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가. 아우슈비츠를 다룬 그렇게 많은 책이 있건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실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에 그의 후기 작품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로 그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그러다 이번에 <고통에 반대하며>라는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 모음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구입한 저자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기 시작했다. 계기도 참 도발적이지 않은가. 이 책을 집어 들기까지 꼭 1065일이 걸렸다. 그리고 다 읽는 데는 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1919년 토리노에서 출생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기계제조업체 간츠에서 일하던 아버지 세자르는 열렬한 독서가이자 독학자였고, 어머니 리나는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피아노 연주와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리나의 결혼식날, 리나의 아버지가 신혼부부에게 아파트를 주었고 프리모 레비는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 1938년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게 된 레비는 새로운 인종법의 시행으로 졸업논문 준비를 하면서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941년 대학 졸업에 성공했다. 그 후 산비토레 광산에서 니켈을 추출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토리노에 돌아온 레비는 어머니, 여동생과 아오스타 계곡에 은신하다 저항운동 단체의 일원으로 유격대에 참여했다.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1943년 12월 13일 체포되면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강제수용소를 체험하게 된다.

 

프리모 레비와 함께 강제호송열차에 탔던 650여명의 유대계 이탈리아인들의 운명 역시 유럽 유대인들의 처참한 운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노동력의 절대부족 때문에 독일 정부는 ‘최종해결책’의 시행을 늦추기 시작했다. 전쟁물자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약자들은 레비의 증언대로 폴란드 절멸수용소에 도착하는 대로 모두 가스실로 보내졌다. 아르바이츠라거라는 이름의 강제노역소로 보내진 생존자들의 운명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은 공급되지 않았고, 분노와 증오 없이도 이루어지는 일상의 폭력 속에 레비들은 내던져졌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소지품들은 도착과 동시에 압수되었는데, 이것은 해프틀링(포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수인”들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연결고리들을 끊는 동시에 생존 외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강제수용소의 현실에 강압적으로 적응하라는 나치의 조직적으로 계획된 경고처럼 다가왔다.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47쪽).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벗고 하는 신발 하나에 인간의 생존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학자의 냉철한 시선으로 프리모 레비는 노동을 하기 위해 공간이동에 필요한 걷기에 신발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한편, 섭생이 꼭 필요한 음식물에 대한 집착은 또 어떤가.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에게 보낼 식량도 부족한 판에 나치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공급할 합리적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용소를 책임지고 있던 SS는 형편없이 멀건 죽을 떠먹기 위한 숟가락도 공급하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이론적인 문구가 아니라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야했다. 그 와중에서도 엄정한 점호의식과 철저한 위생관리라는 절멸수용소에 어울리지 않는 규율도 강요당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슨 상관인가라는 프리모 레비의 개인적 고민에, 동료 슈타인라우프는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에 옮긴다.

 

무더운 여름, 하루만 샤워를 하지 않더라도 흐르는 땀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을 프리모 레비가 절멸 수용소에서 전해준 증언은 압도한다. 모노비츠 라거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해지는 유대인 해프틀링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치의 엄정한 규율 아래, 인간성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라거에서 그런 협조를 기대할 수 없었다고 레비는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의 생존이라는 절제절명의 명제 아래 거창한 인류애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해하려 애쓰지도 말라고. 저자는 심판관이 아니라, 증언자로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독자에게 묻는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어떤 우연의 작용과 행운으로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우선 크게 다치지도 않았으며, 중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터로 직행이었던 선택이라 불리던 ‘셀렉챠’에서도 제외됐으며, 후반에 가서는 비교적 안락한 화학실험실에서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강제노역소에서 그는 나치의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과학자 특유의 사유와 냉철하게 주변의 인과관계를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게 되었다. 한편 저자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해 치열한 내적 투쟁을 벌이는 인물에 대한 스케치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그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인물들도 넘쳐 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는다. 동시에 라거에서 지배자의 입장에 있던 독토어 판비츠 같은 인물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른바 ‘최종해결책’이라는 절멸계획에 동원된 개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어처구니없는 대학살계획을 수립한 제3제국의 ‘거대한 광기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전하기도 한다. 이십대의 청년이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고, 누구나 다 잊고 싶어하는 기억을 끄집어내어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당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272쪽).

 

프리모 레비가 이 책에 담은 위의 내용이 어디 지난 세기에만 해당하는 일이던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국가와 시민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기록은 나치즘과 파시즘 독재의 광기가 세계를 뒤덮고 있던 어느 특정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는 다른 것을 배제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시절의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광기는 21세기에 극성을 부리고 있는 반이민정서라는 모습으로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관용의 자리에 비타협과 배제가 들어섰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기억하고 있다면 의견교환과 합리적 토론 대신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광적인 충성과 맹종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7-1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발을 소재로 인간의 생존을 탐구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입니다.

레삭매냐 2016-07-18 17:39   좋아요 0 | URL
생존을 위해선 신발과 식량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신발이
우선이라고 하는 실존적 고찰이 돋보였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후속편인 <휴전>을 어제 서점에 가서 사다
읽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은 프리모 레비와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cyrus 2016-07-18 20:11   좋아요 1 | URL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소설이 재미있었습니다. 게릴라 부대의 전투씬이 볼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