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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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 시행을 앞둔 시점에 시간강사들과의 계약을 해지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다시 책을 폈다. 시간강사들에게 교원의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처우를 개선하고, 1년 이상의 임용기간을 보장함으로써 강사 개인이나 대학에 보다 충실한 강의전담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2007년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따른 대량해고 사태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기업이 아닌 '대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적잖은 우려를 갖게 된다. 


수강생이 많은 대규모 교양강의의 대부분을 시간강사들에게 맡기는 반면, 그들에 대한 처우는 시간당 5~6만원 정도로 책정하는 대학의 태도에 절망한 지 오래이고, 강사들은 그나마 강의라도 없는 방학이면 어떠한 수당도 받지 못하는 '계절적 실업자'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계속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한 저자의 분투기를 따라 읽노라면, 착취를 당연시 여기는 구조와 시스템에 눈살이 찌푸려 진다. 저자는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당연하게 생각했던 대학의 구조적 착취라는 '불편한 진실'을 담담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알바 이하의 취급을 받는 강사의 처우에 대한 공론을 촉발시켰다. 


특히, "숨 쉬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삼백만 원이 비었다"는 말로 대학원 등록금도 다 커버하지 못하는 조교, 연구원 생활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과연 이러한 터전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는 있는 것일지, 명문대졸업→유학→교수임용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고서 교수가 된다는 것이 가능은 한 일인지, 그런 교수 밑에서 '잡일'을 해가며 학위를 딴들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는 있을 것인지, 오히려 우리나라 대학원이라는 것이 싼 값에 사람을 부리고, 그들을 결국 고학력 실업자로 내모는 시스템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1부(대학원생의 시간)를 통해 드러낸 이런 처연한 상황은, 2부(시간강사의 시간)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 하다. 교수와 동기사회에서 벗어나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호흡에 직면한 강의실에서 저자는 초짜의 어설픔을 솔직함과 배움(교학상장)의 태도로 승화시킨다. 대학원을 거친 시간강사의 생활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처우임에도, 습득한 지식을 나누며 서로 배울 수 있다는 대학 본연의 기능이, 삶의 극단으로 몰리고 있던 비정규직 강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은 후의 기분은 그리 좋지가 않다. 여전히 초학자들을 중요한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학이, 입시시험의 성적 순으로 배열된 집합소임을 부인하지 않는 대학이, 취업을 위하여 적절한 간판을 제공해주는 기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인 대학이, 과연 우리사회에서 그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그 실제 내용과는 별도로 학점이라는 숫자로 표기되는 형식 이상의 이미를 지닐 수 있을지, 기괴하고 편협한 아집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고를 끌어낼 수 있는 배움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해볼만 한 것일까.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 13

지방시를 쓰며 스스로의 삶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데 대해 놀라고, 또한 절망했다. 사회인으로도, 노동자로도, 학생으로도, 나의 과거와 현재를 쉽게 규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나에게 대학은 신성하고 숭고한 공간이었다. 지성, 학문, 연구, 진리, 이러한 단어들의 총체였고, 나에게는 그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대학의 맨얼굴과 점차 마주하며, 그러한 환상은 무참히 깨어져 나갔다. 나는 그저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처연한 자기 규정을 하게 됨과 동시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15

그래서 원망은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 그러니까 선후배 연구자나 지도 교수에게 가서 닿았다. 지방시를 인터넷에 연재하던 초기에는 그들을 향한 공격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연재를 거듭하며 점차 나를, 그리고 모두를 포위한 어떤 거대한 ‘괴물’이 조금씩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떤 개별 주체가 아닌 대학이 구축한 ‘시스템’ 그 자체였다. 학부생이든, 대학원생이든, 시간강사든, 교수든, 교직원이든, 대학의 그 누구든, 그 안에서는 온전히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비로소 인식했다. - 15, 16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참 슬픈 일이다. - 42

언제가부터 나타난 많은 ‘힐링 전도사’들은 ‘꿈’, ‘도전’, ‘열정’과 같은 단어들을 청년의 미덕으로 제시한다. 듣기엔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구축한 ‘청년론’은 젊은 세대들의 아픔을 그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규정해내기에 문제가 된다. 이 마법의 논리를 구성하는 핵심은 바로 ‘노력’이다. 취직하지 못하는 것, 연애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모든 것들이 기성세대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청년 세대를 위한 위안이나 동기부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혐오감을 증식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스스로의 역할을 뒤돌아보는 대신 그저 청년의 노력을 심사하는 엄격한 평가자가 된다. 결국,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시대적 계발의 논리는 기성세대를 위한 것도, 청년 세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세대 갈등을 더욱 심화하고 있을 뿐이다. - 52, 53

함께 꿈꾸던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보통 자신의 과거를 철없던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 ‘취미’로 ‘꿈’을 격하한다. 괜찮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비난할 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음을 축하해야 한다. 하지만 허벌과 같은, 혹은 제도권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여전히 반사회적 인간인 나와 같은 인간들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철없음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후진 기어를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진행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도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도로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 74, 75

나는 지금껏 많은 논문을 썼지만, 아직 한 번도 ‘글값’을 받아보지 못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자 지원 제도는 대부분 정규직 교수를 위한 것이고, 박사과정 수료 신분의 시간강사가 지원할 수 있는 항목은 아예 없다. 물론 내 연구가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에 게재 판정을 받고 좋은 연구자의 논문에 피인용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에게 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숭고’가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야 강의에 충실할 수 있다. - 195

청년들에게 ‘좋아하는 일’은 다시 태어나야 한 번쯤 선택해볼 만한 일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미리 쓰는 유언장에서조차 자신의 꿈을 고이 접어두고 만다. 인생을 두 번 선택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해야 하는, 꿈꾸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 그래서 지금은 ‘헬조선’이 된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된 이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신조어다. - 232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 236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 236,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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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어떻게 돼? - 각자의 속도로, 서로의 리듬으로
박철현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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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몰랐는데, 저자가 꽤 많은 팬이 있는 전직 에세이스트(?) 였나 보다(나중에 알았지만, 경향신문에 연재된 글을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를 알지 못함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그 지인들이 이 책을 홍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책을 썼으니 이 정도 홍보는 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넘겼는데, 책의 내용에 대한 것보다는 "4쇄 가자"와 같은 구매를 강조하는 노골적인 표현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해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아닌 입'광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문의 근원에는 무언가가 있겠지라는 생각에 책을 폈다.


저자는, 현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4명의 아이를 둔 아빠이자,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한 한국인 남성이다.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남성이 글을 썼다면, 부모 중 1인이 외국인인 가정에 대한 차별과 부당함에 대한 사례가 많았겠지만, 저자는 일본 정부의 사회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차별 없이 받으며, 그리 많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큰 걱정이나 불안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한일 양국 간의 복지시스템이나 외국인에 대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내용은 아니다. 일본 사회의 관용과 포용성은 도드라지게 강조되지는 않지만 각각의 에피소드에 녹아서 표현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만남, 관계, 성장, 독립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들이 아이들의 탄생에서부터 독립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있는 것은 아니고, 각 장의 제목에 맞는 에피소들을 적절히 분산시켜 편집한 것이다. '4명의 아이'라는 특징 때문에 가장 많은 에피소드는, 단연 아이들과 관계된 것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이들은 불필요한 과외 공부에서 벗어나 스스로 학습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념을 기르고, 학교와 이웃은 부모의 국적이나 직업에 따라 아이를 평가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의 구분 없이 학교나 유치원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부모는 일부로 자기 아이를 돋보이게 하려 하지 않지만 아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바를 믿고 지지해준다.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부모가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배운다는 말이 딱 맞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자신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아이들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지지해줌으로써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 돕는 한편, 스스로도 부모로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들 부모의 소유가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고, 우리와 같은 신파가 아니라 죽음과 이별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굳은 마음, 한국과 일본 어느 한쪽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주고 싶어하는 저자(와 그의 아내)의 태도에서는 너무 각박하게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펴보게 한다.


글은 쉽고 매우 빨리 읽힌다. 다른 이의 삶을 엿보는 재미로 생각하면 적당한 수준일 수 있으나, 편집자나 광고가 밝히듯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닮은 가족 드라마"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내가 볼 때는 '일본'이 배경이라는 것과 식구들이 많다는 것 외에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는데, <어느 가족>,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이 꼬여 있는 가족관계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장치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이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에 대한 믿음과 포용이 가정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만드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혼혈을 보통 ‘하프(half)’라고 표현한다. 절반씩 피가 섞였다는 건데 이 하프라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라고 받아들여져 요즘엔 하프 대신 ‘더블(double)’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쓰는 매체나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이들도 당연히 더블 전도사다. - 53

발단은 카렌이 미우에게 "너 정말 하프야?"라고 물은 데서 시작됐다. 카렌 입장에서는 외모상 순수한 일본인과 아무런 차이가 안 나는 미우가 ‘혼혈’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은 듯 물은 것인데 이 질문에 미우가 "응. 근데 하프 아니고 더블이 맞아"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카렌이 되물었다.
"왜 더블이야? 하프 아닌가?"
"하프는 2분의 1이잖아. 더블은 2이고."
"그런가?"
"카렌은 2분의 1이 좋아? 2가 좋아?"
"당연히 2가 좋지."
"그럼 앞으로 더블이라고 말해. 너 러시아어 하지?"
"응. 엄마한테 배워서 조금 하지."
"봐봐. 일본어도 하고 러시아어도 하니까 더블이잖아."
"와! 진짜 그러네!"- 53, 54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거리에서 장애인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애인이 별로 없나 보다’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16년 전 일본에 온 이후부턴 거의 매일 한두 번 정도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목격한다. 잠시 다녔던 자원봉사단체에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 청년이 있었는데 항상 밝은 얼굴이었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에나 장애인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한국은 밖에 안 나올, 아니 못 나올 환경인 것이다. 혼자서는 움직이기 불편한 도로 사정도 있겠고, 사회적 편견도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것이라 본다. - 125

독립된 인격과 삶은 서로가 서로를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18세가 되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에게 다짐을 받는 것이고 또 그들을 세뇌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들이 떠나간다는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놓는 것이다. 나중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구속하고, 속박하지 않겠다는 반복적 자기세뇌다. -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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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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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소설이 아닌 르포라는 신선함에 이끌려 책을 집었다. 장편소설공모전에서 4차례나 상을 받은 다관왕 장강명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문학공모전의 폐해에 대해 파해친다는 점이 다소 낯설었다. 책 표지에는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달려 있지만, 나의 궁금함은 문학공모전의 최대 수혜자가 왜 그 시스템의 문제를 살펴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였다. 이러한 측면을 인식했는지 저자는 본인 스스로가 문학공모의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자이므로 객관적인 비교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시스템, 즉 대입시험, 대기업 공채, 국가고시와 같은 공무원 시험과 비교를 하며 이들에 대한 공통분모를 통하여 현재 한국의 계급사회를 분석한다(구조적으로는 각 장마다 .5장을 할애하여 구분하고 있다).


소설 공모전를 통한 등단의 문제점과 폐해, 그 이면의 오해에 대해 취재와 본인의 경험을 통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은 몰랐던 등단 시스템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합격/불합격의 이런 시스템 -  하물며 문학작품에 대한 우수성을 인증(?)하는 공모에서도 - 이 전혀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낮은 신뢰성을 기반으로 하여 높은 경쟁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성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시스템을 없애자는 주장만이 타당한 것일까, 저자는 반문한다. 저자는 엘리트주의, 패거리문화, 계급의식과 같이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부조리들의 원인이 이런 시스템을 원인으로 한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스템 자체를 없앨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문학계로 좁히자면, 상금과 등단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공모전은 등단/미등단의 차별을 두기 위한 도구만이 아니라, 이슈를 통하여 문학작품을 독자들에게 알리려 하는 문학계와 출판계의 자구책('문예운동'이라고까지 표현한다)이라고 한다. 


시스템의 불합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저자가 꼽는 것은 정보공개이다. 좁은 관문으로 통과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 그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고 공개함으로써 '간판'만으로 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는 단점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중요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좋은 중소기업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림으로써 지원자들의 시선을 끌자는 것이다. 수요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주지 못한 채, 대의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공고한 시스템으로부터의 탈피도, 다양한 도전과 실패에 대한 용인도, 내부 구성원들의 실력과 경쟁력 향상도 더이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르포라는 것이 장강명이라는 이미지에 적확히 들어맞지는 않는 방식의 글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열었으나, 역시 잘 난 사람은 이런 글도 잘 쓰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入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 17

몇몇은 이 시스템이 거의 한계에 온 것 아닐까 내심 걱정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선발 시험이 이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험 자체가 부당한 계급사회를 만드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는 지망생들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경직성이 근본 원인이다.
비판자들은, 합격자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지위를 단단히 하는 데 입시를 악용하고, 그걸 일종의 산업으로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문단의 폐해’라는 것들도, 큰 틀에서 보면 사실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끼리끼리 문화’의 문학계 버전에 불과하다. - 18

모든 사람이 시스템 안에 있으니까, 외부의, 시선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거다. 대졸자에게는 대졸자의 입장이, 고졸자에게는 고졸자의 입장이 있다. 한쪽 의견이 은근한 우월감과 시스템이 정당하다고 믿고픈 기대에 휘둘릴 수 있다면, 다른 쪽 의견은 피해 의식으로 왜곡될 수 있다. - 20

문학상 심사위원회는 무엇으로부터 독립되고, 어떤 가치에 중립적이어야 하는가? 상업성, 금전적 가치다. 잘 팔릴 작품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을 뽑기 위해 위원회를 둔 것이다. 장편소설공모전 수상작들의 대중성이 썩 높지 않을 것임은 이런 설계 단계에서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출판사들은 당선작이 화제를 모아 흥행까지 잘 되길 기대했다. 처음부터 모순이 내재해 있던 셈이다. 출판사들이 문학 출판 시장을 공급자가 주도하는, ‘밀어내기’가 가능한 부문으로 여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판단 전후에는 계몽적, 엘리트주의적인 분위기가 다분히 깔려 있다. 나는 장편소설공모전이 출판인과 평론가들의 문예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 96


과저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두고 중앙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합격자들은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가 되었다. - 101

미국의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동양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인재 평가 방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동양에서는 국가나 스승이 젊은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선배들이 세운 기준을 충실히 따르게 된다. 반면 유럽의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논쟁과 토론이 발전했고 이는 체계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중국에서 생겨난 과거제도를 받아들인 나라가 한국과 베트남이다.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뿌리내리지 않았다. 한자 문화권 국가 중 과거제도를 도입한 중국, 한국, 베트남은 근대화에 뒤쳐져 외세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았던 일본은 반대로 승승장구한 역사가 내 눈에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 102

엘리트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 한곳 더 있다.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분야다. 전복적인 작품은, 문자 그대로 체제를 전복하려 든다. 따라서 구체제의 엘리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저항하게 되기 쉽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작품은 엘리트의 상상력 밖에 있다. 그러므로 엘리트는 그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엘리트들이 일반인보다 더 느리다. 왜냐하면 자기 상상력 바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엘리트보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 137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는가? 그러면 또라이, 반항아, 괴짜들이 설칠 땅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한국 기업이 모두 공채를 없애고 또라이들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많은 후보 중에서 신인을 선발하는 공채 시스템은 공정하고 치열하다. 과거에 성공적인 제도였고, 현재도 효율적이며 믿을만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공채와 별개로 또라이들이 사회 한구석에서 무모한 모험과 실험을 더 많이 벌여야 한다. 대담한 아이디어들은 실제로 구현해 보기 전에는 괜찮은 것과 황당한 것을 구분할 길이 없다. 모험가들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성공시키면 그다음에 더 큰 회사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인수하거나 창안자를 영입해야 한다. 또는 모험가들이 직접 자기 회사를 키우거나. 그런 과정이 더 쉬워지고 더 많아져야 한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그런 식으로만 건질 수 있다. - 162

나는 개인적으로 로스쿨이나 학생부종합전형에 찬성한다. 잘만 운영되면 사시나 수능보다 더 나은 선발 제도라고 본다. 문제는 바로 그 ‘잘 운영되는가’다. 한국 사회는 그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 왜냐하면 경쟁은 치열한 반면 신뢰 수준은 아주 낮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공정성을 확실히 담보하지 못하는 제도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더라도 획일적으로 시험을 치러 점수를 기준으로 뽑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이런 분위기가 공채제도를 유지하는 큰 힘이기도 하다.
그런 정서를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 2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시 고득점자 = 명문대 출신 = 일 잘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거친 등식은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한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다른 평가 방법이 딱히 없으니까.
대학 졸업장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나 브랜드의 품질보증 마크 같은 역할을 한다. 명문대 마크가 찍히면 노동시장에서 좋은 기회를 얻기 쉽다. 그런 간판이 없으면 자기 실력을 제대로 알리기 힘들다.
그렇게 간판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다가 마침내 인간의 가치를 상징하는 데까지 이르고야 만다. 그때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은 단순히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존재 증명을 위한 투쟁이 된다. 나중에 거둘 수 있는 예상 이익보다 훨씬 큰 사교육비를 들여 자녀의 대학 입시를 지원하게 된다. - 312, 313

어떤 상품을 사기 전에 그 물건의 품질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면 간판은 힘을 잃는다. 간판으로 득을 보던 사람은 그런 정보공개에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원자들과 소비자들은 모두 이익이다. 엄계 전체의 경쟁력도 높아지고, 간판으로 사람의 위아래를 정하는 악습도 사라진다. 중진, 원로라도 실력이 없으면 물러나고, 도전적인 신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 - 327

나는 정부와 중소기업계가 주도하는 중소기업 인식 개선 캠페인들이 독자를 도서관에 데려가 "좋은 책이 많으니 무조건 읽어라."라고 권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런 캠페인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대체로 이렇다. 대기업 못지않은 근로조건에 장래성도 유망한 중소기업들이 많은데 사회 전반에 퍼진 중소기업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청년들이 중소기업 취업을 꺼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부정적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소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하다는 둥,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몇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둥 하는 설명도 따른다. - 355

그러나 중소기업들이 평균적으로 괜찮다거나 전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구직자 입장에서 쓸 만한 정보가 못된다. 구직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자신이 지원하려는 특정 기업에 대한 것이며, 그들의 눈높이는 급여, 작업환경, 복리 후생, 안정성 같은 사안에 맞춰져 있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우수한 중소기업이 아주 많다’고만 강조할 게 아니라, 그냥 우수한 중소기업이 어디인지, 어떤 점이 우수한지를 보여주면 될 일 아닌가. 그러면 구직자들이 저절로 그 기업들에 몰릴 거 아닌가. - 356

한국 사회는 공공기관의 조사가 끝나 법원에서 판결까지 내린 사안에 대해서조차 구직자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수한 중소기업이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바라본다’고 그들을 꾸짖는다. 가증스러운 기만이다. 지뢰밭으로 들어가기 주저하는 군인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꼴이다. - 361

그렇게 관료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의 질서는 실력이 아니라 기수 문화와 인맥, 파벌이다. 엘리트를 모아 놓기는 했으나 외국의 같은 직업군에 비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 외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뼛속 깊이 오만하다. 자신들을 뽑아 준 시험의 분별력과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 시험으로 자신들의 능력이 입증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425

바꿔 말하자면, 한국에서 간판이 만드는 차별과 서열의 구조는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런 ‘합의’는 여러 각도에서 공고히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실제로 그 간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간판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판 외에 달리 더 좋은 선택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간판의 본질적인 힘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간판의 중요성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낮아진다. 간판의 힘은 정보 부족에서 나온다. 독자나 출판사가 등단 작가를, 구직자가 대기업을, 기업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다. - 428

나는 사람들이 모험을 하게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믿을 수 있는 정보는 그중 하나다. 다른 두 가지는 충분한 보상과 실패했을 경우의 대비책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그 세 가지가 다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과 기업들은 모험을 극히 꺼린다. 그 결과 역동성이 점점 사라지고 우리 공동체가 계급사회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는 중이다. 상속, 혼인, 시험과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신분을 바꾸기 어려운. - 429,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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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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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반까지는 불명의 누군가로부터 예전에 한 약속의 이행을 재촉당하는 미스테리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꽤 몰입할 수 있는 전개를 하고 있다. 안정적으로 새로운 현실에 정착한 주인공의 회한과 고뇌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예상 밖의 반전이나 결말은 없지만, 그래도 한번 읽어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소설이다. 


결말이 아쉽다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아쉬웠던 점은 기막힌 반전이 없다는 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무모한 약속의 댓가인 범죄자에 대한 응징이 새로운 범죄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 선과 악의 불명확한 구분,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같은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제시해줄 수 있는 작가만의 독특한 관점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그냥 전개되고 마무리될 뿐, 결론적으로 작가가 왜 이런 구성과 스토리라인을 짰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   


반전을 거듭하고 현란하고 기교넘치는 볼거리들이 즐비한 현 상황에서, 소설 속 서사만으로 독자를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미 독자들의 기대는 글자를 통해 읽게 되는 작가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기막히고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아니라, 작가의 관념과 통찰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는지가 소설이 계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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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라이프 -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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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려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생각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어디서부터인가 듣고 스스로 계속 되뇌임에 따라 형성된 것일텐데, 이 생각에 대한 레퍼런스라 할만 한 책을 발견했다. <굿 라이프>는 행복에 관한 흔한 오해들을 바로 잡고, 행복이 강도(intensity)가 아닌 빈도(frequency)이며, 달성해야 할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 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인식임을 밝혀준다. 


제목에 굳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고 '굿 라이프'라고 한 점에 대해서 저자는 행복을 '순간의 기분'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성이 아닌 '삶'의 행복임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행복 자체가 삶의 목표가 아니라 행복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관점 혹은 태도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행복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금방 성과가 나오거나 돈이 되는 연구는 아니어서, 이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주로 외국에서 이루어지고, 독자들은 그 책의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행복이라는 이러한 시각이 외국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최인철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풀어낸 이 책은 '행복'이라는 용어를 접하면서 생기게 되는 오해를 비롯하여, 우리가 행복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떨 때 행복하다고 느끼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책의 구성에서는 행복의 추구가 결국 어떠한 삶을 완성해 갈 것인지를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삶, 품격 있는 삶이라는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행복을 제대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삶을 의미 중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1부와 2부에 이어, 3부에서는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십계명을 제시해준다. 1, 2부가 총론이라면, 3부는 구체적인 각론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를 위한 십계명'과 같은 to do list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삶을 위한 방법을 해체하여 10가지로 유형화하였으니, 이 중 몇 가지라도 실천해보며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행복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금방 성과가 나오거나 돈이 되는 연구는 아니어서, 이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주로 외국에서 이루어지고, 독자들은 그 책의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행복이라는 이러한 시각이 외국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최인철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풀어낸 이 책은 '행복'이라는 용어를 접하면서 생기게 되는 오해를 비롯하여, 우리가 행복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떨 때 행복하다고 느끼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학자라면 자기 연구만을 소개하기보다는 전공 분야의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해서 독자들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하는 것이 마땅하"고, "학자에게 최고의 행복은 자기 데이터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일텐데, <프레임>에 이은 <굿 라이프>는 저자에게 스스로 밝힌 학자의 책무와 기쁨을 부여해주는 결과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을 순간의 쾌락 정도로만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감정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 나머지 이미 충분히 즐겁고, 호기심이 충만하고, 삶의 고요함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불안해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 성공을 포기해야만 찾아오는 것이라고 오해한 나머지, 행복해지는 것을 주저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 유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생존과 번식만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진화심리학의 논리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을 철저하게 마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한 나머지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것을 등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은 도덕이나 윤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행복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품격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10, 11

쾌락은 생물학적이고 의미는 문화적이다. 쾌락은 현재에 집중할 때 경험되고,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나이가 들면 쾌락보다 의미가 중요해진다. - 14

많은 연구는 우리가 충분히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로 ‘단 하나의 옳은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를 꼽는다. 예를 들어 가능한 행동의 선택지를 극소수로 제한해놓은 문화, 다시 말해 엄격한 행동 규범이 존재하는 문화의 구성원들이 느슨한 문화의 구성원들보다 낮은 행복감을 경험한다. 개인적 자유가 억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행복한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서 ‘행복’이라는 어떤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정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경직된 사고가 우리의 행복을 억압했을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만족하고 이미 감사하고 이미 고요하고 이미 즐거우면서도, 여전히 행복이라는 파랑새 같은 감정을 경험해야만 한다는 숙제를 안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 37, 38

관심 있는 마음 상태는 결코 피상적이거나 얕은 감정 상태가 아니다. 관심은 사랑과 예술과 과학, 그리고 모든 문화적 활동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관심이 행복이라고 이해하는 한, 행복은 결코 피상적일 수 없다. - 41

소득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서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늘어난 소득으로 행복에 큰 도움이 되는 경험을 사는 데는 인색하고, 행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소유를 늘리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 116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 119

유도 채점 방법과 올림픽 국가 순위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행복은 긍정 정서 대 부정 정서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달려 있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Versus Negative Affect)」라는 논문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한 자극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 자극에 적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행복 혹은 불행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쩌다 한 번 강한 자극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행복에 유리하다.
만일 이 행복 원리가 사실이라면, 행복한 사람들은 금메달 수보다 총 메달 수를 중시하는 집계 방법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 131

심리학자 에릭 클링거(Eric Klinger)의 말처럼 "인간의 뇌는 목적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The human brain cannot sustain purposeless living)." - 153

인간의 마음속에서 현재는 쾌락의 시간이고, 미래는 의미의 시간이다. - 186

행복은 성공을 포기하는 대가가 아니다. 성공과 성취를 행복의 장애물로 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한 의미 있는 성취를 통한 유능감, 자부심, 고요함을 경험하기 어렵다. - 194

우리의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식이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뀌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아직도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면, 그의 생각은 아직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 - 229, 230

관계의 지리적 편중과 의식의 편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과 삶의 공간을 바꿔야 한다. 결심만으로 의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경영의 구루(guru)이자 사상적 리더인 오마에 겐이치(Omae Kenichi) 역시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간을 바꿀 것, 만나는 사람을 마꿀 것, 그리고 시간을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 231

냉소적 불신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늘 기분이 좋지 않다. 우울을 경험할 가능성도 높다. 한마디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냉소주의자의 특허인 적대적 태도, 공격성, 분노는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냉소적 불신은 치매 가능성까지 높인다. - 240

불량볼트 하나가 우주선 사고의 원인이 되듯이 때로는 아주 미세한 원인들이 대참사를 빚기도 한다. 그런 직접적이고 미세한 원인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사건을 집요하게 들어다봐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후견지명의 착각은 우리에게서 사고(思考)의 집요함을 빼앗아간다. - 252

생명력 있는 글이 좋은 글이고, 생명력 있는 삶이 좋은 삶이다. 생명력이 있는 글이란 불필요한 부사(副司)가 많이 쓰이지 않은 글이다.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adverbs)"라면서 불필요한 부사의 남발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작가가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없을 때 불필요한 수식어를 남발하게 된다. 부사를 내세워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 262

좋은 삶도 그렇다. 불필요한 부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인생은 생명력이 없다. 필요 이상의 권력, 부, 명품, 이미지 등이 인생의 부사들이다. 글에서 부사를 한번 남용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부사의 수가 늘어나듯이, 인생의 부사에 의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그 수가 늘어난다. 결국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그저 그런 글과 그저 그런 삶이 되고 만다. - 263

유연한 삶이 곧 타협하는 삶은 아니다. 삶의 복잡성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고, 생각의 다양성에 대한 쿨한 인정이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다. 확신을 갖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품격이 있는 삶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확신으로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상대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다. -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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