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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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하다 :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부고((訃告) : 사람의 죽음을 알림. 또는 그런 글.

 

마음산책에서 나온 최윤필 기자가 그동안 한국일보 오피니언 <가만한 당신> 코너를 통해 소개한 35명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출간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코너는 현재진행형인 것 같은데 앞으로도 자주 살펴보게 될 것 같다. 제목인 ‘가만하다’라는 형용사의 뜻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는데 표준국어대사건 도움으로 그 뜻을 알게 됐다. 가만하다에는 “부고”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은 순서대로 읽는 대신 마음 가는대로 읽는 편이라 첫 번째 인물로 누구를 고를까 하는 재미가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선택은 델머 버그였다. 이유는 그가 죽었을 때 어디건사 부고를 보고서 뉴욕타임즈에 실린 그의 ‘오비추어리’를 읽은 탓으로 돌리자. 어렵게 대공황기를 나던 미국 청년이 물설고 낯선 나라 스페인에서 프랑코 반란군과 싸우는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목숨 걸고 링컨국제여단원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연대라는 대의에 헌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29년간의 옥살이 끝에 무죄로 풀려났지만, 자신을 가둔 주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1년 뒤에 폐암으로 사망한 글렌 포드의 기막힌 사연은 또 어떤가.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 삼십대에 혈기 방장한 연방검사 마티 스트라우드가 기소 과정에서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고 죽음을 앞둔 글렌 포드는 그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흑인이고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낸 무고한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생활비 지원과 치료비 지원조차 거부하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공권력의 피해자가 된 글렌 포드에게 저절로 동정이 갔다. 하긴 어디 그런 일이 미국에서만 일어났던가?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잘못된 판례들이 뒤집어지고 있지만,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나 검사들의 진정한 사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란 억울하게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범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우호적인 저자의 시각에서 연유한 탓인지 1960년대 발흥한 2세대 페미니스트를 필두로 한 세계 각처에서 양성평등, 존엄사 그리고 여권신장의 현장의 일선에서 오늘도 투쟁을 벌이다 죽음으로 은퇴한 인사들의 이름도 연이어 등장한다. 광물자원 확보 때문에 벌어진 내전을 뛰어넘는 국제전 성격으로 비화된 콩고전쟁의 희생자 마시카 여사의 비극을 이겨낸 활약을 필두로 해서, 1970년대 여성 오르가즘이야말로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뉴욕에 여성전용 섹스토이샵을 낸 델 윌리엄스, 스스로를 “crip"리라고 부르며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 않는다는 코미디언 출신 스텔라 영의 재기발랄한 감동 포르노에 대한 발언, 전통 여성할례 때문에 수많은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의 고통과 비극을 전세계에 증언한 에푸아 도케누, 이제는 합법화되었지만 기나긴 동성결혼에 대한 공식인정을 위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지리한 소송전을 불사한 니키 콰스니 등의 이야기는 무심함 때문에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사건과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페미니즘 전사로 부른 데니즈 마셜 부고에서는 후진국도 아닌 선진국 영국에서 일상처럼 벌어지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60억 파운드에 달한다는 기가 막힌 현실도 접할 수가 있었다. 아울러 나이지리아 라고스 출신으로 런던에서 성노예가 되어야만 했던 가디언이 만든 아비케 스토리(Abike's story) 애니메이션은 유튜브로 동영상으로 감상하기도 했다.

 

작가의 부고 에세이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시대의 불의에 맞선 용감하고 특출한 인물들만은 아니다. 땜빵 메이저리거였던 로키 브리지스처럼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메이저리거들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연봉에 각종 특권을 가진 특권계층이 되었지만, 로키 브리지스처럼 이름 없는 메이저리거도 분명 존재했다. 메이저리거 통산 16개의 홈런을 기록한 그는 전설 베이브 루스처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홈런을 쳤노라고 고백한다. 훗날 마이너리그 감독이 되어서는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선수들이 후져서 경기에 졌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한편, 존 마이클 도어 같은 인사의 경우는 또 어떤가. 누구나 다 기피하던 1960년대 인권담당 검사였던 도어는 그 어느 때보다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문제로 뜨거웠던 시절을 직접 경험했다. 제임스 메리디스의 미시시피 대학 입학 건으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과 살해협박이 쏟아지던 가운데 메리디스의 수호천사를 자처해 가면서 딥 사우스(deep south) 지방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투쟁을 이끌어냈다. 저자는 그가 시대가 요구한 불굴의 투사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묵묵하게 해낸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증언한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현재까지도 총기사고를 비롯한 온갖 사건사고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미국을 정상궤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저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부고는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의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부고를 통해 아무래도 고인에게 후한 평가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가만한 당신>에는 해당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문득 그런 경우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기여한 이들 말고 비평받을 만한 인사들의 부고는 어떤 모습일까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신문 칼럼에 그런 부고를 기대해봐도 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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