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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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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번 서평단 도서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고, 이번에 연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읽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오츠의 <그들>이 1937년의 디트로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그보다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1889년의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개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니 두 개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또한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이 마치 어떤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힌다는 점인데, 오츠의 <그들>이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친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세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 사회 초창기의 여러 단면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19세기 중반, 철도교통의 발달은 대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고(이 소설에서도 철도교통이 중요한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데, 캐리를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이끈 것은 철도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드루에를 만난다. 또한 허스트우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차 운전이었다.), 대도시에는 이른바 '부의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의 미국이 부의 대물림이 어느 정도 그 고착화의 양상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시스터 캐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의 미국은 조금 더 불확실한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순식간에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도, 혹은 몰락의 길도 들어설 수도 있는 가능성 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성실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성공과 몰락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날 것의 생생한 사회학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서사가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은 가난한 캐리와 부유한 드루에 혹은 허스트우드의 대비이다. 여러 변변치 않은 구직처를 전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상과 욕망을 놓지 못하는 캐리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며, 모든 좋은 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일가의 모습은 효과적인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 연극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캐리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허스트우드의 모습은 소설 초반부의 대비보다 훨씬 극적이며, 독자에게 보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물론 드라이저는 이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 세계를 가능한한 세밀하게 교차하며 묘사하는 것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리가 잠깐 들어가 일하게 되는 공장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비교되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심지어 허영마저도 넘쳐나는 허스트우드 가족 풍경의 대비, 또는 후반부에서 허스트우드가 전차 파업의 대체운전수로 잠깐 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과 캐리가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는 모습의 극적인 교차. "이 배우들한테는 원래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지만 허스트우드가 전차 차고의 윗방에서 잠을 자던 바로 그날 밤, 그날따라 유난히 흥에 취한 주연 희극배우가 관객들을 좀 웃기고 싶었는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p.555~556)" 이 묘사들은 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세밀한 분석보고서로의 기능을 한다. 

 

(일종의 분석보고서로 위에 얘기한 오츠의 소설 <그들>과 이 소설 <시스터 캐리>를 연결지어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허스트우드의 몰락. 어떠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허스트우드는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여 빈민, 혹은 그 이하가 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갑자기 스타로 부상하는 캐리가 있다. 캐리의 성공 - 그녀의 성공은 재능 이상의 어떤 기묘한 무엇인가가 작동한다 - 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허스트우드의 몰락도 아이러니하다. 이 가파른 상승과 하강. 반면 <그들>에서 로레타 가족에게는 가파른 상승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파른 하강도 없다. 로레타는 복지시설의 사람들에게 불평을 퍼붓지만, 그녀가 그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복지정책의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 같다. 전차 파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군중의 기묘한 연대와 분노. 반면 현대 사회의 군중들은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혹은 분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무튼 이 전차 파업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드라이저의 필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일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배경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엄격한 도덕률이 남아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과 앞에서 예로 든 <그들>과 같이 작가가 여러 장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현대적인 문학과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드라이저 작가 본인의 목소리다.   

 

이런 분위기는 금세, 쉽게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저택, 화려한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 레스토랑, 온갖 술집들 사이를 걷고, 꽃과 비단과 와인의 향기를 맡고, 사치스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도전적인 창끝의 빛처럼 뿜어져나오는 시선을 느끼고,...(중략) 세상이 이런 것들에 매혹되고 인간의 마음이 이를 꼭 도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왕국으로 보는 한, 이것은 위대함의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p.383)

 

그 모든 향락이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캐리의 목소리도, 허스트우드의 목소리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는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중간중간 이렇게 서사나 묘사가 불현듯 멈추고, 작가의 날 것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이것은 <그들>과 같은 소설의 어떤 트릭이나 장치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들>과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보다 더 다의적,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에서는 일종의 중화제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중간중간 이루어지는 작가의 개입은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이 소설을, 당시 독자들이 읽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들 문제 있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읽으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작가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하나는 이 소설에서 과거의 소설들과 다른 보다 현대적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욕망의 화신(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이 서사를 추동해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캐리가 다른 과거의 인물들과 다른 점은 (뒤의 작품 해설에서 잠깐 언급되듯이) 그녀는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좇는 꿈은 부인가, 명예인가, 인기인가, 혹은 사랑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캐리는 이 소설에서 흔히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에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p.652)" 그녀는 행복을 갈망하지만, 과연 무엇을 채워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욕망하는 것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제 앞으로 많은 현대소설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게 될,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 그런 인간형의 탄생, 아니 어쩌면 현대사회 인간들의 특질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의 등장을 여기에서 목도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는 사람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무엇을 좇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좇는다'는 사실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더 사랑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도,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다. <로마의 휴일>, <벤허> 등을 만들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 의해 1951년 <캐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캐리 역은 제니퍼 존스가 맡았는데,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으려들고, 그것에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을 때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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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1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1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토리냥 2016-04-02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터 캐리에서 현대적 인물로 그려지는 캐릭터는 캐리 하나뿐인 것 같아요.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은 그 시대적인 인물들로 틀에 박힌 전형성을 띠고 있으니까요.

욕망의 화신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캐리랑 잘 어울려요ㅎㅎ

맥거핀 2016-04-04 01:30   좋아요 0 | URL
캐리가 주인공이니까 더 그렇겠죠.^^ 남자들이 조금 단순하기는 한데..뭐 사실 어떻게 보면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현재의 남자들이 소설 속에 그려진 남자들하고 별로 달라진 건 없는듯...

한주의 시작이군요. 좋은 한 주 보내세요.
 

지금막 알라딘 부천점에서 찍은 사진.
누군가가 방금 팔고 간 오체불만족.
행동하는 알라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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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3-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오체만족의 삶이라고 누가 댓달았길래 엄청 웃었습니다만 ㅎㅎㅎ

책한엄마 2016-03-25 18:10   좋아요 0 | URL
오체 full만족이었다고 하더군요.ㅎ

맥거핀 2016-03-25 19:03   좋아요 2 | URL
며칠 사이에 아주 기상천외한 드립들이 난무하더군요. ㅎ 그 중에 몇 개는 그분의 장애와 연결지은거라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지만...

기억의집 2016-03-25 19:10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오체대만족이라고 쓴 댓글보고 한참 웃었어요. 동시에 사람 참 바보 만들기 쉽구나 하는 생각도..

cyrus 2016-03-2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를 부탁해>가 심심해하지 않겠어요. ㅎㅎㅎ

맥거핀 2016-03-25 19:05   좋아요 0 | URL
아마 곧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이책들이 꽤 늘어나지 않겠습니까..나중에는 안받아줄지도...근데 지금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과연 사실 분이 있을지..

기억의집 2016-03-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자기계발서책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여서....

맥거핀 2016-03-26 01:0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나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akardo 2016-03-25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저는 애초에 저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았으니 이 사태가 참으로 흥미로울 뿐입니다. 산 분들은 속이 좀 쓰리실 듯.

맥거핀 2016-03-26 01:22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akardo님. 근데 책을 쓸 때의 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100% 알 수 없으니까요. 그 책으로 인해 읽은 누군가가 좋은 영향을 당시에 받았다면 그것은 그렇게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할 수 만은 없겠죠.^^ 아무튼 대체로 책을 읽으신 분들은 꺼림칙만 면이 더 있으실 듯 합니다.

희선 2016-03-2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뭔가 사기를 쳤나 하는, 팔 다리가 없는 걸 본 적 있으니 그건 아닌가보다 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몰랐군요 안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아봤어요 무슨 일인지... 왜 그랬을까 싶네요 사람이 잘 되다보면 뭔가 잃어버리는지도 모르겠어요(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잊어버린다고 해야 할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던데 그러다니, 지금까지 좋게 생각한 사람은 배신당한 느낌이 들겠습니다 예전에 책 한권 보고 대단하구나 했는데... 그때는 그게 진짜였을 텐데, 그것까지 안 좋게 되었네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 하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6-03-26 01:23   좋아요 1 | URL
아무튼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이번 사건만 보아도), 알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장애와 연관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장애와는 또 별개로 보고 싶습니다. 장애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쌓아온 모든 일들이 또 이번 일들로 다 폄하되는 것도 그렇게 옳지는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이번에 저지른 일은 분명히 나쁜 일이지만요.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애 애쓰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도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게지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영화천국> 3/4월호에 '영화여행을 시작하는 시네필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쓴 몇 편의 글이 실렸다. 100편의 영화, 영화사(史)의 순간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저자 구회영(김홍준 감독의 필명)과의 대담 등등 흥미로운 글들이 많은데, 그중 '10권의 책'에 대한 글이 있어, 나중에라도 찾아보기 쉽게 여기에 목록과 소개의 일부를 옮겨둔다. 모두 한글로 출판된 책이다. 개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지만,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볼 수는 있겠지.

 

먼저 이 책들은 '바로 시작하면 좋은 책'으로 추천한 책들이다.

 

 

트뤼포,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 을유문화사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치 소설처럼 읽기에 딱 좋은 수준의 독서라고.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키, 민음인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할 것.

 

 

쇼트, 엠마뉴엘 시에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시점, 조엘 마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몽타주, 뱅상 피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출간된 일종의 가이드 형식의 책들.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에 부담없는 책들이다.

 


위대한 영화, 로저 에버트, 을유문화사

화장실에 꽂아두고 하루에 세 번(혹은 좀 더 자주) 틈틈이 그저 손 가는 대로 제목이 잡히는 대로 두서없이 읽으라고. (아..근데 큰 일을 하루에 세번이나 보지는...이라는 쓸데없이 더러운 첨언.)

 













세계영화사, 데이비드 보드웰 & 크리스틴 톰슨, 시각과 언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아서 볼 책.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의 난점이 있는데, 하나는 이 책이 3권으로 분절되어 있고, 게다가 절판이라는 점...그렇다면?

 

 

세계 영화 대사전, 제프리 노웰 스미스 책임 편집, 미메시스

위의 책의 대안. 정성일의 충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읽지 말 것. 당신이 관심 있는 영화들의 시대를 중심으로 읽을 것.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강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당신이 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라. 할 수만 있다면 그 글을 길게,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밀고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해보라고 정성일은 충고한다. 이 책은 일기처럼 쓰여진 영화비평이라고...(그러나 '나'는 이 글이 일기처럼..이라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를 하기가..)

 

 

필름메이커의 눈, 구스타보 메르카도, 비즈앤비즈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도 일종의 다른 방법의 독서. 이 책은 거기에 매뉴얼 같은 역할을 할 것.

 

 

그리고 아래의 책들은 '지금은 독서를 말리고 싶은 책'.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지금은'에 있다.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시네마 2 : 시간-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당신이 철학 프로그램에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목과 영화감독 이름에 질릴 것이다. 반대로 시네필들은 첫 장부터 베르그송에 관한 긴 주석으로 진이 빠질 것이다." 두 권의 책의 번역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도 이유라고.

그러니까 먼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를 읽을 것.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길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과 나치 시대의 파시즘 영향들을 바라보면서 영화와 대중 관객의 역할을 '기대하는' 미래의 영화를 위한 '서설(序說)'"이나 그 전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 먼저 설명을 들을 것.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시각과 언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슬라보예 지젝, 한나래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울력

"이 책들은 영화책인 척 하면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용어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비, 도서출판b)를 먼저 읽으라고. 자신(정성일)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쉽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이모션북스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며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지"나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하.

 

 

덧.

물론,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일 테다. 어제 조금 지나간 영화, 오승욱의 <무뢰한>을 보았다. <무뢰한>은 몇 가지 것들(예를 들어 어떤 허세들 같은 것, 혹은 불친절한 생략들)을 견뎌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남자감독이 만들어내는 여성 캐릭터' 김혜경(전도연)인데, 영화 속에서 끝내 바닥에 이르르는, 그래서 그 바닥으로 내려보내지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여성캐릭터가 영화가 끝난 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화의 중심축은 정재곤(김남길)에게 끝까지 머물러 있는데도. 어스름에서 시작해서 어스름으로 끝나는 영화.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개의 어스름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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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7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ell-yuran 2018-02-06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뢰한 정말 좋은 영화죠!

맥거핀 2018-02-19 15:23   좋아요 0 | URL
아직도 마지막 그 김남길의 쓴웃음이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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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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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읽게 되는 이야기. 더 읽어내려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의 삶을 누군가가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사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나의 생각과 주인공의 생각이 얽혀들어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운, 종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실제이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거짓인 이야기. 고통스러우면서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독서. 나에게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로레타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낳은 줄스, 모린, 베티 등이 성인이 되던 시기까지를 종(縱)으로 훑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결코 한 가지의 사건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건을 횡으로 펼쳐내, 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삶을,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계속 지치지 않고 꾸준히 따라가는, 어떻게보면 사회학에서 다루는 종적 연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츠는 생생한 심리 묘사와 사회 분석을 융합한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제도를 계속 탐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큐로도 제작되었던, 사당동의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추적해 한국 사회 빈곤의 종적 영속성을 살펴보게 했던 사회학자 조은의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로레타나 줄스, 모린 등등의 인물에 대한 특정적인 묘사 못지 않게 중요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배경과 시기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인물은 특정의 '누구'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상들의 어떤 특징들이 혼합된 '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소설 뒤 작가 발문의 한 대목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들>의 등장인물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을 합친 '혼합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p.716)

 

그렇다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어떤 시대인가. 소설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 로레타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얼떨결에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하던 1937년 8월의 어느날에서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인종차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동이 벌어지던 1967년의 디트로이트까지를 다루고 있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1967년 7월 23일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폭동이었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건이 <허트 로커>를 만들었던 캐서린 비글로우에 의해 영화화되어 2017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나중에 한 번쯤 챙겨보셔도...) 1937년에는 1929년의 대공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급격하게 성장의 길에 들어서며,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이 낳은 부작용들은 많았다. 빈부격차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으며, 전후 매카시즘, 인종문제 등으로 사회의식 면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뎠다. 도시빈민은 급증하였으며, 도시의 슬럼화된 곳은 점점 늘어났으며, 낮은 의식수준 및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빈곤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이 살던 1950년대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곳이었다. 자동차 산업 등으로 도시의 일부는 발달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로레타 가족이 살던 곳과 같은 슬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로레타 가족은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도시빈민, 백인 하층민 계급. 그들 위에는 안정된 직장과 직업을 가진 백인 상층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래에는(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상대하기를 꺼리고, 무시하는 흑인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그들 도시빈민 백인들과 흑인들의 관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주로 '그들', 그러니까 로레타나 모린이나 줄스는 흑인들을 피한다. 아니 피한다기 보다는 그들에게는 이들 흑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위'를 쳐다보기도 바빴으니까.), 반면 백인 상층민들과의 관계는 여러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줄스가 네이든, 혹은 페이와 버나드(이들은 발전하는, 사실 미쳐 돌아가는 미국 경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벌이는 일들, 혹은 모린과 유부남 짐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꽤 재미있는 점들이 있다.

 

(사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집요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가지로 뭉뚱그려도 되나 싶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양가(兩價)적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줄스나 모린이 상층민 백인들에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보면 그들의 감정은 극도로 양가적이다. 그들은 상층민들을,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열망하지만, 그것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반면 이들의 반대편에서 안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로레타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들을 대비하여 묘사하는 방식은 특징적인데, 줄스나 모린이 특히 이들이 사는 집을 겉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유리 상자안의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 보석을 바라보며 그것을 열망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면 유리가 깨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반대편에서도, 그러니까 상층민 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이든이 줄스에게 대하는 태도, 혹은 짐이 모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특히 짐이 모린에게 접근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데,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로레타, 줄스, 모린 이외의 인물로 시점이 이동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허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어떤 모험과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접근을 열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접근, 그리고 그들과 삶이 연결되어 추락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서로서로에게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양가적 양상을 띤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기꺼이 서로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서로를 증오한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모린)는 앉는다. 그리고 거칠게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자신의 다른 자아가 인도에 서 있는 곳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갈라져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러니까 그 다른 자아는 점점 생생하고 눈부시게 변해서 인도에 서 있다. 그녀가 고개를 고통스러운 각도로 돌려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린을 바라본다. 죄책감과 야성이 뒤섞인 얼굴이다. (p.300)

 

이 죄책감과 야성. 그렇게 그들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죄책감과 야성, 혹은 열망과 두려움, 상승의 열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 혹은 백인 상층민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줄스와 모린이 이 추락의 공포를 안은 불안한 상승, 혹은 불안한 상승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마지막 디트로이트의 대규모 흑인 폭동(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흑인' 폭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상층부의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폭동으로 상징되는 흑인들과의 경계선이 더 뚜렷해지면서 상층부의 백인 사회로 진입할 실마리가 가느다랗게 생겨났다. 절도와 폭행, 포주,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 줄스는 모트, 그러니까 빈곤 퇴치 행동 연합 회장이자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와의 관계가 어느 틈에 만들어졌고, 모린은 야간대학에서 오츠의 수업(결국 <그들>이라는 이 소설은 모린이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릭이 있지만...)을 듣다가 짐까지 만났다. 로레타가 상층부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짧게 '체험'하는 것도 이 때였다.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 '조이스 캐롤 오츠'.(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어떤 사회학의 종적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을 상층부로 연결시켜 준 가느다란 끈. 여기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두 번째 장치가 있다. (처음 장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했으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물론 길게 얘기할 능력도 못되니 짧게 마무리짓겠다. 헤르메스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신다고 예고하셨으니 그 글을 읽으시는 게...)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 혹은 모린의 독백. 조이스 캐롤 오츠는 소설 앞에 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며, 거의 대부분을 실제 '모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실제 소설 중간에는 모린이 작가,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간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도 두 편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모린은 편지에서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 외곽의 집에서 사는 저. 농장 주택 또는 식민지 양식의 주택인 이 집의 뒤편에는 울타리가 있고,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마 바지를 입고 있을 겁니다. 아기는 아기 방의 요람에 있고, 창문에는 하얗고 얇은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함께 쓰는 침실, 거실 창문으로는 잔디밭과 길과 길 건너편의 집이 보입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삶을 아프도록 갈망합니다! 제 눈이 아프도록 갈망합니다.(p.462)" 모린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린은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합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심지어 그 남자들도, 펄롱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하고, 그것만이 제게 유일한 확신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선생님에 대한 미움,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고, 남편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심지어 요즘은 가끔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선생님, 지식을 지닌 선생님. 저는 이미 한평생을 살고 저 자신을 탈탈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그 무엇도 얻지 못했는데 말입니다.(p.469)"

 

이에는 앞에서 말한 양가적 감정이 물론 들어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 왜 이것이 편지의 형태로, 그러니까 모린의 기억을 바꾼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작가에게 보내는 직접적인 편지의 형태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작가의 위치에 이것을 읽는 독자를 바꿔서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안한 방에서,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었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 책 <그들>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그들의 삶을 읽는 것. 이것의 의미를 여기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슨 대통령이나 롬니 주지사(오바마랑 붙었던 그 '롬니'의 아버지다)나, 로버트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러나 안전한 곳에 위치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혹은 모트, 아니 당신의 위치를 여기에 겹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여기서 다시 질문.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모두 만들어낸 트릭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모린의 편지도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기에 희미한 의심을 보낸다. 이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고한 방어막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편안한 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자신을 보고 있는 흐뭇한 이 또다른 자신.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막 말이다. 이 편지들은 어쩌면 그 견고한 방어막의 일부로서 다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책 속 어느 곳에도 사실 진정한 '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물론 영화에 대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들>이라는 책을, 이 긴 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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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3-09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저러한 일들과 별개로)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더 빨리 읽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ㅠㅠ

2016-03-12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3-14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맥거핀님이 언제 리뷰썼지?222

맥거핀 2016-03-14 19:57   좋아요 0 | URL
리뷰 더 빨리 써야하는데, 너무 늦어서 몰래 올린 겁니다. ㅎ

아이리시스 2016-03-15 11:41   좋아요 0 | URL
몰래.. 이렇게 잘쓴 걸 왜 몰래.. 근데 왜 맥거핀님글 계속 놓치지..(운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아침에 조선일보 기사를 잠깐 봤다. 평소같으면 지나칠 신문이지만, 책에 관계된 기사라 잠깐 눈길이 갔다. '한국인의 모순...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 문학상 원해"' (제목부터가 조선일보스럽다.) 지하철에서 인쇄매체를 들고 있는 사람이 (토익책, 전공서적, 신문 등등 합쳐서) 수백명 중에 12명 뿐이라는 이야기(왜곡과 과장이 심한 조선일보지만, 내 경험상 딱히 부인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성인의 연간독서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만 해도 독서율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 특히 요즘에 들어서는 책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어디를 이동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책 한 권이라도 가방에 들어있어야 안심이 되는 편이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그 안심을 직접 꺼내 확인해보는 일이 드물다. 대신 반쯤 홀린 듯한 눈으로 멍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새로나온 기사가 없는지 뒤적거리고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계속 놀랄만한 이야기들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예를 들어 2월 17일자 중앙일보 뉴스 '박 대통령 "모두 물에 빠뜨려놓고 꼭 살려내야할 규제만 살리도록 전면 재검토"' (오마이갓. 만약 9.11후 미대통령이 "건물을 무너뜨려" 어쩌구 하는 발언을 했으면 미국에서는 어땠을까. 아무래도 그분은 생각보다 교묘한 것 같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이 정부의 기본 전략은 아무래도 '쓰레기에다 더 큰 쓰레기를 끼얹어 예전 쓰레기를 잊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거기 낚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몰아닥치는 쓰레기들에 정신이 팔려 가방 속의 안심을, 혹은 의식을 잃어가는 중은 아닐까.

 

 

책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책에 대한 욕심은 줄지 않아서, 쌓아놓은 책들의 탑은 점점 높아만가고, 도무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서평단 도서를 두 권 또 추가하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다만, 가까운 세계에 조금 더 발을 디디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고 싶다.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이야기들은 거기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데, 혹은 다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카인>과 <그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또 너무 가까운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책들은 영 당기지가 않으니...나는 또 여전히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미적미적거리고 있나보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문학동네

 

아무래도 윤대녕의 소설을 첫등에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윤대녕의 소설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전 어느 지방 소도시에 있을 때 윤대녕의 신작을 사러 돌아다니던 일이 떠오르는데(인터넷서점의 당일배송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고릿적 시절 얘기다), 온 시내를 다 돌았음에도 결국 책을 구하지 못하고, 대신 윤대녕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쓸쓸한 모양의 도서관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 곳에 갇혀있었던 것 같은 사서에게 윤대녕의 예전 소설을 빌려 거기에 만족해야 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윤대녕의 이 책을 읽으면 그 때의 책을 구하러 다니던 열정이 되살아날까.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창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책 소개를 보니 흥미가 생겨서 골랐다. (책 소개로 미루어보건대) 윤대녕의 키워드가 '쓸쓸함'이라면 아마도 이 작가의 키워드는 '예민함'인 것 같다. 하긴,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말은 지극히 예민한,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고, 예민함이란 소설가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길, 김원일, 문학과지성사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어떠한 것은 계속 남아있다.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긴 노작가가 소구하는 아직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풍경. 그 풍경 속에 조용히 들어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 모신 하미드, 문학수첩

 

이 책은 전적으로 작가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고 받았던 강렬한 인상에서 고르게 되었다. 책 소개를 보니 이야기를 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언뜻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 카트린 카뮈, 문학동네

 

휘성이 부릅니다.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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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3-0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눔의 세계를 넣었다가.. 소설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려요. 그리고 떠오르는 과 윤대녕 두 권이 저랑 겹치네요. 화이팅 ~~

맥거핀 2016-03-04 16:10   좋아요 0 | URL
네..저도 guiness님 페이퍼봤어요. 떠오르는...은 사실 guiness님 페이퍼에서 처음보고 고르게 된 책입니다.^^ 나눔의 세계는 책분류를 보니 가능할 것 같아서 넣었어요. 물론 안될 것 같지만.

달걀부인 2016-03-0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서재에서 놀다보면, 나란 인간은 더럽게 책일끼에 게으르군, 생각하다 한발만 그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상상불가능한 상태들을 보게 되곤해요. ㅜ ㅜ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않는 사람들..그러니까 인문학서적 아니라도 계발서든, 레이디경향이든 아무런 읽는 행위를 하지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자영스레 주어지는 정보들은 또 너무많아 그런 정보들이 지식이겠거니 해서 뭘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히려 그 아집과 독선이 책을 통해 깊이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경우...암튼 알래딘서재안과밖이 때때론 천국과 지옥(소통의 문제에 있어서는)으로 느껴지네요. 글 잘 읽었어요.

맥거핀 2016-03-04 16: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달걀부인님. 저도요. 작년말에 알라딘에서 통계 같은 것 보여준적 있잖아요. 거기에 뭐 지역에서 상위 몇 %, 뭐 이런 거 나오던데, 제가 너무 높은 순위라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 수능에서 이런 % 정도로 나왔으면 참 좋았을텐데..이런 생각을 조금 했어요.^^ 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좋아하는 작가 같은 거 말할 때(사실 말할 때도 별로 없지만) 적당히 조절(?)해서 말해야하는거, 여기 알라딘에서 자주 왔다갔다하시는 분들은 아마 누구나가 느끼실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한편으로는 그런 점을 느끼기도 해됴. 그런 알라딘 서재 안과밖의 소통이 나눠지기도 하지만, 알라딘 내부에서도 여전히 소통의 지점은 멀구나, 아니 어떤 면에서는 도리어 더 매끄럽지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지나가는 일들을 보며) 느끼기도 합니다. 달걀부인님 말씀 들으니 우리가 책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게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2016-03-0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3-04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래서 책을 사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여기 들어오지 말걸. 몰랐는데 모신 하미드의 신간을 알게 되네요. 제목이 저래서 제발 소설이 아니기를...바랐는데 소설이네요. 세상에 읽을 책이 많아서 설레이고 좋기도 하지만, 확실히 읽는 속도가 책 구매 속도를 못따라가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을 읽고) 저는 여태껏 학교 성적으로 그렇게 높은 순위를 차지해본 적이 없었어요. 수능 성적이 상위 0.2%였다면 지금쯤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져있을텐데..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었습니다. 아하하하하.

맥거핀 2016-03-04 16:48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만 보고 저게 뭔가 싶었는데, 소설이더군요. 제목부터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저번 소설은 처음 한 두장부터 우와..이랬는데, 이 소설은 어떨지..

그런데 다락방님이 0.2%밖에(?) 안되나요..그럼 그 위에 있는 분들은 뉴규? 궁금하네요. 저도 이게 성적표였으면..하는 꿈을 잠깐..꾼 다음..현실에서 쓸쓸히 모니터를 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응?)

기억의집 2016-03-0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의 책을 사러 돌아다니는... 저는 그 대상이 배수아였는데, 지금은 아예 한국문학을 안 읽고 관심도 없어지니, 책을 사러 돌아다니며 흥분되었던, 다음 서점에서 책을 샀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의 발걸음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휴, 지금은 페북에 배수아 보여도 친구신청 안 하게 되더라구요. 배수아씨가 친구요청 받아주시지 않겠지만서도...페북에 많은 문학종사자들, 출판인들이 많지만, 참 이상하죠. 막상 페북 들여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니.... 친추 요청은 안하고 싶더라구요.

전 스마트폼 없애고 와이파이 전용 타블렛으로 사용하니 어디 다녀도 책을 읽게 돼요~

맥거핀 2016-03-05 00:20   좋아요 0 | URL
아..배수아 작가님 좋아하셨다니 저도 더 반갑습니다. 저도 예전에 한 배수아 했거든요.^^ 최근에 나온 유목민...그 에세이도 사놓기는 했는데 여전히 책탑 어딘가에 있답니다. Axt에서 요새 자주 보니 그것도 반갑더군요. 배수아 작가 페북도 있었군요. 저는 몰랐어요 뭐 그런데 저도 친추는 안할 것 같습니다. 아니, 아마도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못할 것 같군요. 저는 소심하니까요.; 저는 그런데 맨날 출판사 페북 같은데만 돌아다녀서 그런지 맨날 `알 것 같은 친구`에 전혀 모르는 출판사 사람들만 뜨더군요.

아..그런 좋은 방법이..저도 스마트폰 그냥 피처폰으로 바꾸고, 이북 기기나 하나 살까요...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못할 거 뻔히 아는 스마트폰 중독자..

비의딸 2016-03-0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히지 않는데도 쌓아놓은 책탑은 자꾸만 높아간다거나 하는 고민은 저만 하는게 아니였군요, 멍하게 스마트 폰을 뒤적이는 것도 그렇고. 이래서 이웃이 필요한 건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책이 줄어드는 듯 하거든요.. ^^ 추천하신 책, 다 좋지만 모신 하미드의 책은 꼭 선정되면 좋겠어요.

맥거핀 2016-03-05 00:23   좋아요 0 | URL
네..저도 선정이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것 같습니다. 책탑 치워야하는데...한번 책탑에서 치워져 책꽂이로 들어가게 되면 한동안 잊어버릴 걸 잘 알기에, 일부러 압박감을 느끼려고 쌓아두기는 하는데 볼 때마다 저도 제가 한심스러워요. 그래도 자기 전에 어떻게든 한 권씩 집어들기는 하는데, 그 속도보다 항상 새책을 사는 속도가 더 빨라요.

cyrus 2016-03-0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게 언론에서는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책 구매비용, 독서 인구 수가 점점 감소된다는 내용을 많이 보도하는데 정부는 꿈쩍을 안 합니다. 독자와 출판사는 법 하나 때문에 점점 힘들어져 갈 뿐입니다.

맥거핀 2016-03-05 00:25   좋아요 1 | URL
매출 자체는 줄었지만, 대형서점들, 인터넷서점들의 영업이익 자체는 늘었다는 뉴스는 봤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도서정가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현재의 도서정가제는 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정가`로 파는 것 같지도 않은데..) 보완이 시급해 보입니다.

2016-03-05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3-05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들 너무 읽기 힘들지 않나요.ㅜㅜ 읽고 한달 정도 지나니 다시 읽어볼까? 하는 마음도 조금 들긴 하는데 엄두를 못 내겠어요. 윤대녕 작가와 관련된 맥거핀님의 추억이 좋아요. 저는 한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기다리던 분이 많으셨나 봐요. 막연한 호감이 싹트고 있어요. 나눔의 세계는 분류는 맞는데 소설이라 보기가 애매해서... 근데 진짜 요즘 카뮈 관련 책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몇 달 격차로.

맥거핀 2016-03-07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윤대녕의 소설은 읽은지가 몇 년은 된 것 같아요. 헤르메스님이 서평단 추천글에 윤대녕에게 최근에 많이 실망하셨다,고 쓰셨던데 저도 별로이면 어떡하나하고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감독)가 많이 나빠진 것을 보면 마음에 좋지가 않죠.

그들은 확실히 읽기가 어려워요. 심리묘사도 치밀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네들 입장에서는 어떤 공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도 많구요. 아무튼 소설에 문체나 묘사나 독특한 부분이 있어요. 제가 리뷰가 늦어지고 있는 것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요.^^

프레이야 2016-03-0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탑이 여기저기 쌓여가고
집중력은 덜해지고‥난감합니다. 확실히 예전보다 뭔가 떨어지고 둔해지는 느낌이예요. 아무래도 스맛폰탓도 좀 해야겠어요. ㅎㅎ

맥거핀 2016-03-07 13:50   좋아요 0 | URL
사실 스마트폰은 죄가 없죠. 그것을 보는 제가 죄가 있죠.^^ 그런데 사실 영화든, TV든, 스마트폰이든 요새는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라 책이 그만큼 저한테있어서도 등한시된느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늘 부러움을 마음 한 켠에 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