈 고등법원에서 한 남자의 형사재판이 진행되었다. 한 여자가 3년을 함께 산 자신의 남편을 가짜라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재판을 진행했던 한 판사는 이 사건을 <잊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이후 6년간 다섯 번이나 재인쇄 되었고 라틴어로도 발간되었다. <잊을 수 없는 판결>은 <마틴 기어의 귀향>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 작업에 협력했던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영화가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영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아쉬워했다. 그녀는 이런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미시사적으로 재접근했다. 이렇게 쓰여진 책이 사건의 주인공 이름을 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마르탱 게르는 열네 살에 베르트랑드와 결혼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식을 낳아야 결혼이 완성된 것으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르탱이 성불능자였기 때문이다. 자식 없이 3년을 넘기면 결혼은 취소될 수 있었으므로 베르트랑드의 가족은 그녀에게 이혼할 것을 종용했다. 결혼 후에는 교회법에 따라 재혼도 허락되었다. 하지만 베르트랑드는 가족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8년 후 우여곡절 끝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마르탱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곡식 약간을 훔치고는 아버지의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 상속지, 부모를 모두 버리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베르트랑드는 정조를 지키며 자식을 키웠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새 마르탱은 모든 면에서 베르트랑드를 만족시켜주었다. 비록 하나는 죽었지만 삼 년 만에 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렇게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던 베르트랑드가 갑자기 남편을 가짜 마르탱이라고 고발했다.

마르탱 자신은 물론 촌락의 많은 사람들이 가짜 마르탱을 진짜 마르탱이라고 증언했고 그의 열정적인 설득은 진실로 받아들여져 재판관들의 판결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판결이 내려질 무렵 극적이게도 진짜 마르탱이 외다리가 되어 등장함으로써 가짜 마르탱은 사형에 처해진다.

대체 베르트랑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람들은 왜 가짜 마르탱을 진짜 마르탱이라고 증언했을까? 마르탱이 마르탱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짜 마르탱이 되어 마르탱으로 살았던 아르노 뒤틸의 삶마저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16세기 사람들은 진실과 재산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었을까? 그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 되는가? 내가 ‘나’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법률적, 역사적, 철학적, 존재론적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진실인가, 사실인가?

저자는 가짜 마르탱 역할을 했던 아르노 뒤틸에게 단순히 마르탱의 재산과 아내를 탐한 사기꾼이 아니라고, 또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생활을 지속했던 베르트랑드를 재빠른 현실 감각을 가진 의지의 여인으로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간 ‘창안된 결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저자는 또 이 기록에 대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보이는 관심을 덧붙였다. 작가들은 믿기 어려운 기이한 특징들에 관심이 있었고 아르노 뒤틸을 경탄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제거되어야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일반 남성들은 사기꾼보다 속은 아내에게 일체감을 가졌으며 20세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여성의 논평이 없음도 밝혀두었다. 또 저자는 몽테뉴의 에세이를 언급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 사건을 보면서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강조하면서 재판장의 사형 판결은 매우 대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당시에 더구나 이단이 판을 치던 랑그독 지방에서 재판관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했을까? 더구나 재판관은 판결을 기다리는 사건 당사자들과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면전에 두고 있었다. 몽테뉴라면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흥행의 극적 요건을 갖춘 이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마르탱 게르를 마치 영웅전설의 주인공처럼 만들었다. 같은 사건을 다루었지만 미시사적으로 접근한 책은 사건의 갈피갈피에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인물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만을 오갈 수 있는 추론식의 역사적 상상력 때문인지 문학적 상상력과는 다른 한계를 지닌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1-06-0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인데요. 16세기에 판결을 내려야 했다면 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 지금은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당연하게 생각되고 인식되지 않은 문제인 듯 느껴지지만 이렇게 발달한 문명의 한복판에도 단순히 '나'라는 사람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가지 가지로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사는 것도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하여튼 내용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흥미롭네요. ^^ 오랜만에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배 불러요. ㅋ

반딧불이 2011-06-07 08:43   좋아요 0 | URL
저자가 영화에서 다룰 수 없던 것들을 다루면서 정체성의 문제에 주목했던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이 마르탱을 증언하는 내용이 재미있는데, 어떤 사람은 신발 사이즈로 어떤 사람은 기억으로 또 어떤 사람은 키로 마르탱을 기억하거든요. 이런 것들이 마르탱을 마르탱이게 하는 증거가 되지만 진짜 마르탱이 나타났을 때 아무 의미가 없어지죠. 내용은 재미있는데 책은 그렇게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아요. 참고하셔요.

루쉰P 2011-06-07 19: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완전 참고하겠습니다. ㅋㅋ 반딧불이님 덕분에 항상 책에 대한 수고를 덜어요. 또 좋은 리뷰 기대하고 있을께요!!

2011-06-1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 - 카프카에서 스메타나까지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2
조성관 지음 / 열대림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맛있는 먹거리나 훌륭한 쇼핑센터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여행 안내서라면 반드시 있어야할 그 흔한 지도도 한 장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은 프라하를 여행할 때 반드시 챙겨가고 싶은 책이다. 여행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도 가끔씩 들여다보는 책이기도 하다.

프라하는 한국인이 가고 싶어 하는 유럽도시 1순위라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약소국이고 과거 한때 식민지였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지리적 혹은 역사적 동질감의 확인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아주 예외적 인물이 넘쳐나는 나라에 나는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행하고 싶은 도시 1순위는 짐작하건대 체코라는 나라이름보다도 프라하라는 도시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 한듯싶다. 우리나라에서 프라하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데에는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단단히 한 몫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미 오랜 전에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또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를 추모하는 음악축제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원작이고, 축제는 매년 5월 12일에 개막해 6월 초순까지 계속된다. 프라하나 체코의 이름이 알려진 데는 밀란 쿤데라나 스메타나 외에도 『변신』의 프란츠 카프카,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의 밀로스 포먼 감독, <신세계 교향곡>의 드보르자크, 벨벳혁명을 이끌었고 전직 대통령이며 극작가인 하벨 등 많은 예술가들이 기여했다.

프라하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연합군의 폭격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중세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프라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시절에는 식민지의 중심도시였고, 1989년 벨벳혁명이 일어나 공산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사회주의 국가였으므로 상업자본주의의 흔적도 거의 없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은 프라하를 사랑했고 프라하는 또 천재를 알아보고 키워낼 줄 아는 도시였다. 가히 예술의 도시라 할만하다. 가보고 싶은 도시 1순위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기자출신의 저자는 여섯 명의 예술가들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족적을 따라 프라하를 소개하고 있다. 각 예술가들의 짧지만 애정 어린 평전을 읽는 듯도 하고 반드시 찾아보아야할 여행지를 안내해 주는 듯도 하다. 카프카가 글을 썼던 지붕 밑의 다락방과 묘지,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을 들으며 거닐면 좋을 블타바 강과 카를교, 토론과 집회의 메카였지만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바츨라프 광장,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집으로 여러 번 등장했던 흐라드찬스케 광장 7번지의 주택 등이 깔끔한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살다간 시기는 비록 달랐지만 어디에선가 그들의 발자국이 겹치기도 했을 것만 같다. 품격 있는 여행안내서로 영혼을 살찌우는 책이 될 것이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1-05-1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카프카를 무척 좋아하는 터라 가고 싶은 도시로 손 꼽는 도시인데 거기를 가신다니 부럽네요. ^^

하벨 대통령도 무척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에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상당히 뛰어나는 느낌을 받거든요. 아무쪼록 프라하에서 이 책에 써 있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다 보고 오셨으면 합니다. 아! 대박 부러워요.

반딧불이 2011-05-16 00:31   좋아요 0 | URL
프라하를 작년에 가려다 못갔어요. 그때 읽었던 책인데 6월에 예정되어 있는 터기 여행관련 책을 찾다가 이걸 다시 보게 되었네요. 다시봐도 제 수준과 입맛에 딱 맞는 책이네요.

여담이지만 저는 제가 글을 올리면 누가 첫 추천을 누르나 늘 궁금했어요. 오늘은 그 범인(?)을 현장에서 체포한 기분인데요.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5-19 23:0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체포 당했지만 상쾌한데요. 아! 이 변태적인 범인의 심리 ㅋ

우와 6월에는 터키 여행이시라니 정말 부럽네요. ^^ 항상 어딘가를 떠나고 싶지만 항상 같은 곳에 잡혀 있는 저로서는 완전 부럽다고 밖에 할 수 밖에 없어요. 갔다 오시면 꼭 좀 글 좀 올려주세용!

여담이지만 저도 제 글에 추천하는 사람이 항상 궁금해요. ㅋ

비로그인 2011-05-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하를 가보고는 싶은데 당장은 어려운데다 영원히 기회를 얻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니 그저 이 책으로나마 위안을 삼아야겠군요 쩝! 내달에 터키를 가시는 모양이네요 ㅎㅎ^^

반딧불이 2011-05-16 11:10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여간 저는 준비하면 못간다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그냥 떠나려고 맘먹었어요.

터키도 프라하꼴 날까 싶어 바로 티켓팅을 하고 아무 준비도 안하고 날짜만 세고 있습니다. 에어텔을 예약했으니 천재지변이 나기 전에는 떠날 수 있겠죠? 왠지 불안해진다는...

파고세운닥나무 2011-05-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영어회화 수업을 듣는데, 미국인 강사가 한 여학생에게 해외 어디에 가고 싶냐니까 '파리의 연인'을 흥미롭게 봤다면서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프라하도 그렇겠지만 대중 문화 속의 이미지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듯 합니다.
터키에 가세요? 아마 체코와 더불어 터키도 유럽 속 변방이란 이미지가 강한 듯 합니다.
저도 티켓팅을 해두고 미국 가는 날을 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부의 도시인데, 근래 이상기후 때문에 그 쪽 지방에 피해가 있더군요. 5년간 안전하게 있다 돌아와야 할텐데요...

반딧불이 2011-05-16 11:17   좋아요 0 | URL
한류를 봐도 그렇죠. 저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아시아의 끝, 유럽의 시작,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곳, 지중해, 흑해 이런 것들이 저를 마구 끌어당기더라구요.

아마도 닥나무님께서 가실때쯤이면 이상기후가 물러가지 않을까요? 건강하게 무사히 잘 다녀 오시기를 바랍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5-17 11:06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언젠가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있겠죠? 저는 이번이 첫 출국이랍니다^^;

여행간 안전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2011-05-19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은 프라하 특유의 고풍스럽고 세련된 우아함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아직도 옛 느낌이 살아있는 그림엽서 같은 그런 풍경...유럽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은 왠지 백인나라들 중에서도 좀 칙칙하다는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체코가 좀 예외죠.사실 2차대전 전에도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이기도 했고요.그 반면 체코와 갈라진 슬로바키아는 왠지 인지도도 떨어지고 좀 그렇죠.

반딧불이 2011-06-08 12: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말씀을 들으니까 반드시 현장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습니다. 그런데 노자님은 여러가지 분야에 참 관심이 많으신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6-08 16:14   좋아요 0 | URL
아...예...제가 민족분쟁이나 문명교류 쪽에 관심이 많고 외신기사도 정독하는 편이라서 그렇습니다.또 세계각지의 식생 동물분포 기후 지질 등도 관심대상이죠.

반딧불이 2011-06-10 11:45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그런데 말씀하신 영역뿐만 아니라 가요나 교육, 언어, 정치 등 많은 분야에 정통하신듯 하던걸요.

노이에자이트 2011-06-10 16:4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정통한 정도는 아니고...워낙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요...
 
<사유의 악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유의 악보』,  

이 책에 대해 내가 쓰는 모든 말은 변죽이거나 불협화음이거나 삑사리다.


1. 변죽


이 책『사유의 악보』를 받아들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사유악부>였다. <사유악부>는 정조 때 의 인물 김려의 글이다. 그는 이옥, 강이천의 친구로 당대 최고의 소품작가였다고 한다. 김려는 강이천 사건에 연루되어 부령과 진해로 두 번 유배를 갔다. 부령에 유배되었을 때 만나 사랑에 빠졌던 기생 연희를 그리워하는 글이 남아있다. <사유악부>가 온통 연희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글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소품문을 쓴다는 것이 그가 귀양을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이렇게 감각적인 글을 쓰고도 정조에게 찍히지 않았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其. 1


問汝何所思 묻노니, 그대 무얼 생각하는가

所思北海煝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眼中分明城東路 눈 감아도 뚜렷한 성 동쪽 길

第二橋邊蓮姬住 그 곳 두 번째 다리 옆에 연희가 살았지

屋前一道淸溪流 집 앞에는 길이 있고 맑은 시내 흐르고

屋後亂石顚山周 집 뒤엔 암석이 즐비하고 산은 병풍을 두른 듯

溪上楊柳數十株 시냇가엔 늘어진 버들이 수 십주가 자라고

一株堂門映粉樓 문 앞에 서면 한그루 나무와 고운 누각

樓上對牕安機杼 누각에선 창을 마주하여 앉아 베를 짜고

樓下石臼高尺許 누각 아래는 한자쯤 되는 고상한 절구가 있었지

樓南小井種櫻桃 누각 남쪽 작은 우물가엔 복숭아와 앵도가 있고

樓外直北會寧去 누각 밖의 북쪽으로 곧장 난 길은 회령 가는 길..



其. 二


問汝何所思 묻노니, 그대 무얼 생각하는가

所思北海湄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全樹桃花結訌萼 복숭아 꽃망울 나무에 온통 어지럽게 엉켜 있고

一花先坼明綽約 그 중에 먼저 피어난 예쁜 꽃 한 송이 보여

我手攀枝摘花來 나는 손으로 가지를 잡고 꽃을 따서는

恰似蓮姬寶靨開 연희가 웃을 때 보조개랑 닮았구나 하면서

聊將投擲蓮姬前 슬쩍 연희에게 던져 주니

蓮姬雙擎玩一廻 연희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살피다가

笑彈纖指捻一捻 웃으면서 고운 손으로 꽃잎을 하나씩 따서 내게 던지며

道似阿郞醉紅頰 술에 취한 서방님 붉은 뺨 닮았네요, 하며 대꾸 했지

我今老醜還喫笑 나는 지금 늙고 추한걸 하니 연희 뒤돌아서 깔깔 웃고

强把花鬚較霜獵 난 억지로 연희를 붙들고 꽃술을 수염대신 붙이곤 했었지.



<사유악부>와 <사유의 악보>는 글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극과 극이다. <사유의 악보>를 읽다가 갑갑해지면 <사유악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 두 글을 한 이불 속에 재우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2. 불협화음


작가의 이력이 다채롭다. 작곡가, 비평가, 기타리스트.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이 책은 음악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 본문 혹은 프롤로그 에필로그가 아니라 서곡 악장 변주 종곡 등 낯선 이름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다행이다. 왜?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니까. 다행이다. 왜? 나는 음악적 형식의 책을 읽는 것이지 책의 형식을 가진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비교적 서문을 꼼꼼히 읽는 편이다. 대부분의 서문에는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나 의도 각 챕터별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책의 맥락을 잡고 나면 내용파악이 훨씬 쉽고 내가 꼭 필요한 부분을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책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준으로 또 기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문에 해당하는 서곡을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한번 연주로 끝나는 음악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다시 읽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이건 악보가 아니라니까 이 등신아!” 자학하며 곁가지들을 마구 잘라냈다. 잘라내면서 보니 한 문장이 평균 대여섯 줄이다. 길기는 하지만 문장에 리듬이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몰라도 줄줄 읽힌다. 음악가의 특성이 글쓰기에도 적용 되는군, 재미있는 경험인데 주절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런데 한참 저자의 리듬을 따라 가다가 술어를 맞닥뜨리면 갑자기 당혹스럽다. 왜 이런 술어가 나왔는지 모르겠는 거다. 문장이 너무 길어서 주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샤프를 이불 꿰매는 대바늘처럼 놀려 주어를 찾아 술어와 꿰고 문맥을 다시 짚어본다.


서곡의 첫 문단은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시대는 주어진 쾌락 속에서 우울하며, 강요된 안정 속에서 불안하다.” 상당히 멋지다. 그런데 나는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주어진 쾌락’은 무엇이고 ‘강요된 안정’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튼 이러한 시대에 “이론과 사유가 다시 촉발되고 가동되어야만 하는 필요성이 절박해진다.”고 저자는 적었다.

그러나 ‘반드시 사유해야 한다는 당위성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나도 동의한다.) 오히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 사유해야 하는가’이다. (사그라지지 않는 시덥잖은 내 반항정신과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다.) 이 책에 적힌 글들은 그러니까 왜 사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극단까지 밀고 가서 그 끝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이며 그 극단에서 그가 내린 ‘오답’이거나 또 다른 질문이고 동시에 ‘오문(誤聞)’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시작된다는 믿음을 저자가 가지고 있다고 내 멋대로 해석한다.


저자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모두 저 극단을 ‘증폭’시키거나 ‘심화’시키거나 ‘악화’시키거나 심지어는 ‘폭발’시키기 위해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저격되었다는 소식 때문인지 모래바람 부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전쟁터에 서 있는 느낌이다. ‘설득’하거나 ‘해명’하는 글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책읽기의 방식은 잠시 잊어버리자. 내가 나를 다독거리며 읽는데 저자는 이 글을 소수의 어떤 이들만을 위한 글이라고 명시해두었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온다. 내가 저 소수에 편입되기 위해 이 화사한 봄날 머리 싸매고 앉아서 잘라내고 재해석하면서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이란 말이냐! 그건 아닐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어떤 특권의식을 가지고 ‘소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또 내가 나를 다독인다.

3. 삑사리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증폭’되거나 ‘심화’되거나 ‘악화’되기로 마음먹는다. 심지어 ‘폭발’도 피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내게는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이미 폭발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면에서 두어 번 했지만 말이다. 독자들을 흩트려 놓기로 작정한 저자 앞에 내가 정색하고 글을 쓰는 것은 농담을 다큐로 받는 것과 다름 아니다. 또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내가 기타리스트 앞에서 박자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한 쪽 굽이 떨어진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그저 들어오는 것만큼만 읽기로 한다.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니 아마도 삑사리가 틀림없을 것이다.

서문보다는 아니 서곡 보다는 훨씬 잘 읽히는 아니 들리는 변주와 악장들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일반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뒤집는 저자의 문장들을 만날 때 나는 분명 증폭되었다. 지하철 안의 맹인 걸인이 애절한 ‘비가’로 청각을 자극하여 시선을 구걸하는 것에서 ‘감정과 변용의 문제’를, 그리고 거기에서 윤리의식보다 미학적 감수성을 떠올리는 저자를 보면서 내가 왜 지하철에서 맹인들을 만날 때 그토록 마음이 불편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런가하면 증조부의 제삿날 ‘산 사람도 살게 해줘야 죽은 사람도 잘 얻어먹는 것입니다.’ 라고 구시렁거리던 저자가 ‘제사라는 형식에 대해 역전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 고백할 때 그리고 그 우월감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우면서도 질투에 떨었다.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야하는 집안의 제사라는 행위에서 기독교에 대한 역전된 우월감을 간파하고, 거기에서 다시 전근대적인 공자의 유물론으로, 또 다시 속고 속이는 환상의 매커니즘 속에 단순히 빠져있는 것과 알면서 이용하는 것의 차이를 꿰뚫어보려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즐거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문학전집 출간의 변속에 감추어진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언급할 때,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룬 『아톰의 철학』이라는 책이 철학코너에,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레저 코너에,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스포츠 코너에 분류되는 현상을 본 그가 단순히 분류법을 문제 삼지 않고 거기에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회의할 때, 소설을 쓰자고 말하는 시와 가지고 있는 시를 다 내놓으라고 말하는 소설을 들어 그 곳에서 조롱의 문법을 찾아내고 비평을 위치시킬 때, 나는 심화 되었다. 가금류에게 강제로 음식을 퍼먹이듯이 우리에게 교육되고 주입된 모든 것들, 그리하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다시 묻고 또 대답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단번에 읽히지 않는다. 저자의 생각의 결이 겹겹이어서 그것들을 벗기지 않으면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생각을 더듬고 차근차근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지적 유희가 샘물처럼 고여 있다. 물론 글의 목적이 유희가 아님은 당연하다.

저자의 아름다운 문장들, 겉모습이 아닌 사유의 힘으로 얻어진 문장들에 사로잡힐 때, 그리하여 그 문장이 대체 어떤 사유를 거쳐 만들어졌을까를 되짚어 생각하는 것은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나 같은 무지한 독자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책이다. 내게는 언젠가 통독하고 또 정독해야할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저자가 이미 서곡에 ‘소수’를 위한 책이라고 밝혀두었으니 내말은 그저 뱀발에 불과하겠지만 한 가지 저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독자를 증폭시키거나 심화시키거나 악화시키기 위해서는 방법적으로 고민을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05-0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 서재에 다신 댓글에서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신 걸 본 적이 있는데(죄송!) 결국 쓰셨네요. 사유의 '악보'에 '변죽'과 '불협화음'과 '삑사리'로 대거리를 하시니 저도 그래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ㅋㅋ 아 물론 먼저 책을 읽어야겠지만 말예요. 근데 다들 어렵다고 하시니 겁이 나서 자꾸 주저되네요^^

반딧불이 2011-05-04 19:15   좋아요 0 | URL
마감날짜를 지키지 못했지만 결국 썼습니다. 덕분에 마감날짜를 어긴 최초의 글이 되었습니다. 더 있어봐야 머 더 좋은 글이 나올리도 없구요. 저의 무지와 무식과 무능을 인정하고 나니 쓰는게 별로 두렵지 않았습니다.두고두고 씹어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후와님이 주저하시면 안되죠. 제가 이런 판단을 내리기는 뭣하지만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빨랑 읽으시고 리뷰 올려주세욧!! 리뷰 예약1번입니닷.

쉽싸리 2011-05-0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유(思有)냐, 사유(思惟)냐,
너무 많은 생각은 오히려 해가 된다 하지만 그 '너무 많다'는 제각각이죠.
아직까지는 사유(思惟)할 때고, 그것은 사유(思有)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즐거운? 봄 밤 입니다. 안해님께서 장구를 두드리고 있네요.


반딧불이 2011-05-05 23:09   좋아요 0 | URL
제 알량한 사유로 남의 사유를 잰다는 것이 어찌나 고단하던지요. 또 사유(事由)는 어찌나 많던지요.
쉽싸리님께는 아름다운 봄밤이군요. 고운 꿈이 함깨하시길. ..

람혼 2011-05-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의 위트 넘치는 쾌속의 리뷰를 타고 저 또한 즐거운 속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섬세하면서도 유머가 충만한 독해에 깊이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샤프를 이불 꿰매는 대바늘처럼 놀려 주어를 찾아 술어와 꿰고 문맥을 다시 짚어본다"는 저 멋진 표현을 읽고,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어떤 반가운 동류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바느질'은 심지에 제가 제 글을 읽을 때도 취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읽으시면서 느끼셨겠지만, 저의 중독(中毒/重讀) 증세는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의 꼬리를 무는 사태, 하나의 문장 안에서도 어떤 요소가 다른 요소들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참조하는 사태로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저뿐만 아니라 제 글을 읽는 독자 분들께서 사유의 조각들을 곱씹을 수 있게 만드는, 그리하여 말 그대로 중독되고 중독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글쓰기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너무 섬세하게 짚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나 제 책의 7악장(이 악장에 대해서는 독자 분들에 따라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듯한데요^^)에 대해 보여주신 깊은 관심, 그리고 섬세한 공감과 예리한 해석의 말씀을 읽었을 때 저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반딧불이님 덕분에 김려의 <사유악부>를 처음으로 읽을 수 있었네요.^^ 이 점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반딧불이 2011-05-05 22:59   좋아요 0 | URL
람혼님의 악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이따위로 삑사리를 내서 죄송합니다. 제대로 읽고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싶었으나 제 여력이 여기까지밖에 안 되었습니다. 어느 곳엔가 눈 밝은 독자가 있어 람혼님의 악보에 맞춰 흥겨운 지식의 놀이마당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제게는 다른 글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7악장이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4악장, 변주1, 10악장, 11악장, 변주8, 종곡 등 읽은 것들은 모두 제게 中毒은 아니더라도 重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음도 밝혀 두고 싶습니다.

<사유악부>나 <사유의 악보>는 시대를 앞서간다는 공통점이 서로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고마워하실 것까지야...

변죽만 울린 글이 불쾌하실 수도 있으실텐데 흔쾌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1-05-05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5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바이 2011-05-06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저자가 세계문학전집과 관련해 쓴 글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흉내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그리고 꼭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많은 부분 제가 가졌던 의문을 콕 찝어서 정리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반딧불이 2011-05-06 11:38   좋아요 0 | URL
쉽게 읽히는 글들은 아니지만 공감되거나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주는 책이었어요. 차근차근 곱씹어보는 재미가 따로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조금은 해보게 되구요. 9기 신간평가단도 계속하시는 건가요?

굿바이 2011-05-06 12:55   좋아요 0 | URL
저는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좋은 글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저는 그저 읽는 재미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
반딧불이님은 계속 하시나요?

반딧불이 2011-05-06 13:24   좋아요 0 | URL
저도 신청하지 않았어요. 신간평가단도 해보니까 제게는 거의 노가다더라구요. 저도 그냥 굿바이님의 글처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글이나 읽으려구요.

양철나무꾼 2011-05-10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려를 읽었었는데...이렇게 연결짓지는 못했었습니다.
멋지십니다~^^

아웅~ㅠ.ㅠ
신간평가단을 하지 않으신다니...심정은 알 것도 같지만, 많이 아쉬운걸요.

반딧불이 2011-05-1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양철댁님도 참, 위에 밝혀두었다시피..그냥 '변죽'이자너요.~

책을 많이 읽으시고 바지런하신 양철댁님같은 분이 신간평가단을 하셔야하는데...저도 아쉬운걸요.

루쉰P 2011-05-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게 무지와 무식과 무능을 인정하고 쓰신 리뷰라니..읽는 내내 좋은 문장들이 안에 있어서 감탄하며 읽었네요. 워낙 철학책은 잼병이라 러셀의 '서양철학사'도 소화를 못 시키고 몇 년째 책장에 꼽아 놓고 있는 저에게 참 무서운 벽 같은 책이에요.

반딧불이님은 좀 너무 심하게 겸손하신 듯해요...저는 너무 부럽습니다. ^^

반딧불이 2011-05-14 02:35   좋아요 0 | URL
내용도 만만찮았지만, 뭐랄까요...이런 글에는 어떤 리뷰를 써야하는지 정말 고민되었습니다. 책을 늦게 받은데다가 꼼꼼이 읽을 시간도 없었고 마감날짜는 지났고 그러니 머 어쩌겠어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되는대로 주어섬겨야죠.^.~

루쉬P님이 드신 밥그릇 수가 저보다 훨씬 적으시잖아요.~ 제 나이가 되면 저 같은 건 발톱에 낀 때만큼도 안 여기시게 될거에요.

루쉰P 2011-05-15 08:02   좋아요 0 | URL
무슨 그런 말씀은 인간은 몸은 20대를 넘어가면 퇴화하기는 시작해도 정신은 무한히 성장하다고 하더라구요. 아마도 반딧불이님을 뛰어넘는 일은 제 평생에는 없을 듯해요. ㅋㅋ

이렇게 독서를 하신다면 말이죠.

바까장 2012-07-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저 바까장입니다.
말씀 들고 와서 보았습니다.
눈으로 읽다기보다는 마음으로 읽으신 듯
묘사와 서술이 재미지고, 흥겹습니다.
저도 다읽고 꼭 감상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딧불이 2012-07-30 12:52   좋아요 0 | URL
여기서 뵈니 더 반갑네요. ^.^
책으로도 모자라 강의까지 들으신다니...기대됩니다.
병원에서 뵙는 것으로는 우리의 수다(?)가 턱없이 부족하지요? 선생님과 책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쁨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래봅니다. 무더위에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