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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엥디녜 부!> 새해벽두에 들은 말이다. 우리말로 ‘분노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재 93세인 프랑스인 스테판 에셀이 한 말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인물이다. 30쪽 정도의 이 작은 책이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는 무관심과 냉담은 가장 나쁜 태도라고 일갈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주변을 돌아보라고,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찾아,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자”고 촉구한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프랑스의 68혁명이 떠올랐다. 저항해야할 대상은 다르지만 분노의 성격은 같은 것이 아닐까. 정치적 급진주의를 세계화한 68혁명은 촘스키와 푸코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어연구에 관해 독창적인 접근을 했던 두 사람이 언어분석으로부터 정치 평론으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68혁명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71년 미국인 촘스키와 프랑스인 푸코가 네덜란드에서 대담을 가졌다. 한사람은 영어로 한사람은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이것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르스가 사회를 봤다고 하는데 그는 영어로 말했을까, 불어로 말했을까?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다. 인간본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언어에 대한 출발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지 좀처럼 합의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사회자가 말하듯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상대방이 서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르다. 내가 촘스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인간은 언어습득능력을 타고 난다는 변형생성문법이라는 말밖에 없다. 거칠게 얘기하면 인간은 자기가 사용하는 모국어에 대해 생득적 지식을 갖고 있어서 하나의 문장을 통해 그와 비슷한 다른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을 알면 나는 엄마를 사랑해, 아빠를 사랑해는 물론이려니와 너는 나를 사랑해 혹은 ‘나는 사랑해, 너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을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에도 적용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성의 바탕에는 진정한 정의 관념이 깔려 있다. 인간은 바로 이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혁명도 불사하지만 어떤 집단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수단으로 혁명을 해서는 안 된다. 또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그에 따르면 미국은 범죄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 이것에 대해 시민은 국가가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을 권리가 있으며 범죄자가(국가) 시민의 행동에 불법 딱지를 붙인다고 해서 그 행동이 불법이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촘스키가 말하는 정의는 궁극의 정의로서 국가, 법 너머의 정의다. 현실을 넘어 관념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반면 푸코는 모든 사회적 투쟁에 정의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의를 이루기 위해 사회투쟁을 벌였다기보다는 사회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의를 내건 것이라고 반박한다. 투쟁에서 이기고 나면, 이긴 자가 곧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정의이고 진리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정의와 진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생각은 감옥의 탄생을 설명하는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18세기말 감옥이 탄생하게 되는데 푸코는 감옥이 왜 생겨났나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감옥이 생겨났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에 주목한다. 그러니까 죄인에 대한 고대의 형벌은 신체적이었던 반면 감옥이 생기고 나서는 감금형으로 바뀐다. 신체형으로부터 감금형으로의 이행은 휴머니즘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것은 죄를 저지른 인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범죄성 즉 정신의 영역을 문제 삼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푸코는 다양한 영역에 이러한 생각의 메스를 들이댄다. 동성애에 가한 의학적 담론뿐만 아니라 성욕, 유아, 가족, 친족 등 그의 사유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러한 모든 곳에는 권력이 작동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못하게 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하도록 하는 생산적 권력이 된다. 로봇처럼 공부를 해야 하고 의사의 말에 복종해야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생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돈벌이에 매달려야한다. 이 책의 4장에는 진리와 권력에 관한 푸코의 생각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등을 읽기 전에 보면 관념에서 나온 철학이 아니라 실천으로부터 나온 이론임을 되새기게 될 것 같다.
P.S : Youtube에서 찾아보니 동영상 몇개가 뜬다. 푸코가 불어로 말을 하면 영문 자막이 뜨고, 촘스키가 영어로 말을 하면 불어자막이 뜬다. 이 대담의 재기발랄한 사회자가 어떤 말을 쓰는지 궁금했는데 동영상 두개를 봐도 사회자는 안나온다. 나는 왜 이렇게 쓸데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