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성, 발달에는 ‘로마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게르만족의 로마에 대한 로망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로망이 생기게 된 것에는 그들이 로마 제국을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우리의 부모 세대가 도자기조차 미제를 원해 코넬사의 강화유리 제품을 새롭고 좋은 도자기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로마’라는 객관적인 문명의 기준이 사라졌으니까.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게르만족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슬라브족의 심층심리에 새겨져서 그들이 각각 제2의 로마[신성로마제국], 제3의 로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들은 각자 자기방식대로 로마 제국에 정착했다. 그 중 하나인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에서 재미난 일이 발생했다. 후한(後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조조(曹操)가 선양(禪讓)받아 위(魏)나라를 세운 것처럼,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였던 소(小)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던 것이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小) 피핀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빌려 피핀 3세로 즉위했다. 그렇기에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Pippinus Ⅲ, 재위 751~768)와 그 뒤를 이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재위 768~814)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잡은 롬바르디아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774)을 공략,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이는 건축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정리, 발전시키고 있던,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기술을 서유럽 전체로 퍼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어떻게 10세기 프랑크 왕국에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알프스 북쪽에 살다가 56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를 잡은 롬바르디아 왕국입니다.

~ 중략 ~

6~8세기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발생한 건축을 롬바르디아 건축이라고 부르는데, 왕국은 국가차원에서 건축 장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호 육성하는 전통이 있어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 특히 조적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롬바르디아 건축의 조적술은 로마 제국보다는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에 가까웠습니다.

콘크리트로 중심 벽체를 만들고 그 외벽에 높이가 낮은 벽돌을 쌓는 방식의 로마 제국의 조적술은 강도는 좋았지만, 작업이 복잡하고 벽체가 두꺼워져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을 오직 조적으로만 벽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벽돌 하나의 높이가 높고 콘크리트 작업이 없어서 공사가 단순하고 소요 시간이 적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제국의 조적술을 배우고 정리해 발전시켰습니다. [pp. 42~43]


덕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싹도 카를루스 대제 시기에 발생했다. 그는 아헨 왕궁 성당(Palatine Chapel in Aachen)을 건설했는데, 로마 제국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장방형 평면의 성당)을 따르면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팔각형 평면과 복층 갤러리를 수용,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맹아(萌芽)를 보여주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구조와 명칭

 

출처: <로마네스크 성당>, p. 37


 

각 국가별 로마네스크 성당  


로마네스크 성당의 특징으로는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많이 사용한 점, 건물 내부를 떠받치기 위하여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한 점, 또 아치 때문에 수평으로 발생하는 힘에 견딜 수 있도록 기둥과 벽을 두껍게 구축하는 반면 창문을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런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군이나 성지 순례에 의해 여러 양식이 교류하면서 발전했고, 특히 수도회의 융성과 활약으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다.


야고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낸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지중해의 머나먼 뱃길 끝 예루살렘보다도, 알프스의 높은 산 너머 로마보다도, 지척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서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순례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미 네 갈래의 고정적인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 순례길들이 지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며, 그 곳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순례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p.101]



프랑스의 로마네스크는 ‘보편주의’와 ‘지역주의’라는 두 갈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보편주의는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 지방의 로마네스크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스크로 나뉜다. 이러한 프랑스 남부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은 11세기 전반부에 그 형식이 완성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전파되었다. 이런 보편주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는 노르망디 지방의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성당(Abbaye Saint-Etienne de Caen)’와 부르고뉴 지방의 ‘제 3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Ⅲ)’로 대표된다.

지역주의로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성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홀(hall) 교회 양식의 ‘생사뱅 수도원 성당(Abbaye de Saint-Savin-sur-Gartempe)’과 네이브(nave)1)의 베이(bay)2)마다 천장이 석조 돔으로 올려진 돔(dome) 교회 양식의 ‘앙굴렘 대성당(Cathedrale Saint-Pierre d’Angouleme)’이 있다.



독일 북부의 초기 로마네스크는 보통 ‘오토 건축’이라고 불린다. 웨스트워크 자리에 이스트엔트의 성가대석과 앱스의 구성이 한 번 더 들어가는 ‘더블 엔더’가 특징인 이 양식은 작센 지역의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성당(Michaeliskirche in Hildesheim)’과 라인란트 하류 지역의 ‘트리어 대성당(Trierer Dom)’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지역주의 성향의 오토 건축은 ‘제1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Ⅰ)’ 의 완공으로 보편주의로 성장했지만,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은 ‘제2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Ⅱ)’이다.


국가 차원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이탈리아를 두고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는 보편 교회인 로마와 가까운 프랑스 교회와 독일의 지역 교회가 긴장 관계에 놓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이러한 대치는 성당 건축에서도 드러났는데, 제3 클뤼니 성당과 제2 슈파이어 성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3 클뤼니 성당은 보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종교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제2 슈파이어 성당은 지역 교회 차원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습니다. 하지만 두 성당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종합한 것과 그 결과로 모두 대형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제2 슈파이어 성당은 독일 로마네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독일 로마네스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p. 173~177]


덧붙이자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프랑스 로마네스크가 보여준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조와는 달리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추상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수직성을 강조하면서 국가보다는 교회의 우월성을 나타냈다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수직성과 수평성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와 함께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p. 180]



영국의 로마네스크 성당을 대표하는 것은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과 전성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다. 이들 영국 로마네스크 성당에는 기하학적이고 장식 위주의 ‘영국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특함이 묻어나 있다.

첫째, 수평성을 선호하는 영국의 정서가 반영되어 슈베(chevet)3)가 동쪽으로 길게 확장되어 있다.

둘째, 네이브도 확장되어 있다.

셋째,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를 통해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대형화란 천장고를 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성당의 길이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한 것입니다.

영국 로마네스크는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한 것은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입니다. 프랑스는 석재의 물질성과 구조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수직성을 추구했지만, 영국은 벽돌을 재료로 수평성을 유지했습니다. [p. 197]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성당은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 등의 전통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보편주의가 아닌 지역주의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당으로는 롬바르디아 지역의 ‘성 암브로시오 바실리카(Basilica de Sant’Ambrogio)’, 토스카나 지역의 ‘산미니아토 바실리카(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는 알프스 이북의 로마네스크에 비해서 로마 고전주의와의 연속성이 훨씬 깊습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이 로마 고전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네이브월을 구성하는 아치, 오더, 볼트 등의 요소들과 바실리카에서 발전한 라틴 크로스 평면 역시 로마 고전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로마네스크의 고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10]


또한,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지중해의 전통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첫 번째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두 번째 특징은 지역주의입니다. 롬바르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 토스카나의 중부 지역, 그리고 시칠리아가 주도한 남부 지역이 각기 고유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두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초기와 전성기라는 시대적 구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pp. 205~210]


중세 유럽이 ‘라틴어’라는 보편 언어와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과정에서 보듯이 각 국가별로 지역주의의 싹이 드러난 것이 훗날 국민국가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 소개된 성당들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 그리고 로마네스크 성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럽에 갈 기회가 있으면 좀 더 보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다는 3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을 방문하더라도 예전에 방문해서 보다 느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더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1) 네이브(nave, 身廊):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성당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


2) 베이(bay): 네 기둥으로 구획되는 평면의 한 단위를 의미한다.


3) 슈베(chevet): 대성당에서 본당 동쪽 끝의 반원형 부분, 두부(頭部)라고도 번역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祭臺)와 그 근처의 성가대석을 배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