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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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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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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4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5-26 16:29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나만을`의 뜻은 이중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저는 처음 이 소설 제목과 표지를 봤을 때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어요. (노란색으로 표지를 한 것은 그런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솔직히 말해서 한편으로는 `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 소설의 어떤 사건들은 분명히 그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건은 다르지만 그것의 어떤 작동양상을 보면요.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제 생각에는) 결국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를 말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의 목소리라고 봅니다. 현실에서는 그것이 단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것으로밖에 나타나고 있지 못하지만요. 세월호 유족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바로 그들도 사실은 약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그들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거겠지요.) 어쩌면 약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잡아먹는 세계, 그러니까 <킹스맨>이라든가 <설국열차>의 세계가 이미 공고히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15-05-26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30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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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신간평가단으로 그간 6권의 소설을 읽었고, 그에 대한 6개의 리뷰를 썼으며, 아직 읽지 않은 2권의 책이 내 손에 들려있다. 그리고 이제 2번, 그러니까 최대 10권의 선택 기회가 남아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렇게 반환점을 돌았다고 느껴질 때가 아마도 중간점검을 한 번 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번에 새롭게 소설 신간평가단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세운 시답잖은 원칙이랄까,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돌아보면 그 희망은 그렇게 충족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평가단으로서는) 한 권도 읽지 못했고(이번에 구병모 작가의 책이 선정되기는 했지만), SF소설도 아직 한 권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이 전부 별로였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어떤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내가 원하는 분야의 책 위주로 선정을 하겠다,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렇지만...  

 

이번 달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 별로 없다. 3월에 나온 소설들은 이 책도 좋아보이고, 저 책도 좋아보여서 책들을 골라내는 데 애를 먹었는데, 이번 달에 나온 소설들은 5권을 채우기도 쉽지가 않다. 정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고 투표장에 들어섰지만, 투표 용지에서 물릴대로 물려서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이름들만 보았을 때의 맥풀림이랄까(그래도 정동영과 안상수는 좀 너무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도 환멸을 느끼고 투표장을 벗어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중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최선을 고를 수가 없으면, 최악이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빨간색으로 도배된 개표방송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당장의 정국에 대한 답답함이라기보다는 어떤 환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타인들의 환멸을 이야기할 것 없이, 내 안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잡은 내밀한 환멸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을 이겨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든다.

      

물론 신간평가단 책을 골라내는 것은 선거와는 다르고, 예상이 들어맞지 않는 즐거운 배반도 많다(그렇다고 해도 이 신간평가단 책이 선정되는 작은 과정만 해도 잘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그러니 어떻게든 골라보는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희망에 가까운 다섯 권을. 소설 읽기는 내밀한 환멸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집시와 르네상스, 안토니오 타부키, 문학동네

    

항상 유럽사회의 주변인들, 타자들로 여겨지는 집시들의 삶을 묘파하는 안토니오 타부키의 르포 형식의 글이다. 작가로서의 세심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은 소설이 아닌 이러한 글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낭만적인 도시로서만 인식되는 피렌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글은 1990년대 후반에 쓰여졌지만, 지중해에서 일어난 최근의 난민선 전복 사고에서 보듯이 난민 문제는 여전히 유럽 사회의 화두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심상대 외, 예옥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15명의 작가들이 쓴 공동소설집이다. ‘추모’라는 조금은 이른 단어가 걸리기는 하지만, 결국 작가가 이 사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일 터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 어니스트 클라인, 에이콘출판

 

어니스트 클라인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다는 소개문구만 믿고 골라본다. 장황한 책 소개와 가득한 여러 추천문구가 살짝 미심쩍게 만들기는 하지만...

 

  

용감한 친구들,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장미셸 게나시아, 문학동네

 

잘 모르지만 다른 분들의 추천을 믿고 골라보는 소설들. 잘 모를 때는 다른 누군가의 추천을 꼼꼼이 읽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차피 처음 세운 원칙도 다른 분들의 추천에 빚을 지자는 것이었으니 안될 것은 없겠지. 3권만 고르려다가 이렇게 5권을 채운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어떻게든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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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4-3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거 결과 좀 무서워요-_- 별 기대도 안 돼서 일찍 자긴 했는데 역시나였을 때 기분이.. 열다섯 살 때부터 스물 다섯살 때까지만 (내가 뽑지도 못한) 인생에서 최고로 좋았던 대통령의 국가에서 산 게 전부가 될까봐 두려움과 환멸을 많이 느끼죠. 이건 저는 좀 오래됐어요. 공주님이 대통령이 될 때 그래서 많이 무서웠어요. 두려움을 밖으로 꺼낼 수도 없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을 만큼.

우와, 타부키다, 피렌체다, 집시다, 우와...

맥거핀 2015-05-03 16:26   좋아요 0 | URL
저는 이런 결과를 예상못한 바가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를 수치로 보니 기분이 뭐랄까 참담하더군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런 선택의 결과를 보여주다니 도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일반적인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해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고 흔히 얘기하는 국개론도 이의 답은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조금더 굳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근데 저는 타부키 잘 몰라요.

희선 2015-05-0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반이 지났군요 멀리에서 보는 사람은 새로 시작하고 끝나는구나 합니다 바라는 책을 고르려고 할 때는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 이게 있을 때는 많고, 없을 때는 없기도 하더군요 이건 책만 그런 게 아니기도 하죠 마음에 드는 게 많을 때가 더 좋을지, 적어서 뒤돌아서는 게 좋을지... 둘 다 그렇게 좋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적당하면 좋을 텐데, 이런 일이 자주 없죠

자신이 고른 책이 되면 기쁠 듯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고르기, 안 된다 해도 하는 게 더 좋을까요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생각해야겠죠 이건 나 하나가 잘한다고 세상이 좋아지겠어, 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럴 때는 달라지는 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하죠 좀 엉뚱한 말을 했네요

맥거핀 님이 고른 데서 하나라도 되면 좋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5-05-03 21:19   좋아요 0 | URL
이번에는 제가 고른 책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일단 신간평가단 같은 경우에는 제 경험을 돌이켜보면 저의 예상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좋을 것 같아서 골랐는데 영 이상했던 경우도 많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좋았던 때도 많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책을 전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책이 좋아보인다,라고 해서 고르는 게 우스운 거잖아요. 책소개들은 대체로 출판사들에서 홍보 목적으로 쓰는 거라서 다 엄청 좋은 것처럼 소개하기는 하죠.

그런데..선거는 다르죠. 나 하나가 고르는 것이 무슨 영향을 미치겠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되는 것이 선거이죠. 선거라는 것이 그런 작은 나 하나들의 뜻을 반영하는 의미로 처음 탄생된 것이기도 하구요. 선거에서 나는 관심없어,라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에게 실제로 어떤 피해(...)를 입히는 것이 바로 이 구조이기도 하겠죠. 그러니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네오 2015-05-0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될봐에는 앞으로 장난이라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닙다라고 말하고 마음 편하게 먹으면 될까요? ㅠㅜ

맥거핀 2015-05-03 21:21   좋아요 0 | URL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절망하지 않으려 노력중입니다. 근데 저도 잘 안되네요.
 
[55세부터 헬로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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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사람이 예전보다 오래 살아서 쉰다섯이라고 하면 많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적지 않군요 그때가 되어도 마음은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 어쩐지 지금보다 더 우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맥거핀 님이 쉰다섯이 되면 이 책 다시 보실 건가요 쓰기도 하겠다니 그때는 어떻게 쓸지... 여기 나온 사람들과 같은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할까요(그 나이가 아니어도 언젠가 찾아오겠다 하겠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책에 나온 사람도 쉰다섯에서 쉰여섯이 됐습니다 그 사람은,

“쉰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나이를 확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지만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오십 줄에도 완전히 익숙해졌고, 환갑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아직 그렇게 늙은 건 아니다, 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제가 본 책에 나온 사람과 여기 나온 사람은 나이만 같고 처지는 다르군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서글프지 않으면 좋을 텐데, 벌써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은 자라지 않고 나이만 먹는 것 같아서 말이죠 앞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런 생각 자주 하지 않고 아주 가끔 합니다 사람은 본래 안 좋은 것보다 좀더 나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것도 살려는 뜻일지도 모르죠

기분 안 좋을 때 차를 한번 마셔봐야겠군요 마음이 가라앉는지 보게... 그런 걸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예전에 ‘아침에 아버지가 내려준 커피를 마셨다면 그날 안 좋은 일이 없었을 거다’ 하는 말을 들은 적 있군요 무슨 일이 있는 사람한테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했네요 그건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라는 뜻이기도 하겠죠


희선

맥거핀 2015-04-29 15:11   좋아요 0 | URL
사람이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내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지금 쉰다섯의 감정을 미리 느끼거나, 혹은 쉰다섯이 되었을 때, 이십대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지금 제가 나의 쉰다섯일 때는 이럴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것은 있겠지만, 막상 그 때가 되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과는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쉰다섯살 때, 내 나이 이십대때에 느꼈던 어떤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지금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쉰다섯살 때라니요. 아무튼 그래서 분명히 쉰다섯 살 때 혹여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느낌이 지금과는 아주 다르겠지요. 그런 경우들 많이 있잖아요. 예전에 분명히 보았거나, 읽은 이야기인데, 지금와서 다시 보았더니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죠. 지금보다 더 풍부하게 느낄지, 더 빈곤하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르겠지요.

나이를 먹는게 서글프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소리겠지만, 서글픔도 어쩌면 나름 중요한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그 서글픔마저도 망각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그런 멜랑꼴리함이 나중에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확신할 수가 없군요.

네..저도 책을 읽고나서 기분이 안좋을 때 무엇인가를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이 그럴 때 좀 안정이 되려나요. 이왕이면 차가운 것보다는 천천히 마실 수 있는 뜨거운 것이 좋겠죠.

아이리시스 2015-04-2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아님.

아놔 맥거핀님, 평가단도서 말고 다른 리뷰도 좀 써달란말입니다 부대에 읽을거리가 없단말입니다 심심해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평가단도서 리뷰도 겨우 쓰고 있어요. 허허허. 아이리시스아님님, 아이리시스님한테 읽을 거리 많은 거 알고 있으니 열심히 읽으시라고 전해주세요.^^
 
[우리동네 아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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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러 해설이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굳이 애를 써서 보려고 하지 않아도, 약간의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즉 자발라위,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 리파아, 까심 등이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자발라위는 하느님을, 아드함과 이드리스는 아담과 사탄을, 까드리와 후맘은 카인과 아벨을, 자발은 모세를, 리파아는 예수를, 까심은 무함마드를 의미하며, 이 소설은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행적을 묘사함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각 기본바탕에 내재해 있는 것들을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로서 들려준다. 그러므로 사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각 종교에 내재해 있는 어떤 물음들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우리 동네 이야기> 속 이야기대로라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자발라위는 왜 얼자 아드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장자 이드리스를 내쳤는가(하느님은 왜 악을 탄생시켰는가). 자발라위는 왜 형 까드리가 아니라 동생 후맘에게 나타났고, 후맘이 까드리에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는가(우리는 왜 살인자 카인의 후예가 되었는가). 자발라위는 왜 리파아를 구원해주지 않았는가(왜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도록 구해주지 않았는가)...등등의 물음들. 물론 이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책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는 질문이자, 종교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왜 자발라위는 대저택에 은거하고만 있는가, 왜 그는 직접 나서서 재산이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도록 하지 않는가, 왜 그는 모든 사람이 핍박받고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서 신이 있다면,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직접 나서서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물음. 

 

물론 이 물음은 세상의 누구라도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 알레고리를 그려내는 작가 마흐푸즈도 마찬가지다. 대신 마흐푸즈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 알레고리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라파의 이야기이다. 책의 마지막에 붙은 아라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어떤 종교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부분으로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사실 그전 까심의 이야기까지는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부분부터는 이야기가 약간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에 나타난 마법사 아라파가 자발라위의 비밀을 밝히려다 자발라위를 죽게 만들고(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인을 실수로 죽여 그 충격으로 자발라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설정이다. 즉 자발라위는 처음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이야기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발이나 리파아가 자발라위를 만나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발이나 리파아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로서 전해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설정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결과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런 물음을 여기에서 덧씌울 수는 있다. 자발라위가 죽은 것인가, 자발라위가 죽었다고 믿는 것인가), 폭력을 휘두르던 수장들을 제거하지만, 그가 결국 폭력과 억압의 중심에 있던 관재인과 한패가 되고, 그런 자신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려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물론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바대로, 마법사 아라파를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라파가 마법사라는 상징은 물론이거니와(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 예를 들어 그가 '본의 아니게' 자발라위를 죽게 만든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즉 오랫동안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의 이야기, 즉 종교라면, 그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이 마법사 아라파, 즉 과학이며, 과학은 '본의 아니게' 종교가 가졌던 신비를 상당부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었다. 또 그와 동시에 마법사 아라파가 마법의 병을 통해 수장들을 제거한 것처럼, 과학은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날 어떤 가능성을 또한 제공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물론 흥미로운 것은 마흐푸즈가 이런 마법사 아라파를 결코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에 얘기한 대로 마법사 아라파는 모든 이를 억압하는 관재인 까드리의 시녀가 되었으며, 과학은 또한 동시에 거대한 억압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계를 휩쓴 두 차례의 전쟁이 그렇게 거대해진 것이 결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이 약하게 만들었던 종교와 연관지어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아라파도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요. 불로 죽든 물로 죽든 마귀에 의해 죽든 몽둥이에 맞아 죽든 말이죠."- 2권 p.214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의 자식입니다." -2권 p.332). 그리고 관재인은 자발라위가 죽고 동네가 그의 것이 되었는데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즉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재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발라위가 죽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는 종교의 역할을 마흐푸즈가 결코 완전히 부정하지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아라파가 죽음의 과정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아라파의 파멸은 결국 그의 오만, 즉 자발라위가 그를 죽게 만든 아라파를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착각, 혹은 죽은 자발라위를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는 맹신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라파는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결말이 마흐푸즈가 찾은 어떤 적절한 균형점처럼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어떤 균형점 말이다. 반복되는 리벡 연주에 맞춘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이야기가 핍박받고 억압받는 동네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라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자발라위는 죽었다고 믿어졌지만, 사실은 완전히 죽일 수도, 혹은 죽을 수도 없으며(아라파는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으며, 그를 끝끝내 어떤 형태로든 되살리려 애썼다), 아라파는 산채로 매장당했다(아라파의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되는데, 이 묘사는 그를 결국 죽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종교든 과학이든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던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자발라위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과 같은 종교적 선지지가 아닌 평범한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이다. 작품 내내 이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긍정적이지 않다. 일부 현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탐욕적이고, 서로를 시기하고, 남자들은 싸움을 즐겨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약한 자를 짓밟으며, 강한 자에게 금새 아첨한다.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도 모른채, 매일 해시시 담배를 물은 채로 반복되는 리벡 연주를 들으며, 선지자의 이야기, 그러나 현재는 그저 한낱 종교적인 신화가 되버린 그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며, 미망에 빠져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반복되는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한 가지 다행스러운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거짓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경멸스러운 내색을 보였다" -2권, p.357). 그리고 아라파의 마법의 노트를 가진 하나슈는 해방의 날에 대비해 청년들에게 마법을 전수한다.

 

이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 그것은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마법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배우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이며, 아라파를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는 것이다. 마흐푸즈는 가능성과 불안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불안인가, 희망인가. 구원의 가능성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발라위의 살해범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설사 그가 자발라위를 죽였어도 동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추앙했고 드디어 각 구역마다 그를 자신들의 구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동네는 다시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내하고 끈질기게 학대와 억압을 견디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 2권,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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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4-2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로도 어렵군요. 그렇게 느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D

오랜만에 궁금.
점심 메뉴를 말해줘요 :)

맥거핀 2015-04-25 15:33   좋아요 0 | URL
이야기가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다면 제가 리뷰를 못 써서 그렇죠 뭐.^^

오늘은 낮에 비빔국수를 먹었습니다. 사먹은 게 아니고 제가 만들어서 먹었어요.^^

아이리시스 2015-04-25 15:35   좋아요 0 | URL
오..간단한데 의외로 귀찮은 국수.. 종교가 등장하면 난해해서 그렇죠. 리뷰탓은아닌게아니지아닙니다ㅎㅎ 맛있겠다 비빔;;

맥거핀 2015-04-25 15:40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간단하게...면 삶은 다음에 대충 있는 거 잘라서 넣고 오뚜기 비빔양념장을 넣습니다.-_-

아이리시스 2015-04-25 15:47   좋아요 0 | URL
오뚜기비빔양념장 아... 요즘 엄마 안계시니, 생전 부엌일 잘 안해봤는데 예전엔 안사던 온갖걸 다 사서 먹어봅니다.. 맥시멈 1주면 이제 엄마밥 먹을수있어요~!

맥거핀 2015-04-25 15:51   좋아요 0 | URL
밥 중에는 엄마밥이 제일이죠. 그래도 곧 퇴원하신다니 다행입니다. 퇴원하면 얻어먹지만 말고 아이리시스님이 맛있는 것도 해드려요,^^(물론 잘 하시겠지만.)

희선 2015-04-2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는 대로 된다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와 같을까요 이건 종교는 아니고 사람은 어떻게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그랬을 때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건 이루어지지 않죠

세 가지 종교가 나오고, 과학도 나오는군요 세 가지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그냥 종교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죠 종교와 과학으로... 두 가지 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은 주지만, 그것만 믿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봤는데... 거기에서는 하늘이 정말 있느냐, 있는데 왜 힘든 사람을 도와주지 않느냐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신이 사람을 도우면 잘못할 수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잘못을 하죠 신이 사람을 도우면 더는 신이 아닐지도 모르죠 결국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건 사람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거겠죠

저는 이 소설 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것 같네요


희선

맥거핀 2015-04-25 15:46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모든 것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모든 것이 종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의 한계를 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어떤 구조나 시스템의 한계로 돌리는 것도 위험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위험하겠지요.

저는 작가가 마지막에 나름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봤어요. 물론 그런 태도가 한편으로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는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신을 믿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군요.)

2015-04-23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5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전자구독으로 보고 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이번 2015년 봄호의 주제는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기'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질서 속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아슬아슬한 동거를 실험하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를 조망하는 이남주의 글이 있고, 과연 '자본주의 위기'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나누어서 볼 것을 이야기하는 백승욱의 글이 있다. 또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담론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유명한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과의 대담도 있다. 나는 이 주제와 관련된 글들은 다 읽고 실린 소설들을 읽고 있는 참인데, 김미월, 김사과, 이승우, 정지돈 작가의 소설 중에서 특히 이승우 작가의 소설 <신의 말을 듣다>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 현재 세상의 여러 문제들, 그러니까 세월호 문제라든가, 권력비리 문제라든가 하는 것들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에 대한 것은 아니고 그 형식에 대한 것이다. 전자책으로 계간지를 본다는 것 말이다. 사실 전자책을 본다는 것은 이제 그렇게 더이상 낯설지는 않다. 처음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을 때만 해도, 자주 페이지를 넘겨야 하니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재작년에 태블릿을 구입한 이후에는 그런 불편함도 없어져, 독서생활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다.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이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30-40% 정도 된달까. 특히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여 보는 것은 상당히 편리하다. 도서관에 일부러 들를 필요도 없으며, 언제든 생각나면 책을 대여할 수 있고, 언제든 터치 한번으로 반납할 수도 있다. 다만, 이번처럼 전자책으로 잡지를 구독하는 것은 처음인데, 생각해보면 잡지만큼 전자책에 잘 어울리는 범주도 없다. 어떤 특정 시기에 읽는 것이 중요한 잡지의 특성상,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전자책이라는 매체는 효과적이며, 또 글과 사진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형식적인 특성은 전자책에서 자유롭게 변형되어 구현될 수 있다(<씨네21>에서 한 때 발행했던 전자잡지에서 배우와의 실제 인터뷰 영상을 삽입하는 등의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단행본이든 잡지이든 가장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는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책들이 종이책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이니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종이책이 전자책에 결국 완전히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인가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결국 그것은 종이라는 것의 물질성(반대로 이야기하면 전자책이라는 것의 휘발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눈앞에 종이라는 실물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떤 허망함 말이다. 예를 들어 전자책을 광고하는 쪽은 하나의 기계에 수만권의 책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누군가는 그 수만권의 책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실물로서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종이책을 읽을 때, 그 실제의 종이의 무게나 두께가 가진 묵직함이 주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종이책의 페이지를 읽을 때, 남은 페이지의 무게와 두께가 주는 기분좋은(또는 부담스러운) 압박감이 있으며, 지나간 페이지의 무게와 두께가 주는 어떤 모종의 성취감이 있다. 독서에서 그 무게와 두께의 압박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는데, 그것은 때로 어떤 책을 끝까지 읽게 하거나, 혹은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책은 조금 다르다. 전자책에서도 물론 내가 책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숫자는 어떤 압박감의 문제라기 보다는 단지 일종의 표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두꺼운 책을 선택했든, 아니면 매우 얇은 책을 선택했든 전자책에서의 무게는 동일하다(아니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무게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종이책에서는 그것은 결코 같지가 않다.

 

(그러니 종이책과 전자책의 관계는 영화에서의 필름과 디지털의 관계와는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물로서 존재하는 필름과 단지 파일로서 존재하는 디지털은 언뜻 보기에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관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사실 두 가지 모두 휘발성의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극단적인 경우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4286km를 걷기로 결심했던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와일드>와 같은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진, 자신보다 더 커보이는 셰릴(리즈 위더스푼)의 가방 속에는 세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월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었을 때>,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된 언어의 꿈>, 그리고 PCT를 안내하는 지침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 영화의 중반부 트레일을 시작한 셰릴에게 전문가는 조언한다. 짐을 줄여야 한다고. 그리고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을 들어 앞부분을 찢어내 버린다(나머지 두 권도 책 좀 안 읽는다고 나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버리려 하지만 셰릴이 말린다). 이미 지나온 길이니 이 부분은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이미 지나온 것의 무게. 그것을 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 찢어내버린 책의 무게는 말해준다. 지나온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 지나온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앞으로도 짊어갈 이유는 없다는 것(마찬가지로 셰릴이 나머지 두 권을 그대로 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도 매순간 그것의 무게를 절감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짊어갈 삶의 무게의 일부분이자, 아니면 삶의 지침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셰릴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것을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의 가방 속에 담겨진 두꺼운 취업 수험서가 당신의 어깨를 내리누를 때 그 불편한 무게감, 혹은 재미있지만 두꺼운 책을 꺼내들고 읽을 때의 전해오는 저릿저릿한 기분좋은 무게감은 같은가, 다른가. 전자책은 그 같고, 다름을 우리에게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전자책을 읽을 때와 종이책을 읽을 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내 경우에는 책을 읽는 습관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어떤 책이라도 중간부터 보는 경우가 거의 없는 습관같은 것들(심지어 잡지라도 말이다)이 그러하다. 그러니 전자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읽게 하는 여러 기능 같은 것(예를 들어 <창작과비평> 전자책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은 목차를 클릭하면 그 부분으로 이동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혹은 책에 여러 가필을 할 수 있는 기능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창작과비평> 전자책(을 보는 어플)은 여러 가필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책에 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특정 부분에 주석을 달거나, 자유롭게 필기를 하거나, 아니면 취소선으로 특정 부분을 지워버릴 수 있는 등의 다양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종이책이라도 그렇게 가필을 하는 경우는(수험 공부를 할 때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자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마찬가지인데,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는 전자책 어플들도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 여러 다양한 가필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는 조금 이상해보인다. 다시 누군가에게 돌아갈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 말이다. 비록 그것이 전자적 신호로 된 것이어서, 다시 반납되었을 때는 바로 없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았을 때의 의아함과 마찬가지다.

 

책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를 원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간의 무게를 어떻게든 피하려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빛바랜 책에 남겨진 오래전 가필의 흔적을 보는 것은 나에게 그 가필이 이루어졌던 시간, 그리고 빛바랜 책과 현재의 나 사이에 놓여져 있는 시간의 무게를 다시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게가 주는 중압감을 애써 피하고 싶은 나약한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자책은 그런 시간의 무게를 인식시켜 줄 수 있을까? 수만년이 지나도 전자적 신호로 그대로 복원될 수 있는 전자책의 맨들맨들한 페이지는 종이책의 찢어질 것 같은 빛바랜 페이지보다 나을까. 혹은 전자책에서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매끄러운 폰트들은 오래된 책의 이제 사용되지 않는 낡은 폰트들보다 나을까. 나는 화면을 주간모드에서 야간모드로, 혹은 페이지 색깔을 흰색에서 아이보리색으로, 혹은 폰트를 나눔고딕에서 윤명조체로 바꾸면서 생각한다. 클릭클릭, 터치터치. 그 터치들은 너무 가벼워서 이제 곧 날아갈 것만 같다. 날아가지 않도록 잊지 않고 '저장' 버튼을 누른다. 가벼운 터치로.

 

 

 

덧.

<창작과비평>의 경우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년이라도 전자구독을 하면 구독기간 중에는 지나간 모든 호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66년 겨울에 발간된 이호철, 김승옥, 싸르트르, 밀즈, 백낙청, 유종호 등의 글이 실린 <創作과批評> 창간호라도 말이다. 내 경우에는 무료로 보고 있지만, 2만원이라는 1년 전자구독권이 그렇게 비싸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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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20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떠오른 말은 ‘내 마음은 나비처럼 가벼웠네’예요 그런데 찾아보니 조금 다르더군요 본래 제목은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예요 전자책 저는 아직 한번도 못 봤어요 이것도 보다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르죠 책 잘 안 보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책을 가지고 다니기 싫어해서 읽지 않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아니 책도 그렇군요 저는 어디에서나 안 봐서(못 보는 거군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없으면 아예 안 볼 테지만, 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보겠죠 그런 점이 좋다고 봅니다 잡지는 한달에 한번 나오는 것도 있으니 전자 잡지는 괜찮기도 하겠습니다

그래도 책은 종이로 된 게 좋죠 자연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기도 한데... 이건 다시 살려 쓰기를 잘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환경이 나빠질 수 있을까요 이런 말까지 하다니...

영화에서 다른 사람이 책을 찢는군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버려야 할까 싶기도 하네요 그것은 자신을 만들어온 것이기도 하니 버릴 수 없는 건데... 책으로 그런 것을 보여주다니, 그런 모습을 봤다 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작한다 해도 모든 걸 버려야 하는 건 아니겠죠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겠습니다 책도 그렇겠군요 그게 누군가한테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쓰레기가 된다면 좀 슬프겠습니다 그전에 정리를 하면 괜찮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5-04-20 16:39   좋아요 0 | URL
전자책의 장점은 아무래도 가지고 다니면서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거겠죠. 가방이 무거워서 책을 여러권 담지 못할 때 그래도 태블릿 같은 거 하나 담아놓으면 안심이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위에도 썼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콘텐츠가 너무 부족해요. 특히 전자도서관의 책들은 소설 쪽은 그래도 나쁘지 않은데 다른 분야는 상당히 빈약한 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전자책은 가격을 더 확 낮춰야 한다고 봐요. 구간은 그래도 차이가 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만, 신간의 경우에는 아직도 가격적인 매력이 별로 없죠. 이 가격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면 저는 결국 독서시장의 대세는 전자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위에 썼듯이 그렇다고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요.

영화에서 셰릴의 그런 것도 어떤 상징적인 부분의 하나이겠지요. 물론 말씀하신대로 버린다는 행동을 해도 실제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무엇인가를 버린다는 행동을 본인에게 각인시키는 의미도 되겠지요.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는다...생각해보니 나중에 저 쌓여있는 제 책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아니면 어느 헌책방에 팔아넘겨야 하는 신세가 될지..아니면 그도 아니라면 어딘가에 다 버려야하는 것인지..버리는 것보다 누군가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주는 게 좋겠지요. 과연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아이리시스 2015-04-2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거면 저한테 버려요(애절). 아.. 근데 많지 않은 책인데도 저책들을 다 어쩌나 하긴 합니다. 결혼할 때.. 터전 옮길 때..저는 깔끔하게 소장할것만 하고 살고 싶거든요. 일단은 프로젝터로 영화볼 수 있는 방을 만들거라서 서재로 쓸 방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책도 집에 있긴 있어야 하니, 근데 소설을 주루룩 꽂아두는 건 좀 지양하고 싶고.. 예전에 말한 적 있잖아요, 책을 안 읽는 것처럼 보이면서 다 읽는 사람이고 싶고, 집에 책을 최정예로 소수만 소장하면서도 세상 책 다 읽는 사람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긁적긁적) 음악도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책으로 계간지도 볼 수 있구나..(큰 깨달음) 그러나 저는 태블릿 없습니다.. 안살거야(단호). 요샌 책이 풍년이라, 그거 읽을 시간도 부족해서, ebook을 펼쳐본 게 한참 전이에요. 빨강머리앤 세트랑 매그레 시리즈 세트랑 객주 뭐 그런것들 읽고 있는데. 저도 전자책/종이책 소장 분야가 각기 따로 있는데, 전자책 선택폭이 좁은 게 최대 단점이고, 당연히 가격도 매리트가 없어요. 이번주에 캠핑 가는데 물론 들고갈 그릴 요리/캔맥주/와인/치즈도 잔뜩 쟁여놨지만, 그냥 틈틈이 전자책 볼까 도서관 가서 제일 읽고 싶은 신간을 빌려갈까,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 한 권을 들고갈까 이번주에는 내내 고민 됩니다...(대체 이런 걸 왜 고민하나요?)

그거 알아요? 맥거핀님 신간평가단 적중률 100%............... :)

맥거핀 2015-04-21 23:20   좋아요 0 | URL
으하하 그래요. 이번달에는 두 권 다 맞췄어요. 사실 저 위에 리뷰 쓴 우리 동네 아이들 읽기가 싫어서 질질 끌다가 지쳤어요. 왜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지...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어요.

근데 제 책 아이리시스님한테 다 버리면 아이리시스님 처치 곤란일텐데? 막 쓰잘데기 없고,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은 책만 골라서 버려야겠다(사악). 저도 책들 볼 때마다 늘 의문이 들어요. 아니 읽지도 않을 걸 맨날 왜 가지고 있지 그러면서요. 이사가고 할 때마다 참 이거 곤란할때가 많은데, 그 양은 점점 늘어만 가니 그것 참 문제입니다. 책이 최고의 인테리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잘 정리 되어있을 때 이야기죠. 제 책장은 늘 지저분..합니다. 근데 그거 알아요? 프로젝터로 영화볼 수 있는 방 만들려면 돈 되게 많이 드는거.

그런 방 만드시기로 결심한 분이 태블릿은 어째 안사시는지요? (단호한 물음) 안 보게 될 것 같아도 사면 또 보게 되요. 그러니 사세요, 두 번 사세요(태블릿 업자 아님). 그거 참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공감하는 부분이지요. 여행짐 꾸릴 때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은 이 여행에서 실패하지 않을 책이 어떤 책인지를 선정하는 일이이라는 거. 그렇다고 여러권 담자니 손이 무겁고, 이걸 빼자니 이런저런 이유로 걸리고...그런데 여행갔다 오고나면 전혀 읽지 않은 채로 그대로 들고 오니 그것도 참 미스테리합니다. 여행갈 때는 그냥 재미 없는 책이 제일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있는 책을 들고가면 여행을 즐기는 대신, 책만 보다 오니까요.

2015-04-21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4-22 00:25   좋아요 0 | URL
아.. 사악하네요(😥) 그러니까 그게.. 실용성이 없을 것 같고 또, 프로젝터는 지금 꾸밀게 아니고 불분명한 미래의 일이고 또,, 그냥 막 던진겁니다ㅠㅠ 일단 그방이 커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해요. 돈없고 좁아서 그냥 프로젝터만 벽에 쏘는거 아닌가 모르겠어요ㅎㅎ

진짜 큰맘먹고 외출할때 책 들고가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멍때릴때가 많아요 저는. 여행가면 백발백중 고대로 다시 들고올텐데ㅎㅎㅎㅎㅎㅎ 이걸 알면서 저걸 왜 고민하는지 참 한심해요
ㅠㅠ

맥거핀 2015-04-25 15:39   좋아요 0 | URL
크크크 아이리시스님 한심해요, 한심해. (예전에 저 멍청하다고 놀린 것 복수..)

아이리시스 2015-04-25 15:42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한심이한테 한심이라고 그리 금방 인정하면 듣는 한심이 반발하지말입니다..(쬐려봄)

아이리시스 2015-04-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우리동네아이들은 재미가 없게 생겼지만 재미가 있었으면 하고 기대했었는데 맥거핀님이 재미가 없다고하니 재미없어보여 힝ㅠㅠ 중고서점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게 예전판 우리동네아이들이었는데 그건 글자크기와 글꼴 등 편집이 너무 별로여서 빌려서도 못 읽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 우리동네 아이들에게 대체 뭔일이 있길래 지루한지 모르지만 저는 리뷰를 기대할게요^^

2015-04-22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4-25 15:36   좋아요 0 | URL
일단 말투가 너무 옛날식이라 약간 진도가 좀 안나가요. 중간에 번역이 약간 튀는 듯한 느낌도 있고..맥락이 잘 안 맞는듯한 느낌도 있구요. 그리고 민음사는 일단 판형 크기부터가 저는 영 익숙치가 않아서..그래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가 생각보다는 읽을만해서 좋았습니다.

아이리시스 2015-04-25 15:44   좋아요 0 | URL
어쨌거나 민음사 두권을 평가단으로 읽는건 부담이 될것같아요. 저라면 포기했;; 수고했어요 토닥 궁금했던 책이니까. 류는 이제야 좋다는 평가를 받네요 신기 :)

맥거핀 2015-04-25 15:49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쬐려보다가 토닥하니까 왠지 무섭다...이번에 인문서평단 보니까 막 700쪽짜리 롤랑 바르트 책 읽던데, 이 정도는 참고 읽어야겠죠. 그래도 저도 2권 짜리는 부담되서 싫어요.^^;

아이리시스 2015-04-23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기기는 태블릿인거죠? 제가 태블릿을 본적이..아..예전은 그렇다쳐도 바로 얼마전에 친구가 보여줬었는데 내꺼아닌건 대충보기때문에ㅠㅠ 첨엔 맥거핀님 전자책보는기기(아 요새 이름 잘 기억안나요)도 샀구나 했는데,

맥거핀 2015-04-25 15:38   좋아요 0 | URL
태블릿인데 싸구려입니다. 그래도 저는 태블릿 가지고 뭐를 많이 하는 것 아니니까 인터넷 쓸 수 있고, 동영상 좀 보고, 이북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요새 그렇게 비싸지 않은 태블릿들이 많아요. 해외구매를 하면 더 싸질 수도 있고..제 생각에는 전자책 전용 기기보다 이런 쪽이 나은 것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5-04-25 15:45   좋아요 0 | URL
아 그러면 사고싶지말입니다..지를땐 과감하게ㅎㅎ 근데 말투이상 ;;

맥거핀 2015-04-25 15:50   좋아요 0 | URL
어느 부대에서 나오셨는지 궁금한데 말입니다. 지를 때는 질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