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인생수업
백혜선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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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이 아니라 인생 3기를 앞둔 출사표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클래식은 알아도 우리시대의 클래식을 잘 모른다. 기껏해야 피아니스트 백건우, 정명훈 남매, 그러니까 ‘정 트리오’ 정도나 알까? 그래서 나는 백혜선(1965~ )이라는 피아니스트가 낯설다. 그런데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일본 사이타마현 문화예술재단이 선정한 ‘현존하는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에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서울 예원학교 2학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과 변화정 부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9년 월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1990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여 국내에서는 “콩쿠르 여제”로 통했고, 1994년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라는 성적으로 한국인 최초로 상위 입상을 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수상 직후 서울대 음대 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0년 후 서울대 교수직을 박차고 미국으로 떠났다.

중략 ~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모교이자 미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음악 대학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 소개를 보면, 백혜선은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번쯤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기분으로 자신의 성공담을 쏟아내고픈 유혹을 받지 않았을까?

 

그런데 저자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는 대신, 실패담을 되씹으며 인생 3기를 향해 출사표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인생 3기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어릴 적 피아노를 접하고부터 미국에 건너간 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기까지를 제 1기, 최연소로 서울대 음대 교수에 임용되고 나서 겪은 부침부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어렸던 아들딸이 성장하고 선생이자 연주자로 다시 선 지금까지를 제 2기, 그리고 앞으로 맞닥뜨릴 시기를 제 3기라고 구분한 것이다.

 

 

첫 좌절, 수영

 

백혜선이 처음 열정과 재능을 느낀 분야는 수영, 그 중에서도 자유형이었다.

 

내가 단출하게나마 스스로의 재능을 처음 발견한 영역은 수영이었다.

중략 ~

나의 재능이라고 한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신체 조건이 유리하다는 정도였던 것 같다. 물이 무섭지도 않았는지 몸으로 물살을 가를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래에 비해 월등히 큰 키 덕분이었을까. 나는 비슷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앞서 있었다. 운동 신경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라도 물속에만 있으면 칭찬 세례가 연거푸 이어졌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pp. 21~22]

 

열세 살이 되던 해에는 경북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서울 전지훈련을 가서 만난, 최윤정은 그녀와 달리 타고난 천재였다. 얼마 후 소년 체전에서 만난 최윤정은 그녀에게 반짝이는 천재의 꽁무니를 멀찍이서 뒤쫓는 범인의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보다 좋은 신체조건과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노력으로도 타고난 천재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피아노 콩쿠르, 영광과 좌절

 

1989년에는 월리엄 카펠 콩쿠르에 나가 1위에 오르면서 국제 문대에 화려하게 데뷔했고, 1990년에는 여섯 명의 결선 진출자에 드는 것만도 대단한 영예인 리즈 콩쿠르에서 5위를 했다. 또 199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연속 스무 시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양의 연습을 강행한 끝에 4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백혜선은 콩쿠르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된다’는 부러움과 질투 섞인 말이 국내의 젊은 음악인들에게 떠돌았다. [p. 73]

 

콩쿠르 여제”라는 별명을 스스로도 당연하게 여기며 나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는 그녀에게 또 한 차례의 좌절을 안겼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1993년 6월에 미국에서 가장 큰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 나갔다. 평소보다 적은 수라고 할 수 있는 사십에서 오십 명의 연주자만을 추려 참가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강력한 후보인 예닐곱 명에게는 특별히 취재를 위한 카메라와 작가가 하나씩 따라다녔다. 콩쿠르 측에서 ‘이 사람은 분명히 입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참가자들이 대상이었고, 거기엔 물론 나도 포함됐다.

중략 ~

만약 혜선 백이 떨어지면 난 이번 콩쿠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그 이상한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말았다. 본선 1차 실격. 내 평생 1차에서 떨어진 콩쿠르는 처음이었다. [pp. 73~74]

 

또다시 좌절한 그녀는 앞날을 냉정한 판단해보고, 미국 장거리 전화회사 MCI에 영업직으로 들어갔다. 영업직도 천성에 맞았을까? 두 달 만에 매니저 승진 제안을 받을 정도로 능력과 실적을 인정받았다.

그 때, 그녀의 은사인 변화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콩쿠르 준비는 하고 있고?”

매니저 승진 소식까지 전하지는 않더라도 솔직한 마음을 전할 차례 같았다.

선생님, 저는 피아노는 포기했어요. 음악으로 돈 벌고 사는 건 제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는 나가봐야 되지 않겠니?” [p. 77]

 

고민 끝에 그녀는 그녀가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콩쿠르인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지원했다. 여기에서 1위 없는 공동 3위에 입상하면서 다시 피아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인 3역의 좌절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서울대를 종착역으로 여기거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학생이고 교수고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서울대라는 결과에 운과 배경과 실력이 어떠한 비중으로 작용하였는지 헷갈려 하는 이들이 많았고, 교수들 역시 주변에 에헴 하며 으스대지만 내실은 텅 빈 이들이 많았다. 잠깐 머리에 쓸 감투를 너무 눌러써서 감투가 곧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긴, 십 년이면 나도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고 내 것이 아닌 자리였다. [p. 238]

 

학교에서 아무리 젊은 연주자를 위해 편의를 봐준다고 해도 직장은 직장이었다. 서울대 교수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르침에 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주에 가르치는 시간이 서른 시간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연주자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p. 251]

 

결국, 교육자, 연주자, 엄마로서 1인 3역을 수행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또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여긴 백혜선은 서울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의 경험 탓일까? 그녀는 교수직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손열음, 김선욱 같은 젊은 연주자들의 용기와 능력이 부러워하는 말도 남겼다.

 

교수가 되어 십 년 정도 지나면 어느덧 연주자로서의 빛을 잃어, 대중들에게조차 연주자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교수를 함으로써 안정을 얻되 자칫 연주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몸소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아프게 깨달은 그 사실을 이들은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p. 254]

 

 

교육자로서의 벽, 러셀 셔먼

 

콩쿠르와 서울대 교수의 간판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다시 교수가 된 것은 2013년이다. 8년 만에 다시 교수가 된 것이다.

 

참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선생님의 모습을 지켜봐 왔고 이제는 스스로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해오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가르치는 것보다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한다는 선생의 일이 몇 배는 어렵다는 것을. 셔먼 선생님처럼 가르치는 사람에게 그만한 실력이 없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셔먼 선생님은 희생하지 않는 연주자였다. 말하자면, 가르침으로 인해 자신의 연습과 연주가 희생되는 것을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음악에 대해 생각하기로 엄격하게 정해둔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레슨 시간에는 ‘학생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 온 초점이 학생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pp. 255~ 256]

 

학생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란 ‘저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다. 셔먼 선생님은 그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면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까지 했다. 그분은 ‘저렇게 되고 싶지만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p. 257]

 

백혜선이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스승인 ‘러셀 셔먼’이라는 벽에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되고 싶지만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을 아는 것만으로도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또 노력하고 있다.

여러 차례 좌절을 겪으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그녀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되고 싶지만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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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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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安藤忠雄]

 

일본 건축의 대중화를 이끈, 일본 3세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 ]는 여러 모로 유명하다. 일단 그의 이력이 특이하다. 프로복싱 선수 출신이라는 경력이나 고졸이라는 학력 모두 일반적인 건축가와 다르다. 거기에 그는 건축을 독학했다. 그렇기에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라는 이명(異名)을 지닌 세계적인 건축가로 우뚝 선 현재, 그의 삶은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첫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보면 뭔가 건축가로 성공할 수 있는 비법 혹은 자신의 성공담이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책을 고희(古稀)를 앞둔 시점에 내놓았으니 그런 생각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부정한다.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거듭해 온 이 무뚝뚝한 자전을 읽고 한국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인생에 용기를 가져준다면 좋겠다. [p. 5]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그림자

 

안도 다다오는 독학으로 건축을 배우는 과정에서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건축은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하지만 ‘물’이나 ‘빛’ 같은 자연적 요소와의 융합을 꾀함으로써,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콘크리트를 사용하되, 그 안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을 배려하는 건축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을 배려했다는 것과 인간이 생활하기 편리하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예를 들어, 그의 처녀작인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1976)은 그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노출 콘크리트를 소재로 간결하고 독창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내부 중앙에 하늘을 향해 개방된 중정(中庭)이 배치되어 있어 하늘과 바람, 빛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어, 도시 안에서 자연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좁은 집의 1/3을 차지하는, 지붕 없는 중정(中庭)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하는 등 일상 생활에 있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89

 

건축 설계의 목적이란 합리적이고 경제성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쾌적한 건물을 짓는 것이다. 닫힌 실내에서 숨죽이고 사는 것과 다소 불편하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과 호흡 할 수 있는 생활 중에 어느 쪽이 더 ‘쾌적’할까. 이것을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일상생활과 가치관의 문제까지 살펴서 궁리한다면 건축의 가능성은 더욱 넓어지며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p. 335] 

 

관점의 차이겠지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생활공간이라면, 나는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안도 다다오의 ‘쾌적한 건물’보다 생활하기 편리한 건물을 선택할 것이다.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공공시설이나 교회, 성당, 절 같은 종교시설 같은 경우라면 몰라도 굳이 몸과 마음을 쉬는 공간인 생활공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투쟁적인 건축가가 되기까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사회에서 학연이나 혈연 등 아무런 배경 없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맨바닥에 헤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안도 다다오가 뭔가 시작해도 거의 대부분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어쩌면 1%의 가능성도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기성의 개념과 고정관념, 경제적인 제약 등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결과다. 그래서 그를 ‘가장 투쟁적인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의 이력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아마 그것은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있다면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 것이다.

자기 삶에서 '빛'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눈앞에 있는 힘겨운 현실이라는 '그늘'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해 용기 있게 전진할 일이다.

정보화가 발달하고 고도로 관리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늘 볕이 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참된 행복은 적어도 빛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빛을 멀리 가늠하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몰입의 시간 속에 충실한 삶이 있다고 본다.

빛과 그늘. 이것이 건축 세계에서 40년을 살아오면서 체험으로 배운 나 나름의 인생관이다. [pp. 417~419]

 

 

노출 콘크리트가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처음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은 가성비가 좋은 재료이자 공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대 내가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미학적 의도에서만은 아니었다. 벽 안팎을 단번에 마감할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는 제한된 예산과 대지에서 최대한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비용도 저렴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p. 170]

 

하지만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에서 다른 의미를 찾았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공장에서 품질 관리를 할 수 없는 현장 작업’이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마감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재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콘크리트라고 해도 르 코르뷔지에의 라투레트수도원 같은 강력하고 거친 표현도 있고, 칸의 킴벨미술관 같은 단정한 표현도 있다. 즉, 건축가의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라는 것이다. [pp. 170~171]

 

그렇다고 그가 노출 콘크리트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들이 서양식 주택을 짓고 모여 살던, 고베의 주택가에 위치한 ‘로즈 가든’(1977)은 노출 콘크리트를 배제한 작품이다. 이 건축물은 다소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거리 보존과 주변과의 조화를 위해, 벽돌 벽과 합각지붕 디자인이라는 이진칸[異人館]1) 고유의 이미지를 계승하고 있다.

 

로즈 가든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129

 

또한 안도 다다오는 도큐토요코선[東急東橫線]의 시부야역[谷驛](2008)에 지하 깊은 곳까지 빛과 바람이 들어오는 보이드(void2))를 ‘달걀’ 모양의 껍데기로 둘러싼 지중선(地中船)의 형태를 제안했다. 이 ‘달걀’에 덮인 원룸형 역사를 지하 공간의 채광, 통풍, 방습을 위해 설치된 통로 드라이 에어리어와 연결하고, 달걀’ 껍데기의 재료로 일반 콘크리트가 아니라 안에 빈 공간이 있는 GRC(Glass fiber Reinforced Concrete)를 채택하여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환기가 가능한 ‘자연 환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런 점에서 환경파괴적인 노출 콘크리트가 대표하는 이미지와 달리 그가 환경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해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경제의 세기[20C]’에서 ‘환경의 세기[21C]’로의 전환을 고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도큐토요코선[東急東橫線]의 시부야역[谷驛]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328

 

아마도 이런 모습 때문에 책 날개에

 

생각의 자유를 잃지 않는 열정을 청춘이라 한다면 그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방법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다.

 

라고 얘기한 것 같다.

여전히 청춘인 안도 다다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이만 그의 자서전을 덮어야겠다.

 

1) 이진칸[異人館]은 막말(幕末)부터 메이지[明治]시대에 걸쳐 일본으로 온 서양인이 살았던 서양풍의 집

2) 보이드(void)는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 혹은 오픈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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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 - 정치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찾다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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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정치사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의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을

 

이 책은 영화의 정치사상적 빈곤과 ‘혁명’의 무관심을 반증하려는 작은 시도다. 하지만 숱한 영화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이 같은 관심을 기울였는지 경험적인 검색과 과학적 추적에 주력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빈곤한 조건 속에서도 이를 무릅쓴 대표적인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오히려 부족함 속의 풍요와 덜함의 정치미학이 펼치는 영화의 지평을 누벼보려 한다. [p. 44]

 

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2장 전체주의: ‘선’과 ‘악’은 생각의 상태일 뿐, 경계는 없다’에서는 마가레테 폰 포르타의 <한나 아렌트>(2012)를, ‘3장 사회주의: 시(詩)로 쓰는 공산주의 전사(前史)’에서는 장-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2010)을, ‘4장 원리주의: 폭력의 미학과 복수의 굴레’에서는 하디 하자이그의 <클린스킨>(2012)과 하니 이부-아싸드의 <천국을 향하여>(2005)를, ‘5장 자본주의: 거침없는 방종, 하염없는 불평등’에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2012)를 다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저자가 정치영화로 내세운 5편의 영화 가운데 하나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들 영화를 보고 정치사상 혹은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가선용 방법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영화에서 저자가 말하는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떠올리는 것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사상과 PPL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간접광고, 즉 PPL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경우 여주인공 송혜교가 사용한 아모레퍼시픽의 립스틱[라네즈 두톤 립바]은 드라마에서 노출된 후 전달 대비 556%의 매출이 급증했고, 남주인공 송중기가 탔던 현대 자동차의 투싼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판매량이 18.5% 증가했다고 한다.1) 물론 드라마 <미생>처럼 현실성 있고 적절할 PPL은 상관없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인 PPL은 <용팔이>, <여신강림>, <지리산>처럼 드라마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등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

 

정치사상도 마찬가지다. 과도하게 정치사상 혹은 이데올로기를 노출하면, 그것은 예술작품인 ‘영화’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위한 ‘선전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사상은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PPL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사상은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이라는 제목은 외줄타기보다 더 어려운, 영화에서 정치사상을 다루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니까 그 안에 의미를 알아서 찾아보자는, 저자의 갈망이자 역설적 표현이 아닐까?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인이 쓴 책인데 한국영화가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 류승완의 <베테랑>(2015) 같은 작품에서도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방종과 불평등을 엿볼 수 있을 듯 한데……. 영화관계자들에 대한 배려일까 아니면 한국 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일까 궁금하다.

 

만들 수 없어 못 만든 게 아니다. 만들기를 저어했고 보기를 망설였으며 다시 돌리기를 자제했던 터다. 하지만 일부러 안 만들었다는 저 편리한 핑계 속에 묻어나는 과거의 정치적 무능과 침묵으로 일관한 영화적 무관심을 늘 면책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제라도 차근히 제작방향을 세우고 촬영을 고민해야 할 진짜 이유다. [p. 224]

 

언젠가는 저자가 바라는 대로 정치사상과 영화의 예술성이 절묘하게 조합된 한국 영화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노승욱/김기진, “ ‘태양의 후예’ PPL로 재미 본 상품들… 강모연 립스틱 5배 ↑ “대박이지 말입니다~” “, <매경이코노미> 제1853호(2016.04.1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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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만나러 간다 뉴욕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
베티나 빈터펠트 지음, 장혜경 옮김 / 터치아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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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도시가 그러하듯 뉴욕 역시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죽었거나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할 20명의 뉴요커들은 뉴욕을 찾아온 당신에게 여행 가이드처럼 친절하게 뉴욕을 안내해 줄 것이다. [p. 7]



뉴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뉴욕의 전신은 네덜란드의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이다.

네델란드인들은 영국의 미 대륙 지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운영 비용은 최소화하고자 했다.

~ 중략 ~

게다가 북미는 향신료나 설탕, 차같이 뚜렷한 경제적 수익 모델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낮은 지역이었다.1)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은 서서히 와해되고 있었다. 이에 네덜란드에서는 피터르 스타위버산트(Pieter Stuyvesant, 1612~1672)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질서 회복을 꾀했다. 그는 뉴 할렘으로 가는 도로를 닦고, 항만 시설을 넓혔으며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700미터 길이의 담을 쌓는 등 낙후된 작은 항구를 소도시로 변화시켰다. 그의 노력으로 기반이 닦이고 성장하던 뉴암스테르담에 1664년 영국인이 침략했다. 이때 뉴암스테르담은 이미 18개 언어가 사용2)되는 코즈모폴리턴의 도시로 변했기에, 식민지 총독이 항전(抗戰)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영국의 식민지 뉴욕이 되었다.



예술가의 성지(聖地)


New York! ‘예술가의 성지(聖地)’라고도 불리는 도시.


먼저 음악부터 보면, 이곳 뉴욕은 전위적이거나 기존의 흐름을 깨는 음악이 많이 탄생한 곳이다. 예컨대 1970년대의 펑크 록,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등은 이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되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즈의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가 비틀즈 탈퇴 후 정착해서 솔로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뉴요커보다 더 뉴욕을 사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뉴욕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뉴욕은 재즈의 도시라는 별명에 맞게 재즈 문화를 꽃피운 곳이기도 하다. 재즈 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1~1971)이 살았던 퀸스의 저택은 이제 뉴욕을 대표하는 유명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코스에 포함되는, ‘루이 암스트롱 하우스 박물관이 되었다.


미국의 클래식 역사에 있어서도 뉴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유럽 클래식과 미국 재즈를 섞어 가장 미국적인 재즈 심포니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1924)를 작곡한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 덕분이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이끈 레너드 번스타인은 <랩소디 인 블루>


이것은 살아 숨 쉬는 미국이다. 조지가 너무나 잘 알았던 미국의 대도시 생활, 미국 사람들, 미국의 라이프스타일, 미국의 힘, 미국의 위대함이다.” [p. 44]


라고 정의했을 정도다. 그의 또 다른 걸작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1935)도 가장 미국적인 오페라 혹은 뮤지컬로 꼽힌다.


고전을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는, 뉴욕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1957)를 작곡한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영화 쪽으로 눈을 돌리면,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 )의 가장 우아한 뉴욕 영화라고 하는 <맨해튼>(1979)


“1, 그는 뉴욕을 숭배했다. 아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곳을 우상화했다.” 자신이 얼마나 뉴욕을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아이작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도입부[p. 115]


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디 앨런이


나에게 뉴욕은 항상 마법과 흥분, 기쁨의 장소다.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절대 살고 싶지 않다.” [p. 110]

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게 들린다.


외적 역할과 내적 감정을 녹여 하나로 만들라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Станисла́вский, 1863~1938)의 이론을 기초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활용해 더욱 확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기법을 창시한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1901~1982)도 빼먹을 수 없다. 그가 책임자로 있었던 연기의 명당 액터스 스튜디오(The Actors Studio)’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학교(The Lee Strasberg Theatre & Film Institute)’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비열한 거리(Mean Streets)>(1973), <대부 2(The Godfather: Part 2)>(1974),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Raging Bull)>(1980)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 1943~)는 뉴욕 최고의 성격 배우로 꼽히며, 현대의 뉴욕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도 불린다.


문학부분에서는 <뉴욕 3부작(The New York Trilogy)>(1987), <달의 궁전(Moon Palace)>(1989)으로 유명한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The Blindfold)>(1992)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 1955~ ) 부부,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1948)의 작가이자 마릴린 먼로의 3번째 남편으로도 유명한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 1940년대 초 맨하탄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시골 출신 젊은 여성의 삶을 그린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58)을 쓴 트루먼 커포티(Truman Capote, 1924~1984) 등이 있다.



뉴욕을 만든 또 다른 사람들


아메리카 드림의 성공 신화를 쌓은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은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 석유로 막대한 돈을 벌어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1911년 은퇴를 한 후 자산사업에 몰두했다. 록펠러 센터(1931~1939)와 리버사이드 교회(1927~1933)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존 D. 록펠러 2세는 국제연합의 뉴욕 유치를 위해 건설 부지 구입비용 850만 달러를 기부했다.


도시의 어둠을 담당하는 범죄조직을 대표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피아의 거물인 찰스 ‘러키’ 루치아노(Charles ‘Lucky’ Luciano, 1897~1962)와 범죄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도시의 범죄율을 극적으로 감소시킨 뉴욕의 107대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Rudolph Giuliani, 1944~ )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뉴욕을 아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이처럼 <그들을 만나러 간다 뉴욕>은 저자가 선정한 20명의 뉴요커에 대한 짧은 전기를 통해, 그들이 뉴욕이라는 도시에 남긴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동시에 현재의 뉴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려는 취지에서 쓰여진 책이다.


뉴욕을 여행할 때, 이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보는 것도 뉴욕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저자가 선정한 20명 가운데 생존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보니 시간의 경과에 따라 루돌프 줄리아니처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3)는 점이 아쉽다. 또한 단순한 전기(傳記)들을 모아 엮은 형식이기에 이것만으로 뉴욕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기에는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뉴욕의 특정 장소와 관련된 에피소드나 그들의 작품 가운데 뉴욕과 관련된 부분을 강조하여 이를 엮어보는 쪽이 더 인상적인 뉴욕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정유진 옮김, (글항아리, 2017), pp. 100~101

2) 앞의 책 p. 97에 따르면 뉴프랑스의 예수회 신부였던 聖 이삭 조그(Issac Jogues, 1607~1646)는 뉴암스테르담의 인구가 500명인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18개였다고 추산했다고 한다.

3) 이용욱, “ '법질서 시장줄리아니의 몰락”, <경향신문> 2021.06.25 (https://m.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106252035005#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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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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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느린 여행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차례 봐서 그런 것일까? 왠지 청량한 파란색의 아줄레주(Azulejo) 타일 벽화가 인상적인 이 책의 표지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 책, <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은 제목에서 여행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흔들의자나 등받이 의자에 기대고 옆 테이블에 놓인 커피 향기를 즐기며 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제목도 신호음이 들리자 마자 허겁지겁 뛰는 것이 아니라 ‘반 박자’의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자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치고 보니

 

한 박자 반 정도 느린 편이다, 나는. 한 박자 서두른 게 분명했는데, 한 박자 반만큼 뒤처지니 다시 그만큼 뒤에 있다. [p. 4]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했다. 어? 도대체 어떤 여행을 하자는 거지? 설마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겪어 왔던 패키지 여행처럼 서두르는 여행을 하자는 것인가? 모두다 알다시피 해외 여행을 패키지로 출발하면 게임에서 주어진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정해진 무엇을 시간에 쫓기듯이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행’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다가 인증 사진 몇 장을 남기거나 기념품 몇 개를 사오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다행히 저자의 포르투갈 여행은 한 박자 빠른 여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느리게 혹은 쉬엄쉬엄 순간순간을 즐기는 여행이었다.

 

햇살은 커다란 창이 난 곳으로 하염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얀 커튼 그림자가 출렁거렸다기지개를 쭉 켜고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블루투스 오디오를 켰다. 호텔 로비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잔잔하고도 리드미컬한 노래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30분을 더 가만히 누워있었다[pp. 232~233]

 

그래. 여행이라면 이런 여유 정도는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행의 즐거움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이라면 이국적인 먹거리일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사람들은 요리를 하고, 함께 그 음식을 나눠 먹는 데 시간을 쏟는다. 서민들의 삶과 역사가 담긴 식재료로 만든 음식과 와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더 맛있게 느껴진다. 천연 재료의 맛을 살린 담백한 요리가 많은 이유는 직접 잡은 물고기, 직접 키운 야채와 포도처럼 신선한 식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포르투갈에서는 음식의 역할이 중요하다. [p. 271]

 

포르투갈’하면 떠오르는 먹거리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고,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에그타르트다. 포르투갈에서는 이를 ‘나타(nata)’, 정확히는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에그타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저자가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먹으면 행복해진다는, 리스본 벨렘지구에 있는 ‘Pasteis de Belem’1)의 에그타르트의 맛이 궁금해졌다. 그때 함께 마신 에스프레소의 맛도!

사실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음식은 기대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맛에는 실망하게 되기 쉽다. 심지어 나는 마카오에서 로즈 스토우즈 베이커리(Lord Stow’s Bakery [安德魯餠店])’의 에그타르트를 먹고, 맛은 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 곳의 에그타르트를 맛보지 않고 귀국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비극보다도 슬픈 일’이라고 소개받은 에그타르트는 불행히도 내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와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프랑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포르투갈에도 와인이 있다. 그것도 영국에서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을 대체하기 위해 선택한! 그 와인이 포르투갈 북부 도우루(Douro) 강 상류 인근에서 생산되는 포트 와인이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수십 개의 와이너리 투어가 있다는데, 저자는 포르투갈 여행기간이 충분하지 않거나 와이너리 투어에 큰 관심이 없다면 대형 와이너리를 추천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좁은 골목을 오래 걸어가 발견했던 아우구스투스 와이너리 투어와 같은 각자의 신념과 전통을 이어가는 작은 와이너리의 매력도 피력한다.

 

포르투갈 요리의 대표적인 식재료가 소금절인 대구인 바갈라우(Bacalhau)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문어 요리를 찾는 장면도 많이 나왔고, 실제로 거의 매일 문어 요리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에서 매일 먹는 문어 요리는 오늘도 예외가 없다. 운 대구와 오징어, 야채와 감자를 곁들여 식감을 달리하며 먹는 식사는 더 재미있다. [p. 139]

 

알고 보니 문어[Polvo]도 포르투갈 요리의 대표적인 식재료 가운데 하나였다.

 

 

먹거리만 여행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저 이국적인 먹거리를 음미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여행을 가지 않고, 국내에 들어온 각 나라 요리의 전문점을 방문해도 무방할 일이다. 아무래도 즐길 거리도 있어야 여행에 흥이 난다.

한국의 판소리처럼 포르투갈에도 민속음악이 있다. ‘파두(Fado)2)’라고 하는 이 음악은 판소리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첫 파두 레스트랑에서는 두 명씩 온 여행자들에게 4인 테이블을 공유하길 권하면서 빈자리가 없게끔 공간을 꽉 채웠다. 일하는 직원은 느렸고, 사람이 많아 주문이 밀렸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었기에 로컬 음식 위주로 파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영어 메뉴가 없어서 심혈을 기울여 골라야 했다. 와인을 마시면서 프랑스에서 왔다는 옆자리에 앉은 두 여행자들과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예상치 못한 순간이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오브리가다(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그 순간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목청 좋은 한 파디스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강렬한 전율을 잊지 못한다. 여자와 남자가 주고받듯 노래를 하며, 레스토랑 그 좁은 테이블 사이를 조금씩 이동하기까지 한다. 사각지대에 있는 손님을 위한 배려였을까. 둘의 고혹적인 목소리에 빠져들 때쯤 저쪽 코너에서 다른 가수 한 명이 합류한다. 그렇게 또 한 명이 더 합류했고…. 자유롭게 노래하는 파디스트의 향연에 여행자들은 카메라를 꺼냈지만, 아무도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았고,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어두워서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의 표정과 연주와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밥이 나왔지만 배고픔도 잊은 채였다. 그 작은 로컬 레스토랑에서의 파두 가수들은 식당의 여행자들과 소통하며 노래하고 있었다밝은 노래는 몸짓으로, 슬픈 선율은 눈빛으로 허공에 만들어낸 그들의 손짓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마음을 울리며. [pp. 169~170]

 

다만, 그녀가 들은 두 번째이자 보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들은 파두는 그때의 전율을 다시 한번 안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좀더 고급지고 세련된 멋을 얻는 대신 서민의 삶에서 나온 날 것의 감정을 놓친 것이 아닐까?

 

마치 홍보대사도 된 듯이 포르투갈 여행을 가는 사람마다 오비두스(Obidos)를 추천했다가 후회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람마다 혹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여행지의 느낌은 다 다를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하는 질문에 지금의 나는 다른 답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내가 겪고 있는 시절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중략 ~

내가 겪은 계절과 당신의 계절의 온도는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p. 122]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1) 원조 에그타르트 맛집이라는 파스테이스 드 벨렘(Pasteis de Belem)에 대해서는 오봉파리(obonparis)라는 사이트의 포스팅(https://www.obonparis.com/ko/magazine/pasteis-de-belem-lisbon)이 유용하다.

2) 파두(Fado)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민속 음악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우다드(Saudade)가 서려 있다. 흔히 우리나라의 한(恨)과 비슷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원망이나 억울함, 안타까워 응어리진 마음과는 다르다. 향수, 그리움, 열정, 운명, 질투와 슬픔, 좌절과 용기가 어린 그들의 삶이자 정서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우울해하거나 슬퍼할 이유도 없다. 삶의 질감이 드러나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파두라는 것일 뿐, 일상생활에서는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정도의 의미로도 가볍게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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