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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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즐겨들을 때, 박준의 시 '환절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멍해졌던 기억이 있었다. 각 에피소드 맨 마지막에는 시를 낭독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2시간이 넘는 팟캐스트 녹음의 막바지여서 그랬는지 진행자인 이동진의 다소 지친 목소리가 그날 따라 이 시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시를 듣고서, 연예세포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나라고는 하지만 이런 류의 시를 접해본지도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먹해진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에 시구를 검색하였고,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샀다.


이 책을 산 것은 그 시집을 사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시인의 첫 산문집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 예약구매를 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어째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시를 읽고 산문집을 구매한 그 짧은 시간 차에 다시 감정이 무뎌진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미쳐 값지 못한 빚처럼 내 책장에 고이 꽂혀있었다. 해가 바뀌었고 늘 그렇듯 '정리'라는 미명 하에 책장에 꽂힌 책을 나름의 분류기준에 따라 이리저리 옮기는 짓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다시 보았다. 그제서야 내가 이 책을 부푼 기대를 갖고, 그것도 '예약구매'까지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책을 옮기다 말고 표지를 열어 가볍게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가끔은 빠르게 그의 시와 글과 생각을 읽어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장소를 기억하며 엮어낸 시나 산문이 눈에 띄었다. 인천, 경주, 여수, 협재, 벽제, 화암, 묵호, 해남, 혜화동, 삼척...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장소에 가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 혹은 그 사람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장소가 이토록 많다는 것은 생경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의 기억과 후회와 원망과 그리움을 적어 놓은 한 줄의 글귀에는 적잖은 공감이 갔다. 사람이 사는 일이라는 것이 누구를 만나, 설레고, 기쁘고, 뜨겁다가 일상이 되고, 당연시되고, 식은 줄 모르게 식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고, 힘들어 하고, 멀어지고, 괴로워하고, 추억하는 것의 반복이기는 하겠지만, 몇 번을 반복한 관계라는 것이 왜 이리 매번 낯설고 어려운지.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9

떠나는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 23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해 여수」 - 27

환절기를 지나며 나는 더 아팠어야 했는데, 아프지 않으려 하지 말고, 일을 접어두고 병원에 가지 말고,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지 말고, 구깃구깃한 약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넣지 말고, 밀린 걱정들을 떠올려가며 더 아팠어야 했는데. - 30

어떤 일을 바라거나 무엇을 빌지 않아도
더없이 좋았던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들이 다 지나자
다시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스스로에게 빌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지금은」 - 47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고 무겁게만 여겨졌던 내 인연들의 귀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한다. - 50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나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 51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 63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 82

상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혹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 사랑이 과거 ‘그 누군가’가 받았던 것이라거나, 훗날 다른 ‘그 누군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곧잘 상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번 더 깊이 가져가보면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 92, 93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 94

작은 일들은 작은 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 101

사람에게 미움받고.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그해 행신」 - 103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처음 각오했던 한권 분량의 원고를 쓰기는커녕 몇 개의 단상만을 메모해둔 채 별 소득 없이 서울로 향해야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낯설기만 했던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더없이 친숙해졌다는 것, 얼굴과 목이 많이 탔다는 것, 그리고 평소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원래의 내 삶의 일상과 거처가 조금 그리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 110

음식을 대하는 일이 마치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의 오랜 버릇 중 하나는 한번 갔던 식당이 마음에 들면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아 매번 같은 메뉴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일 앞에서 늘 서름서름해하는 내 성격과 꼭 닮아 있다. - 112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 136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가닿고 싶어하는 어른됨 또한 그리 비범한 것은 아니다. - 146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 148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157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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