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 이왕이면 뼈 있는 아무 말을 나눠야 한다
신영준.고영성 지음 / 로크미디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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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0대를 위한 책인 것 같지만, 누군가를 향한 조언이 반드시 젊은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아직까지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충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한때 독서와 영어공부를 하고자 청취했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듣지 않는 팟캐스트의 진행자인 신영준, 고영성의 책이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한국사회 젊은이들에 대한 진지한 멘토 역할과 젊은이들의 변화를 통한 이 사회의 개선에는 크게 공감한 바 있다. 구조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탓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자기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접근도 동의한다.


말랑말랑한 말로 위안을 주거나, 되지도 않는 독설로 긴장시켜 독자들을 책망하게 만드는 여타의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이 책에서는 저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읽기, 쓰기, 공부, 학습능력, 성장이라는, 어찌보면 뻔한 행동의 변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때로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조망하며 충고를 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예비직장인이나, 사회 초년생으로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이 취합 정리되어 있다. 많은 책을 읽어 도움이 되는 구절을 하나하나 어렵게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책들을 통한 집약적 습득도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해본다. 


어느 정도 경험주의자의 관점을 갖고 있는 내게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자기가 겪어보고 실패하고 깨달아야 생각과 행동이 변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20대에 이 책을 읽고 습관을 바꿨다면 인생은 달라졌을까? 아니겠지... 

행복 연구의 대가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행복을 결정한다." - 27

20대는 꿈을 이루는 시기가 아니라 개인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기본기를 축적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안전망은 경제적 잉여 생산물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20대에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고 착각하고 그 수확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단단히 오해한다. - 32

디테일이 티가 나는 순간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다. 상위 레벨로 가면 갈수록 디테일의 중요성은 점점 부각된다. 보통 일의 성과는 처음에는 노력한 만큼 올라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성과의 포화 구간에 진입하게 된다. 노력을 해도 딱히 성과가 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정도라도 성과가 올라간다. 그 작은 성과가 디테일이다. - 38

운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운과의 접점을 늘리기 위한 계획과 운을 접한 후 그 결과 값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철저히 실력이다. 운에 대해 고민하고 전략을 세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민하고 준비된 만큼 불운에 대한 타격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행운의 결과 값은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 41

사실 양과 질은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묶여 있다. 충분한 양의 시도가 있어야 훌륭한 질의 결과가 나온다. - 42

우선 개인이 불행한데 행복한 부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개인이 꼭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행복합니까? 꿈을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서로가 서로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가장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 49

"입사는 스펙으로 가능하지만, 퇴사는 오직 실력으로만 가능하다." - 60

"학습은 많은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키운다는 의미다." - 67

용기와 열정이 퇴사의 원동력이 되면 안 된다. 무모한 퇴사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 84

속독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는 속독 기술을 익히면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실 그런 기술은 없다. 게다가 기술을 익혀 속독한다는 사람 중에 내공이 높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개 엄청난 독서량을 기반으로 배경지식이 많아져서 맥락을 빨리 이해하기 때문에 빨리 읽었다. 맥락의 파악이 빨라지면 몰입도가 높아지면서 빨리, 그리고 오래 읽게 되고 더 많이 일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선순환이 일어나면 읽는 속도는 자연스레 빨라진다. - 87

당연함으로 위장한 수많은 불합리 중에 하나가 선의에 대한 강요다. 선의가 넘치는 사회는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이지만, 선의를 베푸는 주체가 누군지 명확히 해야 한다. 선의의 핵심은 그 시작이 자발적이라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강요에 의한 행위라면 선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감수하는 셈이다. 그러면 누군가를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기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사실 선의를 강요받는 것만큼 지옥이 없다. - 104, 105

누구나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면 갈등하고, 선택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후회가 남는다. 그래서 완벽한 선택을 내리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후회를 최소화시켜 평생 남을 후회 대신 떨쳐 낼 수 있는 아쉬움 정도만이 남게 해야 한다. -127

30살이 넘어가면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도전만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은 다른 단어지만 그 공통분모에는 아주 대단한 단어가 숨어 있다. 바로 포기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말도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다. 무언가를 얻고 싶은가?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차분히 앉아서 포기해야 할 것부터 적어라. 그러면 꿈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 142, 143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변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고, 변화가 가능할 때까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2가지 이유가 역으로 보면 습관을 바꾸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 220

혼자 성공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혁신은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아무리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도 똑똑한 팀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여러 연구에서도 밝혀졌듯이, 스타 인재는 ‘연결 지능’이 있는 사람이다. 곧 대인 관계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 241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들을 칼같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포기하는 만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포기해서 얻은 시간을 잘 활용하여 자신을 발전시킨다면 모든 일의 효율이 올라가고 또 추가적으로 시간을 얻게 된다. 그렇게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구간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 283

일괄적인 보상은 사실 역차별이다. 잘하는 사람은 대우 받고 못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야 역차별이 사라진다. - 350

앞으로의 오늘을 후회가 아니라 만족으로 채워진 삶으로 만드는 더 나은 선택을 ‘지금’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인생 전체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365일 중 하루인 바로 오늘, 보람찬 선택을 하고 있는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과거로 돌아가도 딱히 소용없을 것이다. 미래와 과거는 대척점에 놓인 개념이지만, 신기하게도 공통점으로 엮인 부분이 있다. 그 끝이 현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 하지 못한 것은 과거에도 할 수 없었던 일이고, 미래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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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곰탕 1~2 세트 - 전2권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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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눈에 띄었던 책인데, 망설이다가 독자들의 평이 좋아 구매했다. 그래도 그 후한 평가를 완전히 다 믿을 수는 없어 1권만 구매해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책을 중간 정도 읽었을 때쯤 2권을 함께 사지 못한 걸 후회했다. 간만에 일순간 휘몰아 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었는데, 괜한 의심으로 다음 권을 기다려야 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정도면 바로 다음날 2권을 구매했음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르 소설이기는 한데, 미래를 다루고 있으니 SF라고 해야 할지, 스릴러라고 해야 할지, 스릴러에 못잖은 유머코드가 잔뜩 깔려 있는데, 게다가 우리가 사는 인간 관계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제대로 규명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는 형태인데다가, 그 내용 또한 새롭고 기발하다. 제목은 또 어떠한가.


이 소설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와 미래로부터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재로 시간여행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현재로 도착한 사람들은 각각 현재에 남으려는 사람과 그런 사람을 제거하려는 사람, 현실을 통하여 미래를 바꾸려는 사람들로 나뉘기 시작하고, 그들의 '임무'와 '욕망'은 서로 뒤얽혀 복잡한 사건을 만들어 낸다. 다양한 복선을 실타래처럼 풀리며 미래에서의 모습이나 처지가 갖게 되는 숨겨진 의미가 밝혀지고, 미래를 바꾸고자하는 계획과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서 타인의 행복을 누리려던 욕망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 앞에서 무너져버리고 만다. 결국 가족이라는 연대를 재발견하고, 삶이라는 건 타인의 것이 아닌 내 것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다분히 한국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는 곰탕은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맛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배워와야 할 대상이기도 하면서, 아들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먹이로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자, (미래의) 아버지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굳이 '한국형'이라고 붙이고 싶지 않지만, 국밥을 통하여 가족의 정서를 만들어 내고 그걸 바탕으로 이토록 다양한 시공간을 활용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을 보아, 새로운 형태의 '한국형 SF'라고 칭해도 될 것 같다. 

맛이란 건 좋은 기억 같은 건가 보다. 잊을 수 없는 맛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인가 보다. 이우환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번 저렇게 흥분해서 또 생생하게 말이다. - (1권) 14

한 번도 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자신이 소중해져서가 아니라 더 소중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걸. - (1권) 51, 52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걸 동경하거나 무엇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 (1권) 81

물건 값은, 흥정은 했지만 무리하게 깎지는 않았다. 모든 게 제값이 있는 거였다. 종인은 되도록 값을 정하는 사람이 부르는 값을 믿어주려고 애썼다. 그가 조금 높게 부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집안에 자식이 하나 더 태어났거나, 노모가 아프거나, 큰딸이 결혼을 해야 하거나, 종인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믿었다. 의심에 드는 시간을 종인은 낭비라 생각했다. 그럴 시간에 부지런을 떨면 믿음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믿기 시작한 사람들과의 거래는 오래갔다. - (1권) 120

이 남자가 싫고 좋고 상관없다. 그냥, 아버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에게 할아버지가 된다. 가족이란 그런 거였다. 이유 없이 정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 (1권) 156

양창근은 한 사람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얼굴만 집중해서 살폈다. 그럼 되었다. 상대방의 얼굴만 제대로 보고 있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뿐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의 거짓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굴에는 많은 게 드러났다. 하지만, 아주 섬세했다. 두리번거리는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곳만 봐야 했다. 한곳만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했다. 그래야 보였다. - (2권) 34

종인은 이해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팔자 좋은 누군가가 억지로 만든 있으나 마나 한 말이었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어째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지. 종인은 그런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해를 줄이려고 항상 노력했다. 이해를 위한 노력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오해는 또 다른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 (2권) 53

사람들에게 타인의 일은 모두 이벤트였다. - (2권) 84

권력을 가진 자는 그걸 나눠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권력을 나눠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권력자의 말을 따른다. 돈을 가진 사람이 돈을 쓸 때는 본인에게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은 본인에게 뭔가 필요할 때, 남을 위해 권력을 쓴다. 나눠주는 게 아니라 이용할 뿐이다. - (2권) 87, 88

혼자 자란 사람은 옷을 나눠 입는 법을 몰랐다. 종인은 자산의 옷을 입은 우환이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싫었다. – (2권) 111, 112

사람은 보통 진실을 이야기하다가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거짓말의 모든 부분이 거짓은 아닌 거다. 거짓말들 사이에 ‘진실’은 잘 없겠지만, ‘사실’은 자주 있다. - (2권) 145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많은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은 필요한 경우만, 그것도 사실을 섞어서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거짓말에 능한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사실에 근거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돼 보일 수 있었다. - (2권) 145, 146

연애와 닮았다.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되고,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보고 난 후에는 그 사람만 그리워하게 된다. 보고 싶어 못 견딘다. 그를 소유하기 전까지는 애가 끓는다. 병이 난다. 비로소 그를 소유하게 된 후에는, 그리움도 애정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먼 곳으로 보내고 나면, 잊는다. - (2권) 170

남자의 얼굴은 지루하지 않았다. 생각하게 했다. 담배를 물지 않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얼굴이었다. 고생스럽게 키운 딸을 탐탁지 않은 혼처로 시집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고, 유약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고, 병든 아내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다. 이미 정해진 것들 앞에서 더 나은 해답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절망하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관심받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세상은 걱정으로 그늘진 얼굴에 관심이 없었다. - (2권) 189

스스로 행복해진다는 건 판타지다. 남의 행복을 가져와야 한다. - (2권) 193

우환은 한 번도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다. 가져보지 못한 것이어서 그렇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 (2권) 197

하지만, 기다림만으로 타인의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현재가 있었다. - (2권) 320

50년 만에 쓰나미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살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 (2권) 361

아버지와는 그다지 살갑게 지낸 것 같지는 않아요. 한데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상실감이 이토록 긴 이야기를 쓰게 할 줄 몰랐습니다. 몸이 고되어도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해야 하고, 맘이 무거워도 마감 일이 다가오면 써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 여행이 언제 가능해질지 모르지요. 그전까지는 어찌되었건 우리는 계속 지금에, 이 답답한 현재에 고스란히 살아야 합니다. <곰탕>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럴 수밖에 없는 제 스스로에게, 그리고 읽게 될 우리에게, 그래도 살아봐야겠지요, 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 (2권)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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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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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킬러의 이야기, 라고만 하더라도 흔치 않은 소재일텐데(내가 읽은 킬러를 소재로 한 소설은 김언수의 <설계자들>이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정도이다), 그 킬러가 노년 여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을 더욱 독특하게 만든다. 수려한 만연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이라는 여성과 젊은 남성 킬러의 대치, 구원(舊怨)에 의해 서로 얽히게 된 관계, 차가운 마음을 비집고 들어선 소중한 사람의 존재는 박진감 넘치는 전개, 현실 사회의 파편, 노회한 시선과 더불어 읽는 내내 감각적 요소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이런 소재들은 대체적으로 불행하거나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기 일쑤인데 어찌보면 그런 판에 박힌(새드 엔딩이 오히려 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 48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이라도 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상대해. 자꾸 얕봐가면서 식은 죽 먹기라고 팔랑팔랑 덤비다간 쓰지 않은 힘의 양만큼 너에게 되돌아올 테니까. 그것들이 내 명줄하고 돈줄을 쥐고 있는 고객이라고 생각해봐. - 74, 75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96

노인은 그녀가 내민 백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떤 말이나 신호가 없이 누르퉁퉁한 손으로 받아 껍질도 까지 않고 베어 문다. 군데군데 검은 구멍이 보이는 노인의 잇새로 껍질과 살이 밀려들어가며, 한 세계가 그의 입속에서 부서지는 풍경과 함께, 입가에서부터 흥건한 즙이 흘러 손목을 타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돌아선다. - 102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만 한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 178

그가 물 한 잔을 완전히 비우는 동안 조각은 시선을 줄곧 발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 더욱 선명해지는 죄악감이란 이를테면 물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에조차 심장이 술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어디에도 파종할 수 없이 차가운 자갈 위에서 말라비틀어져 마땅할 터였다. - 240

한번 구축된 조직은 이미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물론 대체품은 소모되는 속도 못지 않게 양산 속도도 빠르지. - 263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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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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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Shape of Love>를 연상시키는 - 하지만 전혀 다른 종의 생물은 아닌 - '아가미'가 달린 소년(곤)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홀로 남아버린 소년 앞에, 자신들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상대를 아끼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소년이 나타난다. 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강하'라는 소년이 유독 눈길을 끄는 이유이다. 그의 거친 태도, 냉랭한 말투는 사실 증오가 아닌 사랑이었음을, 누구보다도 그를 아끼지만,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가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 그토록 서툴거나 심지어 반대의 의미로까지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 22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 49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현재까지 여파를 미치고는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흐름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숨 가쁘게 따라잡는 삶과 거리가 멀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 49, 50

"네? 정말로 슬프거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더 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사람은 저렇게 술에 취해 소리칠 기운도 없을걸요. 제 눈에는 약간 불행을 전시하는 걸로 비치기도 해요."
곤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건 그러네요." - 54

조금 전까지 오감을 장착한 존재였을 살점들이 신속하게 허공을 날아 종이 접시에 착륙하여 따놓은 꽃잎 무더기처럼 소복하게 쌓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고, 곤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대자연에 대한 공정치 못한 착취나 무분별한 도륙으로 보였다. - 105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 118, 119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삶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 194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에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음절이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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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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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즐겨들을 때, 박준의 시 '환절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멍해졌던 기억이 있었다. 각 에피소드 맨 마지막에는 시를 낭독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2시간이 넘는 팟캐스트 녹음의 막바지여서 그랬는지 진행자인 이동진의 다소 지친 목소리가 그날 따라 이 시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시를 듣고서, 연예세포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나라고는 하지만 이런 류의 시를 접해본지도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먹해진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에 시구를 검색하였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샀다.


이 책을 산 것은 그 시집을 사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시인의 첫 산문집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 예약구매를 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어째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시를 읽고 산문집을 구매한 그 짧은 시간 차에 다시 감정이 무뎌진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미쳐 값지 못한 빚처럼 내 책장에 고이 꽂혀있었다. 해가 바뀌었고 늘 그렇듯 '정리'라는 미명 하에 책장에 꽂힌 책을 나름의 분류기준에 따라 이리저리 옮기는 짓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다시 보았다. 그제서야 내가 이 책을 부푼 기대를 갖고, 그것도 '예약구매'까지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책을 옮기다 말고 표지를 열어 가볍게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가끔은 빠르게 그의 시와 글과 생각을 읽어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장소를 기억하며 엮어낸 시나 산문이 눈에 띄었다. 인천, 경주, 여수, 협재, 벽제, 화암, 묵호, 해남, 혜화동, 삼척...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장소에 가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 혹은 그 사람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장소가 이토록 많다는 것은 생경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의 기억과 후회와 원망과 그리움을 적어 놓은 한 줄의 글귀에는 적잖은 공감이 갔다. 사람이 사는 일이라는 것이 누구를 만나, 설레고, 기쁘고, 뜨겁다가 일상이 되고, 당연시되고, 식은 줄 모르게 식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고, 힘들어 하고, 멀어지고, 괴로워하고, 추억하는 것의 반복이기는 하겠지만, 몇 번을 반복한 관계라는 것이 왜 이리 매번 낯설고 어려운지.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9

떠나는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 23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해 여수」 - 27

환절기를 지나며 나는 더 아팠어야 했는데, 아프지 않으려 하지 말고, 일을 접어두고 병원에 가지 말고,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지 말고, 구깃구깃한 약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넣지 말고, 밀린 걱정들을 떠올려가며 더 아팠어야 했는데. - 30

어떤 일을 바라거나 무엇을 빌지 않아도
더없이 좋았던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들이 다 지나자
다시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스스로에게 빌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지금은」 - 47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고 무겁게만 여겨졌던 내 인연들의 귀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한다. - 50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나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 51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 63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 82

상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혹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 사랑이 과거 ‘그 누군가’가 받았던 것이라거나, 훗날 다른 ‘그 누군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곧잘 상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번 더 깊이 가져가보면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 92, 93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 94

작은 일들은 작은 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 101

사람에게 미움받고.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그해 행신」 - 103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처음 각오했던 한권 분량의 원고를 쓰기는커녕 몇 개의 단상만을 메모해둔 채 별 소득 없이 서울로 향해야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낯설기만 했던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더없이 친숙해졌다는 것, 얼굴과 목이 많이 탔다는 것, 그리고 평소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원래의 내 삶의 일상과 거처가 조금 그리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 110

음식을 대하는 일이 마치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의 오랜 버릇 중 하나는 한번 갔던 식당이 마음에 들면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아 매번 같은 메뉴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일 앞에서 늘 서름서름해하는 내 성격과 꼭 닮아 있다. - 112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 136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닿고 싶어하는 어른됨 또한 그리 비범한 것은 아니다. - 146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 148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157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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