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언어들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87년 어떤 사람이 이 사람보통 사람입니다믿어주세요!’ 그리고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통령이 되었다그 이후 어쩐지 보통이라는 단어가 특별하게 들렸다.

아니원래 보통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보통의 언어는 또 어떤 언어일까제목에 대한 호기심에 집어 든 이 책, <보통의 언어들>은 참 묘한 책이다단어들을 수집해서 그 사용 사례와 의미를 첨가한 형식을 띠고 있는데 사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오히려 관계’, ‘감정’, ‘자존감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수집한 단어들을 통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은 수필집의 느낌이 짙다.

 

첫 번째 ‘관계의 언어’에서 여러 단어를 얘기하고 있지만나는 미움 받다와 선을 긋다에 꽂혔다사실 []’이라는 것은 소통의 도구이지만입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음악을 감상하는 이가 그 음악에 대해 평가하듯이 듣는 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당연히 불특정 다수와는 정당한 관계가 성립되기 힘들다그들은 내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써야 할 이유도굳이 나와 소통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다 보니 나의 말이나 글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악성 댓글을 달기도 한다그래서 타인과 선을 긋는 일이 중요하다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AT필드와도 비슷한심리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드니까.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설령 대중적으로 그런 사람이 존재할지언정 측근들 사이에서 차라리 험담이 떠돈다면 그것은 다행이다한 명의 사람이 누구를 대하든 매끄럽다면그 사람은 흡사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거니까그걸 아무리 알고 있어도미움은 어릴 때 꼭 먹어야 된다고 엄마가 얹어주던 맛없는 반찬처럼 삼키기가 싫다.” [pp. 23~24]

아마도 그래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나오고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닐까?

모든 면에서 완벽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보인다면그는 한쪽 면만 드러내는 달처럼 이면(裏面)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끝없이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거울처럼 를 잃어버리고 끝없이 남이 보고 싶은 를 연기해야 하는 지옥도에 들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면 선 긋기가 필요하다왜냐하면 인간은 나만의 공간을 필요하기 때문이다저자는 열 명의 사람 중 두세 명에게서 미움을 받는다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그러나 그게 백 명천 명이 넘어가면 두렵다퍼센티지로는 동률이어도 숫자로 세어지는 마음이 미움이다살면서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어느 순간 이에 대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긴 대로 살아야겠다는 것’ 말이다방송을 하면서부턴 더더욱 그랬다어쩔 수 없이 호불호(好不好)의 평가를 받아야 되는 일을 시작한 이상내 방향성은 더 명확해졌다그건 바로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는 것” [p. 24]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흔히 선을 긋다라는 말에는 너에게 불편함을 느껴 거리를 둔다는 뉘앙스가 담겨있어 상대방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하지만 저자는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나의 영역을 확인하고 나를 인식하려는 것이다그렇기에 소중한 사람일수록 잘 바라보아야 한다세심히 살펴야 한다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당연히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관계는 V3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된다” [p. 30]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의 언어’에서는 단어가 지닌 특유의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학창시절에 배웠던 공감각적 표현은 어쩌면 스마트폰 시대에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를 들면, “ ‘반짝이다’‘빛나다’라는 말이 시각적인 기억을 주로 환기시키는 반면, ‘찬란하다는 표현은 내게 유리조각들이 부딪혀 챙그렁대는 소리가 나는공감각적인 그것에 가깝다뜨겁게 빛나는 태양보다는그 빛이 내리쬐어 물결에 빛나는 모습이 찬란하다와 어울리는 것 같다.

중략 ~

찬란하다는 말의 실제 발음인 ‘찰-란’은 의 받침 ㄹ과 의 자음 ㄹ이 파도 능선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햇살이 닿은 물결의 느낌인 것이다.” [pp. 101~102]

이처럼 너무나 익숙해서 빛나는 것을 몰랐던 단어들의 색다른 모습들을 포착하여 상상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이 저자와 같은 작사가나 시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 번째 ‘자존감의 언어’는 작사가 김이나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여기서 언급하는 단어 가운데 과 살아남다는 대조적인 것 같으면서 서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등래퍼 2>에서 서울외고 입학예정인 하선호는

꿈을 강요하면서

꿈꿀 시간을 주지 않아

모두의 꿈이

책 속에 있다 믿는 거야

중략 ~

철이 없대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매년 적어 내래

장래 희망 oh ah yeah

없어서 없다 썼는데

그게 왜 의지 부족이고

생각 없는 거야라고 외친다.

 

사실 어렸을 때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과학자선생님 등을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때는 몰랐는데본능적으로 왜 그러고 싶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추가적인 질문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같다결국 그때의 나는 꿈이 없었던 것이다.

 

꿈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씨처럼 소리소문 없이 피어났을 때 비로소 꿈이다어쩌면 어릴 때 반복적으로 받은 질문 탓에 우리는꿈을 목표와 혼동하는지도 모른다영화로 말하자면목표는 어느 만큼의 관객수를 동원할지얼마의 수익을 창출할지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다루는 이야기다반면 꿈은 미술을 논한다어떤 분위기의 장소어떤 색깔과 질감의 의상또 어떤 종류의 소품에 둘러싸인 주인공…. 즉 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pp. 149~150]

 

이렇게 피어난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살아남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치열한 순간들의 연속이다단순히 존재감 없이 꾸역꾸역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을 그녀는 살아남다라는 단어로 고백한다.

무례한 클라이언트에게 일침을 날리지 못하고 웃어버린 순간음악 관련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던 돈 많은 제작자가 가사를 가지고 (빨간 펜으로 줄을 그어가며감 놔라배 놔라 할 때 그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 190]

외부에서 바라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중요한 건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 날지언정 더 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pp. 191~192]

 

백조는 수면 위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수면 아래에서 쉴 새 없디 발버둥 쳐야 한다는 말처럼  ‘스타 작사가라는 후광을 끄고 고단하고 혹독한 생존의 과정을 가감 없이 들려준다.

 

 

이 책은 우리가 자주 표현하는보통의 단어들을 수집하고그 단어들이 다 품어내지 못해 흘러내린 의미와 오해를 섬세하게 포착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저자의 본보기를 따라 보통의 단어 속에 깃들인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의 방향성을 찾고 이정표를 세우는 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Radio record’에는 라디오 「김이나의 밤편지」에서 했던 그녀의 주옥 같은 멘트들이Lyrics’에는 시중에 발표되지 않은 노랫말이 실려 있어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키워드로 모은 보통의 단어들이 어떻게 노랫말로 녹아 드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마치 부록으로 그녀의 습작 노트를 살짝 보여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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