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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 시행을 앞둔 시점에 시간강사들과의 계약을 해지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다시 책을 폈다. 시간강사들에게 교원의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처우를 개선하고, 1년 이상의 임용기간을 보장함으로써 강사 개인이나 대학에 보다 충실한 강의전담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2007년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따른 대량해고 사태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기업이 아닌 '대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적잖은 우려를 갖게 된다.
수강생이 많은 대규모 교양강의의 대부분을 시간강사들에게 맡기는 반면, 그들에 대한 처우는 시간당 5~6만원 정도로 책정하는 대학의 태도에 절망한 지 오래이고, 강사들은 그나마 강의라도 없는 방학이면 어떠한 수당도 받지 못하는 '계절적 실업자'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계속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한 저자의 분투기를 따라 읽노라면, 착취를 당연시 여기는 구조와 시스템에 눈살이 찌푸려 진다. 저자는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당연하게 생각했던 대학의 구조적 착취라는 '불편한 진실'을 담담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알바 이하의 취급을 받는 강사의 처우에 대한 공론을 촉발시켰다.
특히, "숨 쉬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삼백만 원이 비었다"는 말로 대학원 등록금도 다 커버하지 못하는 조교, 연구원 생활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과연 이러한 터전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는 있는 것일지, 명문대졸업→유학→교수임용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고서 교수가 된다는 것이 가능은 한 일인지, 그런 교수 밑에서 '잡일'을 해가며 학위를 딴들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는 있을 것인지, 오히려 우리나라 대학원이라는 것이 싼 값에 사람을 부리고, 그들을 결국 고학력 실업자로 내모는 시스템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1부(대학원생의 시간)를 통해 드러낸 이런 처연한 상황은, 2부(시간강사의 시간)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 하다. 교수와 동기사회에서 벗어나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호흡에 직면한 강의실에서 저자는 초짜의 어설픔을 솔직함과 배움(교학상장)의 태도로 승화시킨다. 대학원을 거친 시간강사의 생활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처우임에도, 습득한 지식을 나누며 서로 배울 수 있다는 대학 본연의 기능이, 삶의 극단으로 몰리고 있던 비정규직 강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은 후의 기분은 그리 좋지가 않다. 여전히 초학자들을 중요한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학이, 입시시험의 성적 순으로 배열된 집합소임을 부인하지 않는 대학이, 취업을 위하여 적절한 간판을 제공해주는 기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인 대학이, 과연 우리사회에서 그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그 실제 내용과는 별도로 학점이라는 숫자로 표기되는 형식 이상의 이미를 지닐 수 있을지, 기괴하고 편협한 아집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고를 끌어낼 수 있는 배움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해볼만 한 것일까.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 13
지방시를 쓰며 스스로의 삶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데 대해 놀라고, 또한 절망했다. 사회인으로도, 노동자로도, 학생으로도, 나의 과거와 현재를 쉽게 규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나에게 대학은 신성하고 숭고한 공간이었다. 지성, 학문, 연구, 진리, 이러한 단어들의 총체였고, 나에게는 그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대학의 맨얼굴과 점차 마주하며, 그러한 환상은 무참히 깨어져 나갔다. 나는 그저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처연한 자기 규정을 하게 됨과 동시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15
그래서 원망은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 그러니까 선후배 연구자나 지도 교수에게 가서 닿았다. 지방시를 인터넷에 연재하던 초기에는 그들을 향한 공격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연재를 거듭하며 점차 나를, 그리고 모두를 포위한 어떤 거대한 ‘괴물’이 조금씩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떤 개별 주체가 아닌 대학이 구축한 ‘시스템’ 그 자체였다. 학부생이든, 대학원생이든, 시간강사든, 교수든, 교직원이든, 대학의 그 누구든, 그 안에서는 온전히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비로소 인식했다. - 15, 16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참 슬픈 일이다. - 42
언제가부터 나타난 많은 ‘힐링 전도사’들은 ‘꿈’, ‘도전’, ‘열정’과 같은 단어들을 청년의 미덕으로 제시한다. 듣기엔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구축한 ‘청년론’은 젊은 세대들의 아픔을 그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규정해내기에 문제가 된다. 이 마법의 논리를 구성하는 핵심은 바로 ‘노력’이다. 취직하지 못하는 것, 연애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모든 것들이 기성세대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청년 세대를 위한 위안이나 동기부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혐오감을 증식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스스로의 역할을 뒤돌아보는 대신 그저 청년의 노력을 심사하는 엄격한 평가자가 된다. 결국,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시대적 계발의 논리는 기성세대를 위한 것도, 청년 세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세대 갈등을 더욱 심화하고 있을 뿐이다. - 52, 53
함께 꿈꾸던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보통 자신의 과거를 철없던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 ‘취미’로 ‘꿈’을 격하한다. 괜찮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비난할 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음을 축하해야 한다. 하지만 허벌과 같은, 혹은 제도권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여전히 반사회적 인간인 나와 같은 인간들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철없음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후진 기어를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진행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도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도로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 74, 75
나는 지금껏 많은 논문을 썼지만, 아직 한 번도 ‘글값’을 받아보지 못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자 지원 제도는 대부분 정규직 교수를 위한 것이고, 박사과정 수료 신분의 시간강사가 지원할 수 있는 항목은 아예 없다. 물론 내 연구가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에 게재 판정을 받고 좋은 연구자의 논문에 피인용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에게 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숭고’가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야 강의에 충실할 수 있다. - 195
청년들에게 ‘좋아하는 일’은 다시 태어나야 한 번쯤 선택해볼 만한 일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미리 쓰는 유언장에서조차 자신의 꿈을 고이 접어두고 만다. 인생을 두 번 선택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해야 하는, 꿈꾸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 그래서 지금은 ‘헬조선’이 된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된 이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신조어다. - 232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 236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 236,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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