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굉장히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킬러의 이야기, 라고만 하더라도 흔치 않은 소재일텐데(내가 읽은 킬러를 소재로 한 소설은 김언수의 <설계자들>이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정도이다), 그 킬러가 노년 여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을 더욱 독특하게 만든다. 수려한 만연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이라는 여성과 젊은 남성 킬러의 대치, 구원(舊怨)에 의해 서로 얽히게 된 관계, 차가운 마음을 비집고 들어선 소중한 사람의 존재는 박진감 넘치는 전개, 현실 사회의 파편, 노회한 시선과 더불어 읽는 내내 감각적 요소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이런 소재들은 대체적으로 불행하거나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기 일쑤인데 어찌보면 그런 판에 박힌(새드 엔딩이 오히려 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 48

바닥을 구르는 마른 낙엽 같은 인간들이라도 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서 상대해. 자꾸 얕봐가면서 식은 죽 먹기라고 팔랑팔랑 덤비다간 쓰지 않은 힘의 양만큼 너에게 되돌아올 테니까. 그것들이 내 명줄하고 돈줄을 쥐고 있는 고객이라고 생각해봐. - 74, 75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96

노인은 그녀가 내민 백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떤 말이나 신호가 없이 누르퉁퉁한 손으로 받아 껍질도 까지 않고 베어 문다. 군데군데 검은 구멍이 보이는 노인의 잇새로 껍질과 살이 밀려들어가며, 한 세계가 그의 입속에서 부서지는 풍경과 함께, 입가에서부터 흥건한 즙이 흘러 손목을 타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돌아선다. - 102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만 한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 178

그가 물 한 잔을 완전히 비우는 동안 조각은 시선을 줄곧 발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 더욱 선명해지는 죄악감이란 이를테면 물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에조차 심장이 술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어디에도 파종할 수 없이 차가운 자갈 위에서 말라비틀어져 마땅할 터였다. - 240

한번 구축된 조직은 이미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물론 대체품은 소모되는 속도 못지 않게 양산 속도도 빠르지. - 263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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