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왔다. 나는 길을 건너기가 두려웠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집들이 내 쪽으로 쓰러지거나 
보도가 솟구쳐 나를 들이받을까 두려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언제든지 그들 중 누구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내게 다가와 나를 때려눕히거나, 아니면 내게 한껏 길게 혀를 내밀어 보일 수도 있었다. 고향에서 메타가 그랬을 때처럼. 가면무도회가 열렸을 때 그녀는 나를 보러 와서 가면의 틈새로 내게 혀를 내밀었다.

택시 한대가 지나갔다. 손을 들자 운전사가 멈췄다. 내가 문을 열지 못하자 그가 내려서 문을 열어 주었다. - P217

모든 것이 항상 그토록 똑같았다 내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던게 바로 그 점이었다. 
그리고 그 추위. 또 다 똑같은 집들과 동서남북으로 뻗은 다 똑같은 거리들. - P218

나는 ‘고통이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나는 괜찮았다. 가끔 가다 마치 침대밑을 뚫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이 있는 걸 빼곤. - P221

그들의 말소리가 멈추자 빛줄기가 다시 방문 아래로 들어왔다.
마치 모든 것이 다 잊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억이 물밀 듯 되돌아오는 것처럼. 나는 누워서 그 빛줄기를 보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새롭고 신선하다는 것에 대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아침들과 안개 낀 날들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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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살면 안돼요." 도스 부인이 말했다.
월터가 떠난 뒤로 내가 일주일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자 하는 말이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항상 피곤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하고싶은 일이라곤 
아주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침대에서 뭘 좀
먹고 그러다가 오후에는 오래오래 욕조 안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나는 머리를 물 속에 담그고 수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게 폭포라고 상상했다. 모건 쉼터에서 우리가 목욕을 하던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 같은. - P110

그리고 나는 항상 그 연못이 나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폭포가떨어지는 바로 근처는 물이 깨끗했지만 얕은 곳들은 진흙탕이었다. 연못 주위에는 밤이면 피어나는 그 커다란 흰색 꽃들이 자랐다. 팝꽃,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백합 모양에 진한 단내가 아주 강하게났다. 멀리 떨어져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헤스터는 그 향을 견디지 못했고, 그 냄새를 맡으면 어지러워했다. 강가의 바위 밑에는 게가 있었다. 나는 목욕을 하다가 게들 때문에 첨벙대곤 했다.
게는 긴 더듬이 끝에 작은 눈이 달려 있었고, 사람들이 던진 돌에맞으면 껍데기가 으스러지면서 부드럽고 하얀 물질이 보글보글 흘러나왔다. 나는 항상 이 연못이 나오는 꿈을 꾸며 꿈속에서 그 녹갈색 물을 보고 있었다. - P111

"안돼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살면 안돼요." 도스 부인이 말했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말을 하며 마치 젊다는 게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굴지만, 정작 늙어가는 것은 항상 그리도 무서워한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늙어서 이 모든 망할 일이 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럼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침울한 기분에 빠져있진 않을 텐데! - P111

이윽고 택시가 왔다. 길 양편의 집들은 작고 
칙칙하건 크고 칙칙하건 모두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살아오는 
동안 줄곧 알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두려워해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두려워해왔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그 두려움이 자라나 있었다. 거대하게 자라나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나를 가득 채우고 온 세상을가득 채웠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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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턴 미국 여행

모자
2016년 3월 9일, 나와 아내 F는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오기로 한 M 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착 로비로 나와서 M 군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직 집이었다. 우리의 도착시각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서둘러도 시간을 
맞출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예약해둔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택시로 향했다. - P13

마음에 쏙 들었던 보르살리노의 펠트 페도라였다. 예상보다 날씨는 따뜻했고, 오히려 덥다 싶을 정도여서 모자를 벗은 채 M군에게 전화를 걸고는 그 자리에 두고 왔던 것이다. 여행 첫날부터 모자를 잃어버리다니. 열네 시간의 비행 중에는 물론 모자를 벗어놓았기에 따져보면 착류한 후 도착 로비에 이르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밖에 쓰지 않았던 셈이다. - P13

나중에 공항 유실물센터에 문의하니, 대응은 예상보다 훨씬 정중했지만 역시 보관하고 있는 분실물 중에 내 모자는 없다고 했다. 어디 헌옷가게에라도 팔려버렸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쩍 쓰고 가버린 걸까. 내 머리 크기는 서양인 남성평균보다 꽤 크니 그 모자가 딱 맞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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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좋아하는 대추를 사 가자며 나는 앞서가는엄마를 불러 세웠다. 우리 할머니보다 열 살은 족히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대로변 인도에 자리를 깔고 앉아 대추와 깐 마늘, 쪽파 등을 팔고 있었다. 대추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엄마는 대춧값이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대추를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게 나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 집에 넘쳐 나는 게 대추였는데." - P11

"야, 너 진짜 효심 하나는 인정. 완전 찐사랑이다. 찐!"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할머니가 좋아하시겠지?"
"당연하지. 할머니는 원래 그냥 너 쳐다만 봐도 좋아해. 어제도 못 봤냐, 너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얼굴 환해지시는 거. 할머니 이 대추 드시면 자리 털고 일어나실지도 몰라. 이게 보통 대추냐, 네 정성 때문에라도 할머니 오래 사시겠다."
"그건 아닌데."
영석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어? 뭐가?"
"대추나무에 그래서 올라간 건 아닌데."
"무슨 소리야?"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대추를 기분 좋게, 맛있게 드시고, 그리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올가을이 지나기전에 꼭."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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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경관 속을 걸을 때 어떻게 선주민이 외부인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전언하고 있다. 선주민이 사는 곳 바깥에서 온 외부인이 속한 문화에서는 더 이상 장소와의 신체적 친밀감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이런 감수성을 "원시적" 자질로 치부하고 "선진" 문화에서•온 사람은 이미 거기에서 탈피했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이렇게오만한 태도가 결국 장소와의 신체적 친밀감이 제공하는 엄청난 무형의 가치를 묵살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 P197

그래서 친밀감의 욕구를 무시하는 사람을 보면 무례함을 무릅쓰고서라도 말해주게 된다. 인간이 고독을 벗어던지기란 불가능하다고 아울러 자연을 경시하는 문화에 속한 사람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쉬이 떨쳐낼 수 없으리라는 말도. - P197

근대 문명의 특징인 실존적 고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것은 얼마쯤은 장소와의 관계에 치유적 차원이 있다는 믿음을내버린 탓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연 세계에는 인식 가능하며 그렇기에 관찰자를 포용하는 패턴들이 항상 존재한다. 끝없이 복잡한 이 패턴들을 부단히 새롭게 느끼는 감각은 세상에 혼자라거나 삶이 덧없다는 느낌을 약화시킨다. 
결국 장소를 깊이알고자 하는 노력은 어딘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인간의 소속 욕구를 표현하는 일이다. - P197

젊을 때는 여행하며 거쳐가는 장소에 대해 동행인이 뭔가 굉장히 통찰력 있는 말을 하면 더러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감정은 똑같은 깊이의 지식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 그이처럼 특정 장소에 분명하게 소속되고 싶다는 욕망, 내가 서 있는 장소의 중요한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가까웠다. - P198

회색곰이 덤불숲에서 블랙베리 열매를 거덜내고 있을 때 그건 단지 곰 한 마리가 덤불숲에서 블랙베리 열매를 거덜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은 한 세계로 통하는 진입점이다. 
우리 대다수는 다른 곳에 가려고 그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덤불숲에서 블랙베리 열매를 거덜내고 있는 회색곰에 대해 그저 생각만 하는 편이 낫다고 믿어버릴 테지만. - P198

이 순간은 "초대"다. 
누구든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참여하라고 곰이 내미는 초대장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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