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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려는 욕구는 재화를 축적하려는 부르주아적 욕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전을 모으듯 단어를 모은다. 힘을 갖기 위해서." 동전과단어의 차이점은, 단어는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전에 돈을 쓰는 것도 아주 불합리한 소비는 아니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 - P20

글을 쓰는 사람은 사전을닻으로 삼아 최대한 멀리 뻗어나가야 한다. 단어의새로운 쓰임을 만들어야 한다. 언어는 실제로 쓰이면서 의미가 증폭된다. 어떤 단어를 새로운 맥락에 갖다놓으면, ‘새로운 단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어의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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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업 덕에 ‘판교‘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친구‘에대해 생각했다. 삭막한 신도시라기보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 있는 애틋함의 장소라 여겼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대학 교양 수업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단편적이라기에는 무척 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을 통해 엄청난 지식을 쌓는 걸 기대할 수는없다. 수업 시간에 습득한 것들은 젊은 날 잠깐 머릿속에 자리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싹은 물 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다. 식견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것이 그 순간이 아니라 추수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 P63

삶이란 퍽 짧으므로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어둠의 시간을 충분히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 P79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 P117

‘창의적이라는 것은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영화 속에나 있다. - P131

서양미술사 입문 수업을 듣던 대학 2학년의 나는 작품의 맥락이며 역사적 의미 같은 걸 깊이 이해할 새도 없이굶주린 새끼 짐승이 어미 젖을 빨듯 무조건 외워버렸다. 그때의 나는 ‘이런 암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냉소했지만, 나이가 드니 삶의 어느 순간 옛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 작품이 이런 의미였겠구나.‘ 하고 이해되는 경험과 깨달음의 기쁨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는 ‘암기‘를 ‘절반의 삶‘이라며비웃지만, 그 절반의 앎이 시작되지 않으면 완전한 앎이란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 P131

창의성과 깊이에 대한 공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전에 주입식 교육부터 알차게 하며 단단히 터를 잡아놓았으면 좋겠다. 소수의 천재를 제외한 우리 범인(凡人)들에게창의성과 깊이는 그 터 위에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차근차근 쌓아올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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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불쑥 그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생 시절이라면, 밤의 한강이 보이던 차창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한강 건너편 아파트와 가로등 불빛들이 보였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과속하던 지훈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오른쪽 깜빡이를 넣었다. 자동차가 비스듬히 세 개의 차선을 가로지르며 밤의 한강 쪽으로 움직이는 동안, 지훈은 2011년 봄에도 최고의 풍경이 있었다면 그건 종이컵에 따른 사케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젖히던 리나의 왼쪽 얼굴이리라고 생각했다. - P189

시간이 지나면 지훈 역시 쫓기듯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사랑이라는 걸 할 것이다.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으로만, 그리고 그모든 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만 잊히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꼭 구해야만 했을까, 배수로 속의 그 고양이? - P193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 P196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 P207

그처럼 내 안에는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들이 가득하네요. 끝내 부치지 못할 이편지에 적힌 단어들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말은, 그때는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된 그 말, 한때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 그리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부디 잘 지내고, 잘 지내시길. - P209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그 사람은 바르바라가 수도원 앞에서 발길을 돌려 떠난 뒤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여동생이
수녀원에 있느냐고 물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렇다고 하자, 게으르고 쓸모없는 수녀들이 인민을 위해봉사하는 유일한 길은 수도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하는일이라고 조롱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나는 도 정치보위부장이다. 너희 반국가 행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고 외쳤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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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바르바라가 수도원 앞에서 발길을 돌려 떠난 뒤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여동생이
수녀원에 있느냐고 물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렇다고 하자. 게으르고 쓸모없는 수녀들이 인민을 위해봉사하는 유일한 길은 수도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하는일이라고 조롱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나는 도 정치보위부장이다. 너희 반국가 행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고 외쳤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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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불쑥 그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생 시절이라면, 밤의 한강이 보이던 차창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한강 건너편 아파트와 가로등 불빛들이 보였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과속하던 지훈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오른쪽 깜타이를 넣었다. 자동차가 비스듬히 세 개의 차선을 가로지르며 밤의 한강 쪽으로 움직이는 동안, 지훈은 2011년 봄에도 최고의 풍경이 있었다면 그건 종이컵에 따른 사케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젖히던 리나의 왼쪽 얼굴이리라고 생각했다. - P189

사랑이 막 끝났을 때였다. 지훈도 그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서겁에 질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먹이를 내미는 119 대원도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초등학생들도 없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 돌아갈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애당초 원해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 P192

시간이 지나면 지훈 역시 쫓기듯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사랑이라는 걸 할 것이다.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으로만, 그리고 그모든 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만 잊히는 법이니까. 하지만·····하지만 꼭 구해야만 했을까, 배수로 속의 그 고양이? - P193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 P196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 P207

끝내 부치지 못할 이편지에 적힌 단어들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말은 그때는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된 그 말, 한때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 그리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부디 잘 지내고, 잘 지내시길.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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