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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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한번도 여기 대한민국을 벗어나 이민자의 삶을 꿈꾸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민자들, 혹은 망명자들의 삶이라는 것이 어떨지 모두 다 안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내가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던 시간들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쩔 수없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생존을 위해서, 혹은 좀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을 위해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의 이런 바람은 그저 한낱 바람으로만 남을 것이고, 그것이 긍적적인 선택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몹시 괴로운 감정적 고통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고향을 두고 떠나간 그곳은 낯설고 힘겹기 그지 없으리라. 그곳에서의 삶이 힘겨울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지고 돌아갈 수 없는 이민자의 삶은 상실에 따른 고통, 방황, 향수병에 시달리고 오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을 상실한 채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에는 다양한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삶의 여정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화자(작가 자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이자 이 글을 기록한 작가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기록하면서 그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이 사람들을 추적한 기록들이 픽션인지 팩션인지 모호하고 의심스럽게 잘 버무려져 있어 읽는 내내 사실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거기에 딱 맞는 사진 자료까지 제시가 되어 있으니 사실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암브로스 아델바르트가 이민자로서 겪는 평생의 서사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해 노동 이민으로 우리에게도 많은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만큼이나,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자로서의 삶을 선택해야했던 그의 운명은 결코 낯선 것이 될 수 없다. 



점차 쇠락해가는 그의 집의 커다란 정원만큼이나 헨리 쎌윈 박사의 삶도 그러하다. 어릴 적에 리투아니아의 흐로드나 근처 마을에 살다가 일곱 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그곳을 떠나 이민길에 올라 미국의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그들 가족이 도착한 곳은 영국의 런던이었다. 오랜 시간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했고 헤르슈 쎄베린에서 헨리 쎌윈으로 이름을 바꾸고 의사가 되었으며 전쟁에 참전하고, 젊고 부유한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아내가 그의 유대인 혈통을 알게 되면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인생도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화려하고 풍족했던 생활은 끝이 나고 부부의 사이도 틀어진다. 결국 그는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채로 몇 년 전부터 심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나치의 등장으로 평화로운 삶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에 비하지는 못한다. 파울 베라이터와 막스 페르버의 삶은 나치의 발흥으로 인하여 고향에서 내쳐진 것이고 스스로 원하자 않았음에도 이민자로서의 삶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파울 베라이터는 고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고향에서 내쳐지는데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어서 더 애잔하고 처절하다.

파울은 4분의 1만 유대인이지만 그의 삶은 철저하게 독일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운명을 더욱 파탄으로 몰고 갔을지 모른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교사의 길은 그가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지할 수 없었고, 사랑했던 여인 헬렌은 어머니와 함께 강제 수용소로 이송 되었다. 반半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처참하게 거세지던 때에 두려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었고, 독일인인 어머니는 남은 재산을 빼앗기고 우울증을 앓다가 몇 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자신 스스로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맹목적인 분노"와 "도착적인 기분"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4분의 3만이 아리아인이었던 그에게 징집 영장이 발부되었고 군대에서 6 년간 복무한다. 전쟁이 끝난 후 그가 자신을 몰아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교편을 잡은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고, 뼛 속 깊이 그곳을 혐오했지만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조사하여 알게 된 파울 베라이터의 삶은 오히려 고향에서 더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며 심지어 목숨을 위협 당하기도 한다. 사랑하면서 혐오하고 배척 당하는데 떠나지 못하는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결국 이야기의 결말처럼 그곳의 철도에 머리를 밀어넣고 스스로의 목숨을 끝내는 것 뿐이었을까.

그럼에도 "친애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애도"라는 제목의 조사의 내용은 성의도 없고 책임감도 없었다.


  "파괴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커피가게 주인 쇠페를레가 파울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 ... 쇠페를레는 테클라에게 반유대인과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상점에 드나들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할 수 있으니,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건대 앞으로는 자신의 가게에 매일 드나드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베라이터 가족이 겪어야 했던 그런 비열하고 치졸한 일들을 당신이 몰랐다는 것이 내겐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65~66쪽)



파울 베라이터와 반대로 독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막스 페르버도 죽는 날까지 기억에서 지우지도 다시 모두 기억해내지도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나치에 의해 부모님이 강제 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혼자만이 영국으로 보내져 삼촌의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하지만 그는 삼촌이 있는 미국으로도 자신의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그와 닮은, 쇠락한 공업도시 맨체스터에서 영원한 이민자로서의 삶을 택한다. 독일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독일 땅을 단 한번도 밟지 않았지만 잊었다고 생각했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억압할 수록 자꾸 튀어나와 그의 삶을 침잠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는 그에게 단 하나 남은 어머니의 아름다운 시절의 동화와 같은 기록을 작가에게 넘긴 것이다. "결국에는 가슴을 옥죄어 지극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동화"(244쪽)같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막스 페르버의 과거를 추적하던 작가는 이렇게 썼다. 

  "...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또렷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287쪽)고. 



제발트는 독일인들이 행하고 있는 추모와 참회, 반성의 행동들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겐 모범적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내 머릿 속엔 빌리 그란트 수상의 무릎꿇고 머리 숙인 그 사진이 또렷이 남아있고, 아직도 나치 협력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있는 나라인데... 아니란다! 과거의 흔적을 교묘히 지우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일지 알 수 없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상상하면 무서워진다. 유대인 학살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사람들도,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도 그저 그 익명성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어떨 땐 끔찍하다. 그 익명성이... 그렇기 때문에 막스 페르버와 달리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독일 땅에 살았던 파울 베라이터는 자신의 생을 고향인 S시에서 자살로 마무리함으로써 그 비열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일본의 현재와 비교해보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 <토성의 고리>를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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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발트의 이민자들이군요! 저고 있는데, 이 양반 글이 좀 지루해서 이 작품을 읽엉야 하는지 망셜이다가 지금 커플들 행인들 읽고 있는데..그 다음 타자가 이민자들입니다. 계속 고민되고 이 리뷰를 읽으니 더 고민이 됩니다. 보토슈트라우스의 커플들은 만족하면서 읽고 있지만....제발트는...하~ 이거 이거 계속 미룰거 같아요..^^;;

은하수 2023-12-09 11:13   좋아요 0 | URL
미룰거 같은 그 마음 이해됩니다~~^^
저도 <토성의 고리> 먼저 시작했다 실패하고 이사하면서 알라딘 중고로 팔았는데... 어제 다락방 서재 올라갔다 혹시나 싶어 열심히 찾았잖아요..ㅠㅠ 없더라고요..ㅠ
지금은 후회해요. 이제 잘 읽을거 같은데..힝...하면서요
지루한감이 있긴해요 그래서 별네개... 근데 생각보다 또 재밌었단 말도 맞아요..ㅎ~~~
 
표류도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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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믿고 보는 작가 박경리 선생의 <표류도>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토지> 전 권을 읽은 것, 그리고 <파시> 정도가 내가 읽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이었다. 너무도 오래전 까마득한 시간 속에 <토지>라는 작품이 자리잡고 있어서 내가 <토지>와 <파시>를 읽었단 사실 외에 나머지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이 <표류도>와 <애가>를 선물 받았다. <애가>와 <표류도>는 박경리 컬렉션으로 '다산책방'에서 발간하고 있다. 책 날개의 정보를 확인해보면 총 16권으로 기획이 되어 있는 듯하고 그 중 현재 <김약국의 딸들>, <애가>, <표류도>의 3권이 발간이 되었다.

<김약국의 딸들>은 지난 번 <토지> 전집 발간 펀딩에 참여했을 때 우연찮게 1권이 페이지 오류가 발견이 되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받았고(아직 읽지 않음), 나머지 두 권은 출판사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믿고 보는 작가라고 했지만 사실 읽은 책이라곤 <토지>, <파시> 뿐인지라 작가의 다른 책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였다.



먼저 읽게 되었던 <애가>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양공주' 전력이 있었던 '진수'라고 보았다. 1950년대의 여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이중적인 잣대로 여성을 평가했던 당시의 윤리 의식이 여성을 얼마나 억압하면서 고통 속에 빠지게 만드는지, 또 속물적인 사고로 위장한 과도한 관심과 공격이 '진수'와 '민호',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인 '현회'와 '정규'라는 인물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신물이 올라오기도 한다. 현실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왜 그리 남의 사랑에 관심들이 많으신지.... 이 작품은 현대의 멜로 드라마와 같이 '양공주'라는 자극적인 소재, 삼각관계(진수와 민호, 그리고 민호의 아내인 설희)에 불륜 로맨스가 등장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낭만성을 확보하면서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표류도>의 주인공인 '현회', 이 느낌 있고 개성적이며 특이한 이름은 <애가>에서도 등장을 해서 이것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애가>에서는 민호의 지도 교수의 부인으로, 그리고 민호와 결혼한 설희의 오빠이자 민호의 의대 동기이며 절친인 오정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지고지순한 둘의 사랑은 웬지 모르게 불륜인데도 응원을 하게 되는 힘을 지녔다.



아무튼 <표류도>의 현회는 's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인텔리 여성이지만 지금은 사생아로 낳은 딸 훈아, 어머니, 그리고 배다른 동생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사랑했던 찬수와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결혼식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임신을 한 상태였고, 그런 찬수가 전쟁의 와중에 비극적인 사고로 죽고 사생아인 '훈아'를 홀로 낳는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195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서는 현회에게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요소인 것이다. '현회'로서는 의도하지 않은 불가항력의 요인이지만 어느 누가 그런 걸 신경쓰면서 욕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현회'라는 여성은 그러한 외부의 통상적인 윤리라든가 여자로서의 규범에 대해 대범하면서도,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논리로 무장한 용감성을 발휘한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강한 책임 의식도 가지고 있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도우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그러한 그녀를 따듯하게 배려하는 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번번히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녀는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마돈나'라는 다방을 열고 다방 마담이 되었던 것이다. '다방마담'이라는 직업으로 인하여 또 다른 남자들과의 만남을 야기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불가피하게 아름다운 만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크나큰 불행을 안겨주는 인물과의 만남도 예비하게 된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상현. 그는 신문사의 논설위원이며 저명한 집안의 자제이다. 역시 저명한 집안의 영애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다. 그는 다방 마담이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내면을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상현은 그녀가 다방 마담을 그만 두고 그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현회'는 그와의 사랑을 키워나가며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지 않는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 그녀는 언젠가 닥쳐올 그와의 이별을 기다린다. 자신 스스로는 그와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신문사 논설위원이라는 - 노동을 하고 있듯 -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다방마담'이라는 노동을 통하여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의무를 저버릴수가 없다. 그녀의 절박함을 그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비극은 이미 내포가 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이 샌님, 살아오느 내내 어려움이라곤 하나도 모르고 살아서 그런가 진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정면 돌파가 아니라 도망을 간다. 그가 만난 최고의 어려움은 '현회'가 다방마담을 그만두고 자신과 결혼하자는데도 거부하는 것이겠지. '다방마담'과 결혼하려고 자신의 가정을 깰 용기는 있으신지 묻고 싶다. 아무튼 도망을 갔다. 내가 보기엔 두 번이나...! 그러니 정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늘 ;'현회'의 곁에 없다. 이러니 믿고 의지할 수가 없는 거다.



그녀 주위의 또 다른 인물인 '환규'는 찬수의 친구이자 현재는 출판사 사장으로서 그녀에게 항상, 늘 의지가 된다. 그녀가 선생을 그만뒀을 때 일본어 원고의 번역을 의뢰하면서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금전적, 감정적 도움을 주는 존재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사실 '현회'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유일하게 '환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몰론, '현회'가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면 '환규'와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환규'는 '현회'가 죄를 짓고 수형생활을 하는 중에도 변함없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그녀의 곁을 지킨다. 역시 의리의 상남자라 믿음이 간다. 이 둘의 앞날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뿐. 



여기에 가장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인물은 대학 강사이면서 실력은 없어 제자들로부터 '대가리가 콘크리트'로 놀림을 당하는, 번드르르한 외모의 '최영철'이 있다. '마돈나'의 손님이면서 '현회'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런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무시를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신은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 지극히 속물적이고 돈만 밝히는 수전노이면서 뭇 여성들을 갈취하고 다니는 사기꾼이다.  아무 관심도 없는데 자꾸 '현회'에게 되지도 않게 수작을 건다. 남들은 그의 비열함을 다 아는데 자신은 안 그런 줄 아는, 파렴치한으로 인하여 '현회'가 살인이라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죄를 짓게 되는데 아주 공헌을 하는 인물이다. 의도치 않은 한 번의 실수로 살인자가 되는 '현회'의 고난이 왜 이다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할 뿐 그가 죽은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드라마 보면서 "저런 놈은 죽어야 혀, 잘 죽었어. 죽어도 싸지!" 하고 외치게 만드는 인물이다.  

 


'현회'라는 인물은 그 당시의 여성상으로서는 드물게 용기있고 강단있는 여성이 아닐까 싶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넘어지지 않고 스스로 의지를 다지면서 꿋꿋하게 가족을 부양하고자 다시 일어선다. 이는 그녀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돌면서 배 다른 아이를 낳아 그녀의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긴 그녀의 아버지, 그녀가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어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을 당하게 하는 사회 규범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칭송 받아 마땅한 자질을 지닌 여성이 아닌가 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을 버리고 유랑하는 무능력한 남자였던 아버지는 누구도 욕하지 않는다. 사회 규범을 들먹이면서 한 때 시기를 잘 만나 거대한 부를 이루고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리의 이자를 챙기는 그녀 주위의 친구들, 대학 강사라는 허울로 어렵게 모은 작은 돈을 등쳐먹는 '최영철'이라는 남자는 그럼에도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며 다시 다른 사람을 등쳐먹을 궁리에 몰두한다. 심지어 외국인을 '마돈나'에 데리고 와 가만히 있는 '현회'를 희롱한다. 이 인간이 하는 말만 들어도 이후에 하게 되는 '현회'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차라리 현회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극이며 그건 그저 비극을 잠시 유예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스터 스미스, 그렇게 그 여자가 욕심이 나요?"

      최 강사의 서툴지 않은 영어가 귀에 흘러들어 왔다. 이방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참 아름답소. 눈이 신비하고 슬픔에 젖어 있소."

     "스미스가 외로워서 그렇게 보이는 거요. 여자란 돈과 권력이면 정복되는 동물이 아니오?"

     "저 여자도 돈과 폭력이면 그만인가?"

     "물론."


     "흐음? 그렇다면 문제는 달라지겠는걸. 그럼 스미스는 날 도와주겠소?" 

     "아암, 돈 많이 주겠소."

     "안 돼, 그건. 일전에 내가 부탁한 일 들어주어야 돼요. 스미스, 사실 저 여자는 말이야. 내 것인데 조건에 따라 양보할 수 

      도 있어. 여자를 갖는 데는 낭비가 심해 골치야, 하하핫!"


     "이런 곳에 있는 여자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손쉽고 또 뒤가 귀찮지 않거든 ..."



박경리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여성상은 한결같이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 나아가고 절망 속에 매몰돼 있을지라도 어느 순간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능동적인 인물들이다. 이 작품의 '현회'는 물론이고 <애가>에서 보았던 '진수'와 또 다른 '현회' 그리고 <토지>의 서희 아가씨까지. 그리고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자식을 부양하기 위하여 더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던 작가 박경리 자신까지도. '현회'라는 여성 안에 작가 박경리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멋진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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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0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김약국의 딸들도 새로 나왔더군요 영화 ‘표류도‘는 원작과 결말이 다르더라고요 뭐 가능한 하나의 가정인데요 소설과 다른 평행우주가 펼쳐집니다 소위 통속소설이라지만 남다른 여주인공이라서 역시 박경리의 작품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동명이인 현회에 대해서 함 찾아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은하수 2023-12-05 14:32   좋아요 2 | URL
영화는 다른 결말이군요! 맞아요. 엄밀히 살피면 통속소설이죠. 신문연재 소설이니 순수소설이기는 아마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경리 선생은 돈을 벌어야했고 이 소설이 작은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다니까요.
그런점에서 작가와 주인공이 일맥상통하기도 한거 같아요.
애가에선 현회와 정규, 표류도에선 현회와 환규~~
남자이름도 비슷해서 웃음 났지 뭐예요^^

서니데이 2023-12-05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은하수 2023-12-05 23:05   좋아요 1 | URL
어이쿠... 이런..
제가 좋아서 하고 서니데이님 비롯해서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축하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넘 감사합니다~~^^
남은 2023년의 시간 내내 책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광희가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 명자가 나한테 일러바친 말도 있고 하여 걱정이 된다. 명자의 말인즉 술이 취한 민우 씨가 밤늦게 들르면은 광희가 그를 따라나간다는 것이다. 민우 씨가 나한테 대한 반발심이나 혹은 여자에 대한 학대의식으로 광희를 유혹하고, 광희 역시 자포자기의 기분으로 그한테 몸을 내맡긴다면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의지가 없는 선량이라는 것, 그리고 순수하다는 것, 그런것은 때에 따라서 방종과 무책임에 흐르기 쉽고, 죄를 저지르기 쉽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을 수 있는 불장난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 자신의 마음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 P111

어젯밤에도 우리는 밤거리를 헤매어 다녔다. 상현 씨의 따뜻한 손길이 지금도 머리카락에서 느껴진다. 집에 돌아가서도 나는 밤늦게까지 그를 생각했다. 몹시 피곤하다. 잠을 자지 못한 때문이다. 몽롱해지려는 시야를 넓혀본다. 마돈나는 여전히 고물상 같은 모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봄은 바로 눈앞에와 있는 것 같은데 그을릴 대로 그을린 커튼이 넝마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봄이 빨리 와서 난로라도 치워버렸음 속이 시원하겠다.  - P110

어떤 영문인지 모르지만 최 강사가 김 선생하고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최 강사는 또 무슨 이용 가치를 김선생한테서 발견했는지, 음험한 표정이다. 그러나 김 선생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최 강사는 일전에 삼선교에서 그를 무시하고 합승에서 내려버린 나한테 상당히 깊은 앙심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 P111

그 후부터 그는 사사건건을 묘하게 구부려서 남의마음을 간질간질 긁는다. 그리고 물귀신처럼 기분 나쁘게 말을 감기도 한다. 영 귀찮을 지경이다. 차라리 차를 팔지 않아도 좋으니 그치들이 나타나지 말았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끈질기게 나타난다. 나타나는 이상 손님 대접을 안할 수도 없다. 마돈나의 공기를 험악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영업을 하는 이상 아니꼽고 구역질 나는 일이라도 할 수 없이 해야 한다. 그러나 최 강사에 대한 나의 그러한 대접을 그자는 일종의 교태쯤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 엄밀히 말하면 내가 - 그한테 아침을 하고 비굴하게라도 굴었던 것처럼 거만스럽게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뭐 천한 것들이! 하는 식으로 냉소를 흘린다. 피차가 서로 경멸하기는 일반이다. 다만 나는 그에 대한 경멸의 기색을 고양이의 발톱처럼 감추고 있고,그는 몸짓과 
말투로써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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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이 유리창을 마구 때리고 있는 바깥 날씨는 영하 십칠팔도를 오르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 가끔 고개를 들어본다. 유리창에는 실내에서 서려지는 김이 연방연방 얼어서 빙판을 이루고, 그 위에 또 김이 서려 얼어붙으며 있다. 무릎 옆에 놓인 화로에서 따뜻한 열기가 아랫도리에전하여지기는 해도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뜨개바늘이 흘러내리곤 한다. 다방 안에는 난로 옆에 두서너 명의 손님들이앉아서 불을 찍고 있을 뿐 자리들이 텅 비어 있다. 레지인 명자는 난로 앞에 서서 손님들의 잡담에 웃음을 띠고 있고, 광희는 바람받이를 피한 서쪽 창가에서 양손을 꼬아 쥐고 멍하니 가로를 바라보고 서 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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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0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을 구판으로 읽었답니다 영화도 있는데 이름이 ‘현희‘로 바뀌었더라고요 ‘현회‘보다 무난한 이름으로요 ㅎ

은하수 2023-12-04 23:21   좋아요 1 | URL
이름이 중요한 거 같아요.
근데 무난한 이름이긴 한데 개성이 없죠?!^^
작가가 이 ‘현회‘라는 이름을 <애가>에서도 썼다는게 신기하네요. 거기에서는 끝까지 사랑을 지키는 여인으로 등장해요. 지금으로 서브 여주 정도 된달까요^^

서곡 2023-12-0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애가도 개정신판이 나왔더군요 아 거기도 현회가 나오나요 애가도 구판으로 읽었는데 가물가물...ㅎ

서곡 2023-12-0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선생님이 현회란 이름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하긴 독특한 이름입니다 그에 비해 현희는 흔해서 말씀하신 대로 특별한 느낌은 없지요

은하수 2023-12-05 00:09   좋아요 1 | URL
그러신거 같아요
저도 오늘 표류도 읽고나서 문득 깨달았어요. 읽으면서도 내내 몰랐어요. 불과 얼마 전에 읽었는데도 이래요 ㅎㅎ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서가명강 시리즈 15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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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작품과 안 읽은 작품, 전혀 모르는 생소한 독일 작가의 명작들을 정말 친절한 설명으로 해석해준다. 아는 작품은 알아서 더 좋고 모르는 작품은 몰라도 재밌는데, 작품을 읽을 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헤세, 괴테, 카프카, 그리고 호프만스탈과 추천한 토마스 만의 작품은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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