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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 한 닢 동전의 제국 여행기 ㅣ 알베르토 안젤라의 고대 로마 3부작
알베르토 안젤라 지음, 김정하 옮김 / 까치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흔히 5 현제(賢帝) 시기를 로마제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 로마 제국의 화폐 가운데 하나인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을 통해 대답하고 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고려시대의 <공방전(孔方傳)>처럼 가전체 소설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을 매개로 로마 제국인의 삶을 스케치하듯이 살펴보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현대의 주화처럼 이 동전도 로마의 조폐창에서 주조되어 30인으로 이루어진 기마대들에 의해 제국 각지로 수송된다.
“매번 새로운 통화들이 주조될 때마다 제국의 동서남북 국경지대로 가능한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 당시는 통화가 경제적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보 전달과 홍보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pp. 323~33]
이 책에 소개된 동전의 경우, 로마의 조폐창에서 알프스를 넘고 갈리아를 거쳐 배를 타고 영국해협을 건너 제국의 서쪽, ‘론디니움(Londinium, 런던)’ 요새로 향했다. ‘룬디니움’은 지금의 런던을 생각하면 초라할지 모르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런던의 ‘City’에 해당하는 지역이 개발되어 있고 런던브리지의 원형이 되는 다리가 형성되었다니 흥미롭다.
이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의 본격적인 여행은 ‘론디니옴’ 요새에서 총독 마르쿠스 아피우스 브라두아(Marcus Appius Bradua)가 동전 한 닢을 동전을 수송한 기마대의 십부장에게 건네주면서 시작한다. 그 십부장이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빈돌란다(Vindolanda) 요새의 공중목욕탕에서 동전을 분실하고, 그 동전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포도주 상인의 돈주머니에 들어간다. 그리고 파리시(Parisii)족의 거주지에 세워진 ‘루테티아(Lutetia, 파리)’를 거쳐 신들의 음료라는 포도주를 만드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에 도착한다. 지금의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도시는 독일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모젤 와인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이다.
“오랫동안 포도 재배를 허가받은 유일한 주체는 군단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이 길게 펼쳐져 있는 국경선을 따라 주둔한 상황은 포도주 생산의 지역화에 기여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소비자였기 때문이다. 포도 재배는 종종 이 국경지역의 경작지를 정착의 대가로 제공받은 퇴역군인들에게 위임되었다.” [p. 86]
이로 인해 유럽 와인의 주산지와 고대 로마제국의 군대 주둔지가 겹치는 일이 많다.
모곤디아쿰[Mogontiacum, 마인츠]에서 호박(琥珀) 보석 상인은 안전을 위해 노예 상인과 동행하면서 고객이 있는 메디올라눔[Mediolanum, 밀라노]로 향한다. 여기서는 조선의 여성과 달리 로마의 여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좀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명품을 두르고 거리를 거니는 메디올라눔의 여성들

출처: <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p. 162
“공화정 당시 로마의 결혼은 항상 남편에게만 유리했을 뿐, 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결혼에서 여성에 대한 보호권은 마치 물건처럼, 그리고 집안의 애완동물처럼 부친에게서 남편에게로 넘겨진다” [p. 165]
“공화정 시대가 끝나면서, 여성은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재산에서도 남편과 동일한 권리를 획득했다. 이혼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중 한 명이 증인들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면 그만이었으며, 그 순간 당사자들의 이혼이 결정되었다. ~ 중략 ~
이처럼 트라야누스 황제의 시대에 부유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립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유일한 주체였다. 또한 특히 돈 때문에 결혼한 자신의 남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pp. 166~167]
어떻게 보면 고대 로마의 여성들이 중세나 근대 초기의 여성보다 더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뇌수종 수술을 하는 아리미늄의 외과의사

출처: <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p. 229
다른 도시의 경우, 예를 들면 이탈리아 북부의 아리미늄[Arriminum, 리미니]에서는 외과 의사에게 충치 치료, 백내장 치료, 뇌수종(腦水腫) 치료 등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스티아[Ostia]는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온갖 사람과 물건들이 유입된다.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언어의 바벨탑’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언어가 혼재(混在)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 도시들에서 살아가는 로마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렇게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그냥 짧은 역사소설을 엮은 것처럼 보이지만,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의 여정(旅程)에서 묘사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제로 그 시대에 그리고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실존 인물이고 실제로도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p. 10]고 한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로마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도 그 대부분이 ‘진짜’이다. 왜냐하면, 마르티알리스, 오비디우스, 유베날리스와 같은 고대의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아마도 그래서 에피소드들이 생생하게 그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실된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들을 생각하면, 수많은 전쟁과 자연재해 등을 거치면서도 이런 기록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부럽다. 동시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신분의 사람으로 고대 로마제국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이 책을 쓴 저자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것을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덧붙이자면 책 중간중간에 삽입된 삽화는 여행 에세이의 사진이나 삽화처럼 상상하던 것을 형상화해서 한 눈에 들어오게 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