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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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소설이 아닌 르포라는 신선함에 이끌려 책을 집었다. 장편소설공모전에서 4차례나 상을 받은 다관왕 장강명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문학공모전의 폐해에 대해 파해친다는 점이 다소 낯설었다. 책 표지에는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달려 있지만, 나의 궁금함은 문학공모전의 최대 수혜자가 왜 그 시스템의 문제를 살펴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였다. 이러한 측면을 인식했는지 저자는 본인 스스로가 문학공모의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자이므로 객관적인 비교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시스템, 즉 대입시험, 대기업 공채, 국가고시와 같은 공무원 시험과 비교를 하며 이들에 대한 공통분모를 통하여 현재 한국의 계급사회를 분석한다(구조적으로는 각 장마다 .5장을 할애하여 구분하고 있다).


소설 공모전를 통한 등단의 문제점과 폐해, 그 이면의 오해에 대해 취재와 본인의 경험을 통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은 몰랐던 등단 시스템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합격/불합격의 이런 시스템 -  하물며 문학작품에 대한 우수성을 인증(?)하는 공모에서도 - 이 전혀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낮은 신뢰성을 기반으로 하여 높은 경쟁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성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시스템을 없애자는 주장만이 타당한 것일까, 저자는 반문한다. 저자는 엘리트주의, 패거리문화, 계급의식과 같이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부조리들의 원인이 이런 시스템을 원인으로 한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스템 자체를 없앨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문학계로 좁히자면, 상금과 등단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공모전은 등단/미등단의 차별을 두기 위한 도구만이 아니라, 이슈를 통하여 문학작품을 독자들에게 알리려 하는 문학계와 출판계의 자구책('문예운동'이라고까지 표현한다)이라고 한다. 


시스템의 불합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저자가 꼽는 것은 정보공개이다. 좁은 관문으로 통과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 그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고 공개함으로써 '간판'만으로 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는 단점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중요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좋은 중소기업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림으로써 지원자들의 시선을 끌자는 것이다. 수요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주지 못한 채, 대의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공고한 시스템으로부터의 탈피도, 다양한 도전과 실패에 대한 용인도, 내부 구성원들의 실력과 경쟁력 향상도 더이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르포라는 것이 장강명이라는 이미지에 적확히 들어맞지는 않는 방식의 글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열었으나, 역시 잘 난 사람은 이런 글도 잘 쓰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入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 17

몇몇은 이 시스템이 거의 한계에 온 것 아닐까 내심 걱정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선발 시험이 이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험 자체가 부당한 계급사회를 만드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는 지망생들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경직성이 근본 원인이다.
비판자들은, 합격자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지위를 단단히 하는 데 입시를 악용하고, 그걸 일종의 산업으로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문단의 폐해’라는 것들도, 큰 틀에서 보면 사실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끼리끼리 문화’의 문학계 버전에 불과하다. - 18

모든 사람이 시스템 안에 있으니까, 외부의, 시선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거다. 대졸자에게는 대졸자의 입장이, 고졸자에게는 고졸자의 입장이 있다. 한쪽 의견이 은근한 우월감과 시스템이 정당하다고 믿고픈 기대에 휘둘릴 수 있다면, 다른 쪽 의견은 피해 의식으로 왜곡될 수 있다. - 20

문학상 심사위원회는 무엇으로부터 독립되고, 어떤 가치에 중립적이어야 하는가? 상업성, 금전적 가치다. 잘 팔릴 작품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을 뽑기 위해 위원회를 둔 것이다. 장편소설공모전 수상작들의 대중성이 썩 높지 않을 것임은 이런 설계 단계에서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출판사들은 당선작이 화제를 모아 흥행까지 잘 되길 기대했다. 처음부터 모순이 내재해 있던 셈이다. 출판사들이 문학 출판 시장을 공급자가 주도하는, ‘밀어내기’가 가능한 부문으로 여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판단 전후에는 계몽적, 엘리트주의적인 분위기가 다분히 깔려 있다. 나는 장편소설공모전이 출판인과 평론가들의 문예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 96


과저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두고 중앙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합격자들은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가 되었다. - 101

미국의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동양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인재 평가 방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동양에서는 국가나 스승이 젊은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선배들이 세운 기준을 충실히 따르게 된다. 반면 유럽의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논쟁과 토론이 발전했고 이는 체계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중국에서 생겨난 과거제도를 받아들인 나라가 한국과 베트남이다.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뿌리내리지 않았다. 한자 문화권 국가 중 과거제도를 도입한 중국, 한국, 베트남은 근대화에 뒤쳐져 외세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았던 일본은 반대로 승승장구한 역사가 내 눈에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 102

엘리트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 한곳 더 있다.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분야다. 전복적인 작품은, 문자 그대로 체제를 전복하려 든다. 따라서 구체제의 엘리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저항하게 되기 쉽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작품은 엘리트의 상상력 밖에 있다. 그러므로 엘리트는 그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엘리트들이 일반인보다 더 느리다. 왜냐하면 자기 상상력 바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엘리트보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 137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는가? 그러면 또라이, 반항아, 괴짜들이 설칠 땅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한국 기업이 모두 공채를 없애고 또라이들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많은 후보 중에서 신인을 선발하는 공채 시스템은 공정하고 치열하다. 과거에 성공적인 제도였고, 현재도 효율적이며 믿을만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공채와 별개로 또라이들이 사회 한구석에서 무모한 모험과 실험을 더 많이 벌여야 한다. 대담한 아이디어들은 실제로 구현해 보기 전에는 괜찮은 것과 황당한 것을 구분할 길이 없다. 모험가들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성공시키면 그다음에 더 큰 회사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인수하거나 창안자를 영입해야 한다. 또는 모험가들이 직접 자기 회사를 키우거나. 그런 과정이 더 쉬워지고 더 많아져야 한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그런 식으로만 건질 수 있다. - 162

나는 개인적으로 로스쿨이나 학생부종합전형에 찬성한다. 잘만 운영되면 사시나 수능보다 더 나은 선발 제도라고 본다. 문제는 바로 그 ‘잘 운영되는가’다. 한국 사회는 그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 왜냐하면 경쟁은 치열한 반면 신뢰 수준은 아주 낮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공정성을 확실히 담보하지 못하는 제도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더라도 획일적으로 시험을 치러 점수를 기준으로 뽑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이런 분위기가 공채제도를 유지하는 큰 힘이기도 하다.
그런 정서를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 2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시 고득점자 = 명문대 출신 = 일 잘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거친 등식은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한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다른 평가 방법이 딱히 없으니까.
대학 졸업장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나 브랜드의 품질보증 마크 같은 역할을 한다. 명문대 마크가 찍히면 노동시장에서 좋은 기회를 얻기 쉽다. 그런 간판이 없으면 자기 실력을 제대로 알리기 힘들다.
그렇게 간판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다가 마침내 인간의 가치를 상징하는 데까지 이르고야 만다. 그때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은 단순히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존재 증명을 위한 투쟁이 된다. 나중에 거둘 수 있는 예상 이익보다 훨씬 큰 사교육비를 들여 자녀의 대학 입시를 지원하게 된다. - 312, 313

어떤 상품을 사기 전에 그 물건의 품질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면 간판은 힘을 잃는다. 간판으로 득을 보던 사람은 그런 정보공개에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원자들과 소비자들은 모두 이익이다. 엄계 전체의 경쟁력도 높아지고, 간판으로 사람의 위아래를 정하는 악습도 사라진다. 중진, 원로라도 실력이 없으면 물러나고, 도전적인 신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 - 327

나는 정부와 중소기업계가 주도하는 중소기업 인식 개선 캠페인들이 독자를 도서관에 데려가 "좋은 책이 많으니 무조건 읽어라."라고 권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런 캠페인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대체로 이렇다. 대기업 못지않은 근로조건에 장래성도 유망한 중소기업들이 많은데 사회 전반에 퍼진 중소기업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청년들이 중소기업 취업을 꺼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부정적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소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하다는 둥,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몇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둥 하는 설명도 따른다. - 355

그러나 중소기업들이 평균적으로 괜찮다거나 전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구직자 입장에서 쓸 만한 정보가 못된다. 구직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자신이 지원하려는 특정 기업에 대한 것이며, 그들의 눈높이는 급여, 작업환경, 복리 후생, 안정성 같은 사안에 맞춰져 있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우수한 중소기업이 아주 많다’고만 강조할 게 아니라, 그냥 우수한 중소기업이 어디인지, 어떤 점이 우수한지를 보여주면 될 일 아닌가. 그러면 구직자들이 저절로 그 기업들에 몰릴 거 아닌가. - 356

한국 사회는 공공기관의 조사가 끝나 법원에서 판결까지 내린 사안에 대해서조차 구직자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수한 중소기업이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바라본다’고 그들을 꾸짖는다. 가증스러운 기만이다. 지뢰밭으로 들어가기 주저하는 군인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꼴이다. - 361

그렇게 관료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의 질서는 실력이 아니라 기수 문화와 인맥, 파벌이다. 엘리트를 모아 놓기는 했으나 외국의 같은 직업군에 비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 외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뼛속 깊이 오만하다. 자신들을 뽑아 준 시험의 분별력과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 시험으로 자신들의 능력이 입증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425

바꿔 말하자면, 한국에서 간판이 만드는 차별과 서열의 구조는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런 ‘합의’는 여러 각도에서 공고히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실제로 그 간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간판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판 외에 달리 더 좋은 선택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간판의 본질적인 힘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간판의 중요성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낮아진다. 간판의 힘은 정보 부족에서 나온다. 독자나 출판사가 등단 작가를, 구직자가 대기업을, 기업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다. - 428

나는 사람들이 모험을 하게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믿을 수 있는 정보는 그중 하나다. 다른 두 가지는 충분한 보상과 실패했을 경우의 대비책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그 세 가지가 다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과 기업들은 모험을 극히 꺼린다. 그 결과 역동성이 점점 사라지고 우리 공동체가 계급사회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는 중이다. 상속, 혼인, 시험과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신분을 바꾸기 어려운. - 429,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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