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깊이 - 공간탐구자와 함께 걷는 세계 건축 기행
정태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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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매력

 

진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치과 의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상과는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사람들과 함께 관광지, 유적지, 맛집을 다니다가 혼자서 떠날 용기가 생기자 도시의 뒷골목을 다니면서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어진 삶을 따라 살며 박사 학위를 받고 개원의로 자리 잡은 후 처음 혼자서 무언가를 결정한 것이 건축 공부였다처음에는 건축에 관한 책을 읽다가 점차 빠져들어 건축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pp. 5~6]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직업의 하나로 간주되는 치과의사가 건축가라는 길을 걷게 된 이유다.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취미’라면 몰라도 ‘직업’, 즉 인생의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건축’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저자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건축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탄생시키는 것” [p. 9]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저자는 무주의 종합운동장에 있는 그늘막을 예로 든다. “무주의 종합운동장은 건축가 정기용의 애정이 담긴 프로젝트이다. 종합운동장의 햇빛 아래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람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등나무를 심어 그늘막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무주 종합운동장 같은 그늘막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건축가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고 고민하고 애정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는 프로젝트이다.” [p. 163]

이처럼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건축가의 고민 자체가 건축설계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술관을 설계할 때는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 공동주택을 설계할 때는 주거에 관해 연구하면서 현재 사회의 상황과 문제점들을 찾게 된다. 바로 그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의 장점이다.” [p. 9]

아마도 이것이 저자가 의사에서 건축가로 인생의 길을 바꾼 이유가 아닐까?

 

 

건축 공간을 읽는 다섯 가지 인문학 키워드

 

건축은 유홍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대표적인 분야다. 그렇기에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랜드마크나 명소가 아닌 곳은 여행을 가더라도 몰라서 지나치기 쉽다. 예를 들면, 바르셀로나에 간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 이하 ‘성가족 성당’)처럼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Cornet; 1852~1926)의 작품들을 보기에 바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 아는 자의 도리를 지켜 몇 마디 덧붙여준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바르셀로나에 간다고 하면 나는 무얼 보러 갈 건지 물어볼 것이다. 당신이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를 보러 간다고 하면 나는 거기엔 엔릭 미라예스(Enric Miralles)가 있다고, 그리고 바르셀로나 외곽 히로나(Girona)로 가면 RCR 건축사무소(RCR Arquitectes)가 설계한 레 콜스 레스토랑(Les Cols Restaurant)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줄 것이다.” [p. 10]

 

하지만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그저 사진 몇 장만 늘릴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친절하게 가이드를 제시한다. 즉,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관심을 둔 건축물과 도시 공간을  현대 건축에서  주요한 다섯 가지 논점으로 구분했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건축, 현상학(Phenomenology)으로 대표되는 지각과 체험의  공간, 새로운 유형의 구조주의적(structuralism) 네트워크로서의 건축 공간, 자연을 모방한  바이오미미크리(Biomiomicry)와 복잡계 이론에 기초한 건축, 스케일(Scale)에 따라 건축에서 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면서 다른 곳과 차이가 나는  독특한 도시  여행이  그것이다.” [p. 7]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키워드는 도시 속에서 묘지나 성당, 도서관, 문화시설 같은 ‘비일상’을 만들어내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미셸 푸코가 사용한 개념인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일상의 장소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새롭게 환기시키는 장소, 즉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p. 16]다.

예를 들면,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종묘는 “순간의 현재가 거대한 과거가 되는 서울 종묘는 엄숙한 공간을 위해 중앙을 비워내고 바닥을 돌로 채웠다” [p. 18]고 한다. 또 다른 묘역인 베를린 시내에 있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은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 자체로 엄숙함과 두려움이 깃들게 했고, 관의 형상을 반복함과 함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듦으로써 역사의 엄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p. 18]

 

피터 아이젠만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

출처: <도시의 깊이>, p. 25

 

이렇게 “우리는 상상의 유토피아가 각종 사회 공간의 한계를 위반하는 헤테로토피아로 현실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균열을 통해 바깥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이곳들을 보며 새로운 현실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현대사회의 도시와 건축은 나무와 돌과 벽돌과 유리를 가지고 바닥과 기둥과 지붕을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새로운 사회와 자연현상을 면밀하고 섬세하게 관찰하여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서 새로운 인공의 대지와 건축물을 만들고 그 결과로 자연인지 건축물인지 알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결국 현대 건축물은 지금까지 없었던 다양한 헤테로토피아를 만들고 사회에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사회 문제를 환기하고 고민하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p. 17]

 

두 번째 키워드는 현상학(Phenomenology)이다. “현상학은 우리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현상 자체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철학” [p. 80]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관련된 매개체(로) 주로 빛이나 색 같은 시각적인 정보를 이용” [p. 81]하기에 현상학을 건축에 적용시킨 결과 빛, 색과 향기, 물과 유리 등으로 오감(五感)을 극대화하는 공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일본 서쪽의 작은 도시 가나자와[金澤]의 오래된 전통 찻집 거리인 히가시 차야 거리(ひがし 茶屋 街, Higashi Chaya District)를 다니다 보면 황금의 거리라 불릴 만한 곳을 경험할 수 있다. 일본 금박 장식 산업을 독점했던 탓에 아직도 그 명성이 남아 있다. 그 중 하쿠자 히카리구라(箔座 ひかり藏, Hakuza Hikarigura)는 가게 내부에 있는 작은 아트리움 한쪽 벽 전체가 금박으로 마감되어 있다. 처음에는 금색 칠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체가 다 금박이란다. 그래서인지 금빛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면서도 화려하게 뿜어져 나온다. 금은 보통 장식품이나 장신구같이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지므로 금이라는 재료 자체보다는 형태로 인지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건축물 외벽, 즉 외부의 벽체라는 특정한 형태가 없는 면 전체를 덮은 금을 보는 것이다. 빛이 없어도 빛날 것 같은 재료가 금인데 햇빛을 직접 받아서 반사하는 금빛을 보는 경험은 세상 어디에서도 해볼 수 없을 경험이다이곳의 금빛은 과할 정도로 농축된 금빛이 아니라 우아하고 기품 있는 금빛이다” [pp. 99~100]

 

하쿠자 히카리구라(箔座 ひかり藏)

출처: <도시의 깊이>, p. 101

 

또 다른 예로는 “스위스 대표 건축가인 피터 줌터(Peter Zumthor)가 설계한 쾰른의 콜룸바 박물관(이 있다)오래된 폐허 위에 설계된 박물관은 그 지층 아래에 있는 역사를 오롯이 떠안고 있어야 하는 숙명인데 내부 공간을 벽돌로 막고 한쪽 벽에 벽돌을 느슨하게 쌓아 햇빛과 바람과 그림자를 끌어들여서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었다.

오래된 역사의 한 부분인 로마 시대 유적지 위에 현대 건축 양식의 박물관을 지으면서 내부 바닥은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지그재그 형태의 동선을 넣고 외부에서 벽돌 벽의 틈새로 빛을 비춰서 마치 유적지를 탐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극대화하여 도시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컴퓨터나 가상 현실을 이용하여 지식을 전달하려는 최첨단 문화 공간임을 자랑하는 여타 박물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 [pp. 101~102]

 

피터 줌터의 콜룸바 박물관

출처: <도시의 깊이>, p. 102

 

이처럼, “건축에서 현상학적 공간을 만드는 매체로는 단연코 빛이 최고다. 밝음과 어두움을 이용하여 극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현상학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 것이 현대 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축 재료인 유리 그리고 자연에서 가져온 수(水)공간이다. 유리와 물의 특징을 이용해 공간을 투명하게 만들고 주변 환경을 비추고  굴절시키고 반사시켜서 기존의 관념을 깨는 뒤집힌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대하면 저절로 그들이 창조한 공간에 빠져들게 된다” [p. 06]

 

세 번째 키워드는 현대 건축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Structuralism)로,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이 공간의 관계를 찾는 위상기하학은 현대 건축의 새로운 유형이다. (이렇게 위상기하학이 건축에 적용된 결과) 건축적 관통, 보이드, 폴딩, 대지건축 등 기존 건축에서 나타나지 않은 디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p. 153]

 

건축적 관통의 예로는 램 콜하스의 카사 다 뮤지카

출처: <도시의 깊이>, p. 156

 

보이드의 예로는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본사

출처: <도시의 깊이>, p. 158

21.06.20 추가

제대로 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진을 보려면 <월간 스페이스> 18년 8월호에 실린 임성훈의 "아모레퍼시픽 사옥 -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https://vmspace.com/project/project_view.html?base_seq=MjM0)을 참조.

 

대지건축의 예로는 오사카의 넥스트 21

출처: <도시의 깊이>, p. 164

 

네 번째 키워드는 자연을 모방한 건축설계인 바이오미미크리(Biomiomicry)로, 구조주의와 현상학적 공간을 구현하려던 현대 건축의 한계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 생물학적 특징 등을 연구 및 모방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재닌 베뉴스(Janine Benyus, 1957)에 의해 이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일본 건축의 메타볼리즘도 여기에 해당한다. 즉, “1960년대 일본 건축은 메타볼리즘으로 대표되는데 생물의 신진대사를 변화와 성장을 계속하는 건축과 사회라는 의미로 차용했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정적인 건축이 아니라 변화에 대응하는 동적인 활동을 통해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p. 193]

 

다섯 번째 키워드는 건축물로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는 스케일(Scale)로, 랜드마크, 즉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란 건축물의 스케일을 도시의 스케일로까지 확장하여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의 확장은 스케일을 동반한다” [p. 232]고 한다.

 

 

어떤 건축이 좋은 공간을 만드는가, 도시를 바라보는 건축가의 고민

 

현대 사회의 건축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먼저, 저자는 ‘장소성’과 ‘맥락’을 고려하는 건축 공간으로서 포르투갈 포르투에 있는 일명 ‘바닷가 수영장’인 레싸 수영장(Leca Swimming Pools)을 소개하며 “한국에 있는 국제 규격의 실내수영장이나 리조트의 워터파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p. 138]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레싸 수영장은 바닷가의 일부 공간을 적절하게 막고 최소한만 손을 대 자연스럽게 물을 가두어 만든 천연이자 인공 수영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축 건물에 방해된다고 오래된 나무를 자르거나 옮기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공간이 어색하거나 이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에 순응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는, 즉 주변의 맥락을 고려하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대체되기 어렵다. 이러한 건축물의 대표적인 것이 한국 전통 건축이다. 그래서 저자도 “내가 아는 한 한국 전통 건축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까래도 완벽한 직선이 아니고 구부러져 있는 상태 그대로 사용한다. 그 결과 고졸미가 나타난다. 한국에서 온 나에게 포르투의 천연 수영장은 마치 조선 시대 전통 주택을 먼발치에서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p. 138]고 말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텐마크 국립 아쿠아리움 전철역 인근의 지하도도 떠올릴 수 있다. “덴마크 국립 아쿠아리움 전철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고 지하도로 들어갔다. 상쾌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단순한 지하 통로인데 반대쪽 입구에서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빛은 천창에서 내려온 것처럼 콘크리트 바닥과 주변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벽에 경쾌한 디자인의 파란색 의자가 놓여 있다. 한눈에 봐도 디자인을 신경 쓴 것이 티가 났다. 이런 곳까지 디자인한다는 것이 놀랍다. 이곳 지하도는 기능적인 공간으로만 치부해 파고 뚫고 어두우면 조명 넣고 보기 싫다고 하면 벽화 그려 넣고 위험하다고 하면 CCTV를 달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연과 공간과 디자인과 기능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서 조화롭게 만들었다. 이런 체계적인 문제의식과 고민을 통해 종합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능력일 것이리라.” [p. 167]

 

다음으로는 건축 재료와 디자인을 편견 없이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예들 들면,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사용하는 코르텐강(Cor-ten Steel)을 들 수 있다. 코르텐강의 갈색은 새로운 재료임에도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며 산화되면서 재료가 갖는 시간성이 짙어진다. 그러나 관리가 불편해 우리나라에서는 선호하지 않는데, 톨레도에서는 화단의 경계 등에 코르텐강을 사용해 오래된 도시를 해치지 않으면서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저자는 공공디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엘 크레꼬 박물관(Museo El Creco) 근처에 삼각형 형태의 작은 외부 광장이 있다. 마을의 작은 자투리 공공 공간에 나무 데크를 이용하여 낮은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경계와 재료로 인하여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편하게 주저앉아 쉬거나 심지어 누워서 해바라기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보낸다. 공공 디자인은 항상 결과가 명확히 나오고 티가 나야 실적으로 인정되는데 그런 부담 갖지 않고 진정 사람들이 원하는 작은 관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공공 디자인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p. 235]

 

인증샷을 날리기 위한 관광의 대상, 나아가 건축물이나 도시 공간을 보이는 즐기는 것도 여행의 방법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건축이 아닌 그런 공간을 삶과 사회와 연결시켜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도시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분명히  “건축을 배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Ando Tadao, 1941~ )가 했던 것처럼 실제 건축 작품을 살펴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 [p. 6]이다. 하지만 강요된 언텍트 시대에 이런 책을 통해 도시와 공간의 깊이를 볼 수 있는 혹은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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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망, 로마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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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는 로마를 마음대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로마는 우리가 만든 상상의 도시일지도 모른다” [p. 22]라고 말한다. 그런데 로마만 상상의 도시일까? 아마도 유럽의 파리도, 아메리카의 뉴욕도, 아시아의 교토도 그런 도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곳들을 방문하면 그저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고, 특산품을 사기 일수라는 것이다. 그런 여행이 잘못되었거나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보여주기 위한 여행만 한다면 그 여행은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 <나의 로망, 로마>를 고른 것은 로마를 배낭여행으로 한 번 방문한 적이 있기에,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로마를 바라보고, 걷고, 느낀 기록은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테르미르 역의 지하의 맥도날드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24

 

나는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기차로 로마를 향했기에 저자처럼 테르미르 역을 거치지 않아 그 지하에 있는 맥도날드에서의 느낌을 알지 못한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로마의 출발은 맥도날드에서 한 끼 배고픔을 달래는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었다니,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은 사실이다. 위대한 제국의 출발이 이렇게 초라했다니! 우리는 로마 여행의 첫 번째 장소 (테르미르 역의) 맥도날드에서 로마 탄생의 첫 번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p. 26]

그렇기에 한국의 서울 역에 해당하는 테르미르 역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로마 탄생의 순간을 떠올리는 저자의 감성은 독특하고 신선했다. 하지만 ‘로마의 출발은 맥도날드에서 한 끼 배고픔을 달래는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차라리 <로마사>를 쓴 “역사가 리비우스가 밝힌 대로 로마는 원래 외국인들이 만든 나라다. 가난에 찌들다가, 심지어 죄를 짓고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도피해 온 사람들이 모여 세운 나라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사람들의 희망이 모여 로마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수도에 성벽이 쌓이기 시작했을 때, 다른 것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계의 빗장이 그들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을 때, 로마는 존재의 이유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pp. 42~43]처럼 풀어 쓰거나 ‘~ 배고픔을 달래는 [이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충하는 편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다 본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75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언뜻 보면 유채꽃이 피어있던 경주의 황룡사 터처럼 무너진 건물 잔해가 이리저리 흩어진 폐허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곳에서 다른 것을 보고 있다. 포로 로마노, 즉 로마 광장은 바로 이 로마 공화정의 난제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곳이다. 권력의 질주를 막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 정교한 법률적 장치를 고민했고, 어떤 사람은 종교적 믿음을 이용하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제어할 수 없는 권력의 찬탈자에게 암살의 단검을 휘두르는 마지막 선택을 하기도 했다.” [p. 72]

그렇기에 저자는 이곳에서 로마 공화정 최후의 수호자’라는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포로 로마노의 한 건물 외벽에 키케로의 잘린 혀와 팔이 효수되었을 때, 역사가들은 그 잔혹했던 장면을 위대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사건으로 간주한다. 로마 공화정은 키케로의 시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p. 73]는 추도의 말은 아마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판테온 내부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오쿨루스를 올려다 보는 모습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162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이하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작품’이라고 극찬한 판테온은 유현준 교수가 TV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얘기했듯이 아치(Arch) 구조와 화산재 등을 이용한 저밀도 콘크리트 등이 특징인 건축물이다.

만신전(萬神殿)이라는 이름 그대로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출발한 이 건물은 “거대한 황실의 신전인 동시에 우주의 조화를 지상에 펼치고 있는 거대한 해시계이며, 황제들의 신격화를 위한 거대한 정치적 무대였단 것이다.” [p. 163] 한국으로 치면 역대 국왕 부부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사당(祠堂)인 종묘(宗廟)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지내는 환구단(?丘壇) 등이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판테온을 세운 사람은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이며 사위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B.C. 63(?)~ B.C. 12, 이하 ‘아그리파’)로 우리에게 친숙한 아그리파 석고상의 모델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판테온에서 아그리파가 묻힌 아우구스투스 영묘(靈廟)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로마에서 무엇인가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은 두 사람[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우정에 주목해야 하리라. 캄푸스 마르티우스의 정중앙에 있는 판테온에서 출발해, 트레비 분수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영묘까지 걸어가는 데 직선거리로 30분이면 충분하다. 서둘러 걷지 말고 두 사람의 우정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 길을 걸어보자. 참된 우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큰 뜻을 이루려면 소중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먼 길을 가려면 그 먼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소중한 길동무가 필요하다.” [p. 172]

 

콜로세움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210

 

콜로세움은 베스타시누스 황제의 놀라운 정치적 판단력을 보여준다. 그는 로마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공짜 빵을 바랐고, 원형 경기장에서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격투사의 구경거리를 원했던 것이다.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 황제가 처했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시민의 환호가 멈추는 순간 황제의 권력도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진다는 사실 말이다.” [pp. 210~211]

로마 황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한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처럼 저자는 ‘1장 세르비우스의 성벽’에서 ‘11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까지 로마를 걸으며 로마 제국의 창건에서 멸망까지의 역사와 각각의 장소와 관련된 고전 등을 언급한다 예를 들면, 포로 로마나와 키케로의 <의무론>,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콜로세움과 타키투스의 <역사>, 산탄젤로 성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 등이 있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383

 

물론 로마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흔적만 있지 않다. ‘12장 성베드로 대성당’부터 ‘15장 브르게세 미술관’까지는 로마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더듬어 보는 자리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라파엘로 산지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아테네 학당>이 있는 바티칸 박물관과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 등이 있고,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의 <다비드>와 <아폴론과 다프네> 조각상이 있는 보르게세 미술관 등이 그것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낯설게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가 “우리는 로마에서 ‘재탄생’을 경험한다. 로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다시 태어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인생에는 오직 의무밖에 없단 말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럼 로마가 그 질문에 답해줄 것이다.” [p. 404]

다만, 그런 질문을 가지고도 “로망만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수탉의 여행”[p. 406]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힐링의 여행보다 배움의 여행을 권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한 마디로 보여주는 것이 독일의 르네상스 문학을 탄생시킨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 1459~1521)의 ‘바보 배(Das Narrenschiff)’라는 시다.

 

바보 배

"바보라네,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고도

바른 행실과 이성을 깨치지 못한 사람은.

처음 날아갈 때는 거위였는데,

고향에 돌아온 걸 보니 수탉이로구나.

파비아, 로마, 예루살렘에 다녀왔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이성과 이모저모 지혜의 덕목을

배워와야 진짜배기라네.

나는 그런 여행을 권하고 싶네” [p. 406]

 

나는 저자와 달리 여행을 떠나 로망만 안고 힐링하는 수탉의 여행[관광의 여행]이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나와 우리를 돌아보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위의 여행[사색의 여행] 모두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것이 로마 여행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처해있는 상황이 다른데, 굳이 거위의 여행만 권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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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건축 - 패전과 고도성장, 버블과 재난에 일본 건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현정 지음 / 마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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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후(戰後) 일본 건축일까?


저자는 1945년 이후 일본 건축을 서술하기 위한 틀로 ‘현대’ 대신 ‘전후’(戰後)를 선택했다. 이는 시대구분으로서의 현대보다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가치 공간” [p. 10]을 말하는 ‘전후(戰後)’를 통해 건축을 살피겠다는 뜻이다. , <전후 일본 건축>이라는 제목을 통해 시대의 흐름이나 양식, 건축가 개인의 특징이 아닌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건축을 파악하고 서술하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선포하는 셈이다.



1950년대 전후 재건기_일본의 국가 건축가, 단게 겐조


1945년 패전과 함께, 일본은 천황제(天皇制)와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로의 변화가 강제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건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자는 일본 건축의 아버지혹은 일본의 국가 건축가라고 불리면서 일본 현대 건축의 토대를 닦은 단게 겐조[丹下 健三, 1913~2005]의 변화를 통해 이를 얘기한다.


단게 겐조는 대학원 시절, 전시(戰時)의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에 일본 전통 건축의 모티브를 적극 도입한 대동아건설총령신역계획설계 공모(1942)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는 그가 전전(戰前)에 군국주의를 위해 봉사했다는,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상징한다. 이 꼬리표를 때기 위해 그는 사실상의 데뷔작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1949~1954)르 코르뷔지에 풍의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을 전략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후 일본의 공식 건축가로 새 출발을 도모할 수 있었다.” [p. 41]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천황제, 군국주의 등 일본 전통의 부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를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1953국제성, 풍토성, 국민성: 현대건축의 조형에 관하여라는 심포지엄에서 모더니즘 건축을 일체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국제주의 건축이자, 지배계급의 이해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기능하는 휴머니즘 건축으로 규정” [p. 42]한 저명한 건축 평론가 하마구치 류이치(浜口 隆 一, 1916~1995)와 달리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심지어 모더니즘, 국제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정신성을 결여한 백색의 위생도기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p. 43]

또한,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뿌리, 원시성으로서 조몬[繩文, B.C. 10세기~B.C. 3세기]적인 세계를 추구한 오카모토 다로[岡本 太郞, 1911~1996]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즉 단게 겐조는 일본 건축의 성취가 민중적인 조몬과 귀족적인 야요이[弥生, B.C. 3세기~ 3세기]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예로 전통 건축의 대표작인 가쓰라 이궁[桂離宮]과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제시했다. 물론 단게 겐조의 주장만으로 이들에게 일본 전통건축의 정통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 고건축에서 모더니즘적 요소를 찾으려는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같은 영향력 있는 서구 모더니스트들의 ‘발견’과 관심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일본 전통[특수성]과 모더니즘[보편성], 전통과 현대의 조화 내지는 화해를 모색했다.



1960년대 고도 성장기_메타볼리즘


1960년대 아사다 다카시(淺田 孝, 1921~1990)의 강력한 리더십이 이끈 메타볼리즘(Metabolism) 그룹은 건축의 유연성과 가변성, 성장가능성을 전면에 내세운 여러 프로젝트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성립은

첫째, 1950년 후반 근대건축국제회의(CIAM, 1928~1959)의 헤게모니 붕괴

둘째, 1950년대 일본 건축계의 일본전통논쟁

셋째, 패전과 폐허를 딛고 막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전후 일본 사회의 특수한 맥락 덕분에 가능했다.


이들의 디자인 방법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첫째, 메가스트럭처적 접근

도시의 여러 기능을 포괄한 초대형 구조물”[p. 110]인 메가스트럭처를 지향했다. 기쿠타케 기요노리[菊竹 淸訓, 1928~2011]해양도시’(1958)이나 구로카와 기쇼[黑川 紀章, 1934~2007]공중도시’(1960)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위로부터의 전면적인 개발을 강조” [p. 113] 했다.


기쿠타케 기요노리의 해양도시, 구로카와 기쇼의 공중도시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111


둘째, 그룹 형태(group form)적 접근

주민의 필요와 도시의 맥락에 맞게 유연하고 점진적인 적응과 변화를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접근을 지향”[p. 113] 한다. 따라서 건축가의 권능보다 거주민의 요구와 지역적인 맥락에 방점을 둔 도시계획”[p. 115]을 선호한다. 마키 후미히고[ 文彦, 1928~ ]힐사이드 테라스’(1960~1992)는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마키 후미히고의 힐사이드 테라스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p. 116~117


메타볼리즘은 인공대지로 대표되는 도시적 규모의 디자인에서부터 캡슐로 불리는 개별 주거 단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선보였다. 1960년 초반 거대한 인공대지가 메타볼리즘 건축을 대표했다면, 1960년대 중반부터는 캡슐이 메타볼리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pp. 120~122]


이들의 시도는 비()서구권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며, 일본 건축이 동시대 국제 건축계의 보편적인 이슈를 공유하고, 때로는 선점하기까지 하는 국제적 동시대성을 획득하게 했다. 그러나 바다와 하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는 메타볼리즘의 대담한 구상은 기술과 진보에 대한 자신감만큼이나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태풍 등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섬나라 일본이 갖는 근원적인 불안에 의해 추종되었다” [p. 136]는 저자의 말처럼 일본사회의 생존에의 강박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 오일 쇼크_ 포스트모더니즘, 이소자키 아라타


1970년대는 급진적인 전공투(全共鬪)의 몰락,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1970]의 할복자살, 오일쇼크 등은 국가 재건과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렸다. 건축분야에서는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그 역할을 했다. 건축사학자 야쓰카 하지메[八束 はじめ, 1948~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건축을 모더니즘 건축의 장송곡이자 포스트모던 건축의 서막을 알리는 일본 건축사의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 [p. 150]했던 것처럼, “1970년대 들어 과학기술 낙관론에 근거한 유토피아주의를 골자로 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냉소주의와 상업주의, 절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등장에 의해 도전” [p. 152]받은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을 대표하는 것이 이소자키 아라타[磯崎 新, 1931~ ]를 리더로 해서 포스트 메타볼리즘을 표방한 일련의 젊은 건축가들이다. 이들의 등장에는 무엇보다도 1970년대 일본 사회라는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 “(일본의) 1970년대는 전후 재건이나 정치 민주화, 경제성장 같은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시기이다. 따라서 건축도 사회를 표현하는 공적 역할을 떠맡는 대신, 시적 감흥과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서 사적 성격이 강해졌다.” [p. 207]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1983)은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217


전후 1세대에 속하는 3세대 건축가들은 단게처럼 대동아 공영권의 그늘에서 발버둥칠 필요도, 메타볼리즘이나 이소자키처럼 히로시마의 유령과 싸우거나 종말의 순간을 상상할 이유도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건축의 목표가 국가의 부흥과 동일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롯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pp. 227~228]


3세대 건축가를 대표하는 이토 도요[伊東 豊雄, 1941~ ]메타볼리즘의 영웅주의적 자의식과 위압적이고 값비싼 거대 스케일의 디자인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거주민의 삶과 밀착한 주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p. 237] 그의 라이벌인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 ]도시를 으로 규정하고, 주택을 도시로부터의 피난처이자 개인을 지켜주는 저항의 요새로 접근했다. 이를 위해 공간의 개방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둥과 보로 하중을 받치는 근대건축 전략을 폐기하고, 대신 견고한 벽을 쌓아 내밀한 사적 영역을 만드는 영벽(領壁)”의 부활을 주장했다.” [p. 243]

이처럼 1970년대에 데뷔한, 이들 신세대 건축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외부와 단절된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닫힌 주택에 관심을 가졌다. 이토 도요의 ‘U HOUSE’(1976)나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파사드의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1976)는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토 도요의 U HOUSE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p. 240~241


안도 다다오의 스미요시 나가야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242



1990년대 이후 장기 불황_() 전후 건축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전 체제가 해체되고, 경제의 버블이 꺼지면서 일본은 장기 불황에 빠진다. 이로 인해 냉전 질서 아래에서 평화와 안정, 풍요를 누렸던 일본의 전후패러다임이 붕괴” [p. 271]했다. 건축분야에서도 호황기에 유행했던 과시적이고 거대한 포스트모던 건축이 비판되고, 대신 기능성, 경제성, 친환경성, 로테크(lowtech), 공동체성 등의 가치가 새롭게 모색()” [p. 272] 주택 설계만 활기를 유지했다.  국내에는 <와타나베의 건축 탐방>(1989~ )으로 알려진 주택 탐방 TV프로그램이나 <카사 브루투스>(1998~ )처럼 주택과 인테리어를 소개하는 잡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p. 272]

언뜻 예술 소주택 붐이 일었던 1970년대와 비슷해 보이지만, “1990년대 이후 주택을 둘러싼 논의는 고령화와 인구감소, 소자녀화 등 당시 일본에 불어 닥친 급격한 사회적, 인구학적 변동” [p. 286]때문이었다.


2011 3.11 도후쿠 지방의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사고는 또 한 차례의 변곡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재난 이후 건축이 재난복구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시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택을 통해 위기에 처한 일본을 개조한다는 구상마저 나왔다.

그러나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인 신국립경기장과 관련된 논란은 그러한 변곡점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국제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설계안을 진행 중에 백지화시키고, ‘약한 건축’, ‘작은 건축을 지향하는 구마 겐고[隈硏, 1954~ ]의 설계안을 새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사회를 통해 건축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 사회, 한국 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일본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 한국 건축의 가까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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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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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선선국(敾善國혹은 누란(樓蘭)

 

실크로드의 도시국가라고 하면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소멸되었다는 누란(樓蘭혹은 크로라이나(Kroraina)가 먼저 떠오른다. ‘방황하는 호수’ 로프누르(Lop Nor) 부근에 위치했다는고대 인도유럽어계 토하라인(Tocharians)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국가는 오랫동안 환상 속의 국가로 알려져 왔다왜냐하면 다른 실크로드 도시국가와는 달리 아예 흔적자체가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도시국가 누란의 이야기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곳을 방문하도록 유혹하고여러 이야기꾼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의 검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혜린(1962~ )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1996)나 ’, “꽃을 위한 序詩’,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 등으로 유명한 김춘수(金春洙, 1922~2004)의 시 누란(樓蘭)’(1980)도 이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아쉽게도 이 지역이 1990년대 말까지 핵실험장소로 45차례 사용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탓에 상주하는 사람도 없고 로프누르 호수도 말라버렸다고 한다.

 

 

천산 남북로의 교차점고창국(高昌國혹은 투르판[吐魯蕃]

 

투르판[Turfan, 吐魯蕃]은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갈라지는 길목에 위치해 위치해서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오아시스 도시로 꼽혀왔다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빛나는 장대한 도시 유적지인 교하고성과 고창고성비록 제국주의 탐험가들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베제클리크 석굴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많은 유물을 전하는 아스타나 고분군, <서유기>에 나오는 전설 속의 화염산근대 이슬람 유적인 소공탑(蘇公塔에민 미너렛)거기에다 삶의 슬기가 낳은 인공수로인 카레즈” [p. 56] 등이 남아 있어 실크로드 답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게다가 이곳은 아리안계의 차사인(車師人)이 세운 차사국(車師國, ~460), 한족(漢族)인 국()씨가 지배하던 고창국(高昌國, 502~640), 위구르족의 천산위구르[高昌回, 843~1209] 왕국 등 지배자와 주민이 바뀌면서 계속 새로운 문화가 들어와서 문명의 용광로라고 불리기도 했다그런 만큼 실크로드의 변천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지인들은 교하고성(交河古城)을 아르호토라고 부르는데, ‘언덕 위의 성이라는 뜻이다이곳은 흙을 쌓아 세운 것이 아니라 지하로 파 내려가면서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조성된 천연의 성채로서역 36국 중 하나인 차사국(車師國)의 왕성이었다

고창고성(高昌古城)은 교하고성의 4배나 되는 규모의 도시로 고창국(高昌國)의 왕성이었다교하고성과 달리 흙벽돌을 쌓아 조성되었는데,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에 의해 철저하게 마니교의 벽화네스토리우스교[景敎]의 벽화조로아스터교의 벽화 등이 도굴되고 약탈되었다여기서 북쪽으로 2km 정도 가면 국씨 고창국과 당()나라의 서주(西州지방[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지배층의 공동묘지인 아스타나[阿斯塔那고분이 나온다.

투르판 불교 유적을 대표하는 베제클리크 석굴[Bezeklik Caves, 柏孜剋里 千佛洞]은 약 800년간 83개의 석굴이 조성되었는데일반에게는 6개만 공개되고 있다이곳의 벽화들은 14세기부터 이 지역이 이슬람화하면서 1차 훼손되었고,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에 의해 흙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벽화가 떼어져서 약탈당했다게다가 유물보존능력을 핑계로 약탈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탐험가들의 변명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공습으로 베제클리크 석굴의 대형 벽화 28폭은 영원히 사라졌다.

 

 

인도 페르시아 문화와 중국 문화의 교차로구자국(龜玆國혹은 쿠차 [庫車]

 

투르판에서 천산남로를 따라 좀 더 들어가면 위구르어로 십자로라는 뜻을 가진 쿠차 [Kucha, 庫車]가 나온다구자국(龜玆國)의 도읍이기도 한 이 곳에는 키질 석굴쿰투라 석굴수바시 사원 등 불교 유적지가 몰려 있다.

 

백양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걸으면최초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鳩摩羅什, 344~413]의 동상이 있다이 동상을 지나 도착한 키질 석굴은 용도와 구조에 따라 승방굴(僧房窟중심주굴(中心柱窟), 대상굴(大像窟), 방형굴(方形窟)로 나뉜다승방굴을 스님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공간이고 일반적으로 거실통로작은방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중심주굴은 예배공양 등 종교 활동을 위한 곳으로 석굴 중앙에 방형의 중심기둥이 있어 탑을 상징하며기둥 양옆과 뒤로 난 통로를 통해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구조다대상굴은 중심주굴과 구조가 비슷하나 중심주 정면에 커다란 불상을 모신 구조다방형굴은 주실 평면이 네모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승려들이 불경을 강독하던 공간” [pp. 206~207]이라고 한다.

쿰투라[庫木吐拉] 석굴도 다른 석굴처럼 이슬람화에 따라 파괴되고, 20세기 초 독일프랑스러시아일본의 탐험대에 의해 벽화가 약탈되어 성한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처럼 제작 연대와 승려 이름불상의 이름도상의 내용을 적어놓은 제기가 많이 남아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13세기에 폐사(廢寺)되어 절터만 남아 있는 수바시[蘇巴什] 사원은 서역 불교의 총본산이었을 뿐 아니라 인도의 불교와 중국불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p. 257]을 한 중요한 유적지다.

불교 문화에서 이슬람 문화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은 신강성의 양대 청진사(淸眞寺이슬람교도들의 예배당가운데 하나인 쿠차대사[庫車大寺]와 1759년 청()나라 건륭제로부터 쿠차왕의 작위를 받은 아오떼이[鄂對, ~1778 ]의 후손들이 살아왔던 쿠차왕부[庫車王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우전국(혹은 호탄[和田]

 

‘황량한 사막 산’이라고도‘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해석되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끝없는 모래언덕과 사나운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땅이다이곳을 건너면 옥과 불교의 도시 호탄[Khotan, 和田]이 있다호탄은 서역 불교가 성립한 곳으로 평가 받고쿠차와 함께 서역 불교의 양대 종가로 불리기도 했지만 1006년 이슬람 국가인 카라한 왕조에 점령된 이후 불교건축물이 단 한 곳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이슬람의 색채가 강한 곳이 되었다호탄옥은 중국 4대 명옥(名玉)의 하나이면서 옥 중의 옥으로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의 진주소륵국(疎勒國혹은 카슈가르[喀什]

 

호탄에서 곤륜산맥을 왼쪽에 두고 서역남로를 따라 이동하면 카슈가르[Kashgar, 喀什카스]가 보인다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이 맞닿고천산남로와 서역남로가 만나는 교차점이다하지만 막상 카슈가르에서 답사할 곳은 많지 않다이슬람 사원인 아이티가르 청진사향비묘(香妃墓)로 알려진 아바 호자 능묘’, 그리고 카슈가르 고성(古城정도다” [p. 391]라고 한다.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에 놓치지 않아야 할 곳은 야르칸드 한국[葉爾羌 汗國, 1514~1680]의 수도였던 야르칸드다이곳에는 열두 무카무[十二 木]’라는 이름으로 위구르 민족의 춤과 음악을 체계 있게 정리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지킬 수 있게 한 아마니사한(Amanisahan, 1526~1560) 왕비의 영묘(靈廟)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이번에 마무리 된 실크로드 답사기 이후 전공인 한국미술사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한다언젠가 서안과 낙양에서 시작하는 본격적인 중국 답사기가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아쉬움 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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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 낭만이 깃든 작고 오래된 가게 노포 탐방기
천구이팡 지음, 심혜경 외 옮김 / 페이퍼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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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은

 

타이난[臺南]은 타이완[臺灣]의 옛 수도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일본으로 치면 교토[京都]에 해당하는 도시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숨어있는 듯 드러난 노포(老鋪)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왕하오이는 “최근에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화가들은 타이난에 머물며, 옛 도시들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색다르게 ‘감상’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p. 5]고 한다. 그런데, 구혜란의 <뉴욕 백년 식당>,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의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 이인우의 <서울 백년 가게>처럼 노포들을 다루는 글을 여럿 읽다 보니, 평범한 여행기를 거부하고 색다르게 감상하는 것은 타이완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하나의 트렌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SNS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진에 지쳐서인지, ‘악어’라는 예명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그린 수채화 풍의 그림이 반가웠다. 마치 썬 베드에 몸을 뉘이고 빨대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촨루[民權路]와 신메이제[新美街]라는 두 거리의 지도가 먼저 나오고 각각의 거리에 있는 노포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옛 거리 느리게 걷기’라는 제목으로 관광명소가 소개되며, 책 마지막에 노포에서 만난 사장님들의 사진이 자리잡고 있다.

 

신메이제[新美街] 지도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76~77

 

웨이쥔방 댜오커옌주서[魏俊邦 彫刻硏究社]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90~91

 

옛 거리 느리게 걷기_쓰덴우먀오 다관디먀오[祀典武廟]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84~85

 

노포에서 만난 사장님들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172~173

 

타이난 노포의 매력

 

제일 먼저 소개된 곳은 신위진빙푸[新裕珍餠?]라는 옛날 과자를 파는 가게이다. 이곳은 가게 주인인 커빙장[柯炳章]은 6년 동안 손수레를 끌며 장사하다가 1963년 ‘신위진(빙푸)’를 창업해서 50여 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그는 “가게에서 파는 제품은 그 가게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적당히 만들면 안 되며, 과자에 ‘믿음’을 담아 ‘한결같은’ 가게 정신을 고객들에게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p. 20] 기력이 떨어지자 빵과 케이크는 포기하고 과자만 팔고 있다. 그의 아내인 커천몐[柯陳麵]도 “가게에서 항상 정장이나 양장을 갖춰 입고 깔끔하게 화장을 한 다음 립스틱을 꼭 바른다. 그리고 손님들 한 명 한 명을 예의를 갖춰 맞이한다.” [p. 20]

 

100년이 넘는 가게인 전파차항[振發茶行]은 타이난에서 최초로 공식 등록된 차 도매상으로 수작업으로 찻잎을 포장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불상 조각계의 성형미용센터를 자처하는 허취쉬안포쥐텐[和成軒佛具店]은 1971년부터 20년 간 불상 조각이 유행했던 때 창업을 했으나 지금은 고인의 모습을 불상처럼 만들어 신격화하던 유행도 사그라지고, 중국 본토에서 불상도 수입되면서 곤란을 겪고 있다. 현재는 다른 가게에서 만든 불상을 수선하고 교정하는 서비스도 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음식남녀>,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등의 감독으로 유명한 리안[李安, 1954~ ]이 영화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라는 취안메이시위안[全美戱院], 백 년 전 방식으로 수제 향(香)을 만드는 우완춘상푸[吳萬春香?], 아연생활용품을 제작하는 룽싱야첸덴[隆興亞鉛店], 결혼 축하예물로 쓰이는 시장[喜?]을 만드는 진위안룽시장[錦源榮喜?], 3대째 내려오는 나막신 가게인 전싱세항[振行鞋行] 등 다양한 노포들의 모습에서 교토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타이난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달리는 기록들

 

저자는 “오래된 가게들에 대한 생각을 글로 표현해 보려고 관찰한 사실에서 감동받은 내용을 단편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림으로는 전달할 수 없었던 감정을 글로 적어 보았다. 여행하면서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고향의 오래된 가게를 그린 다음, 여행자의 눈길로, 여행지의 가게를 방문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다” [p. 6]고 한다.

 

저자가 오래된 가게를 기록하는 도구들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14~15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면,

낯선 가게에 들어가게 되면 보통은 내가 미리 준비해 둔 말을 꺼낸다. 오래된 가게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림을 그려 화첩에 소장하고 싶다고. 사연을 모르는 가게 주인들은 우선 내가 왜 자신의 가게를 그리는지 궁금해했고, 이어서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서 내게 앉으라고 권한다. 때로는 목을 축이라고 차를 한 잔 따라 주거나 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사장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들이 가게 업무를 보다가 내가 뭘 그리는지 잠깐씩 보러 오면 함께 잡담을 나누다 다시 서로의 일에 집중하곤 했다. 스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사장님은 외부인인 내가 아직 가게에 있다는 걸 깜빡 잊고는 부인과 농담을 하거나 말다툼을 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게 될 때도 있었다. 이웃들과 수다를 떨고, 심지어는 온 가족들이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따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현장 경험들은 아주 재미있었다. 취재하면서 맞이하는 최고의 순간은 바로 가게의 역사나 오래된 물건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을 때였다. 오래된 가게의 매력은 바로 세월이 흐르면서 층층이 쌓인 이야기들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리고 사장님들의 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시대에 속했던 옛 맛을 그려 낼 수 있다.” [pp. 6~7]

 

저자가 이 책을 펴내는 데 3년 이상 걸렸다는데, 많은 사장님들이 연세가 많으셔서 그 사이에 전파차항[振發茶行]의 4대 사장인 옌찬청[嚴燦成]처럼 세상을 떠난 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노포의 지속 가능성은 ‘사람’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저자도 “오래된 가게들을 방문하는 건 정말 ‘시간’과 함께 달린 기록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p. 7]고 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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