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나오키 : 아를르캥과 어릿광대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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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아를르캥과 어릿광대]는

 

<한자와 나오키: 아를르캥과 어릿광대>는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半澤直樹, 이하 ‘한자와’]의 심사부 조사역 시절 악연(惡緣)이었던 도쿄 본부 영업총괄부장 다카라다 신스케[寶田信介, 이하 ‘다카라다’]의 M&A 지시로부터 실질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거래처의 요청에 의해 주거래은행이 M&A를 지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성장의 한계를 느낀 신흥 IT 기업이 전통 기업을 인수하여 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 그렇기에 인터넷쇼핑몰로 성장한 신흥 IT기업인 자칼이 노포(老鋪)라고 할 수 있는 전통의 미술출판사인 센바[仙波] 공예사를 M&A하고자 하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칼이 양 회사의 주거래 은행인 도쿄중앙은행에 M&A중개를 요청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피인수회사인 센바 공예사에서 M&A를 거부하자 자칼에서 회사의 가치를 뛰어넘는 지나치게 과다한 금액인 15억 엔을 제시하면서까지 M&A에 매달리는 것은 뭔가 수상하다.

여기에 거래처의 대출을 막으면서까지 M&A를 강요하는 본부 영업총괄부의 막무가내(莫無可奈)식 밀어붙이기와 낡은 사고 방식과 직업윤리를 가진, 오사카 서부지점의 지점장 아사노 다다스[淺匡, 이하 ‘아사노’]의 협조가 결합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은행원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한자와 오사카 서부지점 융자과 과장은

중소기업의 경영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지. 그걸 옆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우리 일이고.[p. 145]

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은행원이다.

그 결과 주요 거래처 가운데 하나인 이타치보리[立賣堀] 제철의 모토오리 다케키요[本居竹淸] 회장으로부터

실적을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하지만, 실적도 되지 않고 윗사람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고객을 위해서 일하는 것……. 말로는 간단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중략 ~

요즘 은행원은 고객은 나 몰라라 하고 출세만 생각하는 자들뿐이지. 은행의 방침이나 윗사람의 지시라면, 그게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무조건 추종하는 걸세. 하지만 자네는 달라. 은행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믿을 수 있네. [pp. 351~352]

 

이렇게 한자와 과장이 거래처와 은행원의 직업윤리를 위해 일한다면, 이와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이도 존재한다.

이를 보여주는 것인 다카라다 도쿄본부 영업총괄부장이다. 과거 한자와 과장으로부터 한방 먹은 것을 되새기며 언제가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심지어 실수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누명을 씌워서까지.

뿐만 아니라, 조직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적(私的) 감정으로 행동하며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가 아사노 오사카 서부지점장이다.

그는

오랫동안 인사부에서 일한 ‘본부 관료’출신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엘리트 의식이 배어 있는 사람이다. 아사노에게 지점에서 근무하는 은행원은 무사가 권력을 가졌던 시대의 농부처럼 무시해도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p. 10]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오사카 서부지점장이라는 자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그 지역의 유력한 거래처들도 무시할 수 밖에.

재미있는 것은 소설에 그려진 그의 행적을 보면, 소위 ‘월급 루팡’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직장생활을 해본 이라면 조금씩 경험해봤을, ‘잘되면 내 덕분, 잘못되면 네 탓’이라는 마인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직장에서 흔히 보는 유형의 사람인 셈이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참고로 한 마디 더 하자면, 미나미다 츠토무[南田努] 대리는 지점장과의 이야기를 비밀로 한 한자와 과장에게 섭섭하다는 말을 한 행원에게

은행원이란 건, 사실을 알고 나면 책임이 생기는 직업이야. 그래서 모르는 편이 좋은 일도 있어. [p. 338]

라고 말했다. 아마도 은행원 출신의 작가가 생각하는 은행원의 이미지가 아닐까.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인플루엔셜’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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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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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눈, 일상을 묻어버리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에서 멀어진 삶이 시작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녹지 않는 방부제, 즉 실리카 겔(Silica gel)과 유사한 성분의 가짜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면서 일상에서 멀어진 삶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평균 강설량 20센티미터. 총합 150센티미터. 일반 눈과 다른 점은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짜 눈은 성인 남성의 가슴팍까지 잠길 정도로 쌓였다. 거리의 온갖 쓰레기들, 테이크아웃 컵과 깨진 유리 조각, 담배꽁초, 죽은 시궁쥐, 제대로 닦이지 않은 일회용기 따위도 전부 눈 아래에 묻혔다. 더러운 것은 눈송이가 다 감춰 버렸으므로, 거리는 언뜻 평화로워 보였다. 태우지 않는 한 영원히 녹지 않는 눈 결정체는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일렁이는 물비늘처럼 이쪽저쪽으로 반짝였다.” [p. 34]

 

사람의 온기에도 녹는 진짜 눈과 달리 이 가짜 눈은 발열, 구토, 가려움, 발진, 호홉곤란 등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수분을 빨아들였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눈처럼 반짝이며 지저분한 것들을 덮어 순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속으로는 흡혈귀처럼 수분을 빨아들여 세상을 하얗게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앙이 일상이 된 삶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단순히 소설 속의 일이라고 지나가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 현상 등을 보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재앙 속의 일상

 

가짜 눈이 내린 이후 간혹 진짜 눈이 내려도 과거의 삶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평범했던 일상은 이제 오지 않을 꿈 속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눈송이가 스며들 일이 없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우주복 같은 옷을 입고 눈을 퍼냈다. 일주일이 꼬박 걸려서야 포크레인과 수거 차량이 지나갈 길을 텄다. 방역 회사와 정비원 등 선발대, 자원봉사자가 아닌 주민들도 전신을 단단히 봉하고 나와 눈 더미 치우는 것을 도왔다. 피해는 더디게 복구되었다. 그사이에 돌이킬 수 없도록 무너지는 것들이 더 많았다.

굶어 죽는 사람들, 외로워서 죽는 사람들, 망하는 사람들, 망해서 죽는 사람들, 답답함을 참지 못해 눈 위로 뛰어들었다가 그대로 발작을 일으킨 사람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외출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다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  느릿한 복구 과정 중 그들의 시신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는데 몸집이 바싹 말라 줄어들기는 했지만 꼭 잠이라도 든 것처럼 하나도 부패하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p. 35]

 

이런 상황에서 녹지 않는 가짜 눈을 태우고 묻기 위한 장소, 그러니까 쓰레기 소각 및 매립지로 백영시가 지정되었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 사실상 격리된 이 곳에서 사람들은 녹지 않는 눈을 처리하기 위해 ‘센터’라고 부르는 눈 소각장에서 일하게 된다. 일상이 파괴되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주인공 백모루(이하 ‘모루’)도 이모인 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센터’에서 일한다. 왜냐하면 모루의 엄마가 ‘센터’에서 일하다가 폐렴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을 지키고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처음 가짜 눈이 왔던 중2 진로 상담 때에는 관심 있는 척하며, 되고 싶은 것이 없는 모루에게 장래희망을 계속 캐묻는 담임을 혐오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그때 담임이나 다른 어른들이 바랬던 기업의 성실한 부품이 되었으니까.

 

눈 소각장은 하루 24시간 내내 돌아갔다. 일은 단순하지만 힘들었고, 녹초가 되어 퇴근 이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센터에서 궂은일을 하는 데 나이 제한을 둔 이유가 있었다. 어린애들은 겁이 많고 잘 속으며 체력이 좋지만 뭘 모르니까. 시키는 대로 잘 움직이니까. 처음에는 생기 있던 이들도 점차 피곤에 찌들어 갔다. 생각이라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식사와 침대에 만족하며 성실한 부품이 되었다.” [p. 93]

 

또 다른 주인공 이이월(이하 ‘이월’)은 계모신화의 변형된 형태를 경험해야 했다. 강아지 하루의 환영을 믿어주고 함께 산책해 주면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주는 친엄마 같은 계모(繼母) 정지수와 아이를 이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차가운 의부아빠 같은 친부(親父) 사이에서 그녀가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는 명확해 보인다.

그렇기에 이월이 계모의 마지막 부탁인 눈 속에의 매장을 위해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월은 유진을 만나고, 유진은 이월을 구하기 위해 강도를 유인한다. 마음의 빛을 진 이월은 모루를 만나기 위해 센터로 갔지만, 이모를 기다리는 모루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한다. 고민하는 동안에도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그녀도 기계의 부품이 되었다.

 

센터에서는 늘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아도 일거리가 주어졌고, 정해진 일정을 끝내고 나면 진이 빠져 잡생각을 할 힘이 나지 않았다. 눈을 퍼내면 내 머릿속도 비워지는 것 같았다.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내 선택으로 후회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처럼 무료하면서 또 안락했다. 구매 식당의 흠집 난 식판이나 주말이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매점 같은 걸 볼 때면 내가 제대로 누리지 못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기분도 들었다.” [p. 198]

 

솔직히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고민하고 준비해 둔 길을 그대로 걷는 것은 편하다. 어쩌면 모루나 이월에게 미래를 강요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그런 삶을 안정된 삶이라 여기고 걷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나의 삶’이 없다.

 

하선호라는 래퍼는 [고등래퍼 2]라는 프로그램에서

꿈을 강요하면서

꿈꿀 시간을 주지 않아

모두의 꿈이

책 속에 있다 믿는 거야

괜히 또 남 사는

얘기에 힐끗힐끗해

나 자신을 괴롭히기

이젠 지긋지긋해

철이 없대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매년 적어 내래

장래 희망 oh ah yeah

없어서 없다 썼는데

그게 왜 의지 부족이고

생각 없는 거야

라고 미래를 강요하는 어른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 정해준,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의 주인공 네오가 선택한 빨간 약(red pill)처럼 진실을 깨닫게 되면 또 다른 삶이 주어질까?  이 소설에서는 모루가 무심코 본 한 뉴스에서 변화 혹은 각성이 시작되었다. 강도들의 아지트에서 발견된 이월의 계모 시신과 유품들을 본 모루는 ‘센터’로 달려가 근무하고 있는 이월을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월이 망설이던 진실을 듣고 가짜 눈으로 인한 눈사태에 휘말린다. 이 사고는 이들에게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에 와서 마치 로드무비의 시작점처럼, 그들은 이월의 아빠 차를 빼앗아 유진을 찾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잃어버린 일상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짜 눈을 헤집다가 진물이 나고 화끈거리는 아픔을 겪더라도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을 시도하는 모습은 새로운 삶을 위한 작은 첫 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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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
임성순 지음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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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 ‘우로보로스’는 “꼬리를 삼키는 자’' 라는 뜻으로 연금술에서 꼬리를 먹는 뱀, 혹은 용의 문양을 가리키는 단어(로) 영원함, 완전함, 불사를 상징한다. ~ 중략 ~ 네트워크 이론에서 우로보로스 효과는 어떤 사건의 순환적이고 본질적인 잠식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시도가 오히려 의도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경우 일종의 아이러니와 자기 소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인 실패와는 다른, 최악으로 전락해가는 나선을 의미한다.” [p. 2]

 

첫 번째 글인 ‘PROLOG’는 마치 중세 수도원에서 서고를 정리하는 이의 수기(手記)같은 느낌이 든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떠오르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두 번째 글인 ‘Q&A’는 대학의 양자역학에 대한 교양 과목의 마지막 강의를 묘사하고 있다.

 

세 번째 글인 ‘아톰’에는 로봇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고, 소수의 성공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곳에서는 “일을 하지 않아도 기본수당은 나왔지만 기본수당은 일정 비율 이상 가상 화폐로 환전할 수 없었다. 한때 기본 수당 전부를 가상 세계에 쏟아 부어 결국 현실의 몸이 죽어 버리는 과몰입 아사 사건이 (현실보다 가상현실을 더 중시하는) 이계인들 사이에 번번했고, 정부에서는 최소한의 육체를 유지하는 기본 생활비를 정해 가상 화폐로의 환전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올해는 하루에 한 번 현실로 강제 로그아웃 시키는 법안이 통과됐다”[pp. 75~76]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일자리 할당을 법제화했지만, 법의 의도와 달리 인간은 로봇도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들고, 부가가치 없는 일만 했다. 남겨진 일이 그 모양이니 당연히 인간들은 더더욱 노동을 기피했고 그 결과 노동수당이 만들어졌다. 어떤 형태든 노동을 하는 이들은 임금과 별도로 정부로부터 받는 기본수당의 두 배를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로봇을 많이 고용하는 기업에서 내는 로봇세로 지급하는 수당이었다. 하지만 이런 법조차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수당에 만족했고, 젊은이들은 일을 할 바에는 이계라 불리는 가상 세계의 삶을 택했다.” [p. 81]

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탓인지, 영화 <맨인블랙>처럼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거나 보았을 경우 요원에 의해 기억이 지워진다.

 

네 번째 글인 ‘지도에 대한 열정’은 제국 전체의 지도제작을 명령 받은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점차 이 책이 단편모음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각 글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띠고 있고, 서로 다른 시대를 다루고 있으니……. 어쩌면 서로 다른 시공간에 걸친 여섯 개의 스토리로 구성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처럼 구성된 것일 수도 있겠다.

 

다섯 번째 글인 ‘스트럭쳐’는 빅뱅 직후를 재현하는 실험 전후로 연구소 조정팀 팀장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인공출산 1세대이기에 ‘나’의 복제아를 자연출산하여 자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어쩌면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삶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닐까.

 

여섯 번째 글인 ‘ROLLBACK’은 지금까지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가상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첫 번째 글인 ‘PROLOG’와의 연결고리를 드러낸다.

 

일곱 번째 글인 ‘함수’는 다섯 번째 글인 ‘스트럭쳐’와 이어진다. 기계의 손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연출산으로 얻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첫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다 그렇듯이.

안드로이드가 오기 전까지 나는 늘 수면 부족 상태였고, 아이는 원하는 걸 알지 못하는 엄마 탓에 계속 울어야 했다. 육아휴직 기간이었지만 집 안은 말리는 젖병과 쌓여 가는 일회용 기저귀 쓰레기, 아이의 밀린 빨래로 엉망이었다. 그 모든 혼돈을 육아 안드로이드는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해결했다. 나는 구원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랐던 건 안드로이드가 아이와 정서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는 나보다 아이에게 잘 웃고 더 다정했다. 아이가 원하는 건 즉각 알아채서,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야 원하는 걸 즉각 해결해 주면 거의 울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동안에 사람과 같은 체온이 됐다. 차가운 로봇이라는 내 기억은 편견일 뿐이었다. 육아 안드로이드가 온 후로 나만큼이나 아이도 행복해 보였다. 감정은 인간 고유의 것이므로 안드로이드 손에 자라는 것은 정서 발달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내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감정은 가짜였고, 그것을 보여 주는 리액션들도 그저 치밀한 알고리즘으로 계산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짜도 충분히 그럴듯하면 형편없는 진짜보다 낫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보육 안드로이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괴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부모는 처음이신 거잖아요. 다들 처음에는 서툴기 마련이죠."

보육 안드로이드가 돌아간 직후 나는 구매 신청을 하고 있었다. 부모로서 완패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기계의 손에서 자란 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아이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로봇에게 배웠다.” [pp. 173~174]

 

여덟 번째 글인 ‘인터뷰’는 강인공지능 로봇과 연구소의 이사장의 인터뷰를 다루는데, 마치 사람과 사람의 인터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암시하는 것일까?

 

아홉 번째 글인 ‘바다’는 일곱 번째 글인 ‘함수’와 이어진다. 초기 우주를 재현하려는 실험은 시공간의 굴절을 가져왔고, ‘나’는 유한한 닫힌 공간, 즉 다른 위상공간에 빠져들었다. 재난의 현장을 빠져나가려는 노력 끝에 ‘나’는 주임으로 알고 있던 존재와 만났다. 그리고 그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무기력하게 종말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가상 현실을 통해 일상을 유지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 선택의 결과가 그려져 있다.

 

솔직히 다 읽어봐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현대 물리학 이론을 엮어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만 들 뿐. 나중에 다시 읽으면 지금처럼 각 글마다 요약하는 것보다는 나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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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고세훈 지음 / 한길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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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이 책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이하 ‘오웰’)로 알려진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이는 이 책이 한 개인의 삶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늘어놓는 연대기 혹은 편년체(編年體)라는 일반적인 전기 형식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서사와 사상을 연대기적으로 묶어서 서술하다가 읽는 즐거움과 주인공의 일관되고 체계적인 사유방식을 모두 놓칠까 염려” [p. 39]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오웰의 삶을 그린 ‘1부 생애’와 그의 사상과 작가로서의 글쓰기 태도를 다룬 ‘2부 사상과 글쓰기’로 엮여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을 한 사람의 일생에 평론을 곁들인 평전(評傳)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조지 오웰’이라는 모범 답안을 두고, 은연중 그와 비교하면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글을 엮어나가다 보니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튀어나와 아쉬웠다.

 

 

오웰의 사상과 글쓰기 태도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이하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이란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 [p. 14]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비슷하게 오웰은 “권력 언저리에서 킁킁대며 안일과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지식인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 [p. 33]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통해 지식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웰이 보는 지식인은 어떤 존재일까?

첫째, 지식인은 무지몽매한 민중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흔히 지식인이라고 하면, 무지몽매한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84>와 <동물 농장>으로 알려진 오웰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제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즉, “그는 궁핍과 질병이 주는 삶의 신산(辛酸)함에도 불구하고 승자 진영에 편입되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을 피해자 편에 서서 그들의 눈과 입을 빌려 관찰하고 발언하기를 지속했다. “오웰은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설교하지 않았으며,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결코 시끄럽지 않았으며, 불안한 자의 독단을 보이지 않았다 (…) 그는 관광여행의 안내자의 태도를 취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p. 34]

 

둘째, 지식인은 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지녔음직한 정치적 편견 혹은 종교적 가치에 대해 스스로 민감할수록 미적, 지적, 정직성의 희생 없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인간에겐 너무도 명백하여 변경 불가능한 사실들, 그리하여 조만간 직면해야 할 사실들을 무시하는 능력, 곧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믿으려는 성향이 있다. 마침내 틀렸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옳음을 보이기 위해 사실들을 비트는 것이 인간이다.” [p. 503]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는 계층, 즉 일반적으로 피지배계층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확장된 이익을 대변하는 ‘보편적 계급’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이들의 입장에 서거나 이들을 대변할 경우에만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는 지배계층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자신의 시각으로 피지배계층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시각을 가지려 해야 한다는 얘기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 피지배계층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오웰은 이러한 샤르트르의 주장을 가장 잘 구현한 지식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웰에게는) 이데올로기든 신앙이든 혹은 권력에 의해서든 그것이 작가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율성을 제한한다면, 작가의 생명인 정직성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 보였다.

오웰로서는 진실, 사실과의 정직한 대면, 그리고 그러한 대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인간이 주관적인 감정을 온전히 배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가능하면 사고로부터 그것을 걷어내는 일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읽을 만한 것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pp. 502~503]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정치적 글쓰기라는 예술

 

우리가 학창시절에 KAPF나 프로문학을 배우면서, 문학에 정치적 의도가 들어가면 작품이 아니라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정치적 글쓰기라고 하면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그는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p. 503]

오웰이 보기에는 “소설을 쓰는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보통사람과 계급적으로 유리된 중간계급에 속해 있다. 보통사람, 특히 노동계급(의 삶)과의 접촉이 쉽지 않을 때 작가들은 주제나 소재의 부재에 시달리며, 단어와 표현의 미학적 유희에 쉽게 빠져든다. (그 결과로 산출된 작품들은) 모든 것이 허용된 듯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재미는 있을지라도 감동은 찾기 힘들다.” [pp. 526~527]

오웰이 이런 말을 한 것에는 어떤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혹은 독자들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오웰은 ‘보통사람들의 품위(common decency)’가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을 꿈꿨다. 언어가 간결하고 명료하면 보통사람들이 정치적 논의로부터 배제되거나, 지도자들에 의해 쉽사리 속임을 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정치작가로서의 다짐을 이렇게 토로했다.

책을 쓰는 일이란, 어떤 고통스런 질병을 한 차례 길게 앓는 것 같은 끔찍하고 탈진시키는 투쟁이다. (...)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쓸 수 없다. (...)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취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p. 36]

 

즉, 오웰에게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무릇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推動) 한다. 오웰의 도덕적 힘은 (<카탈로니아에 경의를[Homage to Catalonia]> (1938) 등에서 드러나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버마 나날들[Burmese Days]>(1934)에서 보듯이) 가해자로서의 수치와 죄의식에 터를 잡고 있다.” [p. 35]

따라서 그가 사회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결과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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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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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어려움

 

다른 언어로 쓰여진 글을 읽으려면 그 나라 언어를 할 줄 알면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언어가 존재하고 그 언어들을 한 개인이 다 익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언어를 번역해주는 사람, 즉 번역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해당 언어를 아는 것만으로 번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외국 문물을 ‘적절하게’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일한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원래의 의미는 어떻게든 손실될 수밖에 없다. 번역된 문장은 결국 번역가 자신이 쓴 문장이므로, 번역가 고유의 생각, 가치관, 판단, 개성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라면 한국어라는 언어가 비롯된 한국적 토양, 사회, 문화, 사고방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p. 7]

 

뿐만 아니다. 거의 잊혀진 단어나 기존에 없던 단어를 번역할 때에도 어떻게 번역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의 딸은 풀밭에서 린턴과 대화를 나누다 심심해지자 월귤(越橘)을 따 모아서 유모에게 나눠주면 손장난을 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신사 숙녀들은 말린 월귤에 사탕수수 엿물로 단맛을 낸 후식을 즐기고, <초원의 집>에서는 월귤로 파이를 굽거나 거위 구이에 발라 먹을 젤리를 만들고,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에서) ‘호호 아줌마’는 남편이 팬케이크 발라 먹을 잼을 만들려고 숲에서 월귤을 따서 양동이에 담는다.” [pp. 252~253]

 

월귤(Lingonberry)



출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p. 250

 

여기서 월귤은 ‘링곤베리(lingonberry)’의 번역어지만, 거의 잊혀진 단어이기 때문에 저자처럼 “월귤이라는 이름에 ‘귤’이 들어가므로 귤과 비슷한 과일이라고 상상”[p. 253]하기 쉽다. 게다가 “블루베리 (blueberry)나 크랜베리(cranberry)같은 열매들은 아예 이렇다 할 번역어가 따로 없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 영한사전 편찬자들은 블루베리나 크랜베리의 한국어 뜻풀이를 ‘월귤의 일종’이라든지 ‘월귤의 사촌’이라고 기재하고, 그걸 본 번역가들이 책에다 블루베리나 크랜베리를 ‘월귤’이라고 뭉뚱그려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한국어 번역서에 월귤이 나오면 그게 원문에서 링곤베리인지, 블루베리인지, 크랜베리인지 알 수가 없다.” [p. 255]

 

하나 더 언급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지만 두 단어가 주는 어감 혹은 분위기는 서로 다른 음식인 것처럼 이질적이다. 그래서 저자도 “‘라즈베리 코디얼’을 마시는 소녀와 ‘산딸기 주스’를 마시는 소녀는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다를 것만 같다. 그러므로 진저브레드,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이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과, 생강빵, 월귤, 산딸기 주스가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책은 번역판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롭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번역이 나올수록 그만큼 다양한 의미가 생겨나고,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 [p. 6]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문학 작품 속 음식들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라는 소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온전히 번역에 대한 이야기 혹은 번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 등장한 음식들에 대한 에세이에 가깝다. 이는 이 책이 전채(前菜, appetizer)에 해당하는 제1부 ‘빵과 수프’, 본 요리에 해당하는 제2부 ‘주요리’, 후식(後食), dessert)에 해당하는 제3부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로 구성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음식 이름을 제목으로 한 각 챕터는 해당 음식이 등장하는 소설의 한 장면과 해당 음식에 대한 아기자기한 삽화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햄과 그레이비(Ham with Gravy)’의 경우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멈의 커다랗고 검은 두 손에 들린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버터 바른 참마 두덩이, 수북이 쌓인 메밀 팬케이크 위로 뚝뚝 흘러내리는 시럽, 그레이비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햄 한 조각. 어멈이 가져온 무거운 음식상을 보자 스칼렛의 얼굴에 떠올랐던 가벼운 짜증은 고집스러운 독기로 바뀌었다.” [p. 104]

 

그리고 각 챕터 끝에는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덧붙였다.

 

꿀벌빵(Bienenstich)


출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pp. 296~297

 

덕분에 이 책은 분명히 번역가의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번역가의 삶 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소설에 언급된 요리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일종의 ‘문학 작품 속 요리 사전’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낯선 요리에 궁금증이 있는 이에게는 안성맞춤인 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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