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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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답사

 

돈황(敦煌) 명사산(鳴沙山) 자락에 자리잡은 막고굴(莫高窟)에는 4세기경부터 시작해서 14세기까지 약 1천 년간에 걸쳐 석굴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은 492개인데, 이 중 수(隋)나라 때 97기, 당(唐)나라 때 225기가 만들어졌다니 전체 석굴의 4분의 3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셈이다.

막고굴 석굴의 관람은 보존을 위해 하루 6천 명으로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예약된 관광객만 15분 단위로 입장시키는 등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막고굴 석굴을 관람하려면 먼저 막고굴 디지털 전시 센터로 가서 돈황과 막고굴에 대한 영상을 본 후 막고굴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막고굴 부근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막고굴 입구의 솟슬대문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이드를 만나 석굴을 구경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관람자 별로 2시간 동안 8개의 석굴을 볼 수 있으며, “막고굴 석굴 중 가장 큰 불상인 북대불(北大佛)이 있는 제96굴과 돈황문서가 발견된 장경동(제17굴)이 있는 제16굴은 공통으로 보여주고 나머지는 관람객들이 겹치지 않게 가이드가 조절하여 안내” [pp. 23~24]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 1부 ‘막고굴’에서 두 차례에 걸쳐 11개의 석굴을 관람하고 막고굴에 있는 불상과 벽화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5굴의 모형(돈황박물관)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13

 

박공식의 제254굴 천장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8

 

북두형 천장의 제285굴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9

 

제275굴 교각미륵상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93

 

돈황문서 수난기

 

막고굴은 한동안 잊혔다가 20세기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00년 도사(道士)를 자처한 왕원록(王圓?, 1851~1931)에 의해 제16실 안에 있는 감실, 지금은 제17굴로 불리는 장경동(藏經洞)에서 돈황문서 3만 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문서 가운데 연도를 알 수 있는 것을 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인 353년의 필사본이고,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은 북송(北宋) 때인 1030년에 작성된 필사본이다.” [p. 112]

비록 이곳에서 발견된 불경의 “대부분이 잔권(殘卷) 단편들이고 가짜 경전으로 의심되는 위경(僞經)도 적지 않다. 심지어 잘못 베껴 버려진 두루마리와 먹을 덕지덕지 칠한 잡다한 글씨의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응당 있어야 할 <대장경>에 수록된 주요 경전이나 <대반야경> 등 고급 불경이 없다”[p. 113]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황문서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불행히도 이후 중국에서 ‘도보자(盜寶者)’라고 부르는 영국의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 미국의 랭던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 등이 돈황문서와 유물을 가져가 전세계로 흩어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05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오브루체프(Vladimir A. Obruchev, 1863~1956)가 왕원록에게 승려의복용 직물, 향, 등잔용 기름, 구리 주발 등이 든 6꾸러미를 주고 고문서 2상자를 가져간 것을 시작으로, “1907년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어리숙한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약1만 점을 유출하여 영국박물관에 가져갔고,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다시 5천 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가져갔는데 그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필사본도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청나라 정부가 북경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흩어져 있던 (약 600종의) 문서와 불상을 유출해갔고, 미국의 랭덤 워너는 (돈황문서가 아니라) 불상과 벽화를 뜯어갔다.” [p. 49]

 

돈황문서는 이렇게 흩어졌지만 남아있는 돈황벽화라도 수호한 이들도 있었다. 제백석(齊白石)과 함께 현대 중국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대천(張大千, 1899~1983)은 1941년부터 막고굴 벽화를 모사하는 동시에 석굴마다 번호를 매기며 조사했다. 파리에서 활동한 전도유망한 화가였지만 귀국해 40여 년을 막고굴 보호와 연구에 헌신한 만주족 화가 상서홍(常書鴻, 1904~1994)도 있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韓樂然, 1898~1947)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려는 창조파에 속했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중국 국민당 고급장교를 상대로 하는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했고, 이로 인해 국공합작의 와해 이후 체포되었다. 다행히 각계의 구명활동으로 “활동 지역을 서북지역[감숙성과 신강성]으로 한정할 것과 작품에 노동 인민을 그리지 않을 것을 조건” [pp. 234~235]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돈황 벽화를 모사하며 발굴조사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막고굴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호하였다. 오늘날에는 돈황연구원이 그들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20세기에 일어난 막고굴 약탈, 즉 돈황문서의 수난사는 어떻게 보면 답사기와는 다소 핀트가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막고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에 수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아 감정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황에는 막고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돈황 인근에는 막고굴 외에도 가볼 만한 답사처가 많다. 과주(瓜州) 혹은 안서(安西)에 있는 유림굴(楡林窟)은 막고굴의 자매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제2굴과 제3굴에서 탕구트계의 나라 서하(西夏)가 남긴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제2굴 서쪽 벽의 남측과 북측의 수월관음도는 고려의 불화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떠올리게 한다.

 

제2굴의 수월관음도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p. 284~285

 

돈황 시내에서 각각 서남쪽, 서북쪽에 위치한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은 예부터 서역으로 열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실크로드라고 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은 아니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사막답게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실크로드의 두 관문인 양관과 옥문관을 따라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형성된 것이다. “양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남로는 곤륜산맥의 오아시스 도시인 누란(樓蘭)과 호탄[Khotan, 和田]을 거쳐 카스[喀什]에 이르는 길이다. 옥문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북로는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길로 투르판[Turfan, 吐魯蕃]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천산남로는 쿠얼러[Korla, 庫爾勒]와 쿠차([Kucha, 庫車]를 지나 카슈가르[Kashgar, 喀什, 카스]에 이르고, 북쪽으로 나아가는 천산북로는 우루무치[Urumqi, 烏魯木齊]를 지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로 나아가는 초원의 길이다. 강인욱 교수의 지적대로 실크로드는 선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를 잇는 점을 말한다.” [p. 304]

 

다음 권에서는 <서유기(西遊記)>의 모델이 된 현장법사(玄?法師)가 불경을 찾기 위해 떠났던 길을 따라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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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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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에 대한 로망

 

버려진 곳’ 혹은 돌아올 수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타를라마칸’ 사막하지만 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포함한 타림 분지에서는 한때 소위 실크로드 문명이 번성했었다하지만 실크로드 문명의 몰락과 이후 생겨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하나의 문명이 소멸되었다는 전설 1)은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여러 이야기꾼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의 검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혜린(1962~ )이 그녀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1996)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누란(樓蘭)2)이 소멸되는 것처럼 묘사했던 것처럼.

 

한편, ‘’, “꽃을 위한 序詩’,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 등으로 유명한 김춘수(金春洙, 1922~2004)도 누란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누란(樓蘭)

 

                                   김춘수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五千里사방(四方)이 돌밭이다월씨(月氏)3)가 망()할 때,

바람 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千年)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百年)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三藏法師현장(玄奬)도 들었으리

 

명사산(鳴沙山).


그 명사산(鳴沙山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삭운(朔雲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기원전(紀元前백이십년(百二十年). ()의 한 부족(部族)

그 곳에 호(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이천 구백 이십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실크로드의 답사

 

실크로드의 시작은 섬서성(陝西省서안(西安)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있는()나라 때의 장안(長安)이다이곳을 포함해서 진령산맥(秦嶺山脈북쪽에 서쪽으로는 대산관(大散關),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 남쪽으로는 무관(武關), 북쪽으로는 소관(蕭關)으로 둘러싸인 들판이 있는데이를 4개의 관문[]의 가운데[]라는 의미로 관중평원(關中平原)이라고 한다관중평원은 관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 得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대 중국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고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렇기에 중국답사기가 서안함양공항아니 관중평원에서 시작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물론권두의 중국답사기를 시작하며에서 저자는 나의 중국 답사기 첫 번째 대상은 역대 왕조의 수도이다한 나라의 문화유산은 뭐니 뭐니 해도 옛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법이다따라서 나의 중국 답사기는 고도순례(古都巡禮)가 대종을 이루게 될 것” [p. 7] 이라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아쉽기는 하다구체적으로 중국 8대 고도[북경(北京), 서안(西安), 낙양(洛陽), 남경(南京), 개봉(開封), 안양(安陽), 항주(杭州), 정주(鄭州)]를 열거하며, “나의 중국 답사가 여기에 머물리 만무하다내 전공이 미술사인지라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있는 미술사적 명소를 즐겨 찾아 다녔지만 실제로 답사의 감동은 오히려 사상사문화사의 고향에서 받은 것이 더 크고 진했다” [p. 10]고 말했다하지만돈황(敦煌)으로 가는 답사여행의 출발지는 서안이 아니라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咸陽)이었으니까따라서 서안을 본격적인 답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기에 다소 아쉽지만단지 그뿐이다.

지난 2000, 2억 위안[ 340억원]을 투입해 영화 세트장 형태로 만화 같은 건물을 짓고 동상 조각을 배치” [p. 39]해서 아방궁 테마파크를 세웠다고 하는데나는 2001년 서안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진시황릉의 진시황 동상이 떠올랐다.

 

아방궁 테마파크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1>, p. 38

 

진시황릉 앞 진시황 동상



 

대륙을 연결하는 회랑처럼 길게 뻗어 있는 협곡이 마치 ‘달리는 회랑’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하서주랑(河西走廊)은 동쪽 오초령(烏?嶺)에서 시작해 서쪽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남으로는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 북으로는 마종산(?), 합려산(合黎山및 용수산(龍首山)) 사이 길이 약 900km의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이곳은 한나라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하서 사군[河西四郡무위(武威凉州), 장액(張掖甘州), 주천(酒泉肅州), 돈황(敦煌沙洲)]을 설치한 곳이다고구려의 유민인 고선지(高仙芝, ? ~ 756)가 정벌했던 서역(西域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이기도 하다.

 

맥적산(麥積山석굴 답사를 끝내고 왜 우리나라는 이런 석굴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구현되는 법” [p. 136]이라고 대답한다그리고 어떤 형태의 유무에 우열을 두지 않고굴착이 용이한 사암(砂岩절벽이 많은 인도와 중국에는 석굴 사원이화강암(花崗岩)이 많은 한국에서는 마애불(磨崖佛)과 산사(山寺)일본의 독자적인 정원 예술이 반영된 사찰정원을 공평하게 감상할 것을 주문한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은 명()나라 초기에 몽골의 후예를 자처하는 티무르를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관문으로 명나라의 쇄국정책을 암시하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가욕관을 나와 고비 사막을 질러가면 드디어 돈황(敦煌)에 도착한다.

타임슬립이라는 작품의 형식과 실크로드라는 배경이 유사한 김혜린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에 저자가 소개한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 <돈황>(1959)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진다.

 

하나 덧붙이자면,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때명사산(鳴沙山명불허전(鳴不虛傳)’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놀랐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사자성어가 귀에 박혀 있어편집과정에서의 오류로 이름 명[]’이 아닌 울 명[]’이 들어간 줄 알았기 때문이다다행히 책을 펼쳐보니 월아천(月牙泉 3층 누각인 월천각(月泉閣)에 걸린 현판에 그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그리고 명사산의 명성이 헛되이 전하는 것이 아니다”[p. 332]가 아닌 명사산의 울림은 헛되이 울리는 것이 아니다” [p. 332]에서 오는 울림이 더 컸다고 하니 아마도 그런 이유로 소제목을 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 소위 실크로드 문명이 모래바람으로 순식간에 소멸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다이들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세력과 한()으로 대표되는 정착세력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간신히 생존했다누란의 경우에도 국가가 소멸된 후 도시로서의 기능은 유지했으나 유목민들의 침탈 속에서 인구가 감소하여 소멸했다고 한다.


2) 누란(樓蘭혹은 크로라이나(Kroraina):  누란이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가 전한(前漢)의 문제(文帝)에게 월지[月氏]에게 이겨 누란 등 26국을 평정했다는 선언이 담긴 편지[B.C. 176]에 의한다이후 누란은 생존을 위해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세력과 한()으로 대표되는 정착세력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다그 과정에서 B.C. 77년 한나라가 보낸 사신에 의해 누란의 왕인 안귀(安歸)가 암살당하고 나라 이름이 선선(?)으로 개명당했다. 448년에 이르면 독립된 왕국으로서 누란 혹은 선선은 사라진다.


3) 월지(月氏): 타림 분지에서 동서 무역을 독점하던 고대 인도유럽어계 토하라인(Tocharians)의 일파로 추정된다기원전 2세기 흉노에게 멸망한 후 서쪽으로 가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던 그리스계 박트리아를 정복한 세력을 대월지(大月氏)라 하고타림 분지에 남아 누란(樓蘭), 쿠차[龜玆國등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던 세력을 소월지(小月氏)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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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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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파리는 날마다 축제>을 읽으면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주연인 길 역을 맡은 오웬 윌슨(Owen Wilson)이 된 기분이었다왜냐하면 이 책은 Lost Generation을 대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이하 헤밍웨이’)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과 비슷한 시기[1921~1926]의 파리에 거주하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헤밍웨이의 이동경로에 따라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저자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느낌도 든다.

 

 

가난마저도 추억이 되는 도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헤밍웨이는 갓 결혼한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함께 파리로 향했다비록 그가 <토론토 데일리 스타>의 해외 통신원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가난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작가 지망생 혹은 무명의 작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이 무렵의 헤밍웨이가 살던,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우리 아파트는 온수도 안 나오고 제대로 된 화장실 시설도 없이 간단한 변기통만 있었지만그래도 미시간의 오막살이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p. 35]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베를린의 <데어 크베어슈니트>에서 보내온 원고료 600프랑을 받고 생 제르맹 거리의 리프(Lipp)에서 가졌던 한 끼 식사를 수십 년이 지나도록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왠지 짠했다.

이제 어디 가서 식사나 할까나는 리프 Lipp에 가서 한잔하면서 식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

맥주는 시원하고 맛있었다올리브유를 뿌린 감자 샐러드는 적당히 짭짤하고쫀득쫀득했으며 올리브유의 향미도 감미로웠다나는 통후추를 가루 내어 감자에 뿌린 다음빵을 올리브유에 적셨다첫 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서그 다음부터는 천천히 마시면서 식사했다감자 샐러드를 다 먹고 나자한 접시 더 주문하면서 세르벨라를 추가했다세르벨라는 굵은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세로로 자르고 그 위에 겨자 소스를 끼얹은 요리다.

올리브유와 소스를 빵으로 깨끗하게 닦아 먹은 다음나는 맥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천천히 다 마시고는 반 리터짜리 맥주를 더 주문하고 웨이터가 맥주통에서 맥주를 뽑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번 것은 1리터짜리보다 더 시원했다나는 단숨에 잔을 반쯤 비웠다.” [pp. 83~84]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기록하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몇 십 년 전이 아니라 1년 전 식사도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도대체 얼마나 평상시에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저 한 번의 식사가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문득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 실린 실직한 남편이 직장 다니는 아내를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를 마련해서 왕후(王侯)의 밥걸인(乞人)의 찬이라는 메모를 남긴 한 가난한 신혼부부 이야기가 떠오른다.

 

파리에서의 삶은 힘겨웠지만헤밍웨이는 굴복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스스로 자부했으며부자들을 경멸하고 불신했다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속옷 대신 스웨터를 입는 것이 내게는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자들뿐이라고 생각했다우리는 값싼 음식으로 잘 먹고값싼 술로 잘 마셨으며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고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pp. 50~51]고 얘기한다.

 

나아가 그는 파리는 내게 언제나 영원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어떤 모습으로 변하든나는 평생 파리를 사랑했습니다파리의 겨울이 혹독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가난마저도 추억이 될 만큼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 덕분이 아닐까요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p. 361]라고 말했다.

 

 

나는 글을 쓰려고 태어났고지금까지 글을 써왔으며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이 시절 헤밍웨이의 동료였던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이하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에게 팔리는 글을 쓸 것을 권유했다헤밍웨이에 따르면, “[피츠제럴드]는 내게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가 원하는 단편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잡지사에 팔기에 알맞은 단편 원고 쓰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일단노력을 기울여 좋은 단편을 써놓은 다음잡지사가 원고를 청탁하면 그 잡지사가 원하는 대로 잡지의 판매부수를 올릴 만한 작품으로 다시 수정해서 원고를 넘긴다고 했다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것은 몸 파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그는 그렇긴 해도좋은 작품을 쓸 돈을 마련하려면 잡지사에서 돈을 벌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나는 그에게 작가라면 자기 능력이 닿는 데까지 가장 좋은 글을 써야 하면그렇지 않는다면 자기 재능을 파괴하게 되리라고 말했다그는 자기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팔릴 작품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기 재능에 해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진짜 작품을 먼저 써놓았기에 설령 그것을 파괴하고 변형한다 해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pp. 170~171]

 

하지만 가난해도 훌륭한 글과 문장에 대한 헤밍웨이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피츠제럴드와 달리 나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절대로 생계의 수단으로 소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고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따라서 나는 더 많은 압박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기다리는 동안은 우선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써봐야 할 것” [pp. 87]이라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슬럼프가 와서 새로 시작한 글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 귤 껍질을 손가락으로 눌러 짜서 그 즙을 벌건 불덩이에 떨어뜨리며 타닥타닥 튀는 파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그렇지 않으면 창가에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넌 전에도 늘 잘 썼으니이번에도 잘 쓸 수 있을 거야네가 할 일은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그렇게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을 찾으면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p. 18]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린 췌장암에 걸려 복수(腹水)를 빼내고 있던 에반 쉬프맨(Evan Shipman, 1901~1957)과의 대화는 헤밍웨이의 꾸준히 노력하는 글쓰기를 한 마디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 “헴글 쓰는 것잊지 않을 거지?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내가 글 쓰는 걸 잊을 리가 있나.

나는 전화를 걸려고 밖으로 나갔다물론이지하고 생각했다글 쓰는 걸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나는 글을 쓰려고 세상에 태어났고여태까지 글을 써왔으며앞으로도 다시 글을 쓸 거야.”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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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 서울을 다시 짓는 건축가, 황두진의 나의 도시 이야기
황두진 지음 / 해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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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인가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이라는옆구리에 깊이 새긴 상흔(傷痕속에서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일어났다물론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이 요구되었다더불어 우리만의 확고한 정체성도 잃어야 했다.

때문에 특색 없는 아파트와 빌딩이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한회색도시 서울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화상 같은 공간이 되었다물론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듯이 우리도 아파트와 빌딩 같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울 수는 있다하지만그런다고 해서 개화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천 번도 넘게 우리 스스로 내팽개친 우리의 정체성이 되돌아 오지는 않는다지금이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쌓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솔직히 잘 모르겠다다만예일대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건축사 자격을 획득했지만한옥을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라면 뭐라도 힌트를 줄 것 같았다그래서 선택한 것인 서울 토박이 황두진이 자신이 살았던 동네와 집들을 떠올리며 쓴 개인의 역사이자 서울 변천사인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이다물론 이런 류의 책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얼마 전에 읽었던TV프로그램 <알쓸신잡시리즈로 인기를 얻은 건축가 유현준의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도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살았거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공간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는 서울에서 태어나지금도 서울에 사는서울 중에서도 강북 통의동에 사는 ‘동네’ 건축가 황두진이 얘기하는 서울이야기이다자신의 어렸을 적 서울을 얘기하면서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꼈던 서울의 기억과 지금의 서울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어 청바지에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포크 가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무엇보다도 거창하거나 난해한 건축 이야기가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이런 곳이었습니다라고 읊조리는 느낌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세간의 관심이라는 독()


그러면서도 건전한 상식인이라면 말할 수 있는 일침(一針)도 몇 개 늘어놓아초밥의 와사비처럼 톡 쏘는 느낌을 안겨준다.

통의동을 포함한 창성동 및 효자동 일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경복궁 반대쪽인 사간동과 삼청동 등 소위 북촌 지역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여기에는 북촌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없고유수한 화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다서울시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도심 역사지구 보존사업에서도 이 지역은 빠져 있다한마디로 이렇다 할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축복인지도 모른다지금까지 그 세간의 관심이라는 것이 한 동네를 얼마나 순식간에 망쳐놓는지 보아왔기 때문이다인사동은 이제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되었고풍운아 박영효의 집은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졌다가회동 일대는 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는 즉시 개발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공룡 같은 굴착기에 의해 수많은 한옥들이 쓸려나가는 광경을 잊지 못한다그리고 드라마 <모래시계>로 인해 정동진은 더 이상 한가로운 바닷가 기차역이 아니다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진보며 발전이라고 믿었던 그 시기에그나마 통의동을 지켜준 것은 엉뚱하게도 이웃의 청와대였다.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이 세계적인 자연생태환경인 비무장지대라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면청와대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강박적인 자기보호본능이 통의동이라는 도시적 타임캡술을 만들었다.” [pp. 135~136]

저자가 아쉬워했듯이 번듯하고 유서 깊은 집들이 개발과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사라졌다이러한 집 한 채가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화석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게다가 이 순간에도 재건축 승인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무기로 아파트 1개 동은 미래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고 있다1) 2)고 한다뭔가 반대로 된 것이 아닐까차라리 오래된 건축만큼은 함부로 부수거나 개조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황당한 상황은 저자가 서울 성곽 답사를 시도하면서 맞이해야 했다김중업이 설계한 서산부인과김수근이 설계한 타워호텔을 보면서 그는 김중업과 김수근이들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두 거장이자 누구보다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자기의 건축에서 중요한 담론으로 제시했던 장본인들이다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의 작업 대상지와 직접 관계된 한국건축의 중요한 역사적 유산인 서울성곽에 대해서 이들은 아무 말도 남기고 있지 않다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p. 251]라고 탄식해야 했다.

뿐만 아니다홍파동의 한 다세대주택의 주차장 기둥 사이로 서울성곽의 하부가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마주치기도 해야 했다풍납토성 해자 터에 태양광 주택단지 철거에 따른 건축 폐기물을 매립하라고 지시3)한 공무원에 버금갈 과오가 아닐까?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이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통의동도 가 보고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와 내가 거쳐온 동네들을 되돌아 보고 싶다.

 

p.s. 북촌에 있는 1930년대 한옥을 개보수한 무무헌(無無軒), 설계도를 그린 후 그것에 충실하게 낡은 한옥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취죽당(翠竹堂), 1936년에 지어진 서촌의 한옥을 젊은 신혼부부의 살림집으로 리노베이션한 애지헌(愛智軒등 저자인 황두진의 한옥 프로젝트의 산물도 보고 싶다.




1) 흉물 아파트가 미래 유산?... 강남 재건축 둘러싼 논란 가열”, <매일경제신문> 20.09.25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0/09/990869/]

2) “금남로 아파트 재개발 문화자원 보존.활용 외면’ “, <광주매일신문> 20.08.31 

 [http://m.kjdaily.com/article.php?aid=1598871549522570005]

3) “송파구청 직원 풍납토성에 쓰레기 불법 매립”, <YTN> 13.02.02

 [https://www.ytn.co.kr/_ln/0103_20130202142412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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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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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벽에 부딪힌 사랑

 

공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사라졌지만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 그리고 취향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층 혹은 계급의 벽이 존재한다. 1920년대 미국의 재즈 시대(Jazz Age)를 상징하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이하 피츠제럴드’)는 바로 이 계층/계급의 문제를 다룬 작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시카고 금융 부호의 딸인 지네브라 킹(Ginevra King, 1898~1980)과의 사랑이 이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되었다는 작가의 체험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1915년 그녀의 별장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녀의 아버지 찰스 킹이 그녀에게 큰 소리로 외친 가난뱅이는 부잣집 딸과 결혼할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해. (Poor boys shouldn't think of marrying rich girls)” [p. 38]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뿐만 아니라 이후 앨라배마주 대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 세이어(Zelda Sayre, 1900~1948, 이하 젤다’)와 약혼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파혼 당한다그리고 그의 첫 장편인 <낙원의 이편(This Side of Paradise)>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젤다와 결혼에 성공한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그는 스탕달(Stendhal, 1783~1842) <적과 흑>(1830)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처럼 로 상징되는 신분상승을 꾀했고자신이 쓴 <위대한 개츠비>(1925)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의 삶과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재즈시대의 아이콘

 

부잣집 막내로 자란 젤다와의 결혼은 어떻게 보면 계급의 사다리에서 한 칸 더 올라간신분 상승의 증명이기도 했다그래서 일까피츠제랄드는 상류층 사교계에 발들 디딘 후에는 한평생 부를 과시하는 생활을 했다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고대저택에 거주하고상류층 파티에 고급 옷을 입고 참석해 주인공을 자처했다.” [p. 40]

이렇게 술과 파티재즈 시대의 소비와 향락을 대표하는 이 단어들이 피츠제럴드 부부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 없이는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지만, ‘()’만 가지고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츠제럴드는 끝까지 상류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가 “저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처럼마치 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미국의 성장과 향락을 상징(했을지도 모른다)그는 우리가 문학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화려함을 가장 일찍 획득하고 이를 온몸으로 즐기고그 때문에 불나방처럼 그 화려한 불 속에서 타버렸다 [p. 292]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작가

 

마치 화려하게 빛나던 재즈 시대가 1929년 대공황으로 한 순간에 스러진 것처럼 피츠제럴드도 아내 젤다의 조현병자신의 알코올중독막대한 빚으로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그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는 시장의 외면을 받았고 너무나 미국적이라는 이유로 해외 출판도 거절되었다이후 9년 만에 내놓은그의 네 번째 장편 <밤은 부드러워>(1934)도 실패로 돌아갔다물론 핑계거리는 있다. “피츠제럴드가 소설을 쓰는 데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가 있다그는 볼티모어에서 아내 젤다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짧은 글들을 써야 했다이것이 생활의 주 수입원이었다소설가이지만 본업에 주력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동시에 스코티를 양육해야 했고무엇보다 스스로 알코올 중독과 싸워야 했다.” [p. 129]

여기에 1936년에 발표한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The Crack-up)>은 그의 작가로서의 생명을 사실상 끊어 버렸다이제 피츠제럴드는 순문학 작가로서 찾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 103]

 

결국 피츠제럴드는 아예 할리우드로 건너가 유령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아내 젤다의 치료비딸 스코티의 교육비자신의 생활비를 위해.

 

당연히 할리우드에서의 삶은 그에게 고통이었다그는 편집자 맥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에서 계속 공장 노동자처럼 일하는 건 영혼을 파괴하는 짓입니다영화계 현실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개성을 보고 이곳에 데리고 왔지만당신은 이곳에 있는 이상 개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나아가 그는 각색 작업을 할 때에도오로지 원작에 있는 단어만 써야 한다고 분통을 터트린다수정해야 할 신(scene)이 있으면 마거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마치 성서라도 되는 양 휙휙 넘기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내야 했다” [pp. 26~28]고 하소연할 정도로.

 

말년의 피츠제럴드는 고충을 겪고 있었다책은 팔리지 않는 데다사는 이는 자신뿐이었고작업한 영화 크레디트에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건강은 바닥을 쳤고지갑에는 푼돈도 없었다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그는 카페나 식당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집 근처의 약국에서 만났다게다가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술을 끊어야 했다. ” [pp. 57~58]

어쩌면 몰락한 것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잊혀졌으니까.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그가 자신의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나타나면서점 주인들이 놀라던 때였다모두 피츠제럴드가 이미 죽은 줄 알았으니까그만큼 그는 세상에서 잊혀 있었다그리고 어이없게도피츠제럴드는 화가처럼 사망한 후에 빛을 보기 시작한다그것도 그가 죽고 나서 10년이나 지난 후에 말이다.” [pp. 51~52]

 

1998년 초 뉴욕의 랜덤하우스 편집위원회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100대 영문소설 2위로 <위대한 개츠비>, 28위로 <밤은 부드러워>가 선정된 것은 피츠제럴드에게 주어진 수많은 사후(死後)의 영광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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