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 - 일상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은 여행, 특별한 발견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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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근교를 산책 합니다]는

 

작가의 말’에 담긴

 

이 책은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주말에 어디에 갈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지난 수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철과 버스를 타고 도쿄 근교 도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총 스무 번의 만남에 이르렀습니다. 도쿄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철 밖 풍경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도시와 마을의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세련된 멋이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가꿔온 문화와 꾸밈을 덜어낸 삶이 특별한 여운을 남깁니다도쿄 근교를 산책하며 발견한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p. 5]

 

라는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도쿄 근교에 대해 소개하지만, 도쿄 근교 여행 가이드북은 아니다. 말 그대로 도쿄 근교의 10개 현(縣)을 배경으로 ‘음식’, 인상 깊게 감상한 일본 문화 ‘콘텐츠’, 그리고 ‘키워드’라는 3개의 테마로 20개의 글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글마다 해당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담담히 얘기하고, 산책 tip, 가 볼만한 곳을 덧붙였으니 여행 가이드와 여행 에세이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셈이다.

 

 

음식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도쿄에 참치를 공급하던 가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 반도였다. 저자는 이곳에서 참치의 다채로운 맛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마구로 만개 세트’를 맛보며, 에도 시대(1603~1868)에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도 외면하고 뛰어넘어 간다는 뜻에서 ‘네코마타기[猫]’라고 불리며 버려졌던 참치의 영욕(榮辱)을 생각한다.

 

살다 보면, 본질이 바뀌지 않아도 상황이 바뀐 탓에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 종종 본다. 그 옛날, 기름지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참치가 지금은 똑 같은 이유로 선호되듯이 말이다. 먼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던 참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인정받으려 애쓰거나 억지로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준다 메시지는 꽤 희망적이다. [pp. 22~24]

 

가나가와현 에노시마[江の島]에 가서는 그곳의 명물, 시나스동을 시켰다가 한일 양국의 인간관계가 반영된 비빔밥과 돈부리의 차이를 떠올린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나는 두 나라의 밥 요리에 곧잘 빗대곤 한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이나 식사의 마지막에 나와 우스갯소리로 ‘코리안 디저트’라고 불리는 볶음밥은, 밥과 토핑이 한 몸처럼 뒤범벅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인간관계 보는 듯하다. 한편, 일본의 덮밥인 돈부리는 토핑과 흰 밥의 경계가 뚜렷하다. 입에 넣기 직전까지도 둘을 완전히 섞지 않음으로써, 재료 본연의 맛을 유지한다는 점도 큰 차이다. 혹시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 무의식 중에 음식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p. 29]

 

도치기[?木]현 닛코[日光]의 특산품인 가열한 콩물의 막인 유바[湯波]와의 만남을 애기한 글에서는 여행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여행은 사실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다름 아닌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자가 정작 관찰하는 대상은 외부 풍경이나 이국의 문화보다는 그런 자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p. 64]

 

 

콘텐츠

 

천편일률적인 패키지 여행에 질린 이들이 자신들만의 테마를 선정해서 자유롭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여행 방법의 한 가지가 자신들이 흥미롭게 본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나온 장소를 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소설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는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보다 소설 <도련님>의 발자취 따라 거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는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지만, 이 책에서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스즈와 학교 친구들이 즐겨 가던 식당과 카페를 방문했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 인상 깊게 본 작은 신사와 가게도 부지런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종일 이야기의 무대를 누비며, 나만의 추억을 덧씌웠다. 물론 내 여행은 사전 답사도 편집도 거치지 않은 현실이라, 모든 과정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스즈와 언니들이 맛있게 먹던 전갱이 튀김을 기대하고 간 에노시마의 한 식당에서는 똑같은 메뉴를 팔지 않았고, 만화에서 스즈가 요시노의 남자친구를 미행하던 어느 신사에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 내고 말았다. 또 스즈와 사치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산을 찾아 2시간을 헤맸지만, 태풍 탓이었는지 등산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바다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자매는 이나무라가사키의 해안선을 거닐며 아버지의 추억을 반추한다. 스즈에게는 다정했을지 몰라도, 세 언니에게는 자신들을 버린 원망스러운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이제 언니들에게 스스럼없이 장난도치는 막내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을 남겨준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p.116]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지 못해 저자의 감상에 쉽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내가 읽어보았던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新瀉]현 유자와[湯澤]를 방문한 이야기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도쿄에서는 이미 매화가 만개하고 성미 급한 벚꽃도 고개를 내밀던 겨울의 끝자락, 다카한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한 뒤 에치고유자와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창가에 앉으니 멀리 눈이 소복이 쌓인 산에 시선이 닿았다.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설산이 한기를 몰고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에치고유자와역에 내리기 전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자 고작 1시간 반 만에 도쿄와 완전히 다른 계절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맥과 건물의 지붕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칸센이 없던 시대에 설국을 찾은 시마무라처럼 보통열차를 탔다면, 길이 약 9.7km에 이르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한다. 긴 어둠을 지나 이토록 환한 설경을 마주한다면, 국경이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p. 160]

 

언젠가 겨울에 도쿄를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한번 유자와를 방문해서 설국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글이었다.

 

 

키워드

 

키워드’라는 테마로 여러 글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을 알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라는 뜻의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가 대표적인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쓰오카 세이고[松岡 正剛, 1944~ ]는 ‘이이토코도리’라는 일본식 문화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도시로 보면, 가나가와현의 항구 도시인 요코하마야말로 이이토코토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859년, 미국에서 온 페리 제독에 의해 닫혀 있던 빗장을 푼다. 비록 무력에 의한 불평등한 개항이었지만, 이는 요코하마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발 빠르게 체득한 요코하마인은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았던 서양식 호텔과 베이커리, 이발소를 열었고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을 만들었으며, 경마와 야구 시합을 즐겼다. 자연스레 외국인은 물론 선진 문물을 배우려는 일본인까지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중략 ~

지금도 요코하마 곳곳에는 150여 년 전 뿌리를 내린 세계 각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쉰다. 덕분에 여행객도 마치 셀렉트 숍에 온 기분으로 원하는 것을 취하는 이이토코토리 여행이 가능하다. [pp. 207~208]

 

또 다른 키워드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벚꽃을 죽음과 결부해 왔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고, 가장 화려할 때 덧없이 흩어지는 꽃잎이 생의 무상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바로 일본인만의 미의식이라 불리는 모노노아와레다. [pp. 290~291]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러브 레터> 등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모노노아와레’의 미학(美學)때문에 일본의 정서가 과거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쿄 사람들의 ‘에도[江戶] 시대’에 대한 감정도 ‘모노노아와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도쿄에 살다 보면, 이곳 사람들은 에도 시대(1603~1868)에 대한 집단적 향수를 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100년 넘은 가게를 일컫는 시니세[老?]는 흔하지만, 에도 시대 때부터 내려온 곳은 훨씬 각별하게 친다. 또, 도쿄 국제공항이나 스카이트리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에는 에도를 테마로 한 공간이나 전시물이 빠지지 않는다. 단순히 도쿄의 옛 지명이 에도라서는 아니다. 에도 시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를 지금의 수도로 만든 도시의 기원이자, 어쩌면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상징하는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pp. 234~235]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도쿄에는 에도 시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가 사라졌다. 다행히 개발의 열풍이 비껴간 덕분에 에도 시대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 있다. 바로 ‘고 에도[小 江戶]’라고 불리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 고에도로서의 자부심을 꼿꼿이 지켜나가는 가와고에는 가끔 들춰보고 싶은 오래된 사진첩과도 같다. 물질적 풍요나 첨단 기술은 도쿄에 집약되어 있지만, 막상 도쿄가 잃어버린 에도의 풍경은 가와고에에서 숨 쉬고 있으니. 그래서일까.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을 타고 가와고에를 떠날 때, 나는 일본인의 추억 한 페이지를 거닐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p. 240]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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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주택지 -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 정암총서 12
이경아 지음 / 집(도서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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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개발의 시작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주택 공급은 짓고자 하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만 존재하는 일종의 주문생산 방식이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엄청난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게 되면서 주택 공급 방식도 바뀌게 된 것이다조선 500여 년간 약 10만에서 20만 내외로 유지되던 한양의 인구 규모가 불과 30년 만에 100만에 육박하게 되는, 그야말로 ‘인구 폭증 시대’를 맞았다. 개발자 또는 개발회사는 앞다투어 대규모 필지를 사들이고 그것을 나누어 불특정 다수에서 분양하기 시작했다. [p. 9]

 

주택 개발의 시작이자, 부동산 투기의 시작인 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후암동의 학강(學岡)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昭和園) 주택지와 함께 경성의 3대 주택지로 손꼽히던 북아현동의 금화장(金華莊) 주택지다.

 

금화장 주택지는 원래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이었다금화장 주택지 개발을 할 당시 토막민들과 갈등이 생기는 일은 당연했다. 새롭게 개발된 신규 서양식 주택지와 주변으로 밀려난 토막민의 초라한 움집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비슷한 시기 신당동을 포함한 경성의 여러 주택지 개발에서 나타난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결국 밀려난 토막민들은 아현리와 홍제내리로 옮겨 아무런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p. 310]

 

이렇게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을 밀어낸 자리에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명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금화장 주택지는 금화산에 둘러싸여 있고 금화원이 있어서 녹음과 사계절의 풍경을 즐길 수 있고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땅이 건조하며 공기가 맑은 위생적인 주택지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 하는 교외 주택지의 이미지가 금화장 주택지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일찍부터 전차가 연결되어 도심부는 물론이고 한강의 마포까지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택지가 개발된 이후에는 전차를 타고 경성역, 용산, 멀리는 한강교를 건너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주택지였다. 금화장 주택지 올라가는 언덕 바로 앞에는 죽첨정이정목 전차역이 있었으며 인근에는 서대문소학교와 미동보통교, 죽첨보통교와 같은 교육시설적십자병원과 같은 의료시설동양극장과 같은 문화시설 등등 생활편의시설이 주택지 주변에 두루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유행을 타고 나타난 신규 주택지 금화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적의 주택지로 인식되면서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pp. 304~306]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은 이 땅을 30만원에 매입해서 10년 만에 130만원에 매각했다.

 

“이곳은 원래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 후작이 1916년에 매입한 땅이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장래 토지가격이 상승할 만한 곳을 찾았는데, 하세가와[長谷川] 군부 사령관에게 의뢰하여 찾은 땅이 바로 이 일대 토지와 부산의 토지였고 이것을 30만 원에 매입했다. 이 땅을 1926년 마스다 다이키치[增田 大吉]가 130만 원에 매입했다고 하니 이전 소유자였던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긴 셈이다.” [pp. 306~307]

 

 

한옥 개량의 노력 - 정세권과 박길룡

 

주택 개발의 시대는 ‘문화주택’이라고 불리던 서양식 주택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주택’의 광풍(狂風) 속에서도 한옥을 개량하여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인 경성의 건축왕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 1888~1965) (https://blog.yes24.com/document/9734348) 최초의 조선인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다.

 

먼저 정세권을 살펴보면,

 

그는 조선 재래주택의 단점을 발견한 뒤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목표로 매년 300여 호의 개량주택을 지었다주택 공급방식으로는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의 주택난에 다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직접 주택 개량의 실험대상이 되었다. 개량주택에 들어가 살다가 매각하기를 반복하면서 단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개선해 나가는 식으로 주택 개량 실험을 이어나갔다. 당시 박길룡과 같은 건축가들과 교류하면서 주택 개량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건축가도 정세권처럼 많은 한옥을 직접 짓고 살아보며 실질적인 개량안을 내놓진 못했다. [p. 21]

 

이러한 정세권의 한옥 개량 노력이 집약된 것이 가회동 한옥 단지다.

 

그 동안 가회동 일대는 역사적, 지리적 위상, 가장 한옥 밀도가 높은 한옥단지 정도의 이유로 유명세를 탔다.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한옥밀집지역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굳이 ‘100년’, ‘조선시대’라는 용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다른 한옥단지와 차별화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건축왕이자 민족운동가였던 정세권, 정세권이 가진 조선 주택 개량에 대한 꿈과 이상이 다양하게 실현되었던 곳그래서 20세기 전반 한옥이 ‘도시 주택’으로 변화해 가던 모습을 가장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 가치는 다른 한옥단지와 견줄 수 없다. [pp. 39~40]

 

이렇게 정세권이 실무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면, 박길룡은 이론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 주택에 관심을 두고 각지를 여행하면서 조사하고 그 기록을 도면으로 남겨, 이를 바탕으로 집중식(集中式) 평면배치와 부엌과 온돌, 변소 등의 개선안을 제시했다.

 

박길룡은 1926년부터 1943년 서거하기 전까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거의 매해 빠지지 않고 주택 개량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한글 매체든 일본어 매체든, 신문이든 잡지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재래 주택의 단점을 이야기하고 당시 주택건축 현황을 비판하고 개량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개량안을 제시했다. 개량안은 단지 말뿐 아니라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투시도, 액소노매트릭, 사진 등과 함께 게재해 대중의 이해도를 높였다.

중략 ~

그는 이미 지어진 주택에 대해서는 방의 위치를 바꾸는 것 같은 응급 조치책을 제시하고 새롭게 지어질 주택에 대해서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pp. 78~80]

 

하지만, 박길룡이 원하는, 집중식 배치의 건물과 주변의 외부공간을 두는 한옥을 짓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지와 건물이 요구되고문화주택’에 대한 열풍 몰아치고 있기에 이러한 주택 개량에 대한 박길룡의 생각은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생각을 가장 많이 반영한 것이 244평의 대규모 대지에 지어진 경운동 민병옥 가옥[지금의 민가다헌(閔家茶軒)]이다.

 

삼청동 H자형 하이브리드 주택의 평면과 입단면도

출처: <경성의 주택지>, p. 122

 

길가에 면한 부분에는 서양식으로 보이는 2층의 오오카베[大壁] 구조의 주택을 배치하고 안쪽에는 1층의 한옥을 배치한, 한일(韓日)절충의 H자형 주택을 제시한 김종량(金宗亮, 1901~1962)의 하이브리드 주택도 이러한 주택 개량을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별도의 출입 동선과 화장실 등을 두어 임대가 용이했으나 공간의 낭비가 심하고, 공사비가 비쌌으며, 겨울의 추위로 일본인마저도 다다미가 아닌 온돌을 선호했기에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식 주택, 문화주택의 도입과 광풍

 

당시 자유연애를 부르짖었던 신여성은 문화주택을 통해 상대방의 경제력을 가늠해 결혼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찬어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이라는 문구에서 나타나듯 자신의 삶을 문화주택과 치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여성을 노리는 사기꾼이 나타난다거나, 문화주택을 미끼로 결혼했다가 결국 파경에 치닫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져서, 어떤 이는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은행대부를 받아 지어보기도 했지만 이자를 갚을 능력이 안 되어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문화주택을 은행에 넘기고 은행에 넘어간 문화주택은 결국 외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pp. 48~49]

 

이렇게 ‘문화주택’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생활을 선호하면서도 온돌로 대표되는 기존의 습성은 버리지 않았다. 그 괴리 속에 외관은 벽돌조의 서양식 주택, 내부는 일본식 목조 주택 모듈과 중복도형 공간 구성을 취하면서 온돌 공간을 유지하는 한국, 일본, 서양의 주거문화가 공존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마치 서양문화를 수용하던 20세기 조선을 상징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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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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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인간의 생각과 세상의 물질이 만나 만들어진 결정체다. 건축물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할 때만 완성되기에 그 사회의 반영이자 단면이다. 건축물을 보면 당대 사람들이 세상을 읽는 관점, 물질을 다루는 기술 수준, 사회 경제 시스템, 인간을 향한 마음, 인간에 대한 이해, 꿈꾸는 이상향, 생존을 위한 몸부림 등이 보인다. [p. 6]

 

그렇기에 건축가 유현준이 충격과 감동을 받은 30개의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인문’이,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라는 권역 별로 소개하기에 ‘기행’이 각각 이 책의 제목에 포함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저자의 안내에 따라 건축 기행을 시작해본다.

 

빌라 사보아

출처: <인문건축기행>, p. 22

 

가장 먼저 소개된 건축물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1931)로, 그가 제창한 근대 건축의 5원칙1)1)이 고스란히 적용된 작품이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돌이나 벽돌을 이용해서 벽을 구조체로 하는 건축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기둥 중심의 건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로소 서양 건축은 벽이 주는 한계와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p. 19]

 

 

퐁피두 센터

출처: <인문건축기행>, p. 32

 

 

 

 

두 번째 건축물은 렌초 피아노(Renzo Piano, 1937~ )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1933~2021)의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Pompidou)](1977)다.

 

일반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면 우리는 그 기술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긴다. [p. 35]

 

이 작품은 이와 반대로 건축물의 구조체와 기계설비를 밖으로 노출해서 보여주는 ‘하이테크 건축’에 속한다. 여기에 퐁피두 센터 앞 광장이 퐁피두 센터를 향해 약간 기울어져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형상이 되어 퐁피두 센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출처: <인문건축기행>, p. 144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에서 이상현 교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말을 변형하여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2)”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덟 번째 소개된,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1935~ )가 리모델링한 [독일 국회의사당](1999)은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둠은 당대 최고 권력자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건축 공간이었고 여전히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노먼 포스터는 둠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고 그 안에 경사로를 넣어서 베를린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로 만들었다. 나아가 전망대에서 아래층에 있는 국회 회의장을 내려다볼 수 있게 설계하여 ‘시민이 주인인 사회’라는 것을 선언했다. 앞에서 말한 이상현 교수의 말대로라면, 독일 국회의사당은 국회의원과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건축을 통해 국회의원이 특권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국민보다 아래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주입시키려는 의도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도 이렇게 리모델링해서 국회의원 등을 ‘길들이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시티그룹 센터

출처: <인문건축기행>, p. 248

 

열다섯 번째로 소개된 휴 스터빈스(Hugh Stubbins, 1912~2006)의 [시티그룹 센터](1977)은 건축상의 제약을 독특한 발상과 혁신적인 구조로 뛰어넘은 작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티그룹 센터’가 가장 훌륭한 오피스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건물 하나의 디자인에 사회적 이해, 경제적 혜안, 타협과 중재 능력, 창의적 생각, 구조 기술력, 법규의 기발한 활용, 친환경 사고 등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장점들이 종합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p. 244]

 

저자는 왜 시티그룹 센터에 대해 이렇게 극찬했을까?

땅을 팔고 떠나기를 거부한 바로 옆의 작은 교회 때문에 시티그룹 센터를 건축하기 곤란했다. 이 때 건축가는 작은 교회의 공중권을 구매해서 10층 정도를, 거대한 기둥 네 개로 지탱되는 혁신적인 구조를 채택하여 시민에게 개방된 공지를 제공함으로써 다시 10층 정도를 더 높일 수 있었다.

 

건축가는 우선 전체 ‘시티그룹 센터’ 부지의 북서쪽 사거리 코너에 있던 교회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리고 교회의 지붕 위로 ‘시티그룹 센터’를 지으면서 과감하게 12층 높이까지 비우고 13층부터 건물을 배치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하철에서 올라오면 만나게 되는 지하 1층의 광장부터 시작해서 13개 층 높이의 공간이 비워졌다. 거리에서 보면 대지의 남측과 서측의 대부분 땅에 건물이 하나도 지어지지 않은 것 같은 경관이 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땅은 오롯이 시민을 위한 광장으로 사용된다. [p. 249]

 

이렇게 해서 ‘시티그룹 센터’는 주변의 건물보다 20층 더 높게 지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남쪽으로 45도 경사진 좌우 비대칭의 첨두(尖頭)가 뉴욕 스카이라인에서 돋보여, 뉴욕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꼭 필요한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 재향군인기념관

 

 

출처: <인문건축기행>, p. 293, 298

 

열여덟 번째로 소개된 것은 마야 린(Maya Lin, 1959~ )의 [베트남전쟁 재향군인기념관](1982)로 단지 몇 분 걸었을 뿐인데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경험이 가능한 이유로

 

첫째, 마야 린은 주변에 이미 위치하는 거대한 ‘위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탑’을 이용하는 지혜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과 미국 역사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두 개의 단순한 직선 산책로의 각도 조절만으로 함께 엮어서 관람객의 마음으로 스며들게 해 하나의 서사를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몸을 쓰게 했다는 점이다. 내리막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들어갈수록 이야기의 수렁에 빠져들게 했고, 나올 때는 오르막을 오르면서 희망차게 땅속에서 벗어나도록 연출했다.

셋째는 인공의 건축은 최소한으로 하고 대부분은 기분 좋은 자연의 공원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pp. 299~300]

 

 

아주마 하우스

출처: <인문건축기행>, p. 416

 

스물여섯 번째로 소개된 건축물은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1941~ ]의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 혹은 [아주마 하우스(Azuma House)](1976)다. 이 작품은 그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노출 콘크리트를 소재로 간결하고 독창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내부 중앙에 하늘을 향해 개방된 중정(中庭)이 배치되어 있어 하늘과 바람, 빛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어, 도시 안에서 자연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를 ‘인간과 자연을 직접 대면’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좁은 집의 1/3을 차지하는, 지붕 없는 중정(中庭)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하는 등 일상 생활에 있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이처럼 이 책은 건축가 20인의 건축물 30개를 권역에 따라 나눠 소개하고 있다. 물론 30개의 건축물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퐁피두 센터]를 다룬 두 번째 장을 보면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렌초 피아노의 [메닐 미술관]도, 그에게 영향을 준 루이스 칸의 [리처드 의학연구소]와 [킴벨 미술관], 심지어 노트르담 대성당마저 소개 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장에서 해당 건축가의 다른 건축물을 소개하거나 그 건축물에 영향을 준 건축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30개의 건축물 가운데 내가 본 것은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뿐이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들도 보러 가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각각의 건축물에 대한 소개 속에 담긴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생각들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이들 건축물을 따라 가는 기행(紀行)도 즐거울 듯 하다고 느껴서 일 것이다.

 

1) 첫째, 얇은 기둥 몇 개로 건물을 떠받치는 ‘필로티’ 구조

둘째,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벽이 아니라 기둥에 하중을 전달한다. 덕분에 원하는 곳에 벽을 자유롭게 세울 수 있었고, 유연한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평면]

셋째, ‘자유로운 입면’. 외벽을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

넷째, 가로로 긴 ‘수평창’은 집 안을 밝게 만들고 외부 풍경을 끌어들여 파노라마처럼 집 안에 펼쳐놓는다.

다섯째, 경사지붕과 다락방을 없애고 만든 ‘옥상정원

2) 이상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효형출판, 2013),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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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블루다 - 느릿느릿, 걸음마다 블루가 일렁일렁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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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리카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일까

 

저자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5가지 상징으로 한국의 한(恨)에 해당하는 정서인 사우다지(saudade)를 기본으로 하는 대중가요 파두(fado), 소금으로 간한 정어리를 석쇠에 구워먹는 사르디냐 아사다스(sardinhas assadas), 도루 포도주 산지에서 생산되는 강화 포도주인 포트 와인, 푸른빛 장식 타일인 아줄레주(azulejo) 그리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아프리카(식민지와 흑인)를 꼽고 있다. 파두, 정어리, 포트 와인, 아즐레주는 포르투갈을 다루는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라서 이상하지 않는데, 아프리카는 뭔가 어색하다. 왜 저자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것에 아프리카를 넣었을까?

 

포르투갈의 역사는 포르투를 중심으로 성립된 포르투갈 백작령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둔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 정복에서 시작된 이 제국은 1999년 중국에 마카오를 반환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점을 감안해서 지브롤터(Gibraltar)와 마주보는 아프리카 서북단의 이슬람 항구도시인 세우타가 포르투갈의 수중에 떨어진 1415년 8월 22일이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당신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결코 “당신은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나’로서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를 알기 위해 나를 평가하기 위해 ‘나’가 아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나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즉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나를 알려 한다. 그러한 네트워크 속의 내가 아니면 나 자신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로 세계화가 초래한 결과다.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을 동시화, 동조화시키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은 인터넷의 발명과 컴퓨터의 보급이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1415년 8월 22일에 벌어졌다. [pp. 25~28]

 

이처럼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제국을 가장 먼저 건설한 유럽 열강은 포르투갈이었다.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앙골라에서 많은 앙골라 주민들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해 ‘계약 노동’이라는 이름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심지어 목화 농장을 세우기 위해 앙골라 주민들이 이미 경작하고 있던 수수밭을 태워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은 악명 높은 흑인 노예무역의 중심국가기이고 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포르투갈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아프리카를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누렸던 번영이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지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도시에는 성당과 푸른 빛의 아줄레주가 있다

 

<일본 도자기 여행: 규슈의 8대 조선 가마>, <일본 도자기 여행: 에도 산책>, <일본 도자기 여행: 교토의 향기>, <유럽 도자기 여행: 서유럽 편>, <유럽 도자기 여행: 북유럽 편>, <유럽도자기 여행: 동유럽 편>, <이천 도자 이야기> 등 도자기와 관련된 책을 많이 쓴 작가답게 아줄레주 이외에도 도자기로 부를 일군 도시, 일랴부도 소개한다. 이곳에는 포르투갈 최초의 그리고 지금도 유일한 도자기 생산업체인 ‘비스타 알레그레’의 도자기 공장이 있다.

 

제일 먼저 중국 도자기에 눈을 뜬 포르투갈이었지만, 자체적으로 자기를 만든 것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매우 늦었다. 독일 마이슨이 1710년, 프랑스 세브르가 1727년, 영국 플리머스가 1746년에 도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포르투갈 도자기 공장은 1824년이 되어서야 세워질 수 있었다. 독일보다 무려 120년 이상 늦은 셈이다. [p. 144]

 

비스타 알레그레의 제품들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p. 151~152

 

아마도 마카오를 조차(租借)하여 중국 도자기를 쉽게 수입해서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자체 생산 하는 것은 그만큼 늦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도자기레주는 포르투갈을 상징한다.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아줄레주의 빛깔을 따서 <포르투갈은 블루다>라고 할 만큼.
 

저자에 따르면, 포르투갈이 시작된 도시 포르투는 ‘아줄레주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포르투는 포르투갈에서 제일가는 아줄레주 야외 전시장이다. 리스본의 명품 아줄레주가 잘 드러나지 않은 실내에 숨어 있는 반면, 포르투의 걸작들은 야외에 위풍당당한 풍채를 드러내놓고 있다. 이런 대비, 포르투의 특수성은 대체 어떤 이유로 생긴 것일까?

포르투 와인 판매와 수출로 인해 이 도시가 벌어들인 엄청난 재화들이 갈 곳이 어디였을까 생각하면 해답이 금방 나온다. 열성 가톨릭 국가의 부자도시에서는 성당도 부유할 수밖에 없다. 성당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고, 이의 사용처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를 가장 손쉽게 쓰는 방법은? 물론 빈민구제와 교육사업이 우선이 되겠지만 그래도 남는다면? 아마도 새로 성당을 짓거나 성당을 꾸미는 일이 가장 손쉽지 않을까. 포르투갈은 매우 열렬한 가톨릭 국가다. 성당을 꾸미는 것이 신앙심의 깊이와 정비례한다는 논리에 어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까. [pp. 70~72]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포르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다. 상 벤투(San Bento) 역이다. 포르투의 상 벤투 역은 단언컨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다. 어떠한 역도 그 우아하고 화려한 아줄레주(azulejo), 즉 장식 타일로 장식한 이곳을 따라갈 수 없다.

상 벤투 역의 아줄레주는 하나의 벽화를 연상시킨다. 아니, 아줄레주 자체가 타일로 구성한 벽화다. 분명 여러 장의 타일이 조합되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련만, 수만 장을 분할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는 14cm×14cm 크기의 타일 2만 장으로 만들어낸 위대한 서사시다. [pp. 20~22]

 

상 벤투 역의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21

 

산투 일데폰수(Santo Ildefonso) 성당의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갈은 블루다>, p. 75

 

그렇다고 포르투에만 볼만한 아줄레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아줄레주 끝판왕으로 꼽는,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lgreja de Sao Vicente de Fora)은 초대 포르투갈의 군주인 아폰수 1세 엔히크스(Afonso Ⅰ Henriques, 1109~1185)가 1147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위한 수도원으로 세웠다. 이후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마치 궁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481, 488, 490

 

 

파두, 한(恨)의 노래이자 소통의 노래

 

파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대중가요로 떠오른 것은 <춘향전>을 연상시키는, 마리아 세바라(Maris Severa, 1820~1846)라는 비운의 파디스타 덕분이었다.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거리의 여인인 마리아 세바라와 그의 노래와 외모에 반한 마리알바 백작의 로맨스는 19세기라는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아마 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도 현실이었다면 비슷한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울적하다. 그녀의 뒤를 이어 파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든 포르투갈의 이미자,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0) 등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호세 말호아의 <파두>(1910)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446

 

파두는 ‘사우다지’를 바탕으로 하는 노래다. 바로 우리의 한(恨)이다.

중략 ~

숙명적으로 바라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포르투갈. 그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수 많은 남자들. 그리고 그 남자들을 사랑하고 미워했던 여자들의 눈물과 탄식….

거기에는 지배당하는 힘없는 나에게서 세계의 지배자로 올라섰다가 또 다시 피지배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아픔, 이젠 과거의 영화를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그들의 역사도 애환과 애잔함으로 깔려 있다.

파두에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온 노예들의 설움, 식민지 지배를 당한 브라질 원주민들의 노여움, 머나먼 항해에 지치고 병든 뱃사람들의 비탄, 북아프리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무어인들의 향수가 모두 녹아 있다.

그래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파두란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숙명. 아무리 발버둥치며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왜?’냐고 물어보아도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그렇게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파두는 소통, 요즘 용어로 하자면 ‘인터랙티브’의 노래다. 어느 노래인들 소통의 기능이 없겠냐만 파두는 특히 더 그렇다. 파디스타는 통상 대규모 공연장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근대 클래식처럼 소규모 인원이 감상하는 ‘살롱 음악’의 형태다. 많은 청중을 상대하지 않고 소수의 관중과 일체감을 느끼기 좋은 ‘교감의 무대’에서 노래한다. [pp. 454~455]

 

참고로 파두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으로 KBS의 <UHD 문화기행 낭만 오디세이>(2017.07.02 방영) “포르투갈 파두, 세상의 끝에서 운명을 노래하다(https://youtu.be/dykeRKgTOeI)”를 보는 것도 괜찮다.

 

 

정어리 축제와 성인(聖人) 산투 안토니우

 

리스본 출신의 수도사 산투 안토니우(Santo Antonio, 1195? ~ 1231?)는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시칠리아로 표류했다. 그는 이를 신의 계시로 여기고 그곳에서 설교하면서 수도사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낙담한 그는 바닷가에 가서 그에게 다가온 정어리에게 하소연하듯이 말을 걸었다. 이에 호응하여 정어리 떼가 몰려오자, 신기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해서 정어리를 상태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는데, 이 ‘정어리의 기적’이 유명해져서 그의 사후(死後) 1년 만에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리스본에서는 해마다 6월 12일이 오면 산투 아토니우를 기리는 ‘정어리 축제’가 열린다. 의 반열에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산투 안토니우와 정어리의 기적을 묘사한 17세기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189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되지만, 읽는 이가 관심 가는 지역과 도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저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5가지 상징으로 제시한 파두, 정어리, 포트 와인, 아줄레주, 아프리카(식민지와 흑인)이 11개의 스토리 곳곳에 녹아 들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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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 - 역사 따라 살펴보는 경성 근대건축
이영천 지음 / 루아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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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공관, 건축과정과 건축의도

 

‘1장 서로를 경계하며 우후죽순 밀려드는 외국 공관들’에서는 개항과 함께 세워진 외국 공관들을 다루고 있다.

서양의 공관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미국의 공사관으로 지금은 주한미국대사관저 부속 시설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이어 영국도 한옥을 매입, 공사관을 건립했는데, 현재까지도 대사관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와 벨기에의 공관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공관은 이들과 달리 세월의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러시아는 1890년 한성 내 최초의 서구식 공사관을 정동 언덕에 세웠다. 당시 한성에서 제일가는 서구식 건축물이었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거의 허물어져서 현재는 3층짜리 전망탑 하나만 남아있다.

 

1981년 전망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폭 45센티미터, 길이 20.3미터짜리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운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잇던 비밀 통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작은 통로에 꺼져가는 촛불 같던 나라의 위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보인다. [p. 37]

 

저자의 말처럼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조선의 모습이 엿보이는 듯하다.

 

반면 벨기에는 1901년 체결된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의 내용이 오로지 상업 활동에 관한 규정 일색이었고, 그들이 설치한 공관도 오직 시장 개척에 상응하는 영사 업무만을 위한 영사관이었던 것에 드러나 있듯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추구했다.

 

고종이 승하하고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벨기에는 10배 이상의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영사관 건물을 일본 요코하마 생명보험사에 팔아 넘긴다. 일본인 상권이 명동과 충무로를 점령한 뒤였고, 한성 상권의 패권을 두고 종로와 맞설 때였다. 벨기에영사관이 있던 곳은 곧 식민도시 경성의 핵심 상권으로 성장한다. [p. 53]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와 건축

 

‘2장 순교하는 가톨릭, 병원과 학교를 앞세운 개신교’에서는 성당과 신학교로 대표되는 선교에 치중한 가톨릭과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으로 대표되는 계몽과 근대화에 치중한 개신교의 건축물을 조명한다.

 

가톨릭은 교회 부지로 가급적 높은 언덕을 선호한다. 가톨릭 교리를 표현하는 대상물로서 권위를 드러내고 어느 장소에서든 잘 보이도록 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다. 또 주변에 순교성지가 있어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면 선호도는 배가된다. 이는 통례적으로 인정되어온 가톨릭 전통으로, 한성에서는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의 입지가 대표적이다. [p. 70]

 

신학교는 1891년 5월 정초를 놓고,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청나라 기술자의 시공으로 1892년 6월 25일 축성된다. 이 신학교가 조선 최초의 성직자 양성소 ‘용산신학교’다. 이를 소(小)신학교라 불렀는데, 이 학교는 1928년 혜화동으로 이전한다. 그 후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와 주교관으로 사용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60년대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대(大)신학교 교사는 소신학교 인근에 1911년에 건축되어 일제가 강제로 폐쇄하는 1942년까지 그 역할을 이어갔다. 건물은 잠시 공백기를 거쳐 1944년부터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덕에 온전히 존치될 수 있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설립되면서 건물을 인수했고, 수녀원과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p. 71]

 

주로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루트로 유입된 감리교와 장로교가 조선에서는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울에 지어진 정동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때 미국에서 주류를 이룬 교회 건축은 적절한 부속시설을 지닌 반형식주의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이었다. [p. 97]

 

 

경운궁의 중건(重建)과 근대국가로의 전환 노력

 

‘3장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 경운궁 중건과 서양관’에서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의 확장, 중건(重建)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다룬다. 수옥헌(漱玉軒), 정관헌(靜觀軒)석조전(石造殿) 등 양관(洋館)이라는 이름의 경운궁에 들어선 서양식 건축물은 대한제국의 노력과 좌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경운궁 수리와 더불어 진행된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인 탑골공원의 건립도 마찬가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직후부터 경운궁을 중심에 두면서 나라를 근대국가로 다시 세우겠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가장 먼저 경운궁 수리에 착수하고 이와 더불어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 건립을 시작한다. 곧 도시재정비 사업이다. 이는 온건개화파로 알려진 박정양과 이채현의 노력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고종은 이를 통해 부강한 영세 중립국가 수립을 꿈꾼 것이다. [pp. 101~102]

 

가로가 정비되자 한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불결함이 급격히 줄어들고 옹색해 보이던 생활 환경은 활기를 띠었다. 아울러 상업도 보다 활발해졌는데, 모두 가로 정비에 따른 부수 효과였다. 넓은 도로는 산책하기에 맞춤이었고, 가게는 많은 물건을 진열해 장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넓혀진 도로에는 가로등이 밤을 밝혔다. 가로 정비는 단순히 도로 폭을 넓히고 깨끗하게 정돈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는데, 이는 정궁으로 삼고자 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시 공간구조 개편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가로망처럼, 경운궁을 중심에 두어 권위를 드러내려는 방사형 가로망을 꿈꾼 것이다. 이는 한 지점에서 각 가로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을 갖춘 체계다. 방사형을 선택한 이유는 정세상 일본을 경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pp. 105~106]

 

 

일제의 침략 첨병들

 

‘4장 침략의 첨병으로서 우리를 옥죈 기구들’에서는 용산역과 용산기지, 종로경찰서 등 파출소 및 주재소, 서대문형무소, 경성재판소처럼 침략의 첨병으로 기능했던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일제는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1904~1906년 기간에 용산 땅 992만 제곱미터(약 300만평)을 평당 30전에 강제로 징발한다.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 및 철도 용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pp. 156~158]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침략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군부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인력과 물자를 갈취해 보급하는 실질적 지휘소 역할을 맡는다. 한반도에도 적용된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노동력과 물자, 자금과 물가, 시설과 사업, 출판과 언론을 통제하고 식량을 공출해가는 전시통제체제를 시행한 것이다. 여기에 청년들을 징병해 전장으로 내몰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또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위안소를 차리기까지 한다. [pp.164~165]

 

 

식민 지배공간 창출을 위한 건물들

 

‘5장 치밀한 흉계로 경성을 장악한 통치기구들’에서는 4장과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른, 조선 신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처럼 일제의 통치기구를 위한 건축물을 언급한다.

 

일제는 1916년까지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조선인에 대한 정신적 동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1916년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인을 정신적 동화 대상으로 삼은 것인데, 그 해 일제는 기존 남산대신궁을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격상하는 조치를 발표한다.

이런 배경에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이식과 한반도가 일제 영토임을 종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국가 신토가 건립될 때까지 임시 변통 역할을 경성신사에 맡기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 경성신사 신직이 반발하고 나선다. 야만에 가까운 조선인이 일본 신 앞에서 자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데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선동조론이란 정신 동화정책이 현실에서는 구호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는 종교적 자유와 황실에 대한 충성 의무 사이에 일어난 대립이자, 국가 신토가 갖는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 [pp. 201~202]

 

1907년 일본 왕사제 다이쇼[大正]의 방문을 계기로 숭례문 양측 성곽을 없앤 것을 시작으로 도성 성곽이 본격적으로 파괴된다. 1908년경에는 일본인들이 한일 공동공원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남산 서북서 자락의 약 100만 제곱미터(약 30만 2500평) 땅을 차입하겠다고 청원한다. 이에 송병준 등 친일파 관료들이 앞장서서 그 땅을 무상으로 일본인에게 영구 대여한다. 옛 남산식물원에서 3호 터널에 이르는 공간이다. 이 땅을 차지한 일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둘로 분리된 일본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남산 기슭의 진고개와 왜성대 일대 그리고 군사용 조차장이었던 용산역과 군사기지로 조성 중이던 용산기지를 잇는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봄 공원 조성에 착수해 2년 만인 1910년 5월 29일 성대한 개원식을 치른다. 이 행사에 2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를 기념해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을 친필로 하사하기까지 한다. [pp. 208~209]

 

 

철도, 근대화로 위장된 침략

 

‘6장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철마로 밀려온 근대’에서는 근대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철도 부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을 돌아보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대규모 조차장(操車場)였던 용산역, 중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 및 물류 배후기지로 조성하던 수색 조차장 등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일제는 일찍부터 경부선에 눈독을 들였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 강토를 활보하며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일본 밀정은 이미 1885년부터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리와 인문 정보, 경제 현황, 교통 등을 은밀히 조사한 바 있다. 또 사냥꾼으로 가장한 철도 기술자가 일제의 비호 아래 경부선 철도 예정지를 답사하고 측량한 뒤 1892년 보고서와 도면을 일본 정부에 제출한 사례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이 자행된 1894년과 1899년, 1900년, 190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보완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일제는 실질적으로 전 국민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1901년 6월 25일 반관반민의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중략 ~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경부선 철도 완성은 한 척 전투함을 만드는 것보다, 한 개 사단 병력을 증설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서는 일’이라며 1903년 12워 28일 ‘속성명령’으로 일 년 내 완공을 밀어붙인다. 이런 만행으로 철도가 지나는 곳 주변에 사는 민중들만 골병이 들었다. 땅과 물자는 물론, 노동력마저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고향을 버리고 유리걸식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광무 정권은 토지대금 마련에 허덕이면서 일본은행에 빚까지 진다. 러일전쟁을 위한 통과 시설로서 경부선은 그렇게 한국인의 뼈와 살을 발라 태어난 것이다. [pp. 247~248]

 

 

실패로 끝난 근대화 이식 실험

 

‘7장 이식된 근대화의 길 위에서’는 근대국가를 향한 조선의 노력을 살핀다. 신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기국(機器局), 국립의료원 제중원(濟衆院),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과대학인 의학교, 내부(內部) 직할의 국립 병원인 광제원(廣濟院), 전신선의 설치와 연결을 꾀한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 등은 근대 문물의 도입을 통해 힘을 키우려 했던 조선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김윤식은 현실을 올곧게 직시했다. 나라 재정은 몹시 열악했고, 내부 분열과 외세의 참견, 간섭이 극심했기에 대포나 군함 같은 대형 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장차 만들어질 기기국 규모를 염두에 두고 급하게 전략을 수정한다. 유학생들이 당장 이룰 수 있는 기술부터 익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손기술로 만들 수 있는 탄약이나 화약, 소총 같은 작은 무기 제조에 학습 역점을 두었다. 어느 정도 학습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유학생들을 조기에 귀국시키고, 따로 기계를 사들여 국(局)을 설치한 다음 신무기를 제조할 생각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며 69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떠난 지 불과 일 년 남짓이었다. [p. 271]

 

 

이 책에 소개된 각각의 건축물에는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배경이 세세히 녹아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목적 없이 만들어진 건축물은 없다’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단순히 건축물이 담당했던 기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건축물의 입지에서부터 건축 재료, 건축 형상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치밀한 계산을 통한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각각의 건축물을 세웠다.

그렇기에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으니까, 무조건 철거해서 지워버리자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치욕적이고 끔찍한 역사를 전하는 문화재들은 한때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됐다.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화재의 가치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부적으로는 힘이 없으면 다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가해자의 악행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유물이 되기도 한다. 일제 관련 유물은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최근 행태를 반박하는 증거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관련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보호, 활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네거티브 문화재는 아픈 역사를 드러내 재연되지 않도록 경계를 삼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우리의 근대 건축물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근대 건축물들이 아직 가치평가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보전하고, 그 공간에 담겨있는 기억을 복원하며 앞 세대, 그리고 해당 건축물과 소통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박물관의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박제화하여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간을 활용하고 내용을 채우면서 새로운 가치를 계속해서 담아내는 방식으로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마 저자도 이를 위해 서울의 근대 건축물을 대상으로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닐까?

 

1) 강구열, “기억해야 할 치욕의 흔적… 대한민국 역사의 ‘빛과 그림자’”, <세계일보>, 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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