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베로니카의 삶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이 땅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자신이 겪었다고 자부했다. 이후에 다가오는 삶은 반복의 연속일 뿐이었다. 변화라곤 찾아볼 수 없을 그 평탄함이 그녀는 괴로웠다. 부모님의 말을 따라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도서관 사서라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직업이 전부였다. 더 나아질 것이라곤 조금도 없는 것 같은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죽음을 결심하는 것뿐.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만큼 영예로운 것도 없으리라. 그녀는 수면제 과다 복용이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덜 폐를 끼칠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을 택했고,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를 알리는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를 이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었다. 굵은 튜브와 의료 기기들에 의지한 자신의 모습은 실패자의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부터 그녀의 이름은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빌레트.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공포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이미 오래전 사라졌어야 하는 전기치료도 감행되고 있다는 그곳에 이제 그녀는 누워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심장은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쯤 성공한 죽음이라고 할까? 그것은 벗어나고 싶은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머지않아 어차피 죽게 된,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은 그녀에게 많은 가능성이 존재함을 의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 자살시도를 했지만 정신병원에 갇힐 만큼 미치진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두려웠다. 모두가 미쳐있는 그 공간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미친 척 하는 것이 최선의 방침임을, 그리고 그녀에게 남아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은 그녀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빌레트를 안락하게 여기고 미친 척 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 클럽’ 사람들이 있음을. 미쳤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에게도 각자 나름대로의 삶이 있으며,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때부터 그녀는 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속 가득 찼던 근원 모를 분노를 피아노 선율과 함께 쏟아내 버린 어느 날, 그 밤마다 자기 음악의 유일한 청중으로 존재하는 에뒤아르와의 교감 속에서, 그녀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에뒤아르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내뱉지 못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것이다. 그녀에게 살아야겠다는 이유를 불러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싹트고 있던 ‘사랑’의 존재를 그녀는 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틀을 뛰어넘어 빌레트라는 하나의 작은 사회도 변화시키고 있었다. 죽기에는 너무 젊은, 하지만 죽음에 임박한 그녀의 삶은 제드카와 마리아에게 지금껏 존재치 않던 용기를 발산토록 만들었다. 그들은 베로니카를 통해 지금껏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팠지만 그럴 수 없게 만들었던 벽을 뛰어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편한 세상(빌레트)를 놔두고 혼란의 물결이 이는 보스니아로, 자신의 쓰임을 믿으며 떠나버린 마리아를 향해 ‘형제 클럽’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완전히 미쳤다고 말했지만, 정작 미친 건 그들이었음을 그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삶을 꿈꾸게 해준 존재 에뒤아르에게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베로니카는 죽음의 향기를 뛰어넘어 기적적으로 허락된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영원히 기적일, 그 삶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삶은 소중한 거니까,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 사람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해 봐요. 사람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건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 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권태'라는 단어를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될만큼, 우리네 일상은 때때로 매우 지루하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다람쥐 쳇바퀴"라는 상투적인 말처럼 우리의 상황을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 바쁘게 허둥지둥 살아왔는데 "휴우"하고 잠시 한숨을 돌리려고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라는 것에 우리는 또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었는가.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라는 말이 주는 감흥도 이미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러나 이러한 지루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우리들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이나 재미에 그칠 뿐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줄 그 무엇에 해당되지 않는다. 
 

 꼭 경험을 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니 독서도 간접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일 분 후의 삶>을 읽어보는 것도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는 제법 괜찮은 방법이라 하겠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한 치 앞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 중에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에 닥치게 되어 곧 삶을 마무리 할 순간에 이르게 되었다면 과연 어떨까? 그 순간 무덤덤하고 초연하게 삶을 정리하려 할리는 없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돌아가려고 간곡한 기도를 하던지 하지 않을까. 바로 몇 분 전만 해도 지루하고 지겹던 삶이라 생각했던 곳으로 말이다. 죽음을 지나오자 비로소 삶이 선명해 진 것이다.

 

 이 책은 죽음의 문턱까지 도달했다가 다시 삶의 정원으로 돌아오게 된 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집이다.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의 배에서, 혹한의 추위로 무장하고 있는 어느 산맥에서,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는 사각의 링에서, 빛이 허락되지 않는 어두운 하수도 안에서, 연이 걸려 있는 고압선 위에서, 산사태에 무너져버린 집 안에서, 푸른 창공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 꽁꽁 얼어버린 겨울날의 빙판 위에서 벌어졌던 이들의 경험들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이들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언제 어느 곳에서 이처럼 우연한 상황을 맞닥들이게 될 지도 모른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쳐야 했다. 백 번을 해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불과 한 번 만에 일어날 수도 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그 한 번을 붙잡는다"며 끝까지 포기 하지 않은 채 집중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 집중의 시기가 지나 비로소 체념하는 순간 또 다른 삶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집착하면 일이 어려워지고, 마음을 비우면 시야가 넓어진다. 아르키메데스가 금관에 쓰인 순금의 부피를 알아낸 건 고심을 거듭하며 수학 공식과 계산에 매달릴 때가 아니었다. 모든 걸 체념한 채 옷을 훌훌 벗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이 넘치는 걸 보고서였다. 만유인력부터 라듐의 발견까지 역사상의 무수한 위대한 발견이 집착하던 일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사소한 현상을 사심없이 바라보다가 생겨난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운명의 크고 작은 흐름들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지금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거나, 최선을 다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의 판단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세네카가 말했듯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 데 한평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의 감각은 빛나고, 정원은 푸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율이네 집 - 작지만 넉넉한 한옥에서 살림하는 이야기
조수정 지음 / 앨리스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터인가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에, '래미안', '자이', '롯데캐슬'이라는 이름을 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우리는 어쩌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집'이라는 개념을 큰 건설회사에 내어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회사의 브랜드 네임이 우리 집의 가치와 내 자산의 건실함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어느새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게 되었다.
 

 예전 (지금도 간혹 그렇지만) 대문 앞에는 문패가 있었다. '아무개'라고 적어 놓은 반듯한 이름은 이 집의 주인은 누구인지, 누가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또 다른 표시의 하나였다. 그 대문 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마당의 풍경은 집 주인의 삶의 방식이 어떠한지, 어떤 풍류를 즐기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이었다. 즉, 집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면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집은 우리네 삶을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도심지 한 가운데에 높이 솟은 아파트, 부촌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위치한 넓은 평수의 단독주택, 풍경이 좋은 언덕 위에 위치한 유럽식 전원주택 등 거대자본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현혹시킨다. 마치 우리가 그곳에 살아아만 사회적, 인격적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는 집이 우리네 삶을 닮아간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우리가 한평생 집을 쫓고 있는 셈이다.

 

 일곱살 박이 어린 아이와 고양이들과 함께 한옥으로 이사한 젊은 부부. 그들이 한옥으로 이사를 한 것은 많은 돈이 있어서도 아니고, 넓은 집에 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낡은 집을 손수 수리하거나 집에 어울리는 작은 소품들을 배치하는 기쁨, 좁은 한옥에 살기 위해 그동안 불필요하게 지니고 있었던 물건들을 하나 둘씩 비워내면서 느끼게 되는 아름다움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막연한 전원생활과 상품화된 녹색의 삶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이들처럼 자신의 삶의 지향점을 두고 현재의 삶 속에서 그것을 닮아가는 터전을 서둘지 않고 천천히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본질적인 요소는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면 삶은 더이상 '명랑만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명랑만화가 아님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 저편에 숨어 있는 옛 추억에 대한 것들 까지도 현실이라는 냉혹한 질서에 파묻어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 날의 추억만은 지켜야 우리도 가끔 '회상'이라는 작업을 통해 그때의 아련한 감정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만화책'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어린시절의 즐거운 추억들을 회상해줄 것만 같았던 '둘리'라는 캐릭터에 '현실'이라는 불편한 옷을 입혀 놓고 말았다.
 
아기공룡 둘리를 청년공룡 둘리로 변모시켜 그가 '낯선' 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 대응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를 상상해 본 작가 최규석의 시선은 내게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큼 낯설고 신선했다(충격이라는 말과 낯설다는 말, 그리고 신선하다는 말이 이렇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피할 것은 되도록 피하고 보고싶은 것만을 보고 사는 우리들에게 최규석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는 듯 하다.

타임머신을 통하여 개발될 땅을 알아보았다는 도우너에 꾐에 빠져 가사를 탕진한 끝에 사망한 고길동, 삶에 대한 회의를 폭력으로 풀어내는 희동이, 자신의 집에 화를 불러 일으킨 둘리 일당들을 하나씩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철수, 철수에 계획에 의해 동물원에 팔려나간 타조 또치, 마찬가지로 어느 과학자에게 해부용으로 팔려나간 외계인 도우너, 그리고 이들을 구하려 노력하지만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어 더이상 '호이' 하며 마법을 부릴 수 없는 노동자 둘리.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을 보며 나는 과연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설령 웃는다 해도 이것은 씁쓸한 웃음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운다고 해도 안타까운 눈물일 수밖에 없는 애매한 경계를 최규석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책을 덮으면 잊혀지고 다시 펴면 그대로 거기 있을 것만 같던 이들 주인공들은 어쩌면 언제라도 우리가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미화되어 있는 추억'이라는 대상과 같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순수한 자아'가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화면과 같이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애써 인정하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소박한' 착각은 최규석에 의해 여지없이 깨뜨려지고 만다.

우리의 순수한 자아를 상징하는 둘리는 변모된 모습으로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커다란 벽을, 힘겨운 한계를 느끼고 만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그대로 일 것이라고 착각했던 우리 추억속의 순수함은 현실적으로 변모해가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거긴 살만 한가요? 여긴... 만만치가 않네요." 또치의 말대로 삶은 "이젠 더이상 '명랑만화'가 아니며", 마이콜의 말대로 "자신의 삶만을 생각해도 벅찬" 현실속에서 둘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와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를 기억 저편에 '방치'한 셈이다.

최규석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유쾌하고,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라는 불문율을 단번에 깨트리며,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의 힘겨운 삶이 결국 이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을 비롯하여 우리 내면에 있는 순수함까지도 삶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닐지,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아이들이 과연 '아기공룡 둘리'를 보며 우리가 그랬듯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물려주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 저녁에는 포장마차에 들려 한 쪽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둘리에게 소주 한 잔 사주어야 할까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
여태전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국제중학교 문제가 교육계의 또 다른 쟁점으로 되어 도마 위에 올라 있고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문하며 갈등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답답한 사회분위기와 교육현실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버린 내게도 머잖아 닥칠 아이 교육에 대한 문제는 벌써부터 나를 옥죄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안학교'나 '홈 스쿨링'에 나는 막연하게나마 적잖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누구는 벌써 튼튼영어 한다는데?"라며 갓 돌이 지난 아이를 고문(?)하고 있는 한심한 부모들의 이야기에 대한 반발로, 말로는 "우리 아기는 내가 가르칠꺼야"라고  공언하며 아이 엄마 앞에서는 아이의 조기교육 문제에 대한 논란을 단 한 마디로 일축시키지만, 어디 그게 만만한 일인가? 내뱉은 말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보던 중에 '내가 과연 정규교육을 무시한 채 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의혹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동안 착실하게(?) 정규교육을 받아온 나로써는 어쩌면 교사 '자격증'이 있는 이들이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승자독식'의 사각 링에 초반부터 아이를 밀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나 스스로도 중고등학교 생활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집단이 결국 '인성' 중심이 아닌 '적응' 중심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본다면, 향후 내 아이가 들어가게 될 학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고민 중에 만나게 된 <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라는 책은 내게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고마운 책이다.  


 그동안 그 실험적 시도에 대하여 가타부타 논의가 분분하였던 '간디 학교'는 어느새 그 논란들을 잠식시키고 이제는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의 상징성이 그간의 간디 학교에 대한 비판을 잠재울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은 되지 못한다. 예전부터 '귀족학교'라는 미명하에 "대안학교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근본적인 회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한 듯 저자는 대안학교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나 일방적인 성토를 감행하지 않는다. 저자 나름대로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간디 학교를 평하려는 노력을 한 모습이 보인다. 
 
 우선, 저자는 '자율'을 강조하는 간디 학교에서 "입학을 하고 한학기를 논다"는 사실, 그리고 학생 스스로가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어떤 학생은 "간디 교에 와서 배운 것이 없다"는 비판을 스스럼 없이 하기도 했는데, 저자는 한 학생이 단순히 현 교육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서 자율화되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그 단순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간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반면, 입시교육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간디 학교의 교장 양희규 선생은 대안교육이 입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입시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자율'을 빙자한 '나태함'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선생들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고 정착하기 힘들거나 타 학교와 똑같이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점 등의 문제점 또한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간디 학교는 '완성된' 것이 아니며 현재도 '진행 중'인 학교인 셈이다. 이렇게 새롭게 트인 싹을 잘 가꾸어 약으로 삼을지 독으로 삼을지는 비단 간디 학교 관계자와 학생들, 그 학부모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교육의 구조적 모순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간디 학교 사람들이 다른 점은 그들은 적어도 교육이라는 문제를 정부와 제도의 탓으로 돌린채 외면하고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정말 그들 말대로, "비판만 하고 있기에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자신에게 인생이 너무나 짧고 소중하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간디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꿈꾸지 않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