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곰탕 1~2 세트 - 전2권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번 눈에 띄었던 책인데, 망설이다가 독자들의 평이 좋아 구매했다. 그래도 그 후한 평가를 완전히 다 믿을 수는 없어 1권만 구매해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책을 중간 정도 읽었을 때쯤 2권을 함께 사지 못한 걸 후회했다. 간만에 일순간 휘몰아 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었는데, 괜한 의심으로 다음 권을 기다려야 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정도면 바로 다음날 2권을 구매했음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르 소설이기는 한데, 미래를 다루고 있으니 SF라고 해야 할지, 스릴러라고 해야 할지, 스릴러에 못잖은 유머코드가 잔뜩 깔려 있는데, 게다가 우리가 사는 인간 관계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제대로 규명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는 형태인데다가, 그 내용 또한 새롭고 기발하다. 제목은 또 어떠한가.


이 소설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와 미래로부터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재로 시간여행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현재로 도착한 사람들은 각각 현재에 남으려는 사람과 그런 사람을 제거하려는 사람, 현실을 통하여 미래를 바꾸려는 사람들로 나뉘기 시작하고, 그들의 '임무'와 '욕망'은 서로 뒤얽혀 복잡한 사건을 만들어 낸다. 다양한 복선을 실타래처럼 풀리며 미래에서의 모습이나 처지가 갖게 되는 숨겨진 의미가 밝혀지고, 미래를 바꾸고자하는 계획과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서 타인의 행복을 누리려던 욕망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 앞에서 무너져버리고 만다. 결국 가족이라는 연대를 재발견하고, 삶이라는 건 타인의 것이 아닌 내 것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다분히 한국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는 곰탕은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맛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배워와야 할 대상이기도 하면서, 아들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먹이로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자, (미래의) 아버지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굳이 '한국형'이라고 붙이고 싶지 않지만, 국밥을 통하여 가족의 정서를 만들어 내고 그걸 바탕으로 이토록 다양한 시공간을 활용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을 보아, 새로운 형태의 '한국형 SF'라고 칭해도 될 것 같다. 

맛이란 건 좋은 기억 같은 건가 보다. 잊을 수 없는 맛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인가 보다. 이우환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번 저렇게 흥분해서 또 생생하게 말이다. - (1권) 14

한 번도 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자신이 소중해져서가 아니라 더 소중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걸. - (1권) 51, 52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걸 동경하거나 무엇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 (1권) 81

물건 값은, 흥정은 했지만 무리하게 깎지는 않았다. 모든 게 제값이 있는 거였다. 종인은 되도록 값을 정하는 사람이 부르는 값을 믿어주려고 애썼다. 그가 조금 높게 부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집안에 자식이 하나 더 태어났거나, 노모가 아프거나, 큰딸이 결혼을 해야 하거나, 종인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믿었다. 의심에 드는 시간을 종인은 낭비라 생각했다. 그럴 시간에 부지런을 떨면 믿음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믿기 시작한 사람들과의 거래는 오래갔다. - (1권) 120

이 남자가 싫고 좋고 상관없다. 그냥, 아버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에게 할아버지가 된다. 가족이란 그런 거였다. 이유 없이 정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 (1권) 156

양창근은 한 사람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얼굴만 집중해서 살폈다. 그럼 되었다. 상대방의 얼굴만 제대로 보고 있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뿐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의 거짓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굴에는 많은 게 드러났다. 하지만, 아주 섬세했다. 두리번거리는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곳만 봐야 했다. 한곳만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했다. 그래야 보였다. - (2권) 34

종인은 이해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팔자 좋은 누군가가 억지로 만든 있으나 마나 한 말이었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어째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지. 종인은 그런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해를 줄이려고 항상 노력했다. 이해를 위한 노력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오해는 또 다른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 (2권) 53

사람들에게 타인의 일은 모두 이벤트였다. - (2권) 84

권력을 가진 자는 그걸 나눠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권력을 나눠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권력자의 말을 따른다. 돈을 가진 사람이 돈을 쓸 때는 본인에게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은 본인에게 뭔가 필요할 때, 남을 위해 권력을 쓴다. 나눠주는 게 아니라 이용할 뿐이다. - (2권) 87, 88

혼자 자란 사람은 옷을 나눠 입는 법을 몰랐다. 종인은 자산의 옷을 입은 우환이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싫었다. – (2권) 111, 112

사람은 보통 진실을 이야기하다가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거짓말의 모든 부분이 거짓은 아닌 거다. 거짓말들 사이에 ‘진실’은 잘 없겠지만, ‘사실’은 자주 있다. - (2권) 145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많은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은 필요한 경우만, 그것도 사실을 섞어서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거짓말에 능한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사실에 근거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돼 보일 수 있었다. - (2권) 145, 146

연애와 닮았다.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되고,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보고 난 후에는 그 사람만 그리워하게 된다. 보고 싶어 못 견딘다. 그를 소유하기 전까지는 애가 끓는다. 병이 난다. 비로소 그를 소유하게 된 후에는, 그리움도 애정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먼 곳으로 보내고 나면, 잊는다. - (2권) 170

남자의 얼굴은 지루하지 않았다. 생각하게 했다. 담배를 물지 않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얼굴이었다. 고생스럽게 키운 딸을 탐탁지 않은 혼처로 시집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고, 유약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고, 병든 아내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야 하는 얼굴 같았다. 이미 정해진 것들 앞에서 더 나은 해답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절망하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관심받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세상은 걱정으로 그늘진 얼굴에 관심이 없었다. - (2권) 189

스스로 행복해진다는 건 판타지다. 남의 행복을 가져와야 한다. - (2권) 193

우환은 한 번도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다. 가져보지 못한 것이어서 그렇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 (2권) 197

하지만, 기다림만으로 타인의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현재가 있었다. - (2권) 320

50년 만에 쓰나미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살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 (2권) 361

아버지와는 그다지 살갑게 지낸 것 같지는 않아요. 한데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상실감이 이토록 긴 이야기를 쓰게 할 줄 몰랐습니다. 몸이 고되어도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해야 하고, 맘이 무거워도 마감 일이 다가오면 써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 여행이 언제 가능해질지 모르지요. 그전까지는 어찌되었건 우리는 계속 지금에, 이 답답한 현재에 고스란히 살아야 합니다. <곰탕>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럴 수밖에 없는 제 스스로에게, 그리고 읽게 될 우리에게, 그래도 살아봐야겠지요, 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 (2권) 3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