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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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빵[pain]이 없으면 케이크[brioche]1)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치스럽고 생각 없는 여인을 상징하는 이 말은 불행히도 그녀가 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제6권의 한 구절2)을 인용해서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누명을 써야 했을까? 먼저 이 책,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가를 살펴보자.

 

진실이란 대개 그렇듯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마성(魔性)을 과시할 소양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를 이룰 의지도 없으며, 따라서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p. 10]

 

그러면서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아주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또 무시무시한 개인적인 책임에 몰릴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중략 ~

마리 앙투아네트야말로 그러한 역사의 분명한 증거이다. 38년이라는 생애의 초반 30년 동안 이 여인은 무심한 길을 간다. 적어도 눈에 띄는 범위 안에서는, 그녀는 한 번도 선이든 악이든 평균치를 넘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인생이요 평범한 성격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그녀의 유희 세계 안으로 혁명이 밀어닥치지 않았더라면, 미미한 이 합스부르크가(家)의 여인은 모든 시대의 수많은 여인들처럼 그저 그렇게 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pp. 10~12]

 

저자의 평가처럼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범한 보통사람, 우리 주변의 소시민과 같은 마인드를 가졌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의 황제였던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왕비인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운명에 희롱 당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갔을 테니까. 어쩌면 그녀가 겪은 비극은 아무런 준비 없이 왕비가 된 그녀가 받아야 할 업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혀진 왕관의 무게를 어떻게 느끼고 반응해야 하는지 그녀가 결혼하기 직전까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부모의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제대로 왕권을 쓴 자의 역할을 배우지 않은 탓인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 차례의 징조를 그냥 넘기고 만다. 만약 루이 16세와 그녀가 그 징조들을 보고 제대로 대처했다면 혁명과 공화정이라는 루트 대신 개혁과 입헌군주정이라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흔히 소시민적인 평범한 사람이 격변기에 권력의 정상에 위치하게 되면, 그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일수록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거나 그가 속한 조직이 나락으로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선량한 아버지이나 무능한 지도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淸)나라를 동네북으로 만든 시기의 황제였던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 등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슈테판 츠바이크도 이 책을 통해 평범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의 커다란 비극 앞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변화하는지 그려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생각 없이 경솔하게 살아온 15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비라는 것은 오로지 궁중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애교 있고, 가장 옷을 잘 입고, 가장 버릇이 없고 또 무엇보다고 가장 잘 노는 여자라는 찬사를 받는 것아르비테를 엔레간티아룸, 즉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지나치도록 고상하게 훈련된 사교계의 지도적인 사교부인임을 뜻했다.

중략 ~

혁명이 그녀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무대에서 완력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세계사라는 위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운명이 자기에게 영웅적인 역할을 맡을 힘과 강한 영혼을 주었는데도, 지나간 20년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녀의 역과 살롱 귀부인의 역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p. 118]

 

비록 그것이 뒤늦은 노력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시도와 도전은 그녀를 진정한 프랑스 왕비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 대해, 그녀의 비극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번역가들도 이 책에 대해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평범한” 인물에 대한 심리소설 쪽에 가깝다. 쇤브룬 궁의 철없는 소녀가 프랑스 왕비가 되고 결국은 단두대에서 사라지기까지의 내면적 성숙을 그린 작품이다. [p. 552]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책도 고귀한 태생의 주인공이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몰락하는 고전 비극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여기에 다소 변형을 가해 태생은 고귀하지만 평범한 소시민 같은 성격의 주인공을 등장시켰을 뿐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에게 잘못이 있다면 국왕과 왕비가 된 것이 아닐까?

 

1) 서민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pain]과 부자들이 먹던, 버터와 달걀을 넣어 맛을 돋운 고급 빵[brioche]을 대조하는 말인데, 영어나 한국어 등에서는 ‘브리오슈(brioche)’가 ‘케이크’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2) 드디어 나는 한 지체 높은 공주가 제안했던 임시방편을 기억해 냈다. 사람들이 그 공주에게 “농민들에게 빵이 없다”고 말하니, 그 공주는 “브리오슈(brioche)를 먹게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Enfin je me rappelai le pis-aller d’une grande princesse a qui l’on disait que les paysans n’avaient pas de pain, et qui repondit : Qu’ils mangent de la brio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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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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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3대 거장 중 하나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은하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대하 소설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된 작품이라서 그런 것일까? 특정한 주인공이 없고 시대 혹은 역사 그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파운데이션>은 인류 문명의 암흑기를 단축하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설립한 심리역사학자 해리 셀던의 계획부터 시작한다.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변방에서 온 가알 도닉을 비롯한 한 무리의 과학자들과 그 가족들을 은하계 끄트머리에 있는 ‘터미너스’라는 별에 추방의 형식으로 보낸다. 이들은 표면적인 목적인 백과사전 편찬에 전념한다.

5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은 은하 제국의 영향력에 벗어나 독자세력화를 시도하는 이웃들의 압력 속에서 파운데이션이 설립된 진실된 목적을 알게 된다. 이때 백과사전 편찬만을 우선시 하는 위원회로부터 초대 시장인 샐버 하딘이 파운데이션의 실권을 탈취하고, 주변 세력들 간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서 위기를 극복한다.

다시 30년이 흐른 뒤에는 샐버 하딘이 아나크레온 왕국의 파운데이션에 대한 공격을 종교를 이용해서 물리친다.

파운데이션이 건설되고 150년이 지난 후, 종교와 교역이 결합된 영토 확대를 꾀하는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시장이 된 무역상인 출신의 호버 말로가 교역을 이용해서 코렐 공화국과의 전쟁에 승리한다. 이렇게 <파운데이션>에서는 3차례의 각기 다른 ‘셀던 위기’로 표현되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한다.  

 

언뜻 보면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처럼 위기가 다가오면 영웅이 등장해서 손쉽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어렸을 때 읽고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심리 역사학’에 흠뻑 빠져, 실제로 가능하다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심리 역사학’에 의한 미래는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디스토피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 해리 셀던은 시간 유품관에서 이렇게 말했네. 위기가 닥치는 순간마다 우리가 누리는 행동의 자유는 단 한 가지 행동만 취할 수 있도록 범위를 제한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좁은 길만 따라가야 한다 말씀입니까?”

곁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네. ……” [p. 131]

 

이처럼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심리 역사학’은 새로운 제국 수립을 위한 설계도이자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파운데이션’의 시민들, 나아가 은하 제국의 신민들에게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주어진 미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이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많은 심리학 실험이 그렇듯이 대상자가 실험의 의미를 알 경우 결과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변수를 줄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은 이해한다. 그래서 해리 샐던도 변방의 행성 ‘터미너스’에 ‘파운데이션’, 즉 제1 파운데이션을 설립하면서 심리학자를 제외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통제는 ‘암흑시기의 축소’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통제 받는지도 모르고 다른 이가 규정한 삶을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노예의 삶이 아닐까? 자신의 의지로 행동했다고 믿었던 것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통제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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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4
최부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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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종 18년(1487) 최부(崔溥, 1454~1504)가 제주 세 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1)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파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성종 19년(1488), 최부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야기는 급진전된다. 이 소식에 최부는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서둘러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제주도를 오가는 것이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해야 할 정도로 험난한 일이었다. 문제는 날씨를 가늠하기 어려워 출항여부를 놓고 다투다가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동풍(東風)이 좋으니 떠나자고 권하자, 부친상을 빨리 치르고자 하는 최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 밖에. 그래서일까? 최부의 나주행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바람이 약해지면서 비가 쏟아졌다. 추자도의 배 대는 자리가 가까워졌을 때 썰물은 몹시 급하고 하늘은 매우 캄캄하였다. 군인들을 지휘하여 노를 젓게 하였으나,

이런 날에 배를 떠나게 한 것이 누구 잘못인데…….”

하고 모두 중얼거리며 반발심을 품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이 제멋대로 노질하여 뒤로 밀려나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편 언덕 아래에 닻을 내리고 배를 대었다. [p. 20]

 

이 무렵 닻이 부서져서, 이를 확인하고 급히 노를 저었으나 북풍에 휩쓸려 바다 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본격적인 표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간신히 닿은 절강(浙江) 영파부(寧波府) 하산(下山)에서 해적을 만나 약탈을 당하고, 다시 큰 바다에 버려져 표류하다가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닿았다. 하지만 최부 일행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상륙 후 그 곳을 담당하는 사자채(獅子寨)의 관원이 그들을 왜구(倭寇)로 몰아 머리를 바치고 공훈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부 일행이 배를 버리고 마을로 진입하는 바람에 그 흉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구라는 의혹은 풀지 못해, 임해(臨海) 도저소(桃渚所), 소흥부(紹興府), 항주부(杭州府)에서 각각 조사를 받았다. 가까스로 왜구가 아닌 표류한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된 후에야 대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서 명(明)나라 홍치제(弘治帝)를 알현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답게 최부는 황제에 알현하는 과정에서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나는 차마 길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 이상은 직접 내 굴건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더니

나라에 일이 있게 되면 기복(起服)2)하는 제도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 길복을 입고 들어가서 사은의 예를 마치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와서 도로 상복을 입을 테니 그저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하나만을 고집해서 예절을 잃어서는 안 되지요.” [pp. 212~213]

 

결국 잠시나마 상복을 벗고 알현을 했다. 그 후 귀국 길에 올라 요동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루속히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던 최부에게 성종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우선 기록으로 남기라 명한다. 이에 최부는 단 8일만에 중국에서 겪었던 거의 모든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 바친다. 그것이 바로 이 책 <표해록>이다. 이 책은 일기를 적듯 하루 하루 최부가 겪은 내용을 엮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들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중국 관원과의 문답과정에서 조선의 제도, 조선과 명의 문화적 차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대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본 중국 각지의 기후, 도로, 방죽과 갑문 등 물길 이용 제도, 살림살이와 옷 차림새, 인정과 풍속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의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 차이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강도질을 하는 자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 그러나 여기 강남 사람은 비록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혀 강도질은 할지언정 그렇게 마구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하산의 도적들도 우리를 죽이지는 않았고 먹을 것도 주었으며 선암리 사람들은 자기들이 빼앗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안장을 도로 내놓지 않았는가. [p. 95]

 

부영은 “중국의 인심을 논한다면 북방 사람은 모질고 남방 사람은 유순합니다. 영파의 도적은 강남 사람이므로 아무리 도적이 되었다 해도 물건만 빼앗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들도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북방 사람은 약탈하고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 구렁텅이에 던지기도 하고 강이나 바다에 띄우기도 하니 오늘 강에 떠 있는 시체를 보고도 알 말하지 않은가요?” 하였다. [pp. 178~179]

 

처럼.

 

또한 생사가 걸려있기에 섣불리 조선으로의 이주를 시도하지 못하는 해외유민의 모습도 묘사된다.

 

계면(戒勉)이라는 중은 우리 나라 말을 잘하였다. 그가 나더러,

저는 중인데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역시 중이었던 저희 할아버지가 여기로 들어왔으며 지금 이미 삼대째입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 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지 천 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를 세워 제사를 정성껏 지내며 전통을 잊지 않습니다. 새가 날면 고향으로 가고 토끼가 죽으면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지요! 언제나 본국이 그리워 돌아가 살고 싶지만, 본국에서 나를 도리어 중국 사람이라 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분명히 다른 나라로 탈출한 죄를 받아 몸과 머리가 따로 구르게 되겠으니 마음은 가고 싶어도 발이 주저합니다.”  [p. 251]

 

이렇게 일기체로 구체적인 내용을 적었기에 <표해록>은 명나라 초기의 중국 실정을 확인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1769년 유학자 세이타 겐소[淸田??, 1719~1785]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란 이름으로, 미국에서도 1965년 컬럼비아 대학의 존 메스킬(John Meskill, 1925~ )이 <최부의 일기 표해록(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 by Pu Ch’oe)>라는 이름으로 각각 번역본이 나왔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 책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고 하니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가 우리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옛 유물에 서린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부는 상복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꼬장꼬장한 면도 있지만, 관찰력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소흥부에서 수차(水車)를 돌리던 것을 보고 부영(傅榮)에게 수차 제작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결국 그에게 배운 수차의 형태와 운용법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와 수차를 제작, 호서지방의 가뭄 해소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행동함에 거침이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던 15세기 조선선비의 진취적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지나온 길을 지도로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출판사에서 조금만 배려를 해주어 지도를 첨부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1) 경차관(敬差官)은 왕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감찰하는 관직이고, 추쇄(推刷)는 제 고장에서 도망하여 숨어든 자를 송환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추쇄경차관은 제주도로 도망간 노비나 범법자들을 송환하기 위해 파견된 감찰관인 셈이다.

2)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법이지만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불러 상복을 벗고 출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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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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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개의 단어가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듯한 제목이다. 마치 차가운 불꽃처럼.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이지연의 현재와 1930년대 이정선의 과거가 교차하듯이 얽히면서 전개된다. 현재는 서른 두 살의 이지연이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회령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는 백정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증조할머니 이정선이 나고 자란 황해도 삼천을 떠나 회령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1930년대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가 누군가의 입을 빌어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에 해당하는 이지연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료들이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되어 역사로 남겨지는 것처럼.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은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처라고 거짓말을 한 남자 박희수와 결혼하여 개성으로 떠난다. 병든 어머니를 두고 자기 혼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는 원죄(原罪)에, 백정의 자식이라는 핸디캡까지 있었지만, 남편이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저 만민이 평등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실천했다는 허영심으로 그녀와 결혼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의 범주에는 백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박희수의 부모가 그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이로 인해 박희수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백정의 딸과 결혼했다는 죄책감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결혼이 힘겨울 수 밖에. 단지 ‘삼천’이라고도 불린 지연의 증조모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딞으로써 그들의 결혼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지연의 할머니 박영옥의 삶도 힘겨웠다. 증조부가 1.4 후퇴 때 단신으로 회령으로 내려온 길남선을 마음에 들어 했기에 그와 결혼했다. 길남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그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할머니를 속였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 하나 없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변명할 뿐이었다.

사실 할머니나 증조모도 그녀의 결혼이 파국을 맞이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단지 그 예감이 생각보다 빨리 현실화되었을 뿐.

 

남선인 너이 아바이랑 비슷한 사람이야. 나두 영옥이 너이 어마이가 아니었으면 남선이레 공손하구 괜찮은 사내라구 생각했을지도 모르갔어. 기런데…… 아니야. 너를 귀하게 대할 사람이 아니다

기걸 어마이가 어떻게 알아

같이 밥 먹을 때 보라. 생선이든 고기든 가장 큰 살코기를 제일 먼저 집어가는 기를. 영옥이 너가 귀하면 기렇게 하갔어? 말은 재미나게 하디. 기건 나두 알갔어. 기런데 영옥이 네 말 들어주는 모습을 내레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다 기렇디 않아.

영옥아, 내는 다른 거는 몰라두 너레 너를 속이디 않았으면 한다. [pp. 216~217]

 

지연의 어머니 길미선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로망으로 자신의 엄마가 꺼려하는 결혼을 선택한다.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저 참고 견디기만 했다. 그나마 지연의 조모가 중혼(重婚)을 한 남편에게 매달리지 않고, 지연이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을 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묘하게도 그녀들에게는 모두 힘든 순간 버팀목이 되어 준 벗이 있었다.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지연의 조모 박영옥은 새비 아주머니의 딸 김희자가, 지연의 어머니인 길미선은 멕시코에 사는 명희 언니가,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고 속에 담아둔 말을 들어줄 수가 있는 상대방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이 존재하는 것, 혹은 버틸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기억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굳이 다른 이를 기억하기 위해 마음과 시간을 쓴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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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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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人(인)’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양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과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관계를 잃어버리면 사람은 어떤 존재가 될까? <불편함 편의점>에서 나오는 노숙자 ‘독고’처럼 되지 않을까? ‘독고’처럼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하루하루를 생존하는데 급급하게 된다면, 그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 <불편한 편의점>은 그런 의미에서 노숙자 ‘독고’가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면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독고’는 어떻게 자신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70대의 염영숙 여사(이하 ‘염 여사’)의 잃어버린 파우치를 곰 같은 치에 말도 어눌하게 하는 전형적인 노숙자 ‘독고’가 돌려주면서 시작된다.

 

단기적인 인연으로 끝날 것 같았던 염 여사와의 관계는 야간의 붙박이 알바인 50대의 실직 가장 성필 씨의 재취업으로 변화했다. 성필 씨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독고’는 노숙자에서 알바생으로 사회적 신분이 바꿨다. 그리고 이 변화로 ‘독고’는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하고, 자신의 기억을, 아니 과거를 조금씩 되찾게 된다.

 

이 과정을 소설은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독고’를 보는 편의점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의 시선을 나열함으로써 알려준다. ‘제이에스 오브 제이에스’라는 소제목으로 오전 알바 시현이, ‘삼각김밥의 용도’라는 소제목으로 오선숙 여사가, ‘원 플러스 원’이라는 소제목으로 매일 밤 야외 테이블에서 참참참(참깨라면, 참치김밥, 참이슬) 세트로 혼술을 하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영업직 회사원 경만이,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소제목으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청파동에 글을 쓰러 들어온 30대 희곡작가 정인경이, 네 캔에 만 원’이라는 소제목으로 편의점을 팔게 하려던 염 여사의 말 안 듣는 아들 민식이, ‘폐기 상품이지만 아직 괜찮아’라는 소제목으로 민식의 의뢰를 받아 독고의 뒷조사를 하는 곽이 각각 본 ‘독고’의 모습이 그려진다. 11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일인칭 서술을 하는 다이 호우잉[戴厚英, 1938~1996]의 <사람아! 아, 사람아!>나 5명의 등장 인물이 각자 독백하듯이 서술하는 마나토 가나에[溱かなえ, 1973~ ]의 <고백(告白)>이 떠오르는 구성이랄까?

 

마지막 장은 ‘ALWAYS’라는 소제목으로 편의점 일에 숙달될수록 기억을 조금씩 되찾는 독고의 독백이 담겨 있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고 다른 이와의 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독고의 행동 또한 그려져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극복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존중한다. 감히 따라 할 수 없으니까. 소설의 막바지에 그려진 독고를 보면 그도 그런 이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독고는 모든 것을 잃었기에 그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그렇게 성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 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 편의점에서, 아니 그 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pp.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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