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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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따라서 사회를 벗어나 존재하기 어렵다이런 점을 고려하면개인이 속한 조직 구성원 모두가 ‘yes’를 외칠 때 홀로 ‘no’라고 말하기 어렵다더구나 ‘yes’를 말하도록 강요 받을 때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오세아니아라는 국가는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yes’를 강요하는 조직이다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은 송수신이 동시에 가능한 텔레스크린에 의해 통제되는 당원과 하층 노동자인 프롤(Prole)로 나눠지고당원은 권력을 누리는 내부 당원과 실무를 담당하는 외부 당원으로 다시 분리된다.

나아가 개인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오세아니아라는 국가 혹은 당()의 부품으로만 존재한다개인의 개성과 욕구는 말살되고여기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려는 사람은 그가 존재했다는 모든 흔적이 사라지는 증발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된다그리고 고문을 통해 인간성을 말살하고 마음까지 빅 브라더라는 오세아니아의 통치자에게 복종하도록 세뇌시킨다.

따라서 노트를 사서 일기라는 개인적인 기록을 작성하는 외부당원인 윈스턴 스미스(Winston Smith) 같은 존재는 돌연변이그러니까 일종의 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따라서 빅 브라더라는 상징적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오세아니라라는 국가는 이러한 돌연변이가 전이(轉移)되거나 확산되기 전에 제거하려고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국가의 조치는 효과 만점이다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평범한 당원이었으나 체제에 의문을 품게 된 원스턴 스미스와 같은 존재가 개성을 상실하고 조직의 부속품으로 다시 되돌아갔으니까.

 “그는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는 저 시커먼 콧수염 아래에 숨겨져 있는 미소의 의미를 배우는 데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저 자애로운 품 안을 벗어나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살아온 유랑이여술 냄새가 배어 있는 두 줄기 눈물이 그의 코 양 옆으로 흘러내렸다하지만 잘되었다모든 게 잘되었다투쟁은 끝이 났다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p. 347]

 

 

디스토피아는 현재 진행형이다.

 

<1984>처럼 정부가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인은 SNS 등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삶과 기억을 디지털화하여 자발적으로 외부에 노출하고 있다만약 어느 날 디지털화된 자료가 모두 날아간다고 하면 <1984>에서 빅 브라더가 통치하기 전의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두 당()이 숙청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1984>에서는 핵전쟁도 과거를 삭제하는 데 한 몫 한 것 같지만…….

그런 상황에서 CCTV 등을 이용해 개인의 삶을 통제한다면 <1984>의 세계가 현실화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지금 현재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그래서 진실을 찾고 기억하려는 이들이 소중하다왜냐하면그런 전체주의 사회가 출현한다면 그런 이들이 <1984>에 나오는 원스턴 스미스나 줄리아(Julia)처럼 체제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들 대부분은 파멸하고그들의 이야기는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 扮)이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고 말했던 것처럼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행동해야 하고다른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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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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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어떤 사람이 이 사람보통 사람입니다믿어주세요!’ 그리고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통령이 되었다그 이후 어쩐지 보통이라는 단어가 특별하게 들렸다.

아니원래 보통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보통의 언어는 또 어떤 언어일까제목에 대한 호기심에 집어 든 이 책, <보통의 언어들>은 참 묘한 책이다단어들을 수집해서 그 사용 사례와 의미를 첨가한 형식을 띠고 있는데 사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오히려 관계’, ‘감정’, ‘자존감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수집한 단어들을 통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은 수필집의 느낌이 짙다.

 

첫 번째 ‘관계의 언어’에서 여러 단어를 얘기하고 있지만나는 미움 받다와 선을 긋다에 꽂혔다사실 []’이라는 것은 소통의 도구이지만입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음악을 감상하는 이가 그 음악에 대해 평가하듯이 듣는 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당연히 불특정 다수와는 정당한 관계가 성립되기 힘들다그들은 내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써야 할 이유도굳이 나와 소통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다 보니 나의 말이나 글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악성 댓글을 달기도 한다그래서 타인과 선을 긋는 일이 중요하다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AT필드와도 비슷한심리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드니까.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설령 대중적으로 그런 사람이 존재할지언정 측근들 사이에서 차라리 험담이 떠돈다면 그것은 다행이다한 명의 사람이 누구를 대하든 매끄럽다면그 사람은 흡사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거니까그걸 아무리 알고 있어도미움은 어릴 때 꼭 먹어야 된다고 엄마가 얹어주던 맛없는 반찬처럼 삼키기가 싫다.” [pp. 23~24]

아마도 그래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나오고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닐까?

모든 면에서 완벽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보인다면그는 한쪽 면만 드러내는 달처럼 이면(裏面)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끝없이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거울처럼 를 잃어버리고 끝없이 남이 보고 싶은 를 연기해야 하는 지옥도에 들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면 선 긋기가 필요하다왜냐하면 인간은 나만의 공간을 필요하기 때문이다저자는 열 명의 사람 중 두세 명에게서 미움을 받는다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그러나 그게 백 명천 명이 넘어가면 두렵다퍼센티지로는 동률이어도 숫자로 세어지는 마음이 미움이다살면서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어느 순간 이에 대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긴 대로 살아야겠다는 것’ 말이다방송을 하면서부턴 더더욱 그랬다어쩔 수 없이 호불호(好不好)의 평가를 받아야 되는 일을 시작한 이상내 방향성은 더 명확해졌다그건 바로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는 것” [p. 24]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흔히 선을 긋다라는 말에는 너에게 불편함을 느껴 거리를 둔다는 뉘앙스가 담겨있어 상대방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하지만 저자는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나의 영역을 확인하고 나를 인식하려는 것이다그렇기에 소중한 사람일수록 잘 바라보아야 한다세심히 살펴야 한다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당연히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관계는 V3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된다” [p. 30]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의 언어’에서는 단어가 지닌 특유의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학창시절에 배웠던 공감각적 표현은 어쩌면 스마트폰 시대에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를 들면, “ ‘반짝이다’‘빛나다’라는 말이 시각적인 기억을 주로 환기시키는 반면, ‘찬란하다는 표현은 내게 유리조각들이 부딪혀 챙그렁대는 소리가 나는공감각적인 그것에 가깝다뜨겁게 빛나는 태양보다는그 빛이 내리쬐어 물결에 빛나는 모습이 찬란하다와 어울리는 것 같다.

중략 ~

찬란하다는 말의 실제 발음인 ‘찰-란’은 의 받침 ㄹ과 의 자음 ㄹ이 파도 능선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햇살이 닿은 물결의 느낌인 것이다.” [pp. 101~102]

이처럼 너무나 익숙해서 빛나는 것을 몰랐던 단어들의 색다른 모습들을 포착하여 상상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이 저자와 같은 작사가나 시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 번째 ‘자존감의 언어’는 작사가 김이나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여기서 언급하는 단어 가운데 과 살아남다는 대조적인 것 같으면서 서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등래퍼 2>에서 서울외고 입학예정인 하선호는

꿈을 강요하면서

꿈꿀 시간을 주지 않아

모두의 꿈이

책 속에 있다 믿는 거야

중략 ~

철이 없대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매년 적어 내래

장래 희망 oh ah yeah

없어서 없다 썼는데

그게 왜 의지 부족이고

생각 없는 거야라고 외친다.

 

사실 어렸을 때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과학자선생님 등을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때는 몰랐는데본능적으로 왜 그러고 싶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추가적인 질문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같다결국 그때의 나는 꿈이 없었던 것이다.

 

꿈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씨처럼 소리소문 없이 피어났을 때 비로소 꿈이다어쩌면 어릴 때 반복적으로 받은 질문 탓에 우리는꿈을 목표와 혼동하는지도 모른다영화로 말하자면목표는 어느 만큼의 관객수를 동원할지얼마의 수익을 창출할지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다루는 이야기다반면 꿈은 미술을 논한다어떤 분위기의 장소어떤 색깔과 질감의 의상또 어떤 종류의 소품에 둘러싸인 주인공…. 즉 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pp. 149~150]

 

이렇게 피어난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살아남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치열한 순간들의 연속이다단순히 존재감 없이 꾸역꾸역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을 그녀는 살아남다라는 단어로 고백한다.

무례한 클라이언트에게 일침을 날리지 못하고 웃어버린 순간음악 관련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던 돈 많은 제작자가 가사를 가지고 (빨간 펜으로 줄을 그어가며감 놔라배 놔라 할 때 그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 190]

외부에서 바라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중요한 건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 날지언정 더 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pp. 191~192]

 

백조는 수면 위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수면 아래에서 쉴 새 없디 발버둥 쳐야 한다는 말처럼  ‘스타 작사가라는 후광을 끄고 고단하고 혹독한 생존의 과정을 가감 없이 들려준다.

 

 

이 책은 우리가 자주 표현하는보통의 단어들을 수집하고그 단어들이 다 품어내지 못해 흘러내린 의미와 오해를 섬세하게 포착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저자의 본보기를 따라 보통의 단어 속에 깃들인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의 방향성을 찾고 이정표를 세우는 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Radio record’에는 라디오 「김이나의 밤편지」에서 했던 그녀의 주옥 같은 멘트들이Lyrics’에는 시중에 발표되지 않은 노랫말이 실려 있어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키워드로 모은 보통의 단어들이 어떻게 노랫말로 녹아 드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마치 부록으로 그녀의 습작 노트를 살짝 보여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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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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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베스트 송 모음

 

소설가 한강은 몇 차례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적이 있다그때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어울리는 단아한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무엇인가 결핍된 인물들 때문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정확한 실체는 모르겠지만그녀가 창조한 인물예를 들면 <채식주의자>의 영혜나 <희랍어시간>의 주인공들인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등이 현실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자신을 일부라도 투영(投影)한다는 말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간의 유사성을 찾고괴리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한때 내가 그녀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활동하면서 엮은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를 찾아본 이유가 아닐까책 소개에 따르면노래에 담긴 그리운 지난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본다고 하니 뭔가 좀더 감상적인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또 그녀가 직접 만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 10곡의 노래가 궁금하기도 했다불행히도 2010년대 초반에야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종로에 있는 대형 서점 몇 곳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절판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우연히 들린 대형서점에서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보고집에 돌아와 주문을 했다시는 시인의 영혼을 담아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했었고이 시집이 그녀가 20여 년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엮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어떻게 보면 그녀의 베스트 송 모음집인 셈이다.

 

 

소리도빛도 없는 어둠을 넘어

 

새벽에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pp. 12~13]

 

이 시는 혹시 <희랍어 시간>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일까?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희랍어 시간>의 남자처럼 시력을 잃어가는 것을혀가 녹지 않아 입술을 닫은 것은 같은 책의 여자처럼 모국어를 말할 수 없는 것을 각각 그린 것이 아닐까?

혹시 <희랍어 시간>과 아무 상관 없다면 왜 시인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녁의 소묘 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p. 85]

 

시인은 왜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것이 부스러질 것들이라고 했을까이 또한 소설에서처럼 결핍을 나타내기 위해서일까? ‘부스러진 것이 아닌 부스러질 것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마치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암시하기 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저녁일까’ 였다서랍이 무엇인가를 넣어 두는 수납공간인 것은 맞는데아침도점심도 아닌 저녁을 넣어 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결국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저녁의 소묘’, ‘거울 저편의 겨울’. 이 시집에서 실린 연작 시()들의 제목들이다뭔가 검은 아우라(Aura)가 살짝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제목들이다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물론 이 책에 실린 시()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는 읽기 어렵다고등학교 국어시간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분석해보려는 마음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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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열린책들 세계문학 251
서머싯 몸 지음, 이민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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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출신 스파이서미싯 몸

 

이안 플레밍(Ian Fleming, 19081964) 007시리즈에서 나오는 제임스 본드처럼 비현실적인 모험담 위주였던 당대 스파이 소설들과는 달리 서미싯 몸(Somerset Maugham, 1874~1965) <어셴든영국 정보부 요원>(1928)에서 하나의 직업으로서 스파이를 묘사했다이에 영향을 받은 존 르 카레(John le Carre; 1931~)는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Call for the Dead)>(1961) 등 사실적 스파이 소설을 남겼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여기에 언급된 작가들은 모두 스파이 출신이다물론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등 대부분 순수 문학작품을 남긴 서미싯 몸이 영국 정보부 요원 출신이라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가 러시아 2월 혁명 후 멘셰비키의 알렉산드로 케렌스키(Aleksandr Kerenskii, 1881~1970)가 이끄는 내각을 지원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고 1917 7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파이로서도 만만찮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책에서 정보부 대령 R이 작가 어셴든에게 유럽의 여러 언어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작가라는 직업이 첩보원이라는 신분을 위장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얘기였다책을 쓰기 위한 직업이라는 구실이 있으니 괜한 시선을 끌지 않고도 어떤 중립국에든 갈 수 있지 않느냐” [p. 16]라고 설득했듯이 작가는 스파이들이 이용하기에 최적의 직업 가운데 하나다물론 이 경우 작가들도 스파이 체험을 소재로 이용할 수 있으니 서로가 Win-Win 이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스파이 활동을 했던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007시리즈의 이안 플레밍,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등을 쓴 존 르 카레, <레드 스패로우> 쓴 제이슨 매튜스(Jason Matthews; 1951~ ), <자칼의 날> <오데사 파일>을 쓴 프레드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 1938~ ) 등이 그렇다아마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침묵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자기 자랑을 한 것이 아닐까이는 번역가 김석희는 타고난 스파이습관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경험을 제거할’ 필요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자문(自問)한 뒤 소설을 쓴다고 자답(自答)했다.1)라는 얘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그래서인지 스파이 소설을 남기지 않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 <멋진 여우씨>, <마틸다등 아동을 위한 작품을 쓴 로알드 (Roald Dahl, 1916~1990)과 같은 경우가 예외적인 사례로 보인다.

 

 

작가 출신 스파이어셴든

 

이 소설에서 작가출신 스파이로 나오는 어셴든은 작품 구상을 핑계로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 각국을 오가며 첩보 활동을 펼친다. <어셴든영국 정보부 요원>이라는 책 자체가 어셴든이 스파이 임무 수행 중에 겪게 되는 일화를 다룬 16편의 단편을 모은 것인데일종의 연작(連作소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단편인 [R]은 정보부 대령 R이 작가 어셴든을 스파이로 스카우트하는 얘기를 프롤로그처럼 간략하게 다룬다.

두 번째 단편인 [가택 수색]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입수해 어셴든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프랑스에 있는 첩보국 본부에 전달하러 간다이 부분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인데뭔가 긴급하고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해서 상사에게 보고하면상사가 ……. 그래그런데 우리가 뭔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군’ 혹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물론 그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스위스 경찰이 가택 수색을 한 부분은 어셴든이 스파이였지 하고 되새기게 하지만.

네 번째 단편인 [대머리 멕시코인]에서 여섯 번째 단편인 [그리스인]까지는 멕시코의 우에르타 반란군 장군 출신임을 주장하는 살인 청부업자와 동행하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으로 보내는 기밀 서류를 입수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루고 있다.

열 번째 단편 [배반]에서는 조국을 배반하고 독일의 스파이가 된 영국인 그랜틀리 케이퍼를 회유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맡아 스위스의 루체른에 간 어셴든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어셴든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정보부 대령 R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상사의 장기말이 되어 버린 조직원이 떠올라 씁쓸했다.

 

짧은 단편들의 모음이라서 그런 것일까이 책에서는 우리가 스파이 소설이라고 할 때 기대하는 쓰릴 넘치고 긴박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오히려 스파이 소설적인 요소가 묻은 건조한 회사원의 느낌이 짙었다저자가 괜히 서문에서 정보부 기관원이 하는 일은 대체로 단조롭기 짝이 없다많은 부분 쓸모 없는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소설의 소재로 쓰려 해도 단편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대부분” [p. 11]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007시리즈와 같은 빠른 전개긴박감반전 등을 기대하는 이라면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고, <팅거테일러솔저스파이>를 즐겁고 재미있게 읽은 이라면 한 번 읽어 볼 만하다.

 

 

옥의 티

 

p. 206

한편으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哥)>와도 같은 ~ ⇒ 한편으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歌)>와도 같은 ~

무언가 Lieder ohne Worte의 번역이므로 한자 표기는 無言哥가 아닌 無言歌가 맞다.



1) 문갑식, “[방랑자의 인문학 <8>]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옥스퍼드-런던-베를린의 뒷골목”, <월간조선 19 5>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905100044&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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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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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의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중국의 루쉰[魯迅, 1881~1936]나 한국의 이광수(李光洙, 1892~1950)처럼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첫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지만마쓰야마[松山]의 중학교로 전근해서 겪은 경험을 소재로 쓴 <도련님>으로 더 유명하다.

왜냐하면이 작품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봉건주의를 넘어 산업사회에 기반을 두고 사실주의를 구현한 찰스 디킨스의 선험적인 시선을 장착한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련님>은 그런 의미에서 유학 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의 첫 소설로 보아 무방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어떤 문학적 호기심의 시도로 출발한 것이라면 <도련님>은 근대 작가가 매달렸던 체험적 소재를 통한 사실주의의 실현이 녹아 든 동양의 첫 작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 177]

 

 

도련님의 좌충우돌

 

도련님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귀하게 자라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였다부족함 없이 자라서 돈에 얽매이지 않는그냥 바라만 봐도 귀티 나고 훤칠한 부잣집 도련님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번역한 이가 제목을 잘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저자인 나쓰메 소세키가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사를 거쳐일본에서도 오지라고 불리는 시코쿠[四國에히메[愛媛현에 있는 보통중학교로 전근해서 겪은 경험을 소재로 쓴 글이라고 한다그러니까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인 셈인데왠지 욱하는 도련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사회의 물이 덜 든 애송이이기에 주인공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쉬쉬하며 덮여버리던 일들과 타협하는 대신 우직하게 충돌한다처음 숙직하는 선생의 이불 속에 메뚜기를 집어넣는 기숙사 학생서화나 골동품을 강매하려는 하숙집 아저씨나 끝물호박[고가영어교사]을 멀리 보내고 그와 결혼을 약속한 마돈나[도야마네 딸]를 수중에 넣으려는 빨간 셔츠[교감등과의 갈등은 어쩌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는 중학교 학생과 사범학교 학생간의 패싸움을 말린 일 때문에 산미치광이[훗타수학교사]가 부당하게 면직당하자주인공이 교장에게 가서 사직 의사를 밝히고 이력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이력보다 의리가 더 중요합니다.” [p. 165]라고 외친 일이 아닐까?

직장인의 필살기가 사직서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인공의 도련님 같은 면모를 더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짧은 교직 생활에 대한 스케치와 같은 이 소설이 그렇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소설 여기저기에 내비치는 주인공의 도련님다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기에 역설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런 도련님이 아닐까그래서 이 책의 해설을 쓴 소설가 백가흠도 도련님은 외롭다정직하기 때문에솔직하기 때문에관대하기 때문에순응하기 때문에 외롭다지금의 세상은 정직하면 손해 보는 곳이고솔직하면 비난받는 곳이고관대하면 무시당하는 곳이고순응하면 빼앗기는 곳이다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 보고비난받고무시당하고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이는 전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마음이다인간을 윤리나 도덕예의 안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허나 이는 슬픈 일이면서 망가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 183]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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