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 - 역사 따라 살펴보는 경성 근대건축
이영천 지음 / 루아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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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공관, 건축과정과 건축의도

 

‘1장 서로를 경계하며 우후죽순 밀려드는 외국 공관들’에서는 개항과 함께 세워진 외국 공관들을 다루고 있다.

서양의 공관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미국의 공사관으로 지금은 주한미국대사관저 부속 시설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이어 영국도 한옥을 매입, 공사관을 건립했는데, 현재까지도 대사관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와 벨기에의 공관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공관은 이들과 달리 세월의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러시아는 1890년 한성 내 최초의 서구식 공사관을 정동 언덕에 세웠다. 당시 한성에서 제일가는 서구식 건축물이었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거의 허물어져서 현재는 3층짜리 전망탑 하나만 남아있다.

 

1981년 전망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폭 45센티미터, 길이 20.3미터짜리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운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잇던 비밀 통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작은 통로에 꺼져가는 촛불 같던 나라의 위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보인다. [p. 37]

 

저자의 말처럼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조선의 모습이 엿보이는 듯하다.

 

반면 벨기에는 1901년 체결된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의 내용이 오로지 상업 활동에 관한 규정 일색이었고, 그들이 설치한 공관도 오직 시장 개척에 상응하는 영사 업무만을 위한 영사관이었던 것에 드러나 있듯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추구했다.

 

고종이 승하하고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벨기에는 10배 이상의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영사관 건물을 일본 요코하마 생명보험사에 팔아 넘긴다. 일본인 상권이 명동과 충무로를 점령한 뒤였고, 한성 상권의 패권을 두고 종로와 맞설 때였다. 벨기에영사관이 있던 곳은 곧 식민도시 경성의 핵심 상권으로 성장한다. [p. 53]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와 건축

 

‘2장 순교하는 가톨릭, 병원과 학교를 앞세운 개신교’에서는 성당과 신학교로 대표되는 선교에 치중한 가톨릭과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으로 대표되는 계몽과 근대화에 치중한 개신교의 건축물을 조명한다.

 

가톨릭은 교회 부지로 가급적 높은 언덕을 선호한다. 가톨릭 교리를 표현하는 대상물로서 권위를 드러내고 어느 장소에서든 잘 보이도록 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다. 또 주변에 순교성지가 있어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면 선호도는 배가된다. 이는 통례적으로 인정되어온 가톨릭 전통으로, 한성에서는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의 입지가 대표적이다. [p. 70]

 

신학교는 1891년 5월 정초를 놓고,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청나라 기술자의 시공으로 1892년 6월 25일 축성된다. 이 신학교가 조선 최초의 성직자 양성소 ‘용산신학교’다. 이를 소(小)신학교라 불렀는데, 이 학교는 1928년 혜화동으로 이전한다. 그 후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와 주교관으로 사용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60년대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대(大)신학교 교사는 소신학교 인근에 1911년에 건축되어 일제가 강제로 폐쇄하는 1942년까지 그 역할을 이어갔다. 건물은 잠시 공백기를 거쳐 1944년부터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덕에 온전히 존치될 수 있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설립되면서 건물을 인수했고, 수녀원과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p. 71]

 

주로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루트로 유입된 감리교와 장로교가 조선에서는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울에 지어진 정동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때 미국에서 주류를 이룬 교회 건축은 적절한 부속시설을 지닌 반형식주의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이었다. [p. 97]

 

 

경운궁의 중건(重建)과 근대국가로의 전환 노력

 

‘3장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 경운궁 중건과 서양관’에서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의 확장, 중건(重建)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다룬다. 수옥헌(漱玉軒), 정관헌(靜觀軒)석조전(石造殿) 등 양관(洋館)이라는 이름의 경운궁에 들어선 서양식 건축물은 대한제국의 노력과 좌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경운궁 수리와 더불어 진행된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인 탑골공원의 건립도 마찬가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직후부터 경운궁을 중심에 두면서 나라를 근대국가로 다시 세우겠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가장 먼저 경운궁 수리에 착수하고 이와 더불어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 건립을 시작한다. 곧 도시재정비 사업이다. 이는 온건개화파로 알려진 박정양과 이채현의 노력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고종은 이를 통해 부강한 영세 중립국가 수립을 꿈꾼 것이다. [pp. 101~102]

 

가로가 정비되자 한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불결함이 급격히 줄어들고 옹색해 보이던 생활 환경은 활기를 띠었다. 아울러 상업도 보다 활발해졌는데, 모두 가로 정비에 따른 부수 효과였다. 넓은 도로는 산책하기에 맞춤이었고, 가게는 많은 물건을 진열해 장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넓혀진 도로에는 가로등이 밤을 밝혔다. 가로 정비는 단순히 도로 폭을 넓히고 깨끗하게 정돈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는데, 이는 정궁으로 삼고자 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시 공간구조 개편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가로망처럼, 경운궁을 중심에 두어 권위를 드러내려는 방사형 가로망을 꿈꾼 것이다. 이는 한 지점에서 각 가로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을 갖춘 체계다. 방사형을 선택한 이유는 정세상 일본을 경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pp. 105~106]

 

 

일제의 침략 첨병들

 

‘4장 침략의 첨병으로서 우리를 옥죈 기구들’에서는 용산역과 용산기지, 종로경찰서 등 파출소 및 주재소, 서대문형무소, 경성재판소처럼 침략의 첨병으로 기능했던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일제는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1904~1906년 기간에 용산 땅 992만 제곱미터(약 300만평)을 평당 30전에 강제로 징발한다.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 및 철도 용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pp. 156~158]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침략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군부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인력과 물자를 갈취해 보급하는 실질적 지휘소 역할을 맡는다. 한반도에도 적용된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노동력과 물자, 자금과 물가, 시설과 사업, 출판과 언론을 통제하고 식량을 공출해가는 전시통제체제를 시행한 것이다. 여기에 청년들을 징병해 전장으로 내몰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또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위안소를 차리기까지 한다. [pp.164~165]

 

 

식민 지배공간 창출을 위한 건물들

 

‘5장 치밀한 흉계로 경성을 장악한 통치기구들’에서는 4장과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른, 조선 신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처럼 일제의 통치기구를 위한 건축물을 언급한다.

 

일제는 1916년까지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조선인에 대한 정신적 동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1916년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인을 정신적 동화 대상으로 삼은 것인데, 그 해 일제는 기존 남산대신궁을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격상하는 조치를 발표한다.

이런 배경에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이식과 한반도가 일제 영토임을 종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국가 신토가 건립될 때까지 임시 변통 역할을 경성신사에 맡기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 경성신사 신직이 반발하고 나선다. 야만에 가까운 조선인이 일본 신 앞에서 자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데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선동조론이란 정신 동화정책이 현실에서는 구호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는 종교적 자유와 황실에 대한 충성 의무 사이에 일어난 대립이자, 국가 신토가 갖는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 [pp. 201~202]

 

1907년 일본 왕사제 다이쇼[大正]의 방문을 계기로 숭례문 양측 성곽을 없앤 것을 시작으로 도성 성곽이 본격적으로 파괴된다. 1908년경에는 일본인들이 한일 공동공원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남산 서북서 자락의 약 100만 제곱미터(약 30만 2500평) 땅을 차입하겠다고 청원한다. 이에 송병준 등 친일파 관료들이 앞장서서 그 땅을 무상으로 일본인에게 영구 대여한다. 옛 남산식물원에서 3호 터널에 이르는 공간이다. 이 땅을 차지한 일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둘로 분리된 일본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남산 기슭의 진고개와 왜성대 일대 그리고 군사용 조차장이었던 용산역과 군사기지로 조성 중이던 용산기지를 잇는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봄 공원 조성에 착수해 2년 만인 1910년 5월 29일 성대한 개원식을 치른다. 이 행사에 2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를 기념해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을 친필로 하사하기까지 한다. [pp. 208~209]

 

 

철도, 근대화로 위장된 침략

 

‘6장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철마로 밀려온 근대’에서는 근대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철도 부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을 돌아보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대규모 조차장(操車場)였던 용산역, 중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 및 물류 배후기지로 조성하던 수색 조차장 등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일제는 일찍부터 경부선에 눈독을 들였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 강토를 활보하며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일본 밀정은 이미 1885년부터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리와 인문 정보, 경제 현황, 교통 등을 은밀히 조사한 바 있다. 또 사냥꾼으로 가장한 철도 기술자가 일제의 비호 아래 경부선 철도 예정지를 답사하고 측량한 뒤 1892년 보고서와 도면을 일본 정부에 제출한 사례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이 자행된 1894년과 1899년, 1900년, 190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보완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일제는 실질적으로 전 국민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1901년 6월 25일 반관반민의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중략 ~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경부선 철도 완성은 한 척 전투함을 만드는 것보다, 한 개 사단 병력을 증설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서는 일’이라며 1903년 12워 28일 ‘속성명령’으로 일 년 내 완공을 밀어붙인다. 이런 만행으로 철도가 지나는 곳 주변에 사는 민중들만 골병이 들었다. 땅과 물자는 물론, 노동력마저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고향을 버리고 유리걸식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광무 정권은 토지대금 마련에 허덕이면서 일본은행에 빚까지 진다. 러일전쟁을 위한 통과 시설로서 경부선은 그렇게 한국인의 뼈와 살을 발라 태어난 것이다. [pp. 247~248]

 

 

실패로 끝난 근대화 이식 실험

 

‘7장 이식된 근대화의 길 위에서’는 근대국가를 향한 조선의 노력을 살핀다. 신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기국(機器局), 국립의료원 제중원(濟衆院),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과대학인 의학교, 내부(內部) 직할의 국립 병원인 광제원(廣濟院), 전신선의 설치와 연결을 꾀한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 등은 근대 문물의 도입을 통해 힘을 키우려 했던 조선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김윤식은 현실을 올곧게 직시했다. 나라 재정은 몹시 열악했고, 내부 분열과 외세의 참견, 간섭이 극심했기에 대포나 군함 같은 대형 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장차 만들어질 기기국 규모를 염두에 두고 급하게 전략을 수정한다. 유학생들이 당장 이룰 수 있는 기술부터 익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손기술로 만들 수 있는 탄약이나 화약, 소총 같은 작은 무기 제조에 학습 역점을 두었다. 어느 정도 학습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유학생들을 조기에 귀국시키고, 따로 기계를 사들여 국(局)을 설치한 다음 신무기를 제조할 생각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며 69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떠난 지 불과 일 년 남짓이었다. [p. 271]

 

 

이 책에 소개된 각각의 건축물에는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배경이 세세히 녹아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목적 없이 만들어진 건축물은 없다’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단순히 건축물이 담당했던 기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건축물의 입지에서부터 건축 재료, 건축 형상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치밀한 계산을 통한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각각의 건축물을 세웠다.

그렇기에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으니까, 무조건 철거해서 지워버리자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치욕적이고 끔찍한 역사를 전하는 문화재들은 한때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됐다.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화재의 가치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부적으로는 힘이 없으면 다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가해자의 악행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유물이 되기도 한다. 일제 관련 유물은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최근 행태를 반박하는 증거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관련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보호, 활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네거티브 문화재는 아픈 역사를 드러내 재연되지 않도록 경계를 삼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우리의 근대 건축물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근대 건축물들이 아직 가치평가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보전하고, 그 공간에 담겨있는 기억을 복원하며 앞 세대, 그리고 해당 건축물과 소통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박물관의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박제화하여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간을 활용하고 내용을 채우면서 새로운 가치를 계속해서 담아내는 방식으로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마 저자도 이를 위해 서울의 근대 건축물을 대상으로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닐까?

 

1) 강구열, “기억해야 할 치욕의 흔적… 대한민국 역사의 ‘빛과 그림자’”, <세계일보>, 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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