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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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조숙한 천재


저자는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하 추사’)의 일생을 각 시기별로 나눠, 당대(當代)의 시류(時流)와 추사의 학문 및 예술세계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먼저, 추사는 명문가인 경주(慶州) 김씨(金氏) 출신으로,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양자인 김이주(, 1730~1797)의 손자다. 동시에 아들이 없는 백부(伯父) 김노영(金魯永, 1747~1797)의 양자(養子)이기에, 왕가와 이어지는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섯 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북학파의 거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제자로 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사는 거만하고 고집스러운”[p. 174]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청()나라를 오가면 그곳의 명사(名士)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좋게 보면 국제적인 감각을, 나쁘게 보면 청()나라 문화에 기울어진 모습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첫 연경행(燕京行)에서 돌아오기 전, 그가 읊었다는 이별시가

나는 변방에서 태어나 참으로 비루해서[我生九夷眞可鄙]

중원 선비 사귐 맺음 너무도 부끄럽다[多媿結交中原士]” [p. 78]라고 시작되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물론 추사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 갔단 온 지식인들이 말끝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남을 면박 주며 잘난 체하곤 했는데, 그런 오만과 치기가 추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p. 73]. 어쩌면 향토색이 짙은 예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선진국의 물을 먹은 젊은 천재였기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에게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들의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p. 230]라고 언급하면서 비친, 18세기의 진경 산수화[정선]와 남종 문인화[심사정]에 대한 평가도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가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남긴, 향토색이 짙고 독자적인 서체를 추구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의 글씨에 대한 일화도 그렇다.



연경행(燕京行), 국제적인 안목(眼目)을 갖추다


추사가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된 계기는 연경행이었다. 1809년 친부(親父)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가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서 청()나라의 대학자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갖게” [pp. 67~68] 될 만큼, 그 두 사람은 추사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는데, 여기는 그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p. 107]고 단언했다. , “한나라 유학은 훈고학이고 송나라 유학은 성리학이라 하여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p. 107]는 내용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주장했다.

이를 보면, 훗날 청()나라 경학(經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연구하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隣, 1879~1948] 추사를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p. 45]라고 평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제주 유배,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시련


1830년 생부인 김노경이 모함으로 유배되고, 이어 1840년에는 추사 본인도 모함을 받아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이 제주 유배는 추사의 인생과 글에서 매우 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 1555~1636)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 1037~1101)와 미불(, 1051~1107)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 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p. 346]라고 말했듯이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치 정()-() –()의 과정을 밟는 것처럼, 추사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추구한 예술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가 가려지지 않는다)’을 이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동시에 이 세한도는 고졸한 풍경의 집 한 채와 그 좌우에서 대칭을 이루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림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의 글씨까지 하나로 봐야 하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 더하자면, 제주 귀양이라는 시련은 추사를 한층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8 3개월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서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대웅보전현판을 다시 달라고 했다는 일화나 이삼만의 묘비문을 써주었다는 전설은 이를 보여주는 얘기들이다.


추사의 삶에는 제주도 해배(解配)이후 8년의 시간이 더 있다. 그 기간 중에는 북청으로의 유배도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에 영향을 주는 큰 굴곡은 더 이상 없었다고 느꼈다. 아마도 추사가 <논어>에서 말하는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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