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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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프랑스의 툴루즈 고등법원에서 한 남자의 형사재판이 진행되었다. 한 여자가 3년을 함께 산 자신의 남편을 가짜라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재판을 진행했던 한 판사는 이 사건을 <잊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이후 6년간 다섯 번이나 재인쇄 되었고 라틴어로도 발간되었다. <잊을 수 없는 판결>은 <마틴 기어의 귀향>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 작업에 협력했던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영화가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영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아쉬워했다. 그녀는 이런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미시사적으로 재접근했다. 이렇게 쓰여진 책이 사건의 주인공 이름을 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마르탱 게르는 열네 살에 베르트랑드와 결혼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식을 낳아야 결혼이 완성된 것으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르탱이 성불능자였기 때문이다. 자식 없이 3년을 넘기면 결혼은 취소될 수 있었으므로 베르트랑드의 가족은 그녀에게 이혼할 것을 종용했다. 결혼 후에는 교회법에 따라 재혼도 허락되었다. 하지만 베르트랑드는 가족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8년 후 우여곡절 끝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마르탱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곡식 약간을 훔치고는 아버지의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 상속지, 부모를 모두 버리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베르트랑드는 정조를 지키며 자식을 키웠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새 마르탱은 모든 면에서 베르트랑드를 만족시켜주었다. 비록 하나는 죽었지만 삼 년 만에 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렇게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던 베르트랑드가 갑자기 남편을 가짜 마르탱이라고 고발했다.

마르탱 자신은 물론 촌락의 많은 사람들이 가짜 마르탱을 진짜 마르탱이라고 증언했고 그의 열정적인 설득은 진실로 받아들여져 재판관들의 판결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판결이 내려질 무렵 극적이게도 진짜 마르탱이 외다리가 되어 등장함으로써 가짜 마르탱은 사형에 처해진다.

대체 베르트랑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람들은 왜 가짜 마르탱을 진짜 마르탱이라고 증언했을까? 마르탱이 마르탱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짜 마르탱이 되어 마르탱으로 살았던 아르노 뒤틸의 삶마저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16세기 사람들은 진실과 재산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었을까? 그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 되는가? 내가 ‘나’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법률적, 역사적, 철학적, 존재론적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진실인가, 사실인가?

저자는 가짜 마르탱 역할을 했던 아르노 뒤틸에게 단순히 마르탱의 재산과 아내를 탐한 사기꾼이 아니라고, 또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생활을 지속했던 베르트랑드를 재빠른 현실 감각을 가진 의지의 여인으로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간 ‘창안된 결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저자는 또 이 기록에 대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보이는 관심을 덧붙였다. 작가들은 믿기 어려운 기이한 특징들에 관심이 있었고 아르노 뒤틸을 경탄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제거되어야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일반 남성들은 사기꾼보다 속은 아내에게 일체감을 가졌으며 20세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여성의 논평이 없음도 밝혀두었다. 또 저자는 몽테뉴의 에세이를 언급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 사건을 보면서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강조하면서 재판장의 사형 판결은 매우 대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당시에 더구나 이단이 판을 치던 랑그독 지방에서 재판관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했을까? 더구나 재판관은 판결을 기다리는 사건 당사자들과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면전에 두고 있었다. 몽테뉴라면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흥행의 극적 요건을 갖춘 이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마르탱 게르를 마치 영웅전설의 주인공처럼 만들었다. 같은 사건을 다루었지만 미시사적으로 접근한 책은 사건의 갈피갈피에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인물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만을 오갈 수 있는 추론식의 역사적 상상력 때문인지 문학적 상상력과는 다른 한계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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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인데요. 16세기에 판결을 내려야 했다면 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 지금은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당연하게 생각되고 인식되지 않은 문제인 듯 느껴지지만 이렇게 발달한 문명의 한복판에도 단순히 '나'라는 사람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가지 가지로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사는 것도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하여튼 내용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흥미롭네요. ^^ 오랜만에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배 불러요. ㅋ

반딧불이 2011-06-07 08:43   좋아요 0 | URL
저자가 영화에서 다룰 수 없던 것들을 다루면서 정체성의 문제에 주목했던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이 마르탱을 증언하는 내용이 재미있는데, 어떤 사람은 신발 사이즈로 어떤 사람은 기억으로 또 어떤 사람은 키로 마르탱을 기억하거든요. 이런 것들이 마르탱을 마르탱이게 하는 증거가 되지만 진짜 마르탱이 나타났을 때 아무 의미가 없어지죠. 내용은 재미있는데 책은 그렇게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아요. 참고하셔요.

루쉰P 2011-06-07 19: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완전 참고하겠습니다. ㅋㅋ 반딧불이님 덕분에 항상 책에 대한 수고를 덜어요. 또 좋은 리뷰 기대하고 있을께요!!

2011-06-1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