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블루다 - 느릿느릿, 걸음마다 블루가 일렁일렁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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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리카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일까

 

저자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5가지 상징으로 한국의 한(恨)에 해당하는 정서인 사우다지(saudade)를 기본으로 하는 대중가요 파두(fado), 소금으로 간한 정어리를 석쇠에 구워먹는 사르디냐 아사다스(sardinhas assadas), 도루 포도주 산지에서 생산되는 강화 포도주인 포트 와인, 푸른빛 장식 타일인 아줄레주(azulejo) 그리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아프리카(식민지와 흑인)를 꼽고 있다. 파두, 정어리, 포트 와인, 아즐레주는 포르투갈을 다루는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라서 이상하지 않는데, 아프리카는 뭔가 어색하다. 왜 저자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것에 아프리카를 넣었을까?

 

포르투갈의 역사는 포르투를 중심으로 성립된 포르투갈 백작령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둔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 정복에서 시작된 이 제국은 1999년 중국에 마카오를 반환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점을 감안해서 지브롤터(Gibraltar)와 마주보는 아프리카 서북단의 이슬람 항구도시인 세우타가 포르투갈의 수중에 떨어진 1415년 8월 22일이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당신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결코 “당신은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나’로서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를 알기 위해 나를 평가하기 위해 ‘나’가 아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나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즉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나를 알려 한다. 그러한 네트워크 속의 내가 아니면 나 자신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로 세계화가 초래한 결과다.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을 동시화, 동조화시키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은 인터넷의 발명과 컴퓨터의 보급이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1415년 8월 22일에 벌어졌다. [pp. 25~28]

 

이처럼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제국을 가장 먼저 건설한 유럽 열강은 포르투갈이었다.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앙골라에서 많은 앙골라 주민들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해 ‘계약 노동’이라는 이름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심지어 목화 농장을 세우기 위해 앙골라 주민들이 이미 경작하고 있던 수수밭을 태워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은 악명 높은 흑인 노예무역의 중심국가기이고 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포르투갈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아프리카를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누렸던 번영이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지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도시에는 성당과 푸른 빛의 아줄레주가 있다

 

<일본 도자기 여행: 규슈의 8대 조선 가마>, <일본 도자기 여행: 에도 산책>, <일본 도자기 여행: 교토의 향기>, <유럽 도자기 여행: 서유럽 편>, <유럽 도자기 여행: 북유럽 편>, <유럽도자기 여행: 동유럽 편>, <이천 도자 이야기> 등 도자기와 관련된 책을 많이 쓴 작가답게 아줄레주 이외에도 도자기로 부를 일군 도시, 일랴부도 소개한다. 이곳에는 포르투갈 최초의 그리고 지금도 유일한 도자기 생산업체인 ‘비스타 알레그레’의 도자기 공장이 있다.

 

제일 먼저 중국 도자기에 눈을 뜬 포르투갈이었지만, 자체적으로 자기를 만든 것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매우 늦었다. 독일 마이슨이 1710년, 프랑스 세브르가 1727년, 영국 플리머스가 1746년에 도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포르투갈 도자기 공장은 1824년이 되어서야 세워질 수 있었다. 독일보다 무려 120년 이상 늦은 셈이다. [p. 144]

 

비스타 알레그레의 제품들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p. 151~152

 

아마도 마카오를 조차(租借)하여 중국 도자기를 쉽게 수입해서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자체 생산 하는 것은 그만큼 늦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도자기레주는 포르투갈을 상징한다.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아줄레주의 빛깔을 따서 <포르투갈은 블루다>라고 할 만큼.
 

저자에 따르면, 포르투갈이 시작된 도시 포르투는 ‘아줄레주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포르투는 포르투갈에서 제일가는 아줄레주 야외 전시장이다. 리스본의 명품 아줄레주가 잘 드러나지 않은 실내에 숨어 있는 반면, 포르투의 걸작들은 야외에 위풍당당한 풍채를 드러내놓고 있다. 이런 대비, 포르투의 특수성은 대체 어떤 이유로 생긴 것일까?

포르투 와인 판매와 수출로 인해 이 도시가 벌어들인 엄청난 재화들이 갈 곳이 어디였을까 생각하면 해답이 금방 나온다. 열성 가톨릭 국가의 부자도시에서는 성당도 부유할 수밖에 없다. 성당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고, 이의 사용처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를 가장 손쉽게 쓰는 방법은? 물론 빈민구제와 교육사업이 우선이 되겠지만 그래도 남는다면? 아마도 새로 성당을 짓거나 성당을 꾸미는 일이 가장 손쉽지 않을까. 포르투갈은 매우 열렬한 가톨릭 국가다. 성당을 꾸미는 것이 신앙심의 깊이와 정비례한다는 논리에 어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까. [pp. 70~72]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포르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다. 상 벤투(San Bento) 역이다. 포르투의 상 벤투 역은 단언컨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다. 어떠한 역도 그 우아하고 화려한 아줄레주(azulejo), 즉 장식 타일로 장식한 이곳을 따라갈 수 없다.

상 벤투 역의 아줄레주는 하나의 벽화를 연상시킨다. 아니, 아줄레주 자체가 타일로 구성한 벽화다. 분명 여러 장의 타일이 조합되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련만, 수만 장을 분할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는 14cm×14cm 크기의 타일 2만 장으로 만들어낸 위대한 서사시다. [pp. 20~22]

 

상 벤투 역의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21

 

산투 일데폰수(Santo Ildefonso) 성당의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갈은 블루다>, p. 75

 

그렇다고 포르투에만 볼만한 아줄레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아줄레주 끝판왕으로 꼽는,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lgreja de Sao Vicente de Fora)은 초대 포르투갈의 군주인 아폰수 1세 엔히크스(Afonso Ⅰ Henriques, 1109~1185)가 1147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위한 수도원으로 세웠다. 이후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마치 궁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481, 488, 490

 

 

파두, 한(恨)의 노래이자 소통의 노래

 

파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대중가요로 떠오른 것은 <춘향전>을 연상시키는, 마리아 세바라(Maris Severa, 1820~1846)라는 비운의 파디스타 덕분이었다.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거리의 여인인 마리아 세바라와 그의 노래와 외모에 반한 마리알바 백작의 로맨스는 19세기라는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아마 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도 현실이었다면 비슷한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울적하다. 그녀의 뒤를 이어 파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든 포르투갈의 이미자,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0) 등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호세 말호아의 <파두>(1910)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446

 

파두는 ‘사우다지’를 바탕으로 하는 노래다. 바로 우리의 한(恨)이다.

중략 ~

숙명적으로 바라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포르투갈. 그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수 많은 남자들. 그리고 그 남자들을 사랑하고 미워했던 여자들의 눈물과 탄식….

거기에는 지배당하는 힘없는 나에게서 세계의 지배자로 올라섰다가 또 다시 피지배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아픔, 이젠 과거의 영화를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그들의 역사도 애환과 애잔함으로 깔려 있다.

파두에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온 노예들의 설움, 식민지 지배를 당한 브라질 원주민들의 노여움, 머나먼 항해에 지치고 병든 뱃사람들의 비탄, 북아프리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무어인들의 향수가 모두 녹아 있다.

그래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파두란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숙명. 아무리 발버둥치며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왜?’냐고 물어보아도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그렇게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파두는 소통, 요즘 용어로 하자면 ‘인터랙티브’의 노래다. 어느 노래인들 소통의 기능이 없겠냐만 파두는 특히 더 그렇다. 파디스타는 통상 대규모 공연장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근대 클래식처럼 소규모 인원이 감상하는 ‘살롱 음악’의 형태다. 많은 청중을 상대하지 않고 소수의 관중과 일체감을 느끼기 좋은 ‘교감의 무대’에서 노래한다. [pp. 454~455]

 

참고로 파두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으로 KBS의 <UHD 문화기행 낭만 오디세이>(2017.07.02 방영) “포르투갈 파두, 세상의 끝에서 운명을 노래하다(https://youtu.be/dykeRKgTOeI)”를 보는 것도 괜찮다.

 

 

정어리 축제와 성인(聖人) 산투 안토니우

 

리스본 출신의 수도사 산투 안토니우(Santo Antonio, 1195? ~ 1231?)는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시칠리아로 표류했다. 그는 이를 신의 계시로 여기고 그곳에서 설교하면서 수도사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낙담한 그는 바닷가에 가서 그에게 다가온 정어리에게 하소연하듯이 말을 걸었다. 이에 호응하여 정어리 떼가 몰려오자, 신기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해서 정어리를 상태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는데, 이 ‘정어리의 기적’이 유명해져서 그의 사후(死後) 1년 만에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리스본에서는 해마다 6월 12일이 오면 산투 아토니우를 기리는 ‘정어리 축제’가 열린다. 의 반열에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산투 안토니우와 정어리의 기적을 묘사한 17세기 아줄레주

사진출처: <포르투갈은 블루다>, p. 189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되지만, 읽는 이가 관심 가는 지역과 도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저자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5가지 상징으로 제시한 파두, 정어리, 포트 와인, 아줄레주, 아프리카(식민지와 흑인)이 11개의 스토리 곳곳에 녹아 들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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