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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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한 지 3년 만에 <이것이 인간이다>를 읽었다. 왜 그런 책이 있지 않은가. 서가의 한 구석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번에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집에 나왔다는 뉴스를 듣고는 <이것이 인간이다>를 단박에 읽어 내렸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후속편에 해당하는 <휴전>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드문 일인데 서점에 달려가서 <휴전>을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전작 <이것이 인간인가>가 생존과 그에 수반한 고뇌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휴전>에서는 귀환과 유랑이 키워드였다.

 

어렸을 적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소련침공에 총알받이로 동원된 이탈리아 전쟁포로들의 유쾌한 귀환 이야기를 다룬 글을 읽었던 기억이 불쑥 났다. 그들의 유랑에는 유머가 있었다면, 프리모 레비의 귀환은 살아남은 자의 비애가 담뿍 담겨있다. 레비가 생존에 성공했던 아우슈비츠 3수용소인 모노비츠에서의 생존만큼이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쉽지 않았다. 서쪽으로 진군하던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1945년 1월 이미 독일의 패망이 예견되어 있긴 했지만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수용소에서 해방된 유대인 해프틀링들은 자유인이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러시아군이 감시하는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하는 역설에 직면해 있었다. 또 하나의 역설은 병동에 남아 있던 레비가 만약 건강했다면, 수용소 친구였던 알베르토처럼 마우트하우젠과 부헨발트 같은 독일 내 수용소로 퇴각 행군 중 SS(슈츠슈타펠:나치친위대)에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읽으면서 전율했던 또 하나의 부분은 간난신고 끝에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폴란드 ‘민간인들’에게 환대를 받으리라는 그의 생각은 착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치 유대인 해프틀링들을 페스트에 걸린 환자라도 되는 듯 그렇게 대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했던 걸까? 전쟁 중에 그들을 돕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일말의 양심과 죄의식이 발동해서 환대보다 무관심과 격리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폴란드 사람들을 몰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레비는 전후의 혼돈이 매혹적이었노라고 증언하고 있지만, 그런 혼돈은 이탈리안스키들의 귀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우선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5월 8일 유럽승전이 확정되었음에도 한 때 적성국가였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귀환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와 일행은 스스로 먹을 것과 생활필수품들을 구해야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슈퍼 그리스인 모르도 나훔의 등장은 그런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노동 혹은 교환이라는 방식이 해결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도 있지만 테살로니키 출신 그리스인 답게 지나치게 극단적인 이윤 추구와 안 해본 장사가 없다고 외치는 슈퍼 그리스인의 당당함 앞에선 그저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인간미가 없다는 점이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그의 대척점에 서 있는 동료가 바로 체사레였다. 체사레는 모르도 나훔 못지않은 수완가였지만 동료를 챙길 줄 아는 인간미 넘치는 멋진 친구였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급조된 시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터무니없는 거래를 성사시키고 이윤획득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는 슈퍼 그리스인 버금가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오지에서 그나라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면서 닭을 잡아먹겠다는 일념으로 마침내 동료들에게 닭을 선사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한편, 레비는 일견 어수선해 보이는 소련군(이반)이 엄정한 규율과 질서를 자랑하는 무적의 독일군에게 승리한 원인을 남다른 시선으로 냉철하게 분석해낸다. 무언가 무질서해 보이고, 상황에 맞게 대충대충 일처리를 하는 것 같지만 특유의 인내심과 임기응변이야말로 기나긴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라는 점을 간파해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이지 않고 기계적인 방식으로는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전쟁에 이길 수 없었다는 분석일까? 러시아의 황량한 벌판을 지나며,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여름으로 향하는 계절과 러시아군의 규칙적이지 않지만 꾸준한 보급으로 추위와 기아에서는 해방이 되었지만, 무위도식하는 가운데 생겨난 향수를 달랠 방법이 없었노라고 레비는 <휴전>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자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런 시간들을 보내는 이들에 대한 스케치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 수용소였던 스타리예 도로기에서 스탈린그라의 영웅 티모셴코 원수로부터 고대해 마지 않던 귀환을 약속받은 이탈리안스키들은 마침내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폴란드, 러시아, 몰다비아, 루마니아,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일까지 아우르는 기나긴 여행 끝에 프리모 레비는 고향 토리노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제목 <휴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레비는 종전이 아니라, 왜 휴전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이 책이 쓰인 1960년 초반은 동서방의 냉전(Cold War)이 열전으로 진화해 가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레비는 파시즘에 대항해서 연합했던 서방과 소련이 또 다른 전쟁상태로 돌입할 거라는 사실을 예견했던 걸까. 그런 점에서 레비에게 모르도 나훔이 말한 전쟁은 늘 있다는 경고가 연상됐다. 확실히 <휴전>은 전작의 우울한 분위기에서 탈피한 삶에 대한 희구와 유머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뭐랄까 마침내 살아남는데 성공해서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끔찍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에 대한 기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오디세우스적 유랑일 수밖에 없다면, 절멸 수용소에서 그 근처까지 갔던 이들의 기록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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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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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가. 아우슈비츠를 다룬 그렇게 많은 책이 있건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실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에 그의 후기 작품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로 그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그러다 이번에 <고통에 반대하며>라는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 모음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구입한 저자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기 시작했다. 계기도 참 도발적이지 않은가. 이 책을 집어 들기까지 꼭 1065일이 걸렸다. 그리고 다 읽는 데는 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1919년 토리노에서 출생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기계제조업체 간츠에서 일하던 아버지 세자르는 열렬한 독서가이자 독학자였고, 어머니 리나는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피아노 연주와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리나의 결혼식날, 리나의 아버지가 신혼부부에게 아파트를 주었고 프리모 레비는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 1938년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게 된 레비는 새로운 인종법의 시행으로 졸업논문 준비를 하면서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941년 대학 졸업에 성공했다. 그 후 산비토레 광산에서 니켈을 추출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토리노에 돌아온 레비는 어머니, 여동생과 아오스타 계곡에 은신하다 저항운동 단체의 일원으로 유격대에 참여했다.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1943년 12월 13일 체포되면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강제수용소를 체험하게 된다.

 

프리모 레비와 함께 강제호송열차에 탔던 650여명의 유대계 이탈리아인들의 운명 역시 유럽 유대인들의 처참한 운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노동력의 절대부족 때문에 독일 정부는 ‘최종해결책’의 시행을 늦추기 시작했다. 전쟁물자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약자들은 레비의 증언대로 폴란드 절멸수용소에 도착하는 대로 모두 가스실로 보내졌다. 아르바이츠라거라는 이름의 강제노역소로 보내진 생존자들의 운명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은 공급되지 않았고, 분노와 증오 없이도 이루어지는 일상의 폭력 속에 레비들은 내던져졌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소지품들은 도착과 동시에 압수되었는데, 이것은 해프틀링(포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수인”들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연결고리들을 끊는 동시에 생존 외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강제수용소의 현실에 강압적으로 적응하라는 나치의 조직적으로 계획된 경고처럼 다가왔다.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47쪽).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벗고 하는 신발 하나에 인간의 생존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학자의 냉철한 시선으로 프리모 레비는 노동을 하기 위해 공간이동에 필요한 걷기에 신발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한편, 섭생이 꼭 필요한 음식물에 대한 집착은 또 어떤가.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에게 보낼 식량도 부족한 판에 나치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공급할 합리적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용소를 책임지고 있던 SS는 형편없이 멀건 죽을 떠먹기 위한 숟가락도 공급하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이론적인 문구가 아니라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야했다. 그 와중에서도 엄정한 점호의식과 철저한 위생관리라는 절멸수용소에 어울리지 않는 규율도 강요당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슨 상관인가라는 프리모 레비의 개인적 고민에, 동료 슈타인라우프는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에 옮긴다.

 

무더운 여름, 하루만 샤워를 하지 않더라도 흐르는 땀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을 프리모 레비가 절멸 수용소에서 전해준 증언은 압도한다. 모노비츠 라거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해지는 유대인 해프틀링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치의 엄정한 규율 아래, 인간성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라거에서 그런 협조를 기대할 수 없었다고 레비는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의 생존이라는 절제절명의 명제 아래 거창한 인류애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해하려 애쓰지도 말라고. 저자는 심판관이 아니라, 증언자로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독자에게 묻는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어떤 우연의 작용과 행운으로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우선 크게 다치지도 않았으며, 중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터로 직행이었던 선택이라 불리던 ‘셀렉챠’에서도 제외됐으며, 후반에 가서는 비교적 안락한 화학실험실에서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강제노역소에서 그는 나치의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과학자 특유의 사유와 냉철하게 주변의 인과관계를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게 되었다. 한편 저자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해 치열한 내적 투쟁을 벌이는 인물에 대한 스케치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그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인물들도 넘쳐 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는다. 동시에 라거에서 지배자의 입장에 있던 독토어 판비츠 같은 인물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른바 ‘최종해결책’이라는 절멸계획에 동원된 개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어처구니없는 대학살계획을 수립한 제3제국의 ‘거대한 광기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전하기도 한다. 이십대의 청년이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고, 누구나 다 잊고 싶어하는 기억을 끄집어내어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당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272쪽).

 

프리모 레비가 이 책에 담은 위의 내용이 어디 지난 세기에만 해당하는 일이던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국가와 시민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기록은 나치즘과 파시즘 독재의 광기가 세계를 뒤덮고 있던 어느 특정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는 다른 것을 배제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시절의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광기는 21세기에 극성을 부리고 있는 반이민정서라는 모습으로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관용의 자리에 비타협과 배제가 들어섰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기억하고 있다면 의견교환과 합리적 토론 대신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광적인 충성과 맹종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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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발을 소재로 인간의 생존을 탐구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입니다.

레삭매냐 2016-07-18 17:39   좋아요 0 | URL
생존을 위해선 신발과 식량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신발이
우선이라고 하는 실존적 고찰이 돋보였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후속편인 <휴전>을 어제 서점에 가서 사다
읽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은 프리모 레비와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cyrus 2016-07-18 20:11   좋아요 1 | URL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소설이 재미있었습니다. 게릴라 부대의 전투씬이 볼만했습니다.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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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오래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도전했다가 상당 부분까지 읽고 끝내 완독하지 못한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서가를 보니 그의 작품 <농담>이 어딘가 꽂혀 있더라. 지난달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달 독서 모임 책이라 다음 주말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시작했는데 이 책 의외로 재밌다. 물론 분량이 적어서 하루 정도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겠다는 계산도 빠르게 작용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리고 보니 나의 독서 계획은 참 부박하기 짝이 없구나.

 

150쪽 남짓한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 파리다. 체코 출신으로 파리로 망명해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이방인 작가 밀란 쿤데라가 2014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14년만에 나온 소설이라고 한다. 우선 등장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제임스 설터의 <올 댓 이즈>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의 스물네 마리 자고새 농담과 이마누엘 칸트의 도시이자 프로이센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왕의 산) 지금은 칼리닌그라드가 된 도시에 관한 이야기가 끝없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애덤 써웰의 <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가 연상됐다. 호모 폴리티쿠스인 밀란 쿤데라가 왜 이 이야기를 소설에 등장시켰는지 소설이 전개될수록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알랭과 라몽, 샤를 그리고 칼리방(<템페스트>의 캘리번의 프랑스식 이름인가 보다) 네 명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설정은 최근에 읽고 있는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와도 유사했다. 처음 등장하는 알랭이 여성의 매력은 배꼽에 있는 게 아니냐는 몽상을 읽으면서 정말 애덤 써웰의 도발적인 데뷔작과 비슷한 행로를 겪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노장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책을 절반 가량 읽고 나서 등장인물 벤다이어그램을 그려봤다. 관계도를 통해 그들의 관계의 무언가를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도 있었지만 사실 <무의미의 축제>에서 그런 관계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고찰은 어쩌면 무의미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태생부터 원하지 않는 존재였던 알랭은 필연적으로 모든 일에 소심한 사과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고 평생 어머니의 부재에 시달리면서도 모성을 그리워하는 남자로 등장한다. 알랭의 어머니는 죽기 위해 투신했다가 자신의 의도에 반하는 구조자를 죽이고 뱃속에 든 아기와 함께 부활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역설이란! 가짜 암환자이자 옛 동료인 다르델로의 파티에서 매력적인 여성 쥘리와 만나 로맨스를 꿈꾸지만 상대방에 ‘늙은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른 채 채이는 그런 남자 라몽. 나르키소스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째 그런 느낌을 물씬 풍긴다. 유창한 프랑스 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파키스탄 사람 흉내를 내는 칼리방과 개인 칵테일파티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를 하는 샤를, 그의 어머니는 현재 위중한 상태다.

 

여성의 매력이 엉덩이, 허벅지나 가슴이 아니라 배꼽에 있다고 몽상하는 에로티시즘 분석가의 삶을 가리키면서 작가는 독자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노벨라의 곳곳에서 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농담이라고는 도무지 모를 것 같은 독재자의 자고새 농담은 숨겨진 그의 이면을 들추어내려는 짓궂은 설정이었던가? 도대체 소설의 진행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영예를 안게 된 소비에트 노동자 영웅 미하일 칼리닌이 비대해진 전립선을 부여잡고 소변을 참는 장면을 계속해서 읽어야 하는 걸까? 밀란 쿤데라는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는다. 사실 아무래도 쿤데라의 전작들을 읽어 보지 못하다 보니 노벨라 <무의미의 축제>에서 과연 작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디어에 나온 리뷰들을 찾아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연 책을 읽고 나서 썼나 싶을 정도로 피상적인 글들 아니면 너무 자의적인 해석으로 가득한 리뷰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거 뭐 도움이 안되는군.

 

어쨌건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 언뜻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혼란한 세상 속에서 의미를 갈구하는 우리네 현실과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존재론적 고독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독재자 스탈린의 엉뚱한 농담처럼 노장의 노벨라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온 게 아닐까. 그것은 마치 책에서 굳이 의미를 찾겠다는 몸부림치는 구도의 과정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결말에 도달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진지하지 않은 독법으로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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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 관계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겠어요. 나중에 <무의미의 축제>를 읽을 때 레삭매냐님의 서평을 참고해야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6-07-13 21:44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 회원 분이 등장인물 관계가 복잡하다
해서 한 번 맹글어 봤습니다.
처음에 만든 건 허접했었는데 갈수록 나아지더군요 :>
 
스페인, 어쩌면 당신도 마주칠 수 있는 순간들 79 - 바르셀로나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김영주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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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책의 서두에 여행을 끊었다가 다시 여행길에 나서게 되었노라고 글쓴이는 밝히고 있는데 정말 순수하게 여행이 좋아서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책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사실 그저 단순한 여행객이라면 이렇게 꼼꼼하게 글을 쓸 수 없겠지. 그리고 사진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여행을 하면서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정리를 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더라. 이젠 기억마저 오래돼놔서 정리할 자신도 없고. 어쨌든 자신이 하고 싶은 여행을 마음껏 하면서 책까지 낼 수 있다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부럽다 부러워.

 

글쓴이의 이번 여행 목적지는 안달루시아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안달루시아행 직항편이 없으니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에서 출발하겠지. 예상대로 글쓴이와 동행 T라는 분은 카탈루냐 지방의 거점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를 만끽하고, 그리고 몬주익 스타디움에서 무엇보다 부러운 U2의 공연(아직까지도 U2는 우리나라 공연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단다, 놀랍군. 더 놀라운 건 앞으로도 그들의 공연을 우리나라에서 볼 기회가 없을 거라는 암울한 전망!)을 즐겼다는 것이다. 80년대 U2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나에겐 한없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With Or Without You"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단 이야기는 정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않았다.

 

좀 냉소적일 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동안 숱한 스페인 기행 서적을 섭렵해 온지라 그녀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안토니 가우디의 걸작들 특히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대한 감상 등은 시큰둥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책으로 만나는 타인의 감동은 온전하게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몸이 깨달은 모양이다. 람블라스 거리의 낭만도 이미 다른 책들에서 많이 듣고 봐온지라 가보지는 못했지만 여행서적 베테랑으로서는 좀 그랬다.

 

글쓴이와 동행 T는 어쨌든 바르셀로나의 황홀한 추억을 뒤로 안달루시아의 첫 번째 도시 세비야로 비행기를 이용해서 공간이동을 감행한다. 도보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고, 자동차로도 길 한 번 잃지 않고 족히 10시간은 달려야 하며 직행열차도 없으니 비행기가 가장 합리적인 이동수단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어제 막 읽은 일본 에세이 작가의 카미노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에서도 굳이 도보로 걸어야 하나 하는 글을 읽었는데, 삶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여행 방법에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한가.

 

그러다 저자가 준비한 신의 한수가 등장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타리파에서 마주한 아프리카 대륙의 모로코 땅 탕헤르에서의 한나절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그림 같은 휴양을 즐길 수 있었던 타리파 아파트 발코니도 그랬지만, 스페인 무데하르 양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마그레브 지역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여행길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좋은 가이드의 도움으로 마티스와 윌리엄 버로스 같은 예술가들의 족적을 따르는 여정이 조금은 뾰루퉁했던 마음을 풀어주었다고 할까. 여행가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의 내공을 갖추어야 하지 않았을까.

 

탕헤르 한나절에 비하면 나머지 일정은 여느 여행자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을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금지되었다는 투우 경기를 보지 못해 안도했다는 마음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될 듯 싶기도 하다. 미하스 푸에블로 광장에서 만난 거리의 플라멩코 공연 같은 행운도 마냥 부러웠다. 뜨내기 여행자가 그런 공연을 찾아서 볼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여행 팁 중의 하나인 알함브라의 온전한 투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예약이 필수라는 중요한 사실을 나같이 무계획한 여행을 선호하는 나그네에게 알려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여행은 평소의 안락함 대신 ‘천국보다 낯선’ 곳에서 불편함을 추구하는 고행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대로 여행의 끝에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하게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날레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나니, 나그네의 고행과 무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되짚어 보니 여행길에서의 어떤 고생도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총천연색 멋진 추억으로 시냅스에 각인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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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가만하다 :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부고((訃告) : 사람의 죽음을 알림. 또는 그런 글.

 

마음산책에서 나온 최윤필 기자가 그동안 한국일보 오피니언 <가만한 당신> 코너를 통해 소개한 35명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출간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코너는 현재진행형인 것 같은데 앞으로도 자주 살펴보게 될 것 같다. 제목인 ‘가만하다’라는 형용사의 뜻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는데 표준국어대사건 도움으로 그 뜻을 알게 됐다. 가만하다에는 “부고”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은 순서대로 읽는 대신 마음 가는대로 읽는 편이라 첫 번째 인물로 누구를 고를까 하는 재미가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선택은 델머 버그였다. 이유는 그가 죽었을 때 어디건사 부고를 보고서 뉴욕타임즈에 실린 그의 ‘오비추어리’를 읽은 탓으로 돌리자. 어렵게 대공황기를 나던 미국 청년이 물설고 낯선 나라 스페인에서 프랑코 반란군과 싸우는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목숨 걸고 링컨국제여단원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연대라는 대의에 헌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29년간의 옥살이 끝에 무죄로 풀려났지만, 자신을 가둔 주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1년 뒤에 폐암으로 사망한 글렌 포드의 기막힌 사연은 또 어떤가.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 삼십대에 혈기 방장한 연방검사 마티 스트라우드가 기소 과정에서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고 죽음을 앞둔 글렌 포드는 그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흑인이고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낸 무고한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생활비 지원과 치료비 지원조차 거부하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공권력의 피해자가 된 글렌 포드에게 저절로 동정이 갔다. 하긴 어디 그런 일이 미국에서만 일어났던가?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잘못된 판례들이 뒤집어지고 있지만,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나 검사들의 진정한 사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란 억울하게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범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우호적인 저자의 시각에서 연유한 탓인지 1960년대 발흥한 2세대 페미니스트를 필두로 한 세계 각처에서 양성평등, 존엄사 그리고 여권신장의 현장의 일선에서 오늘도 투쟁을 벌이다 죽음으로 은퇴한 인사들의 이름도 연이어 등장한다. 광물자원 확보 때문에 벌어진 내전을 뛰어넘는 국제전 성격으로 비화된 콩고전쟁의 희생자 마시카 여사의 비극을 이겨낸 활약을 필두로 해서, 1970년대 여성 오르가즘이야말로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뉴욕에 여성전용 섹스토이샵을 낸 델 윌리엄스, 스스로를 “crip"리라고 부르며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 않는다는 코미디언 출신 스텔라 영의 재기발랄한 감동 포르노에 대한 발언, 전통 여성할례 때문에 수많은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의 고통과 비극을 전세계에 증언한 에푸아 도케누, 이제는 합법화되었지만 기나긴 동성결혼에 대한 공식인정을 위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지리한 소송전을 불사한 니키 콰스니 등의 이야기는 무심함 때문에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사건과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페미니즘 전사로 부른 데니즈 마셜 부고에서는 후진국도 아닌 선진국 영국에서 일상처럼 벌어지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60억 파운드에 달한다는 기가 막힌 현실도 접할 수가 있었다. 아울러 나이지리아 라고스 출신으로 런던에서 성노예가 되어야만 했던 가디언이 만든 아비케 스토리(Abike's story) 애니메이션은 유튜브로 동영상으로 감상하기도 했다.

 

작가의 부고 에세이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시대의 불의에 맞선 용감하고 특출한 인물들만은 아니다. 땜빵 메이저리거였던 로키 브리지스처럼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메이저리거들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연봉에 각종 특권을 가진 특권계층이 되었지만, 로키 브리지스처럼 이름 없는 메이저리거도 분명 존재했다. 메이저리거 통산 16개의 홈런을 기록한 그는 전설 베이브 루스처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홈런을 쳤노라고 고백한다. 훗날 마이너리그 감독이 되어서는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선수들이 후져서 경기에 졌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한편, 존 마이클 도어 같은 인사의 경우는 또 어떤가. 누구나 다 기피하던 1960년대 인권담당 검사였던 도어는 그 어느 때보다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문제로 뜨거웠던 시절을 직접 경험했다. 제임스 메리디스의 미시시피 대학 입학 건으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과 살해협박이 쏟아지던 가운데 메리디스의 수호천사를 자처해 가면서 딥 사우스(deep south) 지방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투쟁을 이끌어냈다. 저자는 그가 시대가 요구한 불굴의 투사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묵묵하게 해낸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증언한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현재까지도 총기사고를 비롯한 온갖 사건사고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미국을 정상궤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저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부고는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의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부고를 통해 아무래도 고인에게 후한 평가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가만한 당신>에는 해당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문득 그런 경우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기여한 이들 말고 비평받을 만한 인사들의 부고는 어떤 모습일까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신문 칼럼에 그런 부고를 기대해봐도 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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