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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평점 :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 마치 단편소설의 한 대목과 같이 단도직입적인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애디 무어나 루이스 워터스가 누구인지,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대한 배경설명 없이 작가는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짧은 분량, 단순하고 명료한 서술, (어느 정도) 예상되는 전개, 평범한 대화체로 구성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읽을수록 마음이 끌렸다. 한나절의 시간을 들여 다 읽었지만, 읽는 내내 넘어가는 책장이 아쉽기만 했다. '황혼의 로맨스'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을 폄하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고 담담한 가운데 깊이가 묻어나는 소설이다.
책을 한 장 넘기자마자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라는 애디의 직설적이고도 당돌한 제안이 보인다. 마치 프로포즈를 하듯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밤의 어둠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는 여자는 삶의 마지막 자락에 커다란 용기를 낸듯 하다. 더이상 아무것도 흡수하지 못한 채 말라비틀어진 채로 죽어가던 나무가 갑자기 생기를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듯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에요."라는 말에 애디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다. 제3자들이야 무시한 채로 살아갈 수 있어도 가족, 특히 자식들에게는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다(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종종 나오는 바로 그 상황이다). 딸에게 나도 너에게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니 너도 내게 강요하지 말라, 고 말한 루이스가 오히려 꿋꿋하게 애디와의 관계를 밀고 나간다. 하지만 처음에 그를 놀라게 할 정도로 용기를 내어 다가오던 애디가 자식의 요구 앞에서 끝내 흔들리게 된다. 더 이상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살고 싶다던 그녀의 변심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을 찾은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라는 뒷표지의 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제3자든 왜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저 밖으로 내몰려고 하는지. 젊은 날의 뜨겁던 욕망도, 한 없이 빛날 것만 같던 사회적 지위도, 어지러히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 둘씩 사그라들거나 끊기고 있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반대로 그 시기가 되어서야 진짜로 원하는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는 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도 이대로 끝이 아닐 것 같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두 남녀를 응원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침대에 누군가가 함께 있어준다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그녀가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 10쪽
나는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어차피 다 알게 될 거고요. 누군가가 보겠죠. 앞쪽 보도를 걸어 앞문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에요. - 13쪽
아무런 믿음도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있어요. 당신은 믿을 수가 있어요. 그건 이미 알아요. 다만 내가 당신과 똑같을 수 있는지 확신이 안서네요. - 13, 14쪽
고마워요. 하지만 그 사람들로 인해 나는 상처받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밤들을 즐길 거에요. 그것들이 지속되는 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말해요? 일전에 내가 그랬듯 말하네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기를 원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미 말했듯, 난 더 이상 그렇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잘 사는 길이 아니죠. 적어도 내겐 그래요. 좋아요. 내게도 당신 같은 분별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말이 옳아요, 물론. - 33쪽
초콜릿은 안 먹는 게 좋다지만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죽을 거에요. - 40쪽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군요. 그건 아니고, 뭐랄까요, 그녀와의 추억을 아직 사랑하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 45, 46쪽
그런데 말이에요, 나는 아내보다도 타마라에게 상처를 준 게 더 한이 돼요. 내 혼이랄까, 그런 걸 실망시킨, 흙바람 부는 소도시의 평범한 고등학교 영어선생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이 되라는 일종의 소명을 저버린, 그런 느낌이에요. - 50쪽
네 말이 맞다. 좋아하거나 잘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가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는 요인이란다. 이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온통 말라죽은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 59쪽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 102쪽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이 물리적 삶이요.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 141쪽
당신은 뉴스이고 싶어요? 아뇨, 절대로. 난 그냥 하루하루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밤에는 당신과 함께 잠들고요. 그래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죠. 우리 나이에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으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에요. 아무 변화도 흥분도 없이 모든 게 막을 내려버린 게 아니었다는, 몸도 영혼도 말라비틀어져버린 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에요. - 159쪽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건 알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에게 그런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안 들어요. 그 얘기는 됐어요.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 문제니까요. - 163쪽
그는 밤에 그녀의 집에 왔지만 이제 전과 달랐다. 예전의 편안한 즐거움과 발견의 분위기가 없었다. 차음 루이스가 오지 않는 날이 생겼고 애디 또한 루이스와 함께 누워 있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보고 싶은 밤이 늘었다. 그녀는 옷을 벗고 그를 기다리기를 멈췄다. 그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손을 잡긴했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습관과 쓸쓸함, 그리고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 때문이었다. 마치 다가올 무엇에 대비하여 이런 순간들을 비축해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을 깨어 말없이 함께 누워 있을 뿐ㅇ 이젠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다. - 180쪽
진심이에요. 당신은 내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이상 더 뭘 원할 수 있겠어요? 당신과 함께한 후 난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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