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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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치 <Shape of Love>를 연상시키는 - 하지만 전혀 다른 종의 생물은 아닌 - '아가미'가 달린 소년(곤)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홀로 남아버린 소년 앞에, 자신들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상대를 아끼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소년이 나타난다. 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강하'라는 소년이 유독 눈길을 끄는 이유이다. 그의 거친 태도, 냉랭한 말투는 사실 증오가 아닌 사랑이었음을, 누구보다도 그를 아끼지만,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가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 그토록 서툴거나 심지어 반대의 의미로까지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 22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 49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현재까지 여파를 미치고는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흐름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숨 가쁘게 따라잡는 삶과 거리가 멀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 49, 50

"네? 정말로 슬프거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더 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사람은 저렇게 술에 취해 소리칠 기운도 없을걸요. 제 눈에는 약간 불행을 전시하는 걸로 비치기도 해요."
곤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건 그러네요." - 54

조금 전까지 오감을 장착한 존재였을 살점들이 신속하게 허공을 날아 종이 접시에 착륙하여 따놓은 꽃잎 무더기처럼 소복하게 쌓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고, 곤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대자연에 대한 공정치 못한 착취나 무분별한 도륙으로 보였다. - 105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 118, 119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삶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 194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에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음절이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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