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야기가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김영하의 <읽다>에 인용된 신형철의 이 글(<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나온 글이다.)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이야기하는 글이지만, 그것은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떠올리게 했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읽다> p.153~154)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전에 먼저 전채요리 격으로 하루키의 이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었다. 세기말의 일본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을 하루키가 접하고,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옴진리교 신자(옛 신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하루키의 이 책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와 대칭을 이루는 책이지만, 그 구성은 약간 다르다. 피해자들의 진술을 묵묵히 그대로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언더그라운드>와 달리 <약속된 장소에서>의 하루키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박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거름망 없이 그대로 읽었을 때의 어떤 '위험'을 하루키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느낀 어떤 '재미'라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흔히 종교집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비논리적이거나, 감정적, 혹은 단순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이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빈틈을 옴진리교가 파고 들었다. 즉 이들은 현세가 가지는 어떤 가치들 혹은 현세 그 자체에 대해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문들이 주는 '번뇌'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번뇌'를 해소시켜 더 높은 차원의 인간(혹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옴진리교에 빠져들었다. 옴진리교는 그들의 의문에 대해 해답을 주었고, 존사(아사하라 쇼코)는 그 의문을 알기 쉽게 그들에게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 누구나가 느끼는) 사회가 가지는 수많은 모순들과 의문들, 그 의문들에 답을 얻고 그것으로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적어도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심리학자는 그것을 반대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말이죠, 번뇌와 소모가 없다면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니까요. (번뇌를 버리는 건 수행이 아니로군요.) 네. 그건 이미 부처지 인간의 수양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신이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번뇌가 사라졌나 싶으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죠......(중략) 그래서 그런 수준의 (옴진리교) 사람들은 번뇌와 더불어 살아갈 힘이 조금 부족합니다. 안타깝긴 하지만요. 하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우리 범인(凡人)보다는 순수하거나 매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역시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부처의 나라로 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은 상당히 큰일이죠. 그래서 저는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약속된 장소에서> p.289~299)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들, 혹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다루는 인물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부모들, <환상의 빛>의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자, <걸어도 걸어도>의 죽은 아들(또는 형)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 혹은 <아무도 모른다>의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부재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디스턴스>에서는 옴진리교 사건을 둘러싼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떤 과거의 사건들이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그리기 좋아했던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답을 알고 싶어했지만,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런 답도 그들에게 주지 않거나, 혹은 이미 줄 수 없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인물들은 어떨까. 이야기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남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시작한다. 15년 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 그 부고를 듣고 두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는 큰딸 사치(아야세 하루카)는 자신은 가지 않겠다며, 동생들을 대신 보내지만, 마음을 돌려 뒤늦게 장례식장에 나타나고 거기에서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딸, 그러니까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그리고 사치는 이제 갈 곳이 없어진 스즈에게 같이 살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서 사치는 고레에다 인물들의 자장 속에 있다. 아무 답을 주지 않는 인물이 떠나며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시 그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레에다 감독이 그려냈던 것이 단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바로 그들의 '시간'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그들은 항상 긴 시간을 지나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그 흔한 플래시백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로 돌아가 그들에게(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어떤 해답을 주는 것을 그는 반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대신에 그 긴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쪽을 늘 택했고, 그래서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던 것은 플래시백이 아니라, 긴 시간의 서술이었고, 그에 따른 시간의 점핑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수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출발하려 하는 기차에서 사치가 스즈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 후, 그것에 뒤이어 바로 스즈가 세 자매를 찾아오는 씬이 붙는 것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의 점핑은 어떤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리어 그들의 긴 시간을 관객이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이렇게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다보면 문득 이상한 씬의 연결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살던 마을을 돌아보던 세 자매에게 스즈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며 오래된 사진을 들고 오고, 세 자매가 추억에 빠져 사진을 들여보던 장면이 있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이라면 여기에서 세자매의 시점 숏, 그러니까 사진을 보여주는 컷을 끼워넣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끝끝내 사진은 보여주지 않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매들의 옆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세 자매는 스즈에게 마을에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고 스즈는 산에서 마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곳으로 그녀들을 데려간다. 그리고 자매들은 스즈에게 마을의 풍경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때쯤이라면 한번쯤 마을의 조망컷을 끼워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감독은 여전히 그것을 관객들에게 제공해 줄 맘이 없다. 뒤늦게서야 그 조망을 바라보는 (스즈를 포함한) 네 자매의 뒷모습을 비추며 조망컷을 멀리에서 살짝 제공할 뿐이다. (비슷한 예는 후반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배 안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아이들, 그것을 보여주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줄 법도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검은 밤바다에 비친 흐릿한 색으로만 그것을 보여주거나 불꽃놀이에 넋이 빠져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뒤늦게 회사 옥상에서 동료들과 불꽃놀이를 보는 둘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의 컷을 여기에 연결시키며 그들의 뒷모습과 함께 이 불꽃놀이를 살짝 보여준다. 마치 "이렇게라도 살짝 봤으니까, 됐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여기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나 조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을 추억에 빠져서, 혹은 자신들의 마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는 자매들의 리액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때 이런 질문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자매들의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옆얼굴, 혹은 뒷모습을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일까. 아니, 나는 그것이 죽은 아버지의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단지 감독은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들을 같이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라고 묻고 싶다. 그들의 긴 시간을 같이 지켜보자, 감독은 우리 관객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찍혀야하는 컷을 제외하고는 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혼자 잡는 법이 없다. 자매들은 늘 둘이나 셋이 함께 카메라에 잡혀 있고, 카메라는 집안의 어딘가, 혹은 바깥의 어딘가에서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유령의 시선이지만, 그러나 절대 으스스하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이들의 죽은 아버지나,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가고 이들을 대신 키워준 외할머니의 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묵묵히 물러나 이들의 대화를 무심히 지켜보거나 이들의 무엇인가에 열중한 뒷모습을 잡는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카메라에 대고 우리가 사이가 좋거나, 혹은 좋아졌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영화는 그저 둘이나 셋, 혹은 네 명 전체가 같이 있는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긴 시간 묵묵히 보게 만든다. 이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말을 놓아도 될까,라며 쭈뼛거리던 자매들이 왜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쓰잘데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매실주를 한잔만 마시고도 기절해버리던 소녀가 어떻게 독하게 담궈진 매실과 그렇지 않은 매실을 구별해 언니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혹시 있었을지 모를 번뇌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번뇌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속된 장소에서>의 심리학자의 말대로 사람이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통해 한가지를 아주 어렴풋하게 생각해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번뇌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번뇌에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않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견뎌내며 그것들을 오래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쉬운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힘들고, 어딘가에서 옴진리교와 같은 쉬운 답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번뇌를 품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는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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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12-3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종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책에서 부처 이야기를 잠깐 봤는데,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길게 나오지 않고 제가 다 기억하지 못해서 집착하지 않아야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것이기도 해요 마음을 먹으면 그때는 뭔가 자유로워진 듯한데,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전으로 돌아가 있으니까요 그 책을 본 건 삶은 쉽게 끝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때고, 그 뒤에도 그와 비슷한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이어지다니... 제가 그렇게 이어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은 시간 걸리고 어려운 것보다 빠르고 쉬운 걸 더 좋아하기도 하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건 귀찮아서 하기도 싫은데, 어떤 건 시간 걸려도 하는군요 어떤 때는 일부러 그러기도 하는군요 이 말은 좀 상관없는 걸까요 꼭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죠 그 책 본 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거의 잊어버렸지만, 그거 보면서 ‘저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데 갈 수 있었구나(공동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한 것은 떠오릅니다 그곳에 가면 더 나았을까요 번뇌, 종교나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겠죠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하는 거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길죠(책도 그렇군요) 그 사람들 시간을 지켜보기 혹은 함께 하기... 그렇게 하면 함께 산 듯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처음에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사람, 호모 사피엔스는 왜 생각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요새 이런 생각을 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5-12-31 14:47   좋아요 0 | URL
인간이 부처를 지향할 수는 있겠지만, 아마도 부처가 될 수는 없겠죠.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도 결국 인간이 집착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가를 하는 승려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들도 사실 계속 어떤 유혹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하잖습니까. 그분들도 그러신데 우리 속세에 사는 인간들이 어찌 집착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집착을 안고 살되, 다만 그 집착에 먹히지 않도록 계속 조심하면서 살 수밖에 없겠죠.

말씀하신대로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이고, 늘 쉬운 길을 찾는 존재에 가까우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저만해도 늘 얼마나 쉽게 사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데 말이죠. 종교에 심하게 멀리 떨어진, 그렇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래서 종교가 주는 답은 늘 아리송하고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에 인용한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보면 그들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명쾌한 해답`같은 말이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명쾌한 해답`이 그들을 무서운 길로 이끈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영화는 아주 짧은 영화라도 아주 긴 시간을 담아낼 수 있죠. 그게 대단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니, 이 시간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AgalmA 2015-12-30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 평론가 롤리타 얘기 저도 인상 깊어서 밑줄 쳐 놓은 적 있는데^^

맥거핀 2015-12-31 14:38   좋아요 0 | URL
오..신형철 씨 책은 사실 밑줄을 치자면 한도끝도 없죠..^^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글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살리미 2015-12-3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만번 누르고 싶네요^^ 제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다 있어요.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사실 원작이 더 훌륭하네 하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저는 고레에다 감독의 스타일이 살아있어서 너무 너무 좋았답니다.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감독의 영화에서는 배우가 그렇게 빛나는 건가봐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5-12-31 14:36   좋아요 1 | URL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극장에 신작이 나왔다하면 왠만하면 가서 챙겨보려고 하는 감독입니다. 그의 영화를 보다보면 인생공부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산다는 것이 어떤건지 늘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본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그렇게 느꼈을 거예요. 저기에 가서 살고 싶다. 단지 풍광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 사람들과 일원이 되어서 살고 싶다고 말이죠. 그게 또 현실에서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듯 합니다.^^

2016-02-03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4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드니 빌뇌브, 2015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가끔 과녁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살이 있다. 아니면 이런 표현도 가능하겠다. 가끔 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열차가 있다. 빗나간 화살, 혹은 탈주하는 기관차, 그것들은 현실에서라면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때로 어떤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 다른 더 좋은 목표물에 명중하며, 어떤 열차는 궤도를 벗어나 낯설지만 강렬한 곳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의 과녁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마약조직(카르텔)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가 영화의 시작부에 드러나고, 이들을 잡기 위해 특별한 팀이 결성된다. 목표물은 명확하고, 영화는 정해진 목표물을 잡기 위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을 잡기 위해 특별수사팀은 조직의 본거지인 멕시코 후아레즈로 향하고, 계획은 거칠어 보이지만 나름 치밀하게 수행된다. 작전은 성과를 올리고, 이 특별수사팀은 점점 적의 심장부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미심쩍은 컷들이 끼어든다. 예를 들어 후아레즈를 둘러싼 주위의 황량한 사막과 같은 풍경을 드론으로 훑어내려가면서 찍는 익스트림 롱샷은 왜 필요한 것일까. 중심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키면서 등장하는 민머리 남자와 그에게 축구를 하러 가자면서 보채는 아들의 이야기는 왜 여기에 끼어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야기는 점점 방향을 살짝 틀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이 명확한 목표, 혹은 이 작전에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함이 있다. 그것은 관객이 이 작전에 거의 아무 것도 모른채로, 혹은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목표만을 가지고 참여하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케이트는 마약조직이 벌인 끔찍한 참상을 보고 이 작전에 자원하여 참여하지만, 이 작전에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모르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일단 이 작전을 이끌어가는 CIA의 책임자 맷(조쉬 브롤린)이나 소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을 가졌기에 도로 한복판에서 총격전도 거리낌없이 실행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전 도중에 케이트는 여러 차례 맷과 설전을 벌인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달라. 당신들이 도대체 여기에서 벌이고 있는 (불법을 넘어서 무법에 가까운) 이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맷은 여기에 답한다. 당신이 지금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들을 잡는 영화의 어떤 태도다. 예를 들어 1차로 마약조직 보스의 형을 체포하여 데려오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후, 맷과 케이트는 건물 밖에서 설전을 벌인다. 이 때 재미있는 것은 카메라의 위치다. 통상 이런 장면에서라면 둘의 설전을 보다 타이트하게 숏과 반응숏으로(때로는 클로즈업을 섞어가며) 잡거나, 혹은 오버 더 숄더샷으로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카메라는 한껏 물러나 그들을 원경으로 잡는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만(그래서 자막으로 처리되지만), 어쩌면 이런 거리라면 실제로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치 이것은 영화가 그들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까지 대부분의 관객은 케이트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잡는 것은 케이트의 어떤 답답함, 울분에 관객이 너무 쉽게 동화되는 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관객들을 보다 물러나게 함으로써 관객은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설전을 본다. 이것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이거나, 혹은 이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 것처럼도 보인다. 이보게 케이트, 그거 중요한 거 아니라구, 사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네, 친구.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에 도착하는 것은 이상한 출구이다. 케이트와 함께 터널을 빠져나온 관객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사실상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변한 것은 있다. 보스는 죽었고, 조직은 그 힘을 어느정도 잃었다. 그러나 그 힘의 공백을 무엇이 채우는가. 다른 거대한 힘, 아마도 그보다 훨씬 강력할지 모를 어떤 힘이 채운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상한 출구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케이트와 동일시 된) 관객이 기대하고 본 것은 힘의 공백이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시한 출구는 힘의 균형, 그리고 그 힘의 균형이 실제로 의미하는 '거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음'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마약조직의 소탕을 보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한다. 그것은 감독이 굳이 마지막에 끼워넣은 영화의 컷이 상징한다. 특별히 놀랄 것도 없는 일들,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삶이 그렇게 지속된다. 그것은 영화의 초반부 특별수사팀이 후아레즈에 들어갈 때 무심히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거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끝냄으로써 남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김영하는 <읽다>에서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를 다루며, 그것을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감춰진 중심부', 그러니까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이론과 연결짓는다. 즉 소설에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으며, 독자는 이 감춰진 중심부를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중심부를 찾는가, 못찾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독자들이 그곳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독자들과 게임을 벌인다. 플로베르는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책을 쓰고자 했다. 플로베르의 태도는, 중심부가 아니라 독자가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 다다르려고 애쓰며 어떻게든 독자 자신의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서 플로베르는 주제와 교훈, 그러니까 중심부를 강조하는 소설을 낡은 것으로 보이게 했으며, 따라서 플로베르에게서 현대소설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이 때문이라고 김영하는 말하고 있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에서도 마찬가지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도 어떤 '감춰진 중심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마약 조직의 소탕(케이트)'이라고 불러도 좋고, '힘의 균형을 찾음으로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맷)'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중심부가 아니라 산재해 있는 것들, 중심을 알 수 없는 어떤 무심하고 황량한 풍경이다. 영화의 초중반에 걸쳐서 점점이 걸쳐져 있는 어떤 낯선 컷들이 있다. 마약조직(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를 원경에서 잡는 컷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 이들의 삶은 이 영화의 일련의 과정이 불러온 연쇄를 통해 파괴에 이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파괴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파괴가 너무나도 무심히 당연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점점이 후아레즈라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주인공은 케이트나 맷, 혹은 알레한드로나 마약 조직의 보스가 아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후아레즈라는 거대한 사막의 도시가 아닐까. 그 사막의 도시에서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총격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당연하게 들리는 총격 소리에 무심하며, 수많은 마약은 그곳에서 생산되어 여전히 미국과 전세계의 도시로 흘러들어간다. 사막이 확장되는 것처럼 마약이 불러오는 파괴는 그렇게 확장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호쾌한 액션이나 스릴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출구없는 미로의 풍경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케이트가 알레한드로를 향해 겨눈 총의 방아쇠에 놓인 손가락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이 때 우리는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손가락에 힘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를 쏜다고 해도, 그가 쓰러진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는가. 좋은 영화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답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것을 뒤집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덧.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덧붙이고 싶다. 드니 빌뇌브의 이 영화 <시카리오>는 예상했던 궤도를 벗어나 그보다 더 강렬한 곳으로 관객을 데려다놓는 영화지만,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그 원래 궤도에서 줄 수 있는 재미를 거의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야간 투시경 화면이나 CCTV 화면의 활용 같은 것은 익숙한 설정이지만 적절한 편집으로 실제감을 가중시키며, 기존 스릴러 영화나 액션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컷의 활용은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예를 들어 줄지어 달려가는 자동차를 위에서 잡는 컷과 그에 어울리는 강렬한 음악의 조화 같은 것). <그을린 사랑>이 상대적으로 소재의 강력함에 기댄 것 같은 인상을 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감독의 역량이 그보다 잘 드러난 것 같다.

    

소위 상업영화를 주로 즐기는 관객이나 예술영화를 주로 즐기는 관객이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영화가 아닐까. 다만 '암살자의 도시'라는 부제는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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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리미 2015-12-3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나서 혼란에 빠졌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왜 그랬는지 정리가 되는 느낌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5-12-31 14: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로라^^님. 명쾌하게 적이 있고, 아군이 있는 이런 문제라고 영화 초반에는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저도 혼란스러웠습니다. 확고한 원칙주의자인 케이트가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다행히도 다시 책 추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솔직히 얘기해서) 신간평가단이 도서정가제 위반일 수 있어 신간평가단 활동을 중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더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쉽다,는 것보다는 도대체 지금의 도서정가제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묘한 궁금증이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가제 시행이 1년을 막 넘긴 지금 시점에서, 이 도서정가제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가제가 시행되고 있는 듯 하지만, 어떤 도서 온라인몰들은 상품권 제공이니, 카드사 쿠폰이니, 세트 할인이니, 적립금이니 하면서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할인율을 보여주고 있고, 또 한편에는 정가제 위반을 신고하여 보상금을 타는 일명 '책파라치'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또한 시행 전에는 출판사들이 정가제가 시행되면 책의 가격을 낮출 것이라는 전망(또는 기대)이 있었는데, 지금 책의 가격들을 보면 거의 낮아지지 않거나 도리어 높아진 것 같고, 살아날 것을 기대했던 작은 서점들은 여전히 말라죽어 가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고, 누가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 짤막한 잡담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라는 것이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로 가고 있다는 것,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 누가 무엇으로 이익을 얻고, 누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이 비윤리적 일이고, 어떤 것이 해야만 하는 일인지 점점 알아차리기 힘든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것은 노덕 감독의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를 보고 나왔을 때 달라붙어 있는 묘한 찜찜함, 답답함, 또는 무기력함 같은 것과 비슷하다. 진실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 진실이 되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사회, 혹은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이 도리어 나아보이는, 혹은 더 나아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사회, 그런 이상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혹은 그 모든 일이 너무나도 빠르게 뒤바뀐 후에도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의미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영화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길거리들을 비추는 마지막 컷들은 무심하게 말해준다.

 

그런 세상에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것, 읽는 데 최소한 몇 시간이 걸리고,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기억할 틈도 주지 않고 살짝 자국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들을 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어떻게든 넘기려고 애를 써본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백민석, 한겨레출판

 

나는 백민석과 백가흠을 늘 헷갈린다. 물론 성이 같아서,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 소설가의 세계가 겹쳐지는 부분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이 트렁크 엽기전이나, 조대리의 목화밭이 되어도 그렇게 이상할 것 같지는 않다. 지난 페이퍼로 백가흠의 소설을 추천했으니 이번에는 백민석을...이라는 것은 농담이고, 아무튼 백민석의 소설을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에 첫등으로 골랐다.

 

 

독, 이승우, 예담

 

이번 달 신간을 보니 이승우 재조명 주간이라도 되는지, 이승우 작가의 지난 책들이 두 권이나 다시 출판되었는데, <에리직톤의 초상>과 <독> 중에서 고르라면 아무래도 내 취향은 이쪽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문학과지성사

 

최근에 들어 이름이 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김엄지 작가의 책도 마찬가지로 두 권이 출간이 되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와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아무래도 나는 단편집 취향이니 이쪽으로.

 

 

첫숨, 배명훈, 문학과지성사

 

배명훈이니 읽는 재미는 보장하겠지만, 아마 안될거다.

 

 

다시 소설 이론을 읽는다 - 세계의 소설론과 미학의 쟁점들, 김경식 외, 창비

 

안다. 이건 더 안될거다.

 

 

덧.

여러 다른 분들의 추천글을 보다가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이 +1점이라면 -1점, 그러니까 마이너스 추천도 있었으면 좋겠다.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가 될까봐 불안하다. 솔직히 장강명 작가의 책은 그만 읽고 싶다. 일단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합니다!"라는 카피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소설이라는 녀석은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한 것과 가장 멀리 있어야 되는 물건이다. 빠르고 독한 것은 어제 먹은 고량주,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빠르고 독하게 사람을 훅! 보내준다(어디로?). 아직도 그곳에서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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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 2015-12-0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이거이거..<배명훈이니 읽는 재미는 보장하겠지만, 아마 안될거다> 저도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리스트에 넣었다가 뺀 건데... ^^;;;;
게다가...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가 될까봐 저도 불안... 저도 이제 장강명 작가의 책은 그만 읽고 싶은데 말입니다.. ㅋㅋㅋㅋ
마이너스 추천이라니.. 기발하면서 멋진 생각이십니다. ㅎㅎㅎ


맥거핀 2015-12-02 23:38   좋아요 0 | URL
정말 농담이 아니라 딱 한 권만 마이너스 추천을 할 수 있는 투표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피하고 싶은 책 한 권 쯤은 있지 않을까요...

근데 진짜 이번에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장강명 작가 책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 같아요. 아유..뭐 되면 싫어도 읽어야죠. 싫은 책 읽게 되는 것도 신간평가단의 매력이니..가끔 그 매력이 너무 지나치긴 하지만.^^

2015-12-03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9 0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5-12-0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댓글부대 글 읽으니깐 어제 끝마친 오르부아르 생각나네요. 어제 그 책 끝마치면서 이나이에 이런 농도 찐한 글을 쓰다니, 놀랍더라구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빠르고 독하다는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독자가 판단할 몫이지. 그나저나 댓글부대 별론가봐요!!!

맥거핀 2015-12-03 13:30   좋아요 0 | URL
뭐 제 취향에 안맞는다는 거지, 평들을 보니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더군요. 그런데 기억의집님 말씀대로 저도 소설이든 영화든 작가가 혹은 감독이 자신의 작품이 이런 것이다, 이런 의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또 위의 말씀대로 그 내용도 그다지 와닿지 않구요. 아..그런데 <오르부아르>가 좋은 모양이군요. 그 책 추천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다락방 2015-12-0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장강명 작가의 책을 단 한 권 [한국이 싫어서]만 읽었거든요. 이걸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것만 읽으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었어요. 이 작가의 책을 더 읽고 싶다, 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싶은 거요. 제 느낌하고 비슷한건지 잘 모르겠어요. 반면,

이승우의 책이라면,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작품을 또 읽고 싶죠. 자꾸 자꾸 열심히 책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독]도, [에리직톤의 초상]도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제 책장 한 칸은 이승우에게 내어줄 작정이에요.

맥거핀 2015-12-03 13:35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합니다. 정확히 설명하라면 할 자신이 없지만, 이 작가의 쓰는 방식이 대체로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 방식이 저는 공감이 안되기도 하고, 조금 식상하기도 하고..그래서요. 물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런데 아무튼 많이 쓰는 것 하나는 인정해줘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요새 장강명 작가의 책 진짜 자주 나오더군요.

이승우 작가 좋아하시는 군요. 저는 사실 이승우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한지가 별로 안되서 모르는 작품이 많아요. <에리직톤의 초상>도 기꺼이 읽을 용의가 있습니다만, 책소개를 보니 <독>이 조금 더 흥미가 가더군요.

하..근데 왠지 이번에는 제가 추천한 책은 어째 다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

cyrus 2015-12-0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의 단점이 독자 팬덤이 두터운 작가나 신작의 저자가 많이 선정되는 것 같아요. 특히 소설, 에세이 분야에서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덜 알려진 작가의 책이 선정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정말 제대로 된 신간도서를 알리는 거잖아요. 제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는 상황을 좋아하거든요. ㅎㅎㅎ

맥거핀 2015-12-04 20:2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많이 알려진 작가의 책들 위주로 선정되는 것 같기는 합니다.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저도 의외의 재미 좋아하는데..이번달 출간 책만 봐도 어떤 책이 될지 감이 온다랄까요..그래서 마이너스 추천이라던가, 혹은 가중치 추천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장강명 작가 책만은 제발...

2015-12-05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8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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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소설의 화자 그러니까 '나',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이 살고 있는 헌드레즈홀을 처음 보았을 때의 회상. 엠파이어 데이 기념일에 헌드레즈홀에 가서 에어즈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대령에게 기념 메달을 받고, 예전 유모로 일하던 어머니가 몰래 챙겨준 케이크의 설탕과자 장식과 젤리를 에어즈가 전용 식기장에서 꺼낸 은스푼으로 먹던 기억, 그리고 벽에 붙은 회반죽으로 만든 도토리 모양 장식을 주머니칼로 몰래 떼내가지고 온 일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로 점프한다. 의사가 된 패러데이는 에어즈가에 단 한명 남은 하녀 베티가 아파서 왕진을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헌드레즈홀에 방문하게 된다. 화자, 혹은 작가의 관심은 이 사건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 같다. 균열되고 푹 꺼진 저택의 테라스, 관리하지 못해 엉망이 되어버린 정원, 막힌 배수관에서 나는 악취, 제멋대로 자란 꽃에 뒤덮인 난간, 덧창이 내려진 창문들, 휑뎅그렁하고 낡아버린 집안 곳곳의 풍경. 작가는 닥터 패러데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제된 화려한 헌드레즈홀과 이제는 낡아서 거의 형체만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쇠락해가는 헌드레즈홀을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로 효과적으로 대조시킨다. 집에 대한 묘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솜씨 좋게 무대를 부드럽게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다. 닥터 패러데이의 병원을 겸한 살림집, 일층에 상담실과 진료실, 대기실이 있고, 침실은 다락에 있는, 예전 그의 스승에게 물려받은 낡은 집. 누리끼리한 벽과 '빗살무늬' 페인트칠이 전부인 우중충한 인테리어가 전부인 혼자 사는 의사의 집. 열기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좁은 다락방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닥터 패러데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다락방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전등을 끄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침대 위에 흩어진 사진과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털썩 누웠다. 창문은 커튼이 걷힌 채 열려 있었다. 달 없는 밤에 여름의 껄끄러운 어둠이 내려앉았고, 미묘한 움직임과 소리가 웅성거렸다. 나는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날의 기이한 잔상이었는지 헌드레즈홀이 보였다. 그 서늘하고 향기로운 공간이, 잔에 든 와인 같던 빛이 보였다. 나는 그 공간에 있을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베티는 자기 방에 있을 테고, 에어즈 부인과 캐럴라인은 그들 방에, 로더릭은 그의 방에......  

나는 그렇게 눈을 멀거니 뜨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누워 있었고, 담배는 서서히 타들어가며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었다.   

- p.65~66, 1장의 마지막 문단.  

      

이 공간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공간 그 자체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인물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것은 2차대전 직후의 영국이다. 전쟁이 가져온 여러 영향들로 모든 물자들은 모자랐고, 지주와 귀족들은 몰락해가고 있었으며, 전쟁 직후에 집권한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로 그 몰락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헌드레즈홀이 몰락한 것처럼 이제 에어즈 가문도 거의 몰락했다. 패러데이가 처음 방문하던 날, 에어즈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장남 로더릭은 쇠락해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건사하려 애쓰지만,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이고, 그의 누나 캐럴라인은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는 동시에 하녀처럼 집안일을 하며, 에어즈 부인은 애써 그런 모습을 감추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모습은 '마님'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패러데이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하여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되어 에어즈가에 거의 주치의처럼 드나드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의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다. 에어즈 가문 사람들과 패러데이의 첫만남, 그리고 그가 에어즈가에서 주최한 파티에 다른 초대받은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을 때의 묘사를 보면 그가 처한 위치가 잘 드러난다. 그는 에어즈 가문과 동등한 위치는 커녕, 젠트리(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유민)와도 그 위치가 다르다. 파티에 참석한 베이커하이드 부부나, 데즈먼드 부부, 로시터 부부 등의 인둘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서 그를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에서 자라난 단지 '의사 선생'이었고, 파티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좁은 집에서 그보다 좁은 다락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화려한 저택과 이제 쇠락해가는 저택, 그리고 닥터 패러데이의 초라한 병원 겸용 살림집에 대한 대비적인 묘사는 그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비하며 말해준다. 헌드레즈홀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쇠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초라한 패러데이의 집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이제는 같은 티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위치라고는 해도, 그것은 겉보기의 모습일 뿐 그 차이는 여전히 크게 남아있다.

 

그래서 어쩌면 패러데이는 그 집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서두에서 인상적인 것은 묘사의 대비이기도 하지만,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 집에서 회반죽으로 된 도토리장식을 처음 떼어내 오던 날부터. 그리고 그의 욕망은 헌드레즈홀이 완전히 쇠락했음을 확인한 지금에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헌드레즈홀의 화려함이 아니라, 헌드레즈홀 그 자체, 그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계급성이니까 말이다. 그런 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의사 선생'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포가 아닐까. 늘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녀석, 그러니까 우리를 사로잡는 그 익숙한 공포 말이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다른 것을 욕망하다가 죽는다.)

 

서두 외에 두 가지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나는 몰락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에어즈가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판 헌드레즈홀 주변의 땅에 들어서는 대규모의 주택 단지를 바라보는 패러데이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에는 쇠락한 헌드레즈홀을 돌아볼 때의 연민과 달리 어떤 경멸들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 여기에서 그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자 학창시절의 동무, 그러나 이제는 공사장 인부와 '의사 선생'으로 차이가 벌어진 이를 만난다. 그는 어색하게 '의사 선생님'이라고 칭하며 목례를 하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른 하나는 그 마지막 밤에 사건들이 벌어지기 전, 그에게 닥친 또하나의 다른 사건이다. 그가 찾아간 맹장이 터진 '무단거주자' 가난한 남자의 이야기. "순간 나는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거절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힐끔 안을 들여다봤는데, 바닥이 매트리스와 잠자는 몸뚱이로 난장판이었다. 어른, 아이, 개, 그리고 아직 눈도 안 뜬 강아지까지 꼼지락댔다.(p.669)" 그는 여기에서 무엇을 봤을까, 아니 왜 이 이야기는 하필이면 여기 이 시점, 그러니까 그가 저택 근처로 가기 직전에 들어가 있을까. 그는 여기에서 어떤 공포를 봤을까. 그 자신이 '무단거주자'가 되어 그 한복판에서 몸을 뉘이고 있는 환상을 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환상이 가져다 준 공포가 그에게 무엇을 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엇을 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어쩌면 그는 쇠락해져가는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라 워터스의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가 보여주는 이상한 방식의 동일시이다. 화자인 패러데이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마치 우리가 실제로 헌드레즈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곳곳에 대해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묘사가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는 특별한 사건이 없거나, 기분이 좋을 때에는 이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마치 그를 반기는 듯했다,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반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같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을 의혹과 공포가 가득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묘사한다. "아무리 조그만 소리나 움직임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가 정원 안에 우리와 함께 있는 듯한, 뭔가가 뽀득뽀득 새하얀 눈을 밟고 서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고약한 것은 그것이, 그게 무엇이든 어쩐지 낯익은 듯한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p.560)" 그는 단지 그의 감정을 헌드레즈홀이라는 저택에 투사한 것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 집 자체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이미 그 집 자체는 아니었을까. 그 집은 물론 귀신들린 집이니까.

 

(이 부분부터는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읽지 마시길.)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 사실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닳고 닳은 소재이다. 당장 기억나는 영화들만 해도 <샤이닝>, <컨저링>, <디 아더스>, <헌티드 힐>, <아미티빌 호러>, <폴터가이스트>, <파라노말 액티비티> 등등 한 두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귀신들린 집'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어떤 반전을 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믿기지 않는 현상'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른한 익숙함을 안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에는 그 익숙함을 뒤집는 한 방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때로는 그 한 방이 얼마나 묵직한가에 따라서 이 이야기는 걸작이 되거나, 범작이 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디 아더스>가 줬던 그 묵직한 충격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를 그런 방면에서 보자면 반복되는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와 그것에 가미된 한방은 사실 꽤 밋밋하다. 한방은 커녕 시드시들한 잽도 못된다. (옮긴이는 이 소설을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비유했던데, 사실 이 소설은 애크로이드 씨의 이야기와는 꽤 다른 것 같다. 적어도 크리스티의 '닥터 세퍼드'가 그 안에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사이에 밑줄을 그어보라며 충고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패러데이의 말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이 반전(아닌 반전)은 의미가 없어지며,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소설 속의 모든 것 중에 사실 믿을 만한 것은 없어진다. - 그래서 그의 이름이 패러독스, 아니 패러데이인가? 사실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패러데이의 법칙'에 나오는 패러데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그런데 말이다. 혹시 모든 것이 거짓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면 도대체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시들시들한 잽으로 실망하는 대신에 다른 것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패러데이, 그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공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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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11-1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드린 날보다도 조금 더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이리시스 2015-11-18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어요. 계속 디아더스처럼 끝날까 우려했던 것 같은데, 결말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진 않고요. 아..자다께서.. 담부터 늦지마요 맥거핀님 리뷰 기다리다 목빠지는줄 알았네😌😌😌 사도 리뷰도 좋구요 파묻힌 거인도... 엄청 좋아요. 여러모로 해석이 필요한 작품인데 그 해석이 독창적이기도 어려울 듯한..데 맥거핀님 리뷰읽으며 다시 정리하는 느낌이 들어요. 안녕. 굳나잇.

맥거핀 2015-11-20 21:52   좋아요 0 | URL
글도 늦었는데, 답글도 늦었네요.ㅠㅠ 저는 그 반전(?)을 빼놓고는 괜찮게 봤어요. 그런데 그 반전이, 혹은 어떤 장치가 너무 생각보다 밋밋해서 어떤 중후반부 까지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느낌이었습니다. 차라리 폴터가이스트 자체의 공포를 더 극단까지 밀어붙여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파묻힌 거인,도 괜찮았구요. 그 마지막은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리시스님 주말이 이제 눈앞에 있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2015-11-18 0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도>의 내용, <종이 달>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이준익, 2015

    

영화 <사도>에는 몇 가지의 죽음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광기의 눈빛을 하고 사납게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도세자(유아인)를 만난다. 그는 이제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죽이러 가려는 참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죽음은 시도되었을 뿐 실행되지 않았지만, 다른 죽음도 있다. 영화 상에서 좋지 않았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급격히 파탄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의 죽음을 둘러싼 언쟁에서 촉발되었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죽음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8일을 다룬다. 중간중간에 거대한 플래시백들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칼을 빼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와 그런 그를 뒤주에 가두는 영조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사도>에서는 하나의 느린 죽음이 진행되는 셈이다. 

 

느린 죽음? 느리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뒤주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며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영화상으로 볼 때('영화상으로'라는 표현을 자꾸 쓰는 것은, 나는 이 영화의 해석이 실제 사료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혹은 이 영화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이미 그 전부터 죽어가고 있거나, 거의 죽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아 떠도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 반복되는 옥추경이 울려퍼지는 무덤 속에서 관에 들어가 누워있는 사도세자가 벌이는 기행이었다. 그는 왜 하필이면 상복을 입고 무덤 속 관에 누워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죽은 할머니에게 바치는 독경이라고 보기에는 그 형상이 너무도 기괴하다. 혹시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이미 죽은 존재이거나, 혹은 죽어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영화의 플래시백들 속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대리청정과 반복되는 선위 파동으로) 그 이전부터 거의 말라 죽도록 괴롭히는 것처럼도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영화 <사도>는 올해 몇 차례 등장했던 살부 서사의 계보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깝기로는 <암살>의 살부. <암살>의 자식, 그러니까 안옥윤(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더라면, 그는 그의 쌍둥이 자매와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아버지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 대신에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와 그로인한 죽음)를 택한다.) 반면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사도>의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죽음을 맞는다. 아니면 조금 다른 살부 서사들도 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홍이(김고은)나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이나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차이나타운>에서 일영이 맞서게 되는 것은 엄마(김혜수)이지만, 사실 여기서 김혜수의 외양에서 감지할 수 있듯, 그녀는 엄마라기보다는 아빠에 가까운 것 같다.) 거의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겨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 기이한 살부 스토리들은 왜 올해 극장가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혹시 현실에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숭앙하려 애쓰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고쳐쓰면서까지 그들 정신적 아버지들이 벌인 추악한 일들을 가리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가운데 손가락은 물론 아니겠지. 

 

아무튼 보지 않은 영화나 잘모르는 정치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사도>로 돌아오면, 아버지를 죽이러 가며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묘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처음 영조와 사도세자라는 부자관계에서 출발했던 영화는 점차 다른 부자관계로 중심점이 이동하는데,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라는 부자관계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뒤주에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죽지않으려 날뛰는 사도세자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죽음을 납득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은 뒤주를 깨고 나온 사도세자가 다시 뒤주에 갇히며, 그의 장인 홍봉한이 밀어넣어준 부채를 보는 시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부채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태어나던 날 사도세자가 기쁨에 겨워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세자는 이 시점부터 그가 왕인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세자가 아니라(즉 역모를 일으킨 세자가 아니라), 그저 미쳐 날뛰다가 죽은 세자가 되어야 자신의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논리(그의 장인이 이 부채를 밀어넣어 주는 것도 아마도 그것을 납득하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에 따르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에게 전하는 영조의 대사로 재확인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영화는 초반부에는 영조를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사도세자에게 중심을 맞춰 놓는다. 즉 <사도>의 초반부는 자식을 괴롭히는(혹은 친일을 하는) 이상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식들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중반부에 이르러 그 고통받는 자식은 이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그 논리를 그 괴롭히던 아버지를 통해 재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중심점은 영화 초반부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놓여져있었지만, 두 개의 부자관계가 교차되면서 아버지들에게 중심점이 옮아간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아버지(사도세자)에 다른 아버지(영조)를 겹쳐내면서, 마치 영조도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명백한 착시일까, 아닐까. 만약 착시라면, 이 착시는 의도치 않게 빚어낸 착시일까, 아니면 고도의 계산이 가미된 착시일까. 단지 무의도라고 보기에는 이 논리가 지금의 현실의 논리들과 비슷하게 닮아있어 어떤 찜찜함이 계속 남는다. 

      

 

  

종이 달, 요시다 다이하치, 2015

      

첫 영화를 애초 생각보다 너무 길게 썼으니, 두 번째부터는 짧게짧게 써야겠다.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묘하게 방향을 트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준익의 <사도>만이 아니다. 요시다 다이하치의 <종이 달>의 여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에게는 거의 정해진 결말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점점 부풀어만 가던 횡령은 전모가 드러났고, 남자와의 관계는 끝났으며, 이제 그녀에게는 정해진 대가를 치르는 것만이 남았다. 동료 여직원 스미의 말대로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가야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다른 어떠한 것이 여기에 끼어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플래시백의 등장이다. 이 영화 <종이 달>은 리카의 과거, 그러니까 리카가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비추면서 시작하지만, 이 과거는 아주 짧게 등장한 후 곧 이야기가 1994년, 즉 리카가 계약직 은행원이 되어 횡령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점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의 선을 따라 굴러가고, 그 굴러감에 따라 리카의 횡령 규모도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리카의 횡령이 밝혀지는 이 때 다시 영화는 리카가 교복을 입고 있던 과거의 시점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마치 이 과거가 현재의 어떤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려는 듯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과거씬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야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단지 현재의 어떤 의문들, 즉 리카가 왜 횡령을 저질렀는가에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등장했을까. 기부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치던 소녀의 도벽이 더 큰 것으로 발전되었을 뿐이라는 식의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그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 즉 '종이 달'이 상징하는 어떤 가짜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실체라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플래시백은 그녀의 가짜 세계에 대한 인식, 손가락으로 달을 지워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안에서 만들어졌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떤 것의 연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멈추기 위한 시도의 하나가 아닐까. 이 플래시백이 현재의 가짜 세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 플래시백은 해답과는 거리가 멀다. 리카의 '종이 달', 즉 가짜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플래시백이 등장한 후, 영화는 기어이 가장 가짜같은 장면을 등장시킨다. 창문을 깨고 도망가는 리카. 이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이 가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녀의 도피는 언제까지라도 가능할까.)

 

다만 그 플래시백들은 다른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기부하는 것, 그것이 나쁜가요. 리카는 되묻는다. 어쩌면 리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 돈 몇 푼 없어졌다고, 재해를 맞은 외국의 소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이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기부를 하게 된 셈이니 좋은 것이고, 외국의 소년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으니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생각에 화답하듯이 이상한 장면들을 붙인다. (횡령의 피해자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관심을 보이는 노인, 여자친구와 즐겁게 걷고 있는 남자(리카의 불륜상대), 여전히 활달하게 잘 지내는 남편, 꿈꾸는 듯한 눈빛의 스미, 그리고 영화 속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리카. 모두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언뜻 보면, 홍상수가 그려왔던 세계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상황을 비슷하게 반복시키고, 같은 대사를 다시 하거나, 같은 공간에 비슷한 인물을 넣어놓음으로서 반복이 만들어내는 어떤 화음을 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영화들과 이 영화는 몇몇 차이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내부장치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던 홍상수의 과거 영화들을 짚어보자. <극장전>은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형식이었다. <하하하>는 두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했다. <옥희의 영화>는 한 영화를 여러 개의 장으로 분절했다. <북촌방향>은 시간을 흩뜨려 버렸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고쳐쓰는 작업이었다. 즉 여기에는 어떤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영화, 대화, 이야기, 시간의 뒤섞음, 시나리오의 퇴고 등등. 그 외에도 홍상수는 꿈과 같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치를 쓰며 이야기를 반복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외부적인 장치가 없다. 그저 한 영화가 거의 동일하게 다시 상영될 뿐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두 개의 별개의 영화가 나란히 상영되는 것 뿐이다.(<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한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이 등장하면서 다시 영화가 시작된다.) 즉 관객이 보는 것은 그저 두 편의 나란한 영화이다. 제목은 같고, 등장인물도 같고, 내용도 거의 같으나 미세한 몇몇 가지가 달라졌을 뿐인 영화. 이것은 어떤 영화적 내부 장치, 혹은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한 영화를 두 번 트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것이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조금 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즉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에서는 어떠한 것이 반복된다는 징후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갑자기 반복이 일어날 때 반복 그 자체의 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관객이 대체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다'는 그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한 영화가 다시 반복되는 것은 다르다. 한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하는가? 대부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어떠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그보다는 주목하지 않았던 배경이나 미세한 뉘앙스, 어떤 숨겨진 의미에 그만큼 더 주목하게 된다. 홍상수의 이 영화도 비슷한 것을 노린 것은 아닐까. 즉 두 번째 반복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볼 때 우리는 함춘수(정재영)가 이미 어떠한 행동을 하고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즉 큰 줄거리의 사건은 반복되기 때문에) 반복의 양상보다는 그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훨씬 더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 그 자체에 현혹되지 않고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영화 속 인물이 말하는, 표면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는,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닐까. 어떠한 것이든 표면은 대체로 너무도 심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표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늘 놓친다. 표면은 늘 같으니까, 같은 일들이 반복되니까. 홍상수는 억지로 같은 표면을 두 번 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 표면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든 찾아내게 만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송곳, 김석윤, 2015

      

<어셈블리> 이후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1회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드라마가 있다. 많은 분들이 반농담삼아 이야기한대로 이 드라마에는 송곳 같은 대사가 많이 나오지만, 나에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송곳같이 파고들었던 대사는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안내상)이 했던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편으로 구고신이 늘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이 대사와도 통한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드라마 속 뒷부분을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구고신이 그 '시시함'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것을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과거 고문을 받았고,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을 실토한 다음 겨우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털어 놓는 시시한 인간. 이 '시시함'을 깨닫기 위해 그가 바쳐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시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아니, 꼭 고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수많은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얼마나 시시한 꼴을 많이 봤을 것인가, 살기 위해 배신하는, 혹은 겁내면서 주저하는 시시한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으며, 시시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였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말한대로 거대한 악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 거의 대부분 시시한 인간들의 집합이다. 거의 1회에는 절대악처럼 등장했던 정부장(김희원)도 2, 3회에 이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할 뿐임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는 또 얼마나 조인트가 까였으며, 누군가에게 굽실댔을까. 그렇다면 그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사상무(정원중)가 절대악일까, 아니면 그도 시시한 강자일까. 적어도 구고신의 눈에는 그들 모두는 시시한 강자이다. 살기 위해 패악질하는 시시한 녀석들. 그래서 어쩌면 구고신은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용역들에게도 노동상담소 명함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역질하다가 돈 못받고 떼이면 찾아오라고 말이다.

      

<송곳>은 한편으로 그러한 것을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끄덕거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과거 이수인(지현우)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부장. 그녀는 이수인이 곤경을 받고 있을 때 과거 서사와 함께 뜬금없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시청자에게 갖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없이 다만 실없는 응원을 던지고 가버릴 뿐이다. 그들 대다수는 그런 인간들이니까. 그저 악한것이 아니라 다만 시시할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노동하는 대상이고, 또 서는 위치가 바뀌면 시시한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시시한 약자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시시한 약자들과 시시한 강자들의 문제이다. 악은 선이 될 수 없지만, 시시한 강자는 시시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시시하니까. 그것은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희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악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시시한 이들이 시시하지 않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은 자신이 시시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늘 그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구고신의 일침이 늘 필요하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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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0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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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0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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