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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 Thirs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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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말 많은 영화 <박쥐>를 이제서야 보았다. 여러 논쟁적이며, 동시에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과 평론가들의 상찬과 혹평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일반 관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촉발시키던 영화, 그리고 네티즌 평점 0점과 10점을 오락가락하는 회오리의 중심에 있는 영화다. 처음에는 다들 왜 이럴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관객들에게, 혹은 평론가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들이 이해가 된다. 이 영화는 한편의 원형이자, 아주 흐릿한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문(碑紋)과도 같은 영화다. 그 비문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한마디로 모호하다. 그들의 '모호필름'이라는 이름처럼.

물론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문이 새겨진 앞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새겨지지 않은 뒷부분에도, 혹은 그 비문이 새겨진 재질에도 살짝 주의를 기울여봐야 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뭐 어찌되었던 간에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는 자신의 몫이며, 자신의 즐거움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몇 줄의 글에 대한 자신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누구들처럼, 그 오독(誤讀)을 누군가에게 강변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여기 하나의 오독을 살짝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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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영화의 제목이 화면 중앙에 나타난다. 박쥐, Thirst. '박쥐'라는 잘 알려진 제목보다, 이 영화의 영문명인 'thirst'에 더 흥미가 가며, 내내 그 제목이 머릿 속을 맴돈다. 목마름이라,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 물론 여기서의 목마름은 여러 다양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 대한 갈망, 항상 굶주려하는 뱀파이어의 운명과도 같은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태주(김옥빈)의 다른 세상,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의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상현(송강호)의 신부로서의 거세되고, 억압된 삶,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그것을 무엇이라고 보건, 목마름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부족한 상태,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은, 일종의 마이너스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목마름을 푸는 행위, 즉 갈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플러스가 되고자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마이너스 상태에서 벗어나 0이 되기를 갈망하는 행위이다.

이 갈증을 푸는 행위는 영화에서 수차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일단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누군가의 피를 빠는 행위도 그러하고, 상현과 태주가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행위도 그러하고, 혹은 서로의 발가락을 빨거나, 젖가슴을 탐하는 행위도 그러하다. 물론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영화의 중간, 흥미로우면서도 상징적인 장면이 눈길을 끈다. 죽은 태주를 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상현이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장면. 상현은 태주의 피를 계속 받아 마심으로써 태주를 죽음에 가깝게 인도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살리고 있다. 반대로 태주는 자신의 피를 잃어가며, 점점 상현의 피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그녀를 더욱 뱀파이어화하여 상현의 피를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즉 상현과 태주는 완벽히 돌고돈다. 상현이 플러스가 되는 순간 그녀는 마이너스가 되며, 동시에 0을 향한 그녀의 갈구가 시작된다. 왜 그는(혹 그녀는) 끝없이 결핍되며, 끝없이 목말라하는가.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 혹은 물질적인 욕망 앞에 한없이 나약하며,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는 늙은 노신부(박인환)의 모습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평생을 사제로 살아온, 모든 것 앞에서 초연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던 이 사내도, 세상을 보기 위해 뱀파이어의 피를 갈망한다. 즉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한다. 예를들어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집을 완전하게 하얗게 칠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하얀색, 완벽하고 순수함에의 욕망. 그러나 태주의 입에서 토해져 하얀 바닥위에 번져 나가던 붉은 색의 피처럼, 완전하게 흰 것이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완전함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해 질 수 있을까. 글쎄. 만약 인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불러야하지 않을까. 신, 혹은 사탄, 어쩌면 뱀파이어.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의 뱀파이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가 흥미롭다. 이 영화의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느낌은 영화속 태주의 말마따나 꽤나 '귀엽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간 다른 영화들에서 그려졌던 창백한 얼굴을 한 나약한 모습의(마늘에도 놀라는), 괴상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도 박쥐로 변하고 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강하고 힘센, 마치 슈퍼맨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쿨하고 강한 모습의 뱀파이어로 말이다. 왠지 이 영화 속의 뱀파이어의 모습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도 쿨하고 멋진 뱀파이어의 모습에 별 고민 없이 여주인공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던가. 영화 속 태주가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며, 도리어 예전보다 훨씬 생기를 되찾는다. 영화 처음 병든 남편(신하균) 옆에서 남편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보이던 다크써클 태주의 모습과 영화 후반부 태주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상현과 태주가 쿨해 보이는 이유는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민을 아예 안한다기 보다는 가장 결정적인 고민을 안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고민 말이다. (생각대로 송에 맞춰) ♬피 먹고 싶으면,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거 받아 마시면 되고, 그도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사람거 먹으면 되고, 그것 마저도 다 떨어지면~, 인터넷으로 모집하면 되고~. 생각대로 꿀꺽♬ 아..얼마나 쿨한가. 그래서 그런가. 왠지 그런 상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던 신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배신이라는 인간의 오만 감정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쿨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고, 벌레로 변신시키고, 나무로 변신시키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가르며 날기도 하고,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상현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감정이 난무하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신화가 연상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들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는 왠지 신화의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신화의 효용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테마는 인간의 불완전함, 신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신과 대결하려 한, 혹은 신을 모방하려 한 인간들은 모두 예외없이 파멸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해지려 하고, 신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려고, 욕망을 향해 목말라한다.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부의 설정이 머리를 스친다. 백인과 아시아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신 남자만 걸리는 병. 반쪽의 존재로서의 인간.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브'라는 치료제를 투여하는 방법뿐이다. 이브? 태초에 불완전한 존재였던 아담도, 이브의 존재로 인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익히 잘 알듯이, 뱀에게 유혹당한 이브는 선악과를 아담과 나누어 먹었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아..이야말로 <박쥐>의 이야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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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야 알겠다. 인간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 신화이건, 창세기이건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 뿌리를 두고 흘러나와 수만가지의 갈래가 되어 우리 옆에서 머무른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여러 다양한 해석들과, 여러 논란들이 생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에게는 아직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전히 머리 속에서 맴돈다.

하나는, 태주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남편(신하균)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그녀에게 계속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강아지처럼 다루는') 라여사(김해숙)는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일까. 신화라는 것에 너무 꽂혀버려서 그렇겠지만, 왠지 이 영화 속 라여사는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연상케한다.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아 그것을 몸짓과 불가해한 언어로써 전달하는 것처럼, 라여사는 마비된 몸 안에서 눈동자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코자 한다. 그리고 이 예언자들은 신화 속에서 대체로 끝까지 살아남아 그가 예언한 세상의 몰락을 그의 두 눈으로 지켜본다. 마치 라여사가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들이다. 이 영화는 카톨릭영화인가, 반카톨릭영화인가. 글쎄. 나로서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나약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가 왜 반카톨릭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하고 나약함으로 죄를 저질렀고,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면, 이 영화는 걸작인가, 아닌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참 모호하다. 모호한 상징과 모호한 알레고리로서 관객을 혼미에 빠뜨리는 이 영화가 과연 '영화적으로' 걸작인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보기의 쾌감, 혹은 영화보기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가. 글쎄. 이 영화가 원형적인 텍스트로서 철학적인 만족감을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영화적으로 훌륭한 것인가. 과연 '영화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이 영화 <박쥐>는 다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쉽게 말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당신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나요? 영화사의 걸작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그 장면들을 보고 싶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일단 지금은 아닙니다. 한 두어달 후에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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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주 세속적으로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장면들과 괴이한 이야기로 관객을 불편함에 빠뜨리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못지않게, 박찬욱 감독들의 영화도 그러한데, 왜 누구의 영화는 한국영화 최저관객 신기록을 향해가고, 누구의 영화는 영화관을 가득 메인 관객들을 어리둥절함에 빠뜨리는가. 김기덕과 박찬욱의 차이는 뭘까. 이것은 단순히 배급력과 홍보의 차이인가. 아니면 영화의 문법적으로, 혹은 내러티브, 혹은 만듦새로서, 이 감독들의 영화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 올해의 새로운 주제. 이 영화를 보러 온 수많은 관객들은 왜 이 영화를 보러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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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5-2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불편한 영화라는 점에서 김감독과 박감독의 영화, 비슷하네요.
그런데도 다르구요. 저도 문득 그게 궁금해지네요.
박쥐, 저도 보고 아직 리뷰 못 쓰고 있어요. 테레즈 라캥,을 읽고
태주와 상현이 라여사를 끔찍히 챙기는 이유를 이해했어요.
감독의 말처럼 그 소설에서 상당한 부분 영감을 얻어 만든 영화더군요.

맥거핀 2009-05-30 00:58   좋아요 0 | URL
음..역시 비밀이 어딘가에 숨어 있군요.
<테레즈 라캥>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실 원작이 있는경우에, 왠지 자꾸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지 않고
원작의 어떤 부산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서, 잘 안보기는 합니다만..;)
박쥐, 나중에 리뷰 꼭 써주세요.^^
 
허수아비들의 땅 - Land of Scarecrow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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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그 몇 분의 장면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한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절뚝거리며(그리고는..) 걸어나가던 케빈 스페이시의 뒷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했던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영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를 들어, <쇼생크 탈출> 같은 이야기는 어떠한가. 더러운 시궁창 속을 기어나와 두 팔을 벌리며 쏟아지는 비를 만끽하는 앤디(팀 로빈스)의 감정이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그 나머지 장면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얘기할 <허수아비들의 땅>에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절대 만나서는 안될 것 같은 이들은 이 마지막에 마주친다. 한 때 남자였으나 지금은 여자로 살고 있는 장지영, 그리고 그가 남자로 살 무렵 필리핀에서 입양했던 로이탄, 그리고 현재 로이탄과 사랑하는 사이이자, 한 때 장지영이 장지석이었을 때, 필리핀에서 결혼하려고 데려왔던 여자 레인. 이들은 마주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 장면은 극적인 파토스로 점철된, 즉 사랑과 복수와 애정과 원망과 동정과 안타까움이 어지러이 얽힌 복잡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사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장면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이 장면에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감돌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속이 빈 허수아비와 같다. 이 비어있는 모든 것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암흑의 동공들만 남은 이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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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풍요와 수확의 상징으로서의 허수아비. 허수아비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새나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가장하여 수확을 앞둔 들녘에 세워놓는 허수아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수아비라는 것은 또 실체가 없는 어떤 것, 속이 비어있는 어떤 것, 껍데기, 죽음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수확이 다 끝난 들판에 기울어지고 망가진 채로 내버려진 허수아비들은 또 얼마나 을씨년스러운가. 그래서 그런 것일까. 넓은 들판에서 이상한 표정의 허수아비 옆에서 죽어가던 공포영화의 주인공 친구들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또 허수아비들은 없었지만, 수확이 끝나 짚단을 세워놓은 밤의 들녘은 <살인의 추억>에서 또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쳐졌던가.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서사의 흐름과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빈 들녘의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후자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이미지들은 상당히 강조되어있다. 왜냐하면 이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오염되고, 망가져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채 검은 때로 얼룩진 이 허수아비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염된 것은 허수아비들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모든 것들은 오염되어 있다. 머리가 둘 달린 개,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인면어), 오염된 검은 흙을 잔뜩 머금은 조개, 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할아버지 등 상징적인 오염으로 인한 변형의 이미지들은 물론이고, 그 나머지 것들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들고 오염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주인공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공들이 가장 오염되고 변형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오염이고 변형이란, 주인공들의 외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지영의 경우에는 외면적인 변형을 먼저 이야기할 수는 있다. 장지영의 몸은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다. 그는 이것이 어렸을 때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성호르몬이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라고 알고(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장지영의 진짜 문제는 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문제는 그 자신 스스로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지, 남성이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즉 정신적인 어떠한 부분이다. 장지영은 본인이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남자라며, 결혼하기 위해 레인을 필리핀에서 데려오는가 하면, 여성이 되고 싶다고, 임신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움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정신적 혼란스러움은 비단 장지영의 문제만은 아니다. 차별대우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로이탄이나, 장지영이 여자인 것을 알고 그에게서 나와 거리를 떠도는 레인 역시,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과 변형이 오로지 그들 자신만의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오염된 주변의 모든 것들에 있다. 이는 물리적인 오염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병들어 있는 사회, 병들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오염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오염되고 망가지는 환경은 우리의 정신도 오염시키고 망가뜨린다. 아내를 구하러 필리핀에 간 사람들이 필리핀의 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이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여자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결혼을 해본 적이 있는가.""병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리적인 가치(몸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계량화하는 이 질문들은 망가진 정신, 병든 마음들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오염된 환경, 병든 사회에서 조금씩 물들며 오염되어 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

그래서 이 마지막은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무리로 느껴진다. 레인이 가져온 돌에는 희망의 싹이 움트지만("이 돌에 꽃이 피면 자신이 희망했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이를 희망적인 마무리로 볼 수 있을까. 이 현실의 지옥도에서(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둘 달린 개,케르베로스가 상징하듯) 이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런지. 마지막에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장지영의 옆에 한 소녀가 다가와 뭐라고 속삭인다. 이 소녀는 혹 장지영의 딸일까. 그녀는 임신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 것일까. 그 소녀는 뭐라고 속삭였을까. 이 마지막은 신비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왠지 살짝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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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가지는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몸이 중성화되어 가는,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있는 장지영(장지석)이 그렇게 된 이유가 어떤 환경적인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질 때,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적소수자들을 다룰 때, 이들이 어떤 오염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 신의 섭리를 벗어난 어떤 비정상적인 것, 혹은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인식될 때에 비롯될 수 있는 위험들이 이 영화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한 번 해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인데, 이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무속(巫俗)의 이미지들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제시되는 두 여인의 성황당 나무 앞에서의 무속적인 춤사위도 그렇고, 등장인물들이 어떤 고민에 빠졌을 때 무속인들을 찾아가는 것들이 그렇다. 왜냐하면 무속이라는 것은 과학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오염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것임을, 그리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오염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의 반대되는 지점으로서의 무속의 설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병든 사회, 병든 환경을 보듬는 하나의 치유계로서 무속이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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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 Breathles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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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똥파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싸가지 없는 캐릭터를 다루는 이 영화가 실은 너무 마음씨 고운 영화라는 것이다. 너무 대책없이 착해서 그 일면성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글쎄.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착하다'라는 말을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생각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착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잘 짜인 영리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여러 다른 영화들에서도 비슷하게 변주되곤 하는 것이다. 가정 내의 지난한 폭력이 또다른 폭력적인 사람들을 낳고, 그 폭력은 대를 이어 전해지며, 결국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TV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같은 프로그램에서 1주일에 한 번씩 틀어대곤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폭력에 물들어가는 가정들과 망가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이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런데 이 영화는 가정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서 말해지는 폭력의 구조는 이중이다. 하나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구조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이다. 그러한 폭력의 구조들은 이중의 나선처럼 서로 꼬이고 얽혀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가정 내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갑자기 들이닥친 상훈(양익준) 일행에게 구타당한다. 상훈 일행은 사채 빚을 받으러 남편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상훈의 대사가 참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 x나게 패는 xx는, 자기는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

이러한 폭력의 계층적인 구조와 점점 더 확대재생산 되는 폭력의 구조, 그리고 가정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이 맞물려 돌아가는 순환의 구조는 영화 <구타유발자들>을 연상시킨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이 한정된 공간을 제시하고 캐릭터들을 그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폭력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 영화 <똥파리>는 그 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폭력의 구조를 드러나게 만든다. 즉 <구타유발자들>이 하나의 실험연구를 연상시킨다면, <똥파리>는 자연스러운 관찰카메라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늘상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실험연구보다는 관찰연구가 훨씬 힘들다. 이 영화가 이런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잘 짜여졌다는 것을, 한 마디로 영리한 영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양익준 감독이 한 인터뷰들에서 보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찍었다."는 식의 말들이 많은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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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 영화가 영리한 부분은 이 영화가 일종의 캐릭터 영화라고 착각할 정도로 캐릭터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비참하고도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 이 영화가 그런 구조들을 차례차례 나열하는 식대로만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지루하고 짜증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을 쉽게 지치게 했을 거라는 말이다. 이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캐릭터의 힘이다. 이 캐릭터들은 중간중간 곳곳에서 튀어나와 영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즉 이 영화가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라고 말해질 때, 이 '에너지'라는 것은 영화의 구조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캐릭터들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들의 비전형성에 있다. 이 영화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상훈부터가 그렇다. 영화의 시작부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길거리에서 심하게 구타하고 있다. 이 때 상훈이 나타나 남자를 때린다. 그러나 폭력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처음에는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던 관객들도 점점 이 장면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캐릭터의 비전형성이 드러나는 것은 이 이후부터이다. 상훈은 남자를 실컷 때린 후, 뒤돌아서서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왜 맞고다녀, 이 xxx야." 같은 대사를 날리면서 말이다. 이런 캐릭터를 봤나. 뭐지. 이 똘끼는. <나쁜 남자>의 조재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똘끼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캐릭터가 불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불안함은 영화에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비전형성이 주는 에너지는 비단 상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상훈과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연희(김꽃비)나, 상훈의 동업자이자, 사장인 사채업자 만식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통의 여고생 이미지나 보통의 사채업자 이미지를 뛰어넘어 비전형성을 창조해낸다.

어떤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캐릭터를 필요로 한다. 전형적인 캐릭터가 그들의 캐릭터의 전형성을 어떻게 극대화하여 보여주는가에 그 이야기의 성패가 달려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막장드라마들이 그렇다. 그런 영화에서 나오는 악역들은 더욱 표독스러워야 하고, 착한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선해야만 한다. 시청자들은 그걸 즐기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에서 표독스럽지 않은 악역이나, 결단력 있는 남자 캐릭터는 얼마나 재미가 없는가. 사람들은 "저건 말도 안돼!"하며 분노하다가도, 금방 "왜 말이 안돼? 드라마잖아."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똥파리>와 같은 이야기에서 전형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순간, 영화의 에너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사회고발물이 되거나 눈물을 욕설로 대치한 신파극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연기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는 전형적인 캐릭터보다 이 영화에서처럼 비전형적인 캐릭터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연기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왠지 이 영화의 상훈이나 연희, 만식, 그리고 환규나 영재 같은 다른 캐릭터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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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영리한 것인지, 그를 뛰어넘어 교묘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는 지나치다 싶게 많이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매우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고, 또 아예 보여주지 않는 단절의 부분이 있다. 이는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상당히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기 전, 상훈의 누나와 조카와 함께 아버지가 플스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버지가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즉 중간에 있어야만 마땅한 어떤 사건(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하는, 또는 상훈과 아버지 간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할 때 조카가 그것을 보게 되는 장면도 있다. 그 장면 이후에 마땅히 뒤따라야 할 조카의 충격, 혹은 상훈과의 어떤 관계들은 잘 보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꽤나 많다. 갑자기 고기집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상훈이 연희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부수는 사건들도 보여지지 않거나 매우 짤막하게 처리된다. 또 남다은 평론가가 <씨네 21>에서 지적한 다음의 부분들도 있다. 길지만 잠깐 인용한다.


연희(김꽃비)는 상훈(양익준)이 건달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건달이 엄마의 포장마차를 때려부순 그런 깡패라는 건 모르고, 상훈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영재가 연희의 동생인 걸 모른다. 상훈의 누나는 상훈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고, 만식의 고깃집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엇보다 연희와 상훈은 연애 비슷한 걸 하기 시작하면서도 각자의 가족사나 상처를 숨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물들의 이런 무지함이 영화적 비극을 배가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영화는 인물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이렇게 인물들을 보호하고 특정의 장면을 생략하는 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본다.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관객에게 영화의 구조보다는 캐릭터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자꾸 캐릭터에 동화되도록, 심정적으로 응원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특정의 장면이나 구조를 숨겨 캐릭터에 집중하게 만든다고 해서, 캐릭터를 응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은 그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상훈은 <그랜 토리노>의 동림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딱 1명 꼽자면, 그게 상훈'일 정도로 무서운 캐릭터지만, 자꾸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여기서의 응원이란 안타까움에 가깝다.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이 상훈에게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그를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그것을 그 다음 장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막는다. 상훈은 조카에게 플스를 사주고, 잘 놀아주는 좋은 삼촌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또 연희와 욕이 실린(?) 농담을 하며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를 구타하고, 주위 사람을 이유없이 때린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 그래, 지금처럼 살아"하고 생각하게 만들다가도, "쟤 갑자기 또 왜 저러니."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안타깝게 만든다. 그리고 이 안타까움은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다. 상훈이 사채업에 손을 씻고, 가장 착하게 행동했을 때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 대사는 상당히 안타깝게 들린다. "왜 우물쭈물해?" 여기서 우물쭈물한다는 것은 물론 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런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를 숨기는 것이 가미될 때 이 착한 캐릭터에 동화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동화와 응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래서 여기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처음에 했던 말에 동의하기가 조금은 의심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너무 대책없이 착한 캐릭터가 나오는 착한 영화인가. 그런가.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하고도 교묘하며, 놀라운 점이다. 착한 영화라고 느끼게 되는 이상한 마법.

하기사, 감독이 이 영화를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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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09-04-28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짤막하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쓸데없이 길어졌음..;

프레이야 2009-04-2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이 영화 망설이고 있는데 볼까요? ㅎㅎ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04-30 01:20   좋아요 0 | URL
보통의 영화들과는 약간 다른 문법으로(눈물을 욕설로, 언어가 아닌 몸으로) 말하는 영화라, 맞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추천합니다.
지금까지의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예요. 제가 느낀 바로는 위에서 말한대로 상당히 영리한 영화이기도 하구요.
 
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그 자체인 글이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영화를 본 후 마음 편하게 몇 개의 리뷰 글들을 읽었다. 리뷰 글들은 다양하나 크게 두 갈래로 갈리는 듯 하다. 하나는 인도의 현실을 묘사한 잘 만든 영화이고, 충분히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하다는 의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하나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평범한 할리우드산 성공스토리에 불과한 이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은 아카데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또 한편으로 각색의 아쉬움을 지적한 글도 있었고, 이야기의 얼개가 잘 짜인 잘 만든 영화에 더 무엇을 논하느냐는 의견도 있다.

글쎄. 읽다보니 이것도 맞는 얘기 같고, 저것도 맞는 얘기 같아서 약간은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몇 가지는 저것은 좀 이상한데..라고 느껴지는 것도 있다. 먼저 각색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원작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와 같이 책(소설)이 원작이고, 그것을 영화화할 경우, 그 영화들이 받는 부당한 공격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책과 영화는 그 매체적 특성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활자의 나머지 공간들을 채워 나가야 하는 소설과, 그 상상력이 하나의 화면으로서 제시된 영화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상상력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단지 영화가 책의 일부로서 거대한 삽화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글쎄. 나로서는 도리어 소설의 빈공간들을 채워넣지 못하고 평이한 재현(재해석이 아니라)으로만 끝나는 영화들에 대해 찬성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또 다른 의견, 과연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을만 한가, 이것은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아마도,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가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열등한 것이라는 시선, 따라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선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서 본다면, 그리고 이 영화가 서구의 영화감독 대니 보일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지적한다면, 그렇게 보이는 몇몇 장면들이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힌두교도들이 회교도들을 습격하여 주인공 자말의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얼마나 오랜 대립이 있어왔는지, 이런 습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어떤 맥락도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들을 습격하는 자들이 힌두교도라는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습격하고, 어머니는 죽고 자말과 그의 형 살림은 내달릴 뿐이다. 이것은 마치 동양에는 이런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되는 장면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타지마할에 방문한 서양관광객을 자말이 멋지게 속여먹는 장면이다. 또 장엄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빨래터를 묘사한 장면도 있다. 왠지 이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것과 그의 반대로서 옥시덴탈리즘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감독은 이 두가지를 혼합함으로써 영화의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극과 극의 시선은 버무려지기 힘든 것이다. 물과 기름을 혼합하면, 그 사이의 층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데에는 작년 작가협회 파업으로 아카데미상이 차분히 지나갔던 것에 대한 반동적인 의미와 아카데미상을 좀 더 세계적인 영화 축제로 만드려는 할리우드의 시선이 혼합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 것들이 의외의 일본 영화 <굿' 바이>에게, 수상이 유력해 보였던 <바시르와 왈츠를>을 제치고 외국어영화상을 안기고,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게 작품상을 수여하는 모험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하고 쓰잘데 없는 음모론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사실 <밀크>, <프로스트 VS 닉슨>은 아직 보지 않았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나 같아도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보다는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작품상을 주었을 것 같다. <벤자민..>은 기대보다는 훨씬 평이한 스토리에 너무나도 할리우드 산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에서, <더 리더>는 얼마전 이스라엘의 침공이 문제가 되었던 시점에서 또다시 제노사이드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슬럼독..>을 선택하는 것이 신선하고도, 안전한 선택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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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퀴즈쇼가 하나의 액자로서 기능하고, 그 안에서 자말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왔다하며 전개되는 이 영화는 자칫 잘못 만들었으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영화의 줄기를 잡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말의 이야기와 퀴즈쇼를 버무려내는 솜씨가 좋다.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편집상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러나 잘 만들었다고 해서, 이야기가 매끄럽다고 해서 좋은 영화인가라는 물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 도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이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된 두 형제가 한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를 동생은 사랑하게 되고, 형은 조직으로 들어가고, 동생은 그 소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하필 소녀가 그 조직 보스의 정부가 되고, 개과천선한 형은 소녀를 꺼내주고 장렬한 죽음을 맞고, 동생은 소녀와 천년만년 잘 산다는 그런 이야기. 뭐 이 스토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말대로 아무리 쌍팔년도 스토리라도 잘 만들어졌다면 아카데미 작품상 그 이상도 얼마든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뭇 신파조의 스토리를 신파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노련한 점이다. 바로 그 이야기를 둘러싼 퀴즈쇼. 이것이 하나의 액자가 되고, 거대한 맥거핀이 되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나도 이 때까지는 영화를 즐기며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나 이 맥거핀은 점점 커져 급기야는 퀴즈쇼와 자말의 이야기는 하나로 결합되며, 급기야는 퀴즈쇼가 자말의 이야기를 삼키려 든다. 여기서부터 조금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사회자가 퀴즈에 개입하려 든 순간부터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 자신의 예전의 경험을 토대로 문제를 맞춰나가던 자말에게 경험이란 사라져 버렸다(즉, 경험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말은 사회자와 심리게임을 하며 한 문제를 찍어서 맞추고는 마지막 문제도 찍어서 맞춘다. 그리고 관객이 잊고 있었던 처음 문제의 해답에 대한 자막이 마지막에 제시된다. 자말이 이 모든 문제를 맞추고 우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It is written' 운명이었다. 운명이었다? 운명이었다라니. 결국 그의 운이라는 것인가.

나는 물론 모든 퀴즈 프로그램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더 많이 맞출 확률이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확률의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미미하다고 본다. 아무리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모든 분야의 모든 문제의 해답을 다 알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이라도 그가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면, 그는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럼 많이 아는 분야가 출제되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 하지만 그것 또한 운이다. 퀴즈는 어떤 의미에서는 로또와 비슷하다. 자신이 선택한 번호가 선택될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끔 로또 번호를 분석한다 어쩐다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이 로또 번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로또의 우연성과 불규칙성을 믿고 있지 않음을, 거기에 어떤 무언가가 개입되고 있는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믿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면 로또의 우연성을 100% 믿는다. 그래서 가끔 로또를 산다. 나의 운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리고 가끔 퀴즈 프로그램도 열심히 본다. 나의 운을 가늠해보기 위해.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 내내 자말이 이 해답을 맞추게 되었던 것이 그의 삶 때문이었다고 항변하고는 마지막에 슬그머니 사실은 운이 좋아서..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야기가 조금 딴 길로 샜지만,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 영화가 퀴즈의 해답으로서 제시한 이 마지막 메시지에 있다. 자말이 백만장자가 된 것이 그의 운명, 그의 운이라니. 그렇다면 그의 형 살림이 총을 맞아 죽어간 것도 그의 운 때문이고, 백만장자가 된 자말에 환호하면서도 흙길을 맨발로 달리고 있는 가난한 인도의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그들이 단지 운이 없기 때문인가. 이것에는 정말 동의하기 힘들다. 자말은 마지막에 이 문제들을 틀렸어야 했다. 왜? 그는 이 해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뭐 돈 다 잃으면 어떤가. 그의 곁에는 라티카가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마지막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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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2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가 생각나는 영화였어요.
지혜의 힘을 빌려 우연과 맞서는 인간의 운명을 시뮬레이션한 퀴즈쇼..
우리는 어딜 가나 똑 같고 세월이 흘러도 마찬가지이고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저 신이 다 짜놓은 각본일까요..
늘 좋은 리뷰 잘 읽고갑니다.

맥거핀 2009-04-26 00:46   좋아요 0 | URL
글쎄요. 모두 신이 다 짜놓은 각본이라고 한다면 사는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운이나, 정해진 운명같은 것은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조금은 맘에 안들은 건지도 모르지요.
끌끌...늘 어렵습니다.
 
도쿄 소나타 - Tokyo Sonat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도플갱어>와 <강령>, <주온>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로>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도쿄 소나타>는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공포물들은 귀신과 악령들이 출몰할 것 같은 제목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런 귀신이나 악령보다는 다른 어떤 것들이 더욱 큰 공포를 주곤 했다. 그 다른 어떤 것들이 무엇이냐고? 글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들, 보이지 않으나 저 어둠 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내 주위에 머물 것들. 여러가지 이름을 가져다가 붙일 수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자른다면, 그건 희망 없음의 공포였다.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무서운 것, 도저히 여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득찬 것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런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려내는 가족 드라마라고 그랬다.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나는 속기를 기대하며 갔다. 그리고 속았다.

이 영화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무서웠다. 물론 이 영화에는 귀신이 나오지도, 도플갱어가 나오지도,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없는 무엇도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절망들은 우리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공포감을 준다. 영화의 아버지(카가와 데루유키)나 어머니(코이즈미 교코)는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 앞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이거나, 건널 수 없는 암흑의 망망대해이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reset 버튼을 누를 수 없다. 그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한다. 이 절망은 정말 무섭다.

이 절망적인 마지막 장면 뒤에 마치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더 추가된다. 몇년이 흘렀다는 자막이 스치고 지나간 후, 부모는 막내아들 켄지의 음악중학교 입학시험장에 앉아있다.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부모는 켄지의 손을 잡고 나온다. 이것을 희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모호하다. 실제 이들의 몇년 후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이는 아버지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서 보는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속과 같은 희뿌연 화면 속에서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의 제목부터가 미심쩍다. 드뷔시의 <달빛>이라. 달빛이 의미하는 환상성과 기이함. 어쩌면 이는 소나타 뒤에 이어지는 환상의 즉흥연주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이 그다지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바로 전의 장면이, 다시 모인 가족들의 식사장면이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쓰러졌던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고, 납치범과 같이 바다로 떠났던 어머니는 홀연히 돌아와 막내아들 켄지와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 식탁에는 참을 수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단지 식구들의 밥먹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릴 뿐이다. 그들의 지금까지의 식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반복. 이 식탁 위에는 그간 항상 정적만이 흘렀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두들 조용히 밥을 먹고, "잘 먹었습니다."를 말하고 일어나는 동일한 형식. 이 식탁에는 대화가 필요없었다. 아니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은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 두 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부모들에게 이야기해보아야 그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변하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의 식사로부터의 시작 - 중간의 여러 사건들 - 그리고 다시 식탁에서의 식사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왠지 제시부 - 전개부 - (제시부의 비슷한 반복인) 재현부라는 소나타 형식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이러한 식탁에서의 대화의 단절은 세대간의 단절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한편으로는 미래가 변하지 않기를 은연중에 갈망하는 기성세대와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자식세대와의 단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자식세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란 또 얼마나 얄팍해지기 쉬운 것인가.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때문에 미군에 들어가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것이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큰아들의 논리는 그 미군이 어느 중동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여지없이 깨진다. 이러한 세대간의 단절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큰 무리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와 특정의 어떤 것만 잘하면 된다고 믿는 자식세대간의 단절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간 아버지는 면접관에게 시켜만 주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어떤 특정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가 중요하지,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은 의미없다고 그를 조롱한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이 마지막이 더욱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절망한 아버지가 음악영재인(즉 '음악'이라는 특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라.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또다른 단절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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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며칠전 2006년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우연히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식탁 장면을 보면서 자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가족의 식탁, 이 실패자들의 집합이 벌이는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음식 취향만큼이나 다른 그들 각자의 생각들이 벌이는 충돌의 하모니와 유쾌하고도 아이러니한 봉합. <도쿄 소나타>와 <미스 리틀 선샤인>의 식탁 장면은 이들 영화가 달려가는 마지막 결말만큼이나 매우 다르다. 그러고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족간의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대화를 가장한 충돌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 이 가족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자신과 친밀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나인 동시에, 나의 숨기고 싶은 모든 치부를 알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상처들은 종종 날카로운 말이 되어 식탁위를 가로질러와 우리의 심장에 박히지만, 때로는 침묵의 공기로 변해 조용히 식탁 위에 내리깔린다. 날카로운 말은 상처를 주고 지나갈 뿐이지만, 침묵의 공기는 중금속처럼 우리의 심장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리깔린 공기 속에서 메인 심장 위로 밥을 밀어넣는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기어(gear)가 고장난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가족.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족 중에 몇몇이 내려 차를 밀어 일정 속도에 이르게 한 후 차에 올라타야 한다. 매번 약간 위태위태하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그래도 모든 구성원들을 멋지게 태워 출발한다. 특히 멋진 주제곡 'The Winner Is'가 울려퍼지며, 가족들이 뛰어 달려와 차를 타고가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즐겁고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가족이라면,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무리 열없는 실패자들일지라도 모두 남김없이 태우고 출발해야만 하는 거겠지.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떼놓고 가려고 해도, 어딘가에 버리고 가고 싶어도 어느 틈에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아있고야 마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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