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6
김만중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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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九雲夢)],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구운몽>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그래서일까? ‘세상의 부귀영화가 한 순간의 꿈과 같이 허무하다는 것은 <구운몽>을 읽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암묵적인 약속처럼 되어 있다.


문학동네판 <구운몽>을 번역한 정병설 교수도 해설에서


대개 <구운몽>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p. 407]


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쓴 <구운몽>에 대해 배운 내용 때문일 아닐까? 인간 세상의 부귀영화가 한낱 꿈이었음을 깨달은,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 '성진(性眞)'이 불법(佛法)에 정진(精進)하고 ‘8선녀가 불교(佛敎)에 귀의(歸依)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구운몽>을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얘기하는 소설로 이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저자인 김만중이 예학(禮學)의 대가로 조선 중기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증손자이자 왕비의 작은 아버지로서, 또 청요직(淸要職)의 우두머리 격인 사간원의 대사간(大司諫), 사헌부의 대사헌(大司憲)과 홍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모두 역임한 관료였지만, 당쟁에 휘말려 떠난 유배지에서 이 작품을 썼다는 배경도 한 몫 한다. 유배지에서 그가 느꼈을 유가적(儒家的) 욕망의 허망함도 여기에 담겨있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책을 그렇게만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간절한 연애시로 볼 수 있다면, 김만중의 <구운몽>도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구운몽>을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에서 온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고 본 박성의(朴成義)1)<구운몽>의 환몽구조(幻夢構造)<금강경(金剛經)>의 공()사상이 강력하게 반영되었다고 주장하는 정규복(丁奎福)2) 등의 견해를 따를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문학동네판 <구운몽>을 번역한 정병설 교수가


오랫동안 <구운몽>은 학교에서 잘못 교육되었다. 아니 학계에서 잘못 이해했다. 남녀의 사랑과 인생의 즐거움을 그린 작품을 허무주의적 깨달음을 주는 작품으로 잘못 이해했다. ‘일장춘몽인생무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불교의 () 사상’, ‘금강경 사상등이 모두 작품의 주제라기보다 장치 또는 장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주제로 보았으니 본말이 뒤바뀌어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p. 408]


라고 얘기한 것에 공감하게 된다.


다만 나는 저자가 소설을 쓰게 된 배경 등을 다 치워버리고 순수하게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조금 더 다르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이 원해서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간다고 해도, 살다 보면 이 길이 맞을까?’ 걱정하고 머뭇거릴 때가 있다. 성진이 8선녀를 만나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순간 마음을 다시 잡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일종의 성장 소설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수 아이유의 노래 <분홍신>


내 운명을 고르자면,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지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의 작사가인 김이나는 이 가사에 ‘아이유에게 보내는 최선의 응원’을 담았다는 얘기를 했다. 아이유 본인도 힘들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리며 버텨낸다고 한다. 우리도  <분홍신>의 가사처럼 내가 선택해서 걷는 길이 맞다는 확신을 늘 가질 수만 있다면,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생의 굴곡을 보다 쉽게 버티고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더 얘기하자면, 이 소설을 장르소설에서 흔히 사용하는, 환생 등의 방법으로 이세계(異世界)를 여행했다가 귀환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현실과 꿈의 설정이 다소 역전적(逆轉的)이기는 하지만, 양소유(楊少游)로 환생한 성진(性眞)당시 사대부가 꿈꿔왔던 이상적인 삶을 누렸던 것은 명백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당시의 독자들은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가 현실적인 욕망을 끝없이 누리며 즐기는 모습에서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쩌면 양소유의 활약을 읽으면서 매일매일의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순간의 위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논어> <맹자> 같은 인문고전도 아닌데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을 배울까 혹은 어떤 교훈이 있을까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입시 혹은 시험을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입시 혹은 시험이 끝났다면 더 이상 평가를 위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억지로 꿈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소설을 읽고 무언가 배울 것이 없나 눈에 불을 키고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그저 소설을 읽으며 작품에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이고, 독자의 수만큼 그 소설에 대한 해석 혹은 감상도 존재할 테니까.



[구운몽(九雲夢)]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구운몽>은 흔히 현실--현실의 구조로 이루어진, 몽자류(夢字類)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환몽구조(幻夢構造)의 작품은 <구운몽>이 최초는 아니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만 해도,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調信)의 꿈’, 중국의 철학자 장자(莊子)호접몽(胡蝶夢)’ 이야기와 불경(佛經) 중 하나인 <잡보장경(雜寶藏經)>에 실린 사라나비구(娑羅那比丘)>’ 이야기 등이 존재한다. 또한 <구운몽>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나라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인 심기제(沈旣濟, 750~800) <침중기(枕中記)>도 있다.


그렇다고 <구운몽>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만은 아니다. 우선 국내만 따져도 전체적인 구조가 남영로(南永魯, 1810~1857) <옥루몽(玉樓夢)>, 탕옹(宕翁) <옥선몽(玉僊夢 혹은 玉仙夢)> 등 몽자류(夢字類) 소설에, 양소유의 여장탄금(女裝彈琴)’ 에피소드는 <임호은전(林虎隱傳)>, <장국진전(張國振傳)>, <여자충효록(女子忠孝錄)> 혹은 <김희경전(金喜慶傳)> 등 영웅 소설 혹은 군담(軍談) 소설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구운몽>은 일본으로 건너가 고미야마 텐코[小宮山天香, 1855~1930]에 의해 <무겐[夢幻]>(1894)으로 번안(飜案)되기도 했다.


전통을 묵수(墨守)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전통을 제대로 지키는 것처럼, <구운몽>환몽구조에 영향을 받되, <구운몽>의 번안에 그친 고미야마 텐코의 <무겐>과 달리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운몽>은 소설 자체로도, 영향력으로도 꽤나 독특한 지위 혹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 박성의, “<구운몽>의 사상적 배경 연구 한국고전문학 배경론의 일환으로서 –”, <아세아연구> 12 4(1969), p. 51

2) 정규복, <구운몽 연구>, (고려대출판부, 1974),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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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95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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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위해 팔려간 신부가 되다

 

버들의 아버지, 강 훈장은 과거에 급제해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고 썩은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초시(初試)에 합격한 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양반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과거가 폐지되자 그는 갑자기 먹고 살길이 없어졌다. 운 좋게도 소 장사로 돈을 벌어 양반 신분을 산 어진말의 안 부자가 훈장으로 초빙해서 비로소 강 훈장은 곤궁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주천에 보통학교가 생기자 강 훈장은 맏아들과 버들을 보내 신학문을 익히게 했다. 하지만 버들네 가족이 누릴 짧은 행복은 강 훈장이 일제에 대항해 의병 활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이어 맏아들도 길에서 행인들을 괴롭히는 순사에게 대들었다가 말발굽에 채여 세상을 떠나면서 사라졌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여자라는 이유로 버들은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고, 이후 남동생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며 부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년에 한 두 차례 버들네 집을 방문하던 방물장수 부산 아지매가 사진결혼을 권한다. 먼 나라, 미국의 포와(布?, Hawaii)라는 동네에 사는 9살 연상의 서태완이라는 사내였다. 버들에게는 다행스럽게 단짝친구였던 홍주도 사진결혼을 하기로 했다. 남편의 사별 후 산송장처럼 살아야 하는 과부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산 아지매 집에서 그녀들은 또 한 명의 사진 신부를 만난다. 수리재 무당 금화의 외손녀 송화였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의병의 딸, 과부, 무당의 손녀라는 핸디캡을 가진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포와로 가는 이민선에 올랐다.

 

하와이에서 일한 돈을 고향에 보내 주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방물장수의 얘기와는 달리 하와이에서의 삶은 신랄(辛辣)했다. 사진 결혼은 결혼 상대방의 조건은 물론 외모도 사진 속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자유연애 같은 결혼을 꿈꾸는 홍주는 연상의 남자를 선택했지만 막상 남편으로 나온 것은 자기보다 서른한 살이나 더 많은 마흔아홉의 조덕삼이었다. 천대받던 무당 외할머니의 손녀라는 처지에서 벗어나 새 삶을 꿈꾸었던 송화도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카락이 허연, 게다가 게으르고 노름하고 술주정이 심한 박석보가 남편으로 나타난다. 버들은 그나마 사진 속 모습과 똑같은 스물여섯 살 서태완을 만난다.

 

 

버들 가족의 정착 과정과 하와이 교민의 삶

 

하와이는 흔히 외교독립론을 펼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텃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 1881~1928)가 하와이로 건너가 1913년 1월에 지방자치규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5월에는 하와이 지방정부로부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이하 ‘하와이 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새로운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먼저 모든 회원에게 사실상 세금인 국민의무금을 받아 재정을 충실히 하였고, 여기에 파인애플 농장의 도지권(賭地權)을 제공한 박종수 등의 후원을 바탕으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과 군사학교를 창설하였다. 1919년에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앞서 하와이에서 사실상의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1915년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항의로 특별경찰권이 취소됨으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이 박탈되고 군사훈련이 중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파인애플의 흉작 등으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농장주마저 계약을 취소하자 결국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은 해체된다. 여기에 그가 하와이 정착을 도와준 의형제 이승만과의 대립은 또 하나의 타격이 되었다. 1915년 하와이 지방총회 총선거에서 박용만계의 김종학이 압도적 표차로 당첨되자, 이승만은 개혁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여 사조직화하였다. 이로서 무장투쟁을 위해 박용만이 하와이에 마련한 기반은 의형제였던 이승만에게 모두 탈취당했고,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거의 원수가 되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도 박용만 지지자[1919년 3월 이후 독립단]와 이승만 지지자[1921년7월 이후 동지회] 간의 갈등이 여러 차례 묘사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이미 이승만 지지자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기에 박용만 지지자인 서태완은 이승만 지지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카후쿠(kahuku)에서는 서태완이 관리하던 농장에서 일하던 이승만 지지자들이 이탈하고, 호놀롤루(Honolulu)로 이사한 후에는 서태완이 이승만에게 불리한 기사를 썼다고 해서 이승만 지지자에 의해 테러를 당한다. 끝내 서태완은 박용만을 따라 만주로 가서 통의부(統義府) 의용군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총상으로 다리를 다치고 천식에 걸려 돌아왔다.

 

버들의 아버지 강 훈장도, 큰 오빠도, 심지어 남편도 독립운동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던졌다. 이들의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을 뒷받침했던 여성들의 희생덕분이었다. 버들의 어머니 윤씨도, 버들도. 그녀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그녀들에 대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누가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을까?

 

버들은 감히 하올레[=백인]의 일원인 롭슨가의 안마당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그녀가 겪은 수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본인 재봉소 옆에서 조선 문양의 자수품을 팔았고, 이를 시기한 재봉소의 일본인은 그녀의 아들 정호에게 아들이 대야의 물을 뿌렸다.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아들을 위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는 그녀를 보면 나라 잃은 백성의 분함과 서러움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들이 항상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은 아니다. 기혼자라는 사실을 속이고 결혼한 남편을 버린 홍주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버들이 함께 세탁소와 재봉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치 한겨울에 잠시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것 같아서 미소를 짓게 하는 부분이었다. 누군가에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고 나아가는 삶을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아름답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요즘도 결혼 후 스스로의 삶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로 사는 경우가 있다. 아니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제법 많은 이들이 현재의 삶을 희생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알고 있다. 하물며 일제 강점기, 아니 1917년에야…….


만약 이야기를 이어갔다면 대하소설이 될 것 같아서였을까? ‘판도라의 상자챕터 이후 작가는 서둘러 화자를 버들에서 펄로 바꾸고 글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버들의 딸로 살아온 펄[=진주]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들이 어떻게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는지를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생략되어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땅에서도 연대를 통해 버티고 뿌리내린 그녀들의 삶에 삼가 경의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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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여름 에디션)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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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 끝 온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모스바나’와 ‘3장 지구 끝의 온실’의 주인공은 2129년을 살아가는 더스트 생태학자 정아영(이하 ‘아영’)이고, ‘2장 프림 빌리지’의 주인공은 2058년 멸망한 세계를 언니와 함께 헤매는 아이, 나오미 재닛(이하 ‘나오미’)다. 마치 액자소설 같은 구성의 이 소설은 운명에 저항하고 희망을 얘기한다. <지구 끝 온실>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격언처럼, 시시각각 멸망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세상에서 기어이 희망의 씨를 뿌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실질적인 이야기는 ‘유령 도시’로 알려진, 강원도 해월의 복원 사업이 진행되는 중, 세발잔털갈고리덩굴, 소위 ‘모스바나’가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증식하면서 시작한다. 이에 방제 담당은 더스트 생태 연구센터에 모스바나의 성분 분석을 의뢰한다.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아영은 이 임무를 떠맡았고, 해월시의 불법 회수 처리업자들이 남긴 제보에서 어린 시절 이웃에 살던 이희수 할머니의 정원을 떠올렸다.

 

어떤 집의 정원이었다. 아영은 정원을 향해 홀린 듯이 걸어갔다. 정원의 흙이 푸른빛을 가득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에도 푸른색을 띤 먼지가 흩날렸다. 마치 푸른빛이 정원에 한 겹 덧씌워진 듯한 모습으로, 자연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 으스스하면서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가까이 가서야 아영은 그곳이 이희수의 정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들하던 나무도 무성한 잡초들도 지금은 그림자로만 존재했다. 푸른빛의 먼지들만이 느린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있었다. [p. 67]

 

아영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에서 열린 생태학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기회를 틈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모스바나의 푸른빛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 노력의 결과, 더스트 시대에 모스바나를 약초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에게 ‘랑가노의 마녀들’이라고 불려진 자매 중 나오미와 만나게 된다.

 

아영이 나오미로부터 들은 것은 먼 과거, 더스트에 의해 멸망을 향해 치닫던 2058년의 이야기였다. 자가증식 나노붓의 크기를 줄이다가 그 나노붓이 통제에 벗어난 상태에서 유출된 결과가 더스트 사태였다. 이후 더스트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둠을 만들었지만 어느새 둠을 유지하기 위해, 아니 둠에 살고 있는 기득권자들을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수단이 목적이 된 것이다.

 

돔 시티는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더 자인한 방식으로 침입자들을 학살했다. 작은 마을들도 돔 시티에서 보낸 로봇들에게 파괴당했다. 건질 수 있는 것은 전부 가져가 시체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목격한 사람들의 말이었다. [p. 230]

 

뿐만 아니라 아마라, 나오미 자매는 더스트에 내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사냥감이 되고 실험대상이 되었다. 그녀들이 랑카위(Langkawi) 연구소에서 가혹한 실험에 시달리다가 침입자들의 습격으로 연구소가 무너지는 틈을 타서 도망친다. 그 와중에 유토피아 같은 도피처의 소식을 듣는다. 계속된 도피 생활로 아마라의 건강이 악화되자 마지막 희망을 갖고 그 도피처로 향했다.

그곳, 프림 빌리지는 놀랍게도 실존하는 유토피아였다. 대부분의 유토피아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유령처럼 떠도는 것과 달리 그곳은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실재(實在)하는 공간이었다. 물론 불안요소는 있었다. 프림 빌리지의 리더 지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언덕 위 온실 속에 사는 사이보그 식물학자 레이첼이 건네는 작물들과 더스트 분해제에 의해 마을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평화가 지속될 수는 없는 법, 평화롭던 프림 빌리지는 침략자들의 습격으로 붕괴된다. 그리고 이를 예상했던 프림 빌리지의 리더인 지수는 나오미에게 더스트 분해제 제조법을 알려주면서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만약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거지. 이 덩굴은 바깥에 지금 이곳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야. 우리가 혹시 이곳을 더 지킬 수 없게 되더라도, 이게 있으면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 수 있어. [p. 236]

 

라고 한다. 그리고 침략자들이 습격하자, 지수는 이에 저항하는 대신 프림 빌리지 사람들에게 레이첼이 개량한 더스트 대항종인 모스바나 종자를 주며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p. 242]

 

이후 프림 빌리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모스바나를 세계에 퍼트려, 인류가 재생의 첫발을 디딜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은 오랫동안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인식되었고, 오히려 더스트를 만들어낸, 솔라리타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토대로 한 더스트 대응협의체의 대응만 널리 알려졌다. 분명 이들이 거대 흡착 그물 및 다공성 포집 기둥 설치 등의 더스트 제거 작업과 증식형 분해제인 디스어셈블러의 살포를 통해 더스트를 감소[2차 감소]한 것은 맞다. 그렇다고 둠 밖에 살던 이들의 영웅적인 희생이 잊혀져야 할까?

프림 빌리지 사람들의 처지를 보며, 왠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오버랩 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지구 끝 온실>에서 화자(話者) 역할을 한 아영을 대신해서 작가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p 389]

 

라는 말을 남기게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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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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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 <이방인>과 같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의식을 투영한 작품으로 부조리 문학의 대표 작가로,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같은 철학적 에세이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의 문학세계는 어떤 것일까? 번역자인 김화영에 의하면 카뮈는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작품 세계의 체계적 청사진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듯이 그는 1943년부터 약 15년 동안 두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반항과 테러리즘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소설 <페스트>(1947)와 이를 각색한 희곡 <계엄령>(1948), 희곡 <정의의 사람들>(1949), <반항하는 인간>(1951) 등이 이런 반항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책 <반항하는 인간>의 첫 장을 보면,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non, 부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반항의 첫 충동을 느끼는 순간부터 (oui, 긍정)’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p. 31]


아무리 봐도 막연하고 형이상학적인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실제 사례를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지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반항을 극단으로 몰로 간 이들, 카인의 후예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을 먼저 살펴본다.



반항하는 인간들


<소돔의 120>, 아니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는 세계의 질서와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을 통해 절대적인 (non, 부정)’을 이끌어 낸 최초의 이론가라고 한다.


잔혹함과 철학적 사색으로 가득 찬 그 10여 권의 저술은 불행한 고행을, 전적인 으로부터 절대적인 로의 환각에 사로잡힌 이행을,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의 동의 모든 것과 만인의 살해를 집단 자살로 탈바꿈시키는 를 요약한다. [p. 89]


어떻게 보면 사드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와 같은 낭만주의적 반항인은 증오의 원리로서의 신()’과의 결별을 추구했다.


도전하고 거부하는 힘에 역점을 두다 보니 반항은 이 단계에서 그것이 지닌 긍정적 내용을 망각한다. 신이 인간 내면의 선을 요구하므로 그 선을 조롱하고 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불의에 대한 증오는, 악과 살인의 실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악과 살인의 옹호로 이어지게 된다. [p. 92]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면,


이반 카라마조프는 인간들의 편을 들고 인간들의 무죄에 강조점을 둔다. 그는 인간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의 형벌은 부당하다고 잘라 말한다. 적어도 그 첫 충동에 있어서 그는 악을 변호하기는커녕 신성보다 더 위에 있다고 여기는 터인 정의를 옹호한다. 따라서 그는 절대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이름으로 신을 공박한다.

~ 중략 ~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설령 신비가 진리를 품고 있다 할지라도, 설령 조시마 장로가 옳다 할지라도, 죄 없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악과 고통과 죽음이 그 진리의 대가로 치러지는 상황을 이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반은 구원의 거부를 몸으로 구현한다. 신앙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신앙은 신비와 악을 받아들이고 불의를 감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pp. 106~107]


이반이 마침내 마음속으로 제기하는 질문, 즉 도스토옙스키가 이 반항인으로 하여금 이룩하게 만드는 참된 진보의 핵심인 질문, 그것이야말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즉 인간은 반항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또 반항 속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가?

이반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내비친다. 인간은 오로지 반항을 궁극까지 밀고 나감으로써만 반항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형이상학적 반항의 극단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적 혁명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그의 정당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이상, 타도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도 영생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 다 허용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기 자신의 법 이외의 모든 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pp. 111~112]


이처럼 인간이 신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신을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죽어 있는 신을 발견한 것일 뿐이다.


니체와 더불어 반항은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반항은 그 명제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간주한다. 반항은 그리하여 사라져버린 신을 당치 않게 대신하려 드는 모든 것, 비록 정해진 방향은 없어도 여전히 제신들의 유일한 도가니인 한 세계를 욕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맞선다. 그에 대한 몇몇 기독교측 비판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니체는 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바 없다. 그는 자기 시대의 영혼 속에서 이미 죽어 있는 신을 발견한 것이다.

~ 중략 ~

그러므로 니체는 하나의 반항 철학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반항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의 철학을 구축했던 것이다. [p. 127]



반항이란 무엇인가


살인의 정당화를 거부하는, 반항과 폭력에 관한 연구서라고도 할 수 있는 <반항하는 인간> 서론에서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근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보다는 눈앞의 세계가 곧 현실이기에, 먼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p. 15]


,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반항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와 같은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카뮈의 반항은 테러리즘이나 폭력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항 속에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반항은 형이상학적 시각에서나 역사 속에서의 기능에 있어서나 폭력에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항이 본래의 순수함을 잃게 되어 온통 폭력에 쏠려 버릴 경우, 특히 그 폭력이 정당하다고 보게 될 경우 그 반항은 허무주의와 살인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전적인 거부, 즉 절대적 을 신격화할 때마다 반항은 살인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때, 즉 절대적인 를 외칠 때마다 반항은 살인을 한다.

~ 중략 ~

어쨌든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 반항은 살인에 이르게 되어 반항이라 불릴 권리를 잃고 만다. [p. 565]


, 카뮈는 반항과 폭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으며, 어떤 대의(大義)로도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반항은 폭력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p. 47]


바야흐로 역사와 씨름하고 있는 반항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형이상학적 반항의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에 추가하여,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을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p. 434]


반항에 있어서 정치란 이러한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라야 한다. 결국 반항은 역사를 전진시키고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할 때, 그 폭력 없이라고는 아니라 해도 테러를 동원하는 일은 없이, 그리고 가장 다양한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 [p. 513]


앞에서 인용한 문구들을 살펴보면, <반항하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반항에 있어서 폭력은 불가피한 것일지라도 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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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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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것

 

외(外)’지인, ‘외(外)’계인, ‘이(異)’종족 등이 등장하는 소설, 영화, 만화들은 많다. 그런 작품에서 그들은 종종 나와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유명한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동시에 이런 ‘다른’ 존재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도 한다.

 

이 소설 <나인>을 읽다가 문득 영화 <슈퍼맨>이 떠올랐다. 평범한 지구인처럼 키워진 클라크 켄트(Clark Kent)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히어로(Hero)로 활동하는 영화 말이다. <나인>의 주인공 ‘유나인’도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자라왔다.

 

평범하게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의 힘을 깨닫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나, 옆집의 친절한 이웃이 사실 영웅이었다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것이 삶에 일어나지 않을 판타지를 대리 만족 할 수 있어서였다. 나인도 한때 자신이 밤에는 세상을 구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새벽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은밀하게,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는 걸, 아주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하기 위해 아등바등 헤엄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pp. 238~239]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인에게 식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톱 사이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심지어 환영(幻影)처럼 보이는 소년마저 등장한다. 당연히 자신을 평범한 지구인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던 나인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때 헛것인줄 알았던 소년, ‘해승택’이 그녀가 인간이 아니고 식물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에 나인의 이모로 살아왔던 ‘유지’, 즉, 지모(유지 이모의 약칭, 이하 ‘지모’)는 이제 와서 그녀가 멸망위기의 행성에서 탈출한 누브족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안 그래도 질풍노도의 사춘기인데, 자신의 정체성 문제까지 겹치니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울까?

 

 

진실을 밝힌다는 것

 

“이거 하나는 약속해 주라. 아무리 답답하고 화가 나도 네 능력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절대.”

“어렵지는 않은데……. 우리 종족이 위험해져서?”

“아니. 그 말 한마디로 인간들은 네가 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여길 테니까.”

나인은 이런 말들을 뼈에서 나온 말이라 표현했다. 깊은 상처는 뼈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p. 144]

 

누브족의 식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통해 나인은 2년 전 자취를 감춘 학교 선배 ‘박원우’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문제는 진실을 안다고 해도 나인과 그 친구들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나인이 누브족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쉬운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누브족이라는, 외계인이라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다.

 

다른 존재가 이 행성의 생태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했어. 우리는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곧 떠날 테니까. 나는 그래서 그게 맞는 줄 알았어. 관여하지 않는 거. 우리는 처음부터 이 행성의 법칙에 끼어 있지 않았으니까. [p. 142]

 

다음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수사가 종결된 사안을 당사자도 아닌, 고등학생 몇 명이 나선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재수사할 리 없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박원우 실종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심이 된, 일종의 스릴러 소설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진실은 박원우 실종사건과 관련된 것 하나가 아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입장을 우리는 ‘공리주의(功利主義)’라고 한다. 구체적인 예시를 한 번 들어보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치 큰 사람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려 선로를 이탈한 전차를 막는 행위를 꺼렸던 일은 떠올려보라. 그 사람의 삶은 그에게 속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를 밀기가 꺼려지지 않았던가? 그 덩치 큰 남자가 자기 목숨을 던져 철로의 인부를 구했다면, 그 행동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어쨌거나 그의 삶이니까.

하지만 명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의 목숨을 우리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라는 얘기가 있다. 공리주의 원칙에 따르면, 보다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덩치 큰 사람을 다리 아래로 밀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최선일까?

 

외곽 도로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고 가는 사람들을 지모가 전부 신고했을 때 신고 당한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남의 집 앞도 아니고 차만 다니는 길에 쓰레기 좀 버린다고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좀 있지, 꼭 저렇게 본인만 정의롭다는 식으로 굴어야 속이 편한가. 지모의 등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던 아저씨의 말을 나인은 십 년이 지나도록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뿐이 아니다. 특수 학교 설립에 찬성했을 때도 대부분의 주민이 지모를 그런 눈초리로 흘겼다. 가만히 좀 있지. 애도 없는 아가씨가 뭘 안다고 자꾸 말을 얹어. 땅값 걱정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지. 모르면 말을 말든가.

중략 ~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p. 138]

 

이 이야기에서 누가 다수이고, 누가 소수인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의 숫자가 아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숫자까지 따지면 오히려 지모가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 우리가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것만 멸종일 수 있니?”

나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 선배는 세상에 딱 저 선배 하난데 사라졌잖아.”

말을 할 때마다 비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비를 다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말해야 했다.

중략 ~

“…… 근데 내가 들었어. 저기 있다는 거 내가 알았는데 나야말로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사람 한 명이 지구에서 멸종했는데.” [pp. 140~141]

 

한 명의 사라짐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멸종’이라고 얘기하며 그 또한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는 나인의 관점은 사소한 것을 사소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단기적인 최선, 최대의 행복이 아닌 장기적인 최선, 최대의 행복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나인의 시각이 옳은 것이 아닐까?

 

누브족이 자신들이 살던 행성, 리겔리에서 떠나 지구로 이주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더욱 나인의 생각이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선의 정원을 맞추기 위해, 식량의 확보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었으니,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현실에서 구현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중요도가 있다. 누구든 소중하지만 어떤 죽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죽음은 살인자의 한 끼보다도 보잘것없다.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 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p. 376]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틀린 것이 아니라 여기고, 다름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복잡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신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힘든 일이라고 포기해버리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 생물학적으로 어른이라고 보아야 하더라도.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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