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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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작동원리를 알아야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난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조금 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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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읽었을 땐 무난하게 이해했었는데 중반부는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읽으면 읽을수록 수많은 고민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

맥거핀 2015-02-09 14:45   좋아요 0 | URL
네..저도 뒤로 갈수록 약간 이해력이 달리더군요. 특히 그 수식들 말입니다. 김수행 교수님이 나름 쉽게 푼다고 노력하시는 것 같기는 하지만요. 재독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책입니다.

희선 2015-02-0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공부가 들어가는군요 공부 많이 되었습니까 왜 공부가 들어가는가 했더니 다른 책 《자본론》을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군요 무엇이든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좋겠죠(아는 게 힘) 이렇게 말해도 공부 거의 안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기도 하네요

요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다 한번씩 하는 것이군요 새해가 되고 얼마 안 돼서 그런 건지도... 알 수 없는 말이군요

벌써 주말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5-02-09 14:49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의 사상에 동의하든 안하든 간에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은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 메커니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이것만이 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물론 [자본론]을 보면 더 좋겠지만, 지력이 딸려서...

읽으면 읽을수록 마르크스의 어떤 천재성에 감탄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그는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아주 드물게, 무엇인가를 말하기가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 처음에는 읽고 무엇인가를 써볼까..생각했지만, 읽다보니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누군가가 억지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는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처음 첫번째 장(章)을 읽으면, 읽는 사람을 이보다 더 힘들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은 더 힘들게 만들고, 그 다음 장은 그보다 더 힘들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는다는 사실이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질 즈음, 어느 틈엔가 그 읽는다는 의미의 어떤 숭고함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기록한다는 것과 읽음으로써 그것을 지탱시키는 것의 의미 말이다. 아무튼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소설이다.

 

아마도 무엇을 말하기가 힘든 것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앞에 가로놓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것. 이 소설은 처음에는 하나의 어떤 실제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점점 인간 일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과연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한강 작가의 말대로 놀라울 정도로 잔인하거나 악한 인물이 있었고, 그 반대로 보기 드물게 선하거나,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려 애쓰던 이도 있었다. 인간이란, 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치는 그런 불투명도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한석 평론가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비판론(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비판론이었다)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투명하게 영화가 될 수 없고, 영화도 투명하게 세상이 될 수 없으며, 양쪽은 영원히 그래서도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소설을 비롯한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야기가 투명해질 때 종종 실세계가 불투명함을 우리는 잊고, 이야기의 카타르시스를 세상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혼동하거나 쉽게 대체한다. 내가 밑에 올려놓을 몇 권의 책은 불투명한 상태로 내 앞에 놓여져 있지만, 그 불투명함이 이야기를 읽고 내려놓는 마지막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혹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어도 말이다.

 

 

 

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문학사상사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소설집이다. 시간을 가지고 진득히 챙겨봤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해야겠지. 어째 왠지 늘 그 이름이 그 이름인 것 같은 인상은 있지만, 그래도 이상문학상을 읽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한해를 시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휴전, 마리오 베네데티, 창비

 

군부독재, 도시 노동자, 염세주의와 숙명론,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낯설어 보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이 느낌. 나도 요새 자꾸 염세주의와 숙명론이 엄습하는데, 이 책이 조금 도움이 될까. 

 

 

붉은 밤의 도시들, 윌리엄 S. 버로스, 문학동네

 

반양장은 지난 달이고, 양장은 이번 달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작품은 유토피아 공화국 리베르타티아를 건설한 실존 인물 미션 선장에 영감을 받아,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저질러진 치명적인 실수들을 돌이키기 위해 탄생한 유토피아 소설이다.'라는 출판사 설명을 봐서는 내 취향에 딱일 것 같은데, 아마도 안되겠지. 안될거야.

 

 

상상범, 권리, 은행나무

 

예전에 '씨네21'인가, '한겨레21'인가에 연재되었던(아니면 비운의 만화잡지 '팝툰'에서였나..) 글들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2322년 URAZIL의 세계라니, 재미있을 것 같다. 위에 건 유토피아, 이건 디스토피아.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다른 분들의 추천을 믿고 골라보는 한권. 로쟈님의 추천이나, guiness님의 추천을 봐도 그렇고, 추한 망나니의 '문학적 다큐멘터리'나, '기록문학'이라는 설명을 봐도 그렇고, 꽤나 흥미진진한 독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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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2-0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그나저나 이번 달 도서나 빨리 읽어야겠다. 아직 두 권 다 하나도 못봤음!

희선 2015-02-0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떤 답은 자기 스스로 생각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서 어긋나지 않아야겠죠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군요 책, 거기에서도 소설(이야기)은 책을 읽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만은 아니기도 한데... 하지만 어떤 때는 거기에서 말하는 것을 알고 배우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억지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가르쳐주는 게 좋은 거죠 이런 건 맥거핀 님도 아실 텐데 말했네요

이번에 하나 배웠습니다 소설은 불투명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알 수가 없는 거지, 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것 때문이군요 불투명해야 나은 거군요

이상문학상은 벌써 39회째군요 저는 이거 예전에 아주 조금만 봤습니다 그때는 ‘나왔구나’ 했는데, 지금은 ‘아직도 나오는구나’ 하고 책 앞면 예전하고 달라졌네, 했어요 전에도 조금씩 바뀌었네요


희선

맥거핀 2015-02-05 11:56   좋아요 0 | URL
소설이든 영화든 결국 보는 이에게 질문을 하게 하고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투명하다면, 단지 그것을 읽고 보고 치워버리고 말 뿐이겠죠.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이야기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군요. 그건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야기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질문을 하는 것만큼 답을 찾는 노력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저는 대학 시절부터 거의 이상문학상은 사서 봤던 것 같아요. 뭐 아무래도 누군가의 눈을 거친 작품들이니까, 한해의 좋은 작품들을 편하게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표제작보다 다른 작품들이 더 좋았던 경우가 많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배수아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못탄게 좀 아쉽기는 한데..

아이리시스 2015-02-06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어서 읽어요~!! 새벽세시..에 화장실에 가나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리시스 2015-02-06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집에선 컴터를 잘 안 켜서 새벽에ㅠ깨서 네, 스맛폰으로 뭐든지 합니다.. 댓글도 쓰고 아이러브커피도 아이러브파스타도..루미큐브도.. 안녕~!!

맥거핀 2015-02-06 12:50   좋아요 0 | URL
아..갑자기 무슨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데..새벽 세시 어쩌구 하는 소설이 있지 않았나요? 새벽 세시에 루미큐브 같은 거 하면 잠이 잘 안올텐데..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가 됩시다.^^ 근데 나 아직도 안 읽었어요.-_-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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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그분에게는 망각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경제'였고, 그것은 총 42번 언급되었다. 그 뒤로 많이 나온 단어는 '국민'으로 총 29번 언급되었으며, '경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16번, '개혁'이나 '혁신'은 통틀어 24번 사용되며 그 뒤를 따랐다. 반면 작년에 그분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던 어떤 담화에서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단어도 있다. '세월호', '희생', '위로'와 같은 낱말들. 박근혜 대통령의 원고 위에서만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적어도 방송과 신문은 세월호를 '효과적으로' 제거한 것 같다. 굳이 시간을 들여 찾아보지 않는 한 언론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언급을 보기는 힘들다. 있더라도 특별조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인양을 하는지 안하지는 모를 알 수 없는 뉴스 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어떤 피로감을 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것은 제거되었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효과적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라져버리거나 대체된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면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다.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등이 쓴 12개의 글.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글들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세월호, 구조, 고통, 변화, 희망, 진상규명, 진실, 거짓말, 신자유주의, 국가, 정부, 시민, 그리고 우리, 우리, 우리,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들. 모두들 동일한 시각에 같은 사건을 보았지만, 목소리는 약간씩 다르다. 누군가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부조리를 말하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묻는다. 혹은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공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다른 누군가는 미래를 보며,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상상력과 새로운 행동의 결단을 촉구한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이들은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려 애쓴다. 

 

여기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그것은 정확히 계량하고자 한다면 물론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나에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간극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주로 TV뉴스들을 틀어놓고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물리적인 간극이 있었다. 문자와 소리의 간극.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책과 세월호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TV. 두 개의 다른 나라에서 들려 오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점점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이후의 '살아남은 자들의 세계'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2.   

문제는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새로운 상식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변화는 그런 것들이다. "더이상은 공동체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각자 살아 남는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p.110

      

사실 신자유주의국가는 그 내부에 죽음의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는 불길한 체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한, 만인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애당초 그러했다. 국가의 배후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중략) 그런데 신자유/신보수주의시대 국가권력/폭력의 불길함은 세월호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확인된다. 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그 권력을 공익을 위해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초래하는 치명적 폭력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0

       

각자 살아 남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투쟁은 세월호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국가를 선택한 이후부터 우리에게 예견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이런 풍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1월 21일자 JTBC 뉴스. 포상금을 노리는 전문 파파라치들과 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의 실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한 형태. 실제로 포상금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은 파파라치들과 파파라치 학원이지만, 이들의 뒤에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각종 포상항목(실제로 1100가지가 넘는 항목이 있다)과 포상액이 지난 몇년간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행해야하는 정당한 감시는 공백상태이며, 이 임무는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시와 고발은 파파라치가 아닌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요즘의 뉴스들은 거의 '괴물판독기'라 불러도 될 만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괴물들이 걸러져 나온다. 누군가는 땅콩을 집어 던졌고,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무릎 꿇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딸을 성추행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수많은 각종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보도되고, 신상이 공개되고, 여론의 날서린 비판을 받는다. 괴물의 주변에는 그들을 늘 감시할 눈이 있고, 그 감시는 꽤나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수많은 괴물을 걸러내는데, 왜 괴물들은 도무지 줄지 않는걸까. 아니 도리어 왜 그 숫자를 더 늘려가는 것처럼 보일까. 괴물을 걸러내는 우리의 방법론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괴물들이 늘 양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괴물들은 아무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감시를 행하고 괴물을 걸러내던 누군가가, 어느날 괴물이 될 뿐이다. 표창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공범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죄를 감형받기 위해 공범의 더 큰 죄를 폭로하는 범인처럼 우리는 타인의 죄를 밝혀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학습한다. 자신을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타인을 더 괴물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세월호는 단지 그것을 더 강화시켰거나, 어떤 압축된 이미지로 보여줬을 뿐이다. 타인을 살리려 애쓴 이들은 죽게 하고, 타인보다 어떻게든 빨리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살리는 이미지로 말이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에서 국가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유일하게 구조했다. 

 

3.     

'세월호'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용산 참사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쌍용자동차와 삼성반도체, 밀양, 강정 등으로 표출된 구조적 재난과도 연속되는 현실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2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다른 곳에서 성공했다. 대안 부재가 합쳐진 결과 사유화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행된 곳은 바로 사회였다. 오히려 사유화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동시에 아직 이 사유화를 돌려놓을 대안이 분명치 않은 영역은 바로 주체성과 사회적 관계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했다. (중략)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p.206~207

      

지난 1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일로 쫓겨난 23명의 철거민 중 10명은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6명은 작은 가게를 다시 열었지만, 수입이 훨씬 줄어들었으며, 7명은 아예 직장조차 없음을 뉴스는 말해준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철거된 남일당 건물 자리가 여전히 공터로 남아 단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그 건물에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는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산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했다. 철거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며 그 건물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사람들의 공적 능력을 제거하였으며, 그들 삶의 많은 것을 경제라는 화두로 대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경제가 지배한다. 오늘날의 뉴스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화나게 하는 것은 괴물들의 소식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단지 유흥거리에 불과하고, 보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연말정산, 세금의 확대, 담배값 인상과 같은 것들이다. 세월호라고 하면 보상을 떠올리고,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보상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IS에 잡혀있는 일본인 인질의 굳은 얼굴 뒤에 숨겨진 공포를 보기보다는 그를 돌려받기 위해 IS가 제시한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궁금해하며, 설마 우리나라도 저런 일은 없겠지, 있더라도 (내 돈이 들어간) 세금은 못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경제를 살리는 데에만 힘을 쏟겠다는 경제 대통령을 뽑고, 그 댓가로 기꺼이 대통령은 '경제'라는 낱말을 42번, '성장'이라는 단어를 '16번',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단어를 24번 말해준다. 우리는 그 말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세월호'나 '희생'이나 '위로'라는 낱말을 듣는 대신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다.

 

4.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자책과 죄책의 차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아닐까. 우리 중 누가, 문득 일상이 부러진 채로 거리에서 새까만 투사가 되어 살 일을 예측하고 살까. (중략)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p.95~96

      

안티고네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장례가 불허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과 제주(祭酒)를 뿌리고, 그에 대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장례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 마땅한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윤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 김서영 '정신분석적 행위, 그 윤리적 필연을 살아내야 할 시간' p.181

      

우리는 아니 나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다른 말을 듣기를 말이다. 망각을 말이다. 사건 초기 열심히 뉴스를 보던 나는 어느틈엔가 뉴스를 점점 뜸하게 보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그로부터 며칠 후 예정된 외국 여행 일정이 다가왔을 때는 조금 안도했었던 것도 같다. 한 십여 일 외국에서 있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모두들 금방 잊으니까. 아니, 나야말로 금방 잊고 싶으니까. 그 때의 나는 무엇 때문에 뉴스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던가. 돌이켜보면 사건 당시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나를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공포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한 공포였다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부조리한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공포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당연히 언젠가 바다에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배에 그대로 남아있던 누구도 구조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탈출한 배의 운전을 담당한 사람들은 구조되었고, 국가는 민간업체에 구조를 맡겼지만, 민간업체는 구조는 국가의 일이라 말하였다. 배의 운항을 맡은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낡은 배는 무리한 증축과 구조변경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고, 재난신호는 엉뚱한 곳에 접수되었으며, 대통령은 사고 당시 몇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은 채, 책임을 물어 해경을 해체하였다. 책 속의 박민규의 말대로, 혹은 박민규의 소설 속 풍경대로 그것은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부조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부조리한 모든 것이 당연해보이는 이상한 현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저런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며, 어쩌면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을 뜨는 것(박민규)이거나, 권력에 기대지 않고 망각과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김연수)이기도 하며,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황종연)이기도 하고, 윤리적 임무를 가지고 오빠를 애도했던 안티고네가 되는 것(김서영)이거나 재난의 시대에 맞서 글을 쓰는 것(전규찬)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약간씩 다른 맥락을 가지지만, 적어도 한 가지의 공통점은 가진다.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매몰되어 얼어붙거나, 주입된 공포를 잊기 위해서 달콤한 망각과 은폐의 유혹에 빠져 '경제'와 '성장'과 '혁신'만이 있는 공범들의 사회로 기꺼이 돌아가려 했던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라는 점이며, 동시에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이면에 있는 것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것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실제적인 무엇, 실체가 보이는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이 글들은 긴급한 필요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질문이 정리되면 이제 그 질문에 따라서 답을 그러모으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니 말이다. 시인은 시를 쓸 것이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며, 언론학자는 언론의 책임을 생각할 것이고, 정치철학자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구상할 것이며, 또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안다. 모든 구체성은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것, 아무것도 상상해보지 않는 자에게 어떤 답을 찾을 가능성도 주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눈먼 자들은 눈뜬 세계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상상하지 않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너무도 쉽게 스스로 공범으로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도 아프게 말해준다.

    

 

* 세월호의 빠른 인양과 정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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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1-29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으면 안 되는데 대통령이 말한 몇 가지 낱말 숫자를 적은 걸 보니 웃음이 좀 낫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런 말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잘 모릅니다 세상이 빨라지고 경제만을 생각하는 게 이것 때문이었나 싶군요 나라가 가난해지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힘들겠지만, 늘 경제가 좋아지고 성장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잘 살 것 같지도 않은데...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그대로 못살 것 같아요 가난은 나라도 구해줄 수 없다고 하잖아요

돈은 아껴야 할 때도 있지만, 써야 할 때도 있는데...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배 안에 있던 아이들 구해주러 올 거다 믿고 기다렸을 텐데... 더 많이 구하기를 바랐는데......


희선

맥거핀 2015-01-30 17:21   좋아요 0 | URL
횟수는 저도 YTN 뉴스에서 본 거예요. 그걸 세고 있을 기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기기는 하군요. (그러나 의외로 횟수는 대체로 꽤나 정확한 걸 말하죠.)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죠. 10년째 경제성장을 얘기하는 대통령이 취임하고 있는데, 나라가 왜 이모양 이꼴인지...어제 뉴스를 보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상위 1%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라고 선언하는데 어찌나 멋있어 보이는지요.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나라의 대통령도 그런 선언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얘기 하다가는 난리나겠지요.

아무튼 돈과 상관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세월호를 둘러싼 문제들도 그런 것이겠구요. 근데 벌써 조사위원회의 예산이 어쩌구..하는 기사를 보니 분통만 터질 따름입니다.

2015-02-26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28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2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국제시장, 윤제균, 2015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윤제균의 <국제시장>을 보았다. 이미 여러모로 말이 많은 영화이고, 영화 내외부를 둘러싸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들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화를 보며 스쳐 지나갔던 몇몇 감상들을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2.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여기저기에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많이 실리고 있다. 윤제균 감독은 여러 매체에 거의 비슷한 내용의 소감을 밝히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와 관련된 것이다. 그 인터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윤제균 감독이 이야기하는 이 영화를 만든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 다른 하나는 세대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것이다.

 

3.   

나는 한 가지에는 약간은 동의하지만, 다른 하나에는 조금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먼저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라는 점. 솔직히 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이제서야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간 우리 근현대사의 어떤 지점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상당수의 영화들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표면적으로 유지하거나, 특정의 사건을 통해 내부 전체를 깊숙이 들어가 조망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였다면, 이 영화처럼 적어도 표면적으로 정치적 태도를 탈각한 것처럼 보이고, 특정의 사건이 아닌 어떤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4.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영화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수십 년 동안 반새누리(반한나라)라는 기조를 지켜오신 우리 아버지를 영화의 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울게 만들었나. 그러니까 적어도 이 영화에는 반새누리이든, 혹은 반새정치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이 눈물을 짓게 만드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과 조금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나름의 충실한 재현과 적절한 위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독일에서 광부로 고생하는 덕수(황정민)의 모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우리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칭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5.  

그러나 그것이 흔히 논의된 대로 정치성을 완전히 탈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표면적으로'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이 영화의 중간중간 비어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채우고 있는, 혹은 채우려는 욕망을 보이는 다른 무엇인가가 조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들이기 때문이다.

 

6.  

이 영화는 크게 네 가지의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전쟁 중의 흥남철수, 광부들의 파독,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가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들의 선택이 부적절했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 있는 독재정권이나, 그에 맞선 반독재투쟁과 같은 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반론도 있다. 덕수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므로 이 사건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나는 이 반론도 충분히 가능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 사건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이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7.  

다만 의아한 것은 이 사건을 그리는 방식인데, 이 사건은 덕수를 축으로 하여 통과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득문득 그 축을 벗어나는 지점이 있으며, 그 벗어나는 지점들이 어떤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반의 흥남철수 장면에서 덕수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미군 사령관(아마도 맥아더인듯한)에게 피란민들을 배에 실어달라고 호소하는 한국인 통역관의 모습과 결국 미군 사령관이 무기를 버리고 배에 피란민들을 싣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덕수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후에 어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 장면은 베트남전에서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간청하는 베트남 주민들의 요청을 결국 거부하다가 태우고 마는 덕수의 모습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오로지 어떤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스토리 상으로는 도무지 필요가 없다). 그 모습이란 성장한 한국이라는 국가로 표상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남고자 애썼던 처지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위치. 아니 조금 덜 삐딱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 이러한 것은 기브 미 쪼꼬렛을 외쳤던 어린 덕수의 모습과 이제 베트남 소년에게 초컬릿을 건네주는 덕수의 모습과 같은 장면(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치 필요하다는 듯이 소년은 덕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혹은 독일 광산에서 관리자 앞에 무릎을 꿇었던 영자(김윤진)와 외국노동자를 조롱하는 어린 학생을 훈계하는 덕수의 모습으로 다시 비슷하게 변주된다.

 

8.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비어있는 어떤 장면들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가끔 고개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이상한 녀석이다. 휴전 소식을 들으며, 국가가 힘이 약하니 자기들 맘대로 하는 것이라는 멘트, 혹은 정주영의 꿈을 비웃는 소년들과 결국 정주영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신문기사, 혹은 노년의 덕수와 영자가 대화를 하는 풍경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산의 (예전과 비교되는) 발전된 풍경과 같은 것 말이다(그들은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은 감독은 왜 굳이 나비를 통하여 이 풍광을 돌려서 보여주는 것일까).

 

9.  

물론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웃긴 장면은 대통령도 감명 깊게 보았다는 그 장면일 것이다. 덕수에게 베트남전에 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영자와 이것이 내 팔자니 어쩔 수 없다는 (약간은 이상한) 항변을 하는 덕수의 언쟁을 봉합하는 국기게양식. 이 장면을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나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장면들과 맞물려 이 장면은 조금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일단 이 영화는 장면들이 기능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즉 웃기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고, 울리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즉 음악이나 분위기로 이제부터 울리겠습니다, 혹은 이제부터 웃기겠습니다,라고 이 영화는 장면마다 선언하고 시작한다. 그런 구분으로 보면 이 장면은 명백히 웃기고자하는 장면이 아니며, 도리어 구조상으로 볼 때 갈등이 최고조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덕수에게 그의 삶에 대해서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덕수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남은 가족을 지켜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삶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그의 어떤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은 고시학원에서 도강을 하다가 쫓겨나는 장면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고 제기될 틈도 없어 보였던 그 질문을 영자가 한다. 여기에 당신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때 울려퍼지는 애국가라니. 왜 그는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채, 여전히 비어있는 무엇인가로 남겨져 있는가. 이 영화에서 덕수에게 부여한 위치는 무엇인가. 사건들을 관통하여 보여주기 위한 투시경일뿐인가(예를 들어 이 영화와 비교되는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지능지수가 낮은, 그러므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10.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가 헌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악조건 속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으며, 적어도 그것이 자식 세대들, 혹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꾸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녀석이며, 국가 발전이라는 환상이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무엇을 자꾸 국가가 가로채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족이 가족 이상의 가족주의가 될 때, 혹은 그 가족주의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해질 때, 실제의 가족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 고리를 어떻게 단절시킬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의 어떤 단초를 <인터스텔라>나 <설국열차>에서 보았다.)

 

11.  

그러니까 마지막의 실제 가족은 이상한 위치에 서 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유령)를 만나고 있는 덕수와 분리된 가족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윤제균의 컷이다. 자식들은 아무도 덕수에게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생한 것을 안다, 그러니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그가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의 환영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환영'은 누구인가(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 아버지 세대들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이 사실은 환영(환상)에 불과한 위로라고 해도 말이다.

 

12.   

그 환영이 국가라는 아버지이다,라고 도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장면은 여러모로 아쉽고 미심쩍어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윤제균 감독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가 세대 간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화합과 소통의 가장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을 영화로 말한다면 적어도 상대방을 이해할 여지가 있는 무엇인가로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덕수는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이해의 여지도 없다. 이 영화에서의 젊은 세대는 내가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그저 기능적인 나쁜 캐릭터이다. 그들은 괜히 외국인노동자에게 시비를 걸고, 늙고 게다가 아픈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고 놀러가고, 부모의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들에게 어디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자면, 물론 이는 영화가 어떤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산가족상봉을 그린 후 현재로 건너뛰는 선택 말이다. 덕수와 자식들이 단절된 것은 이 시기의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소통이 단절된 현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도 물론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이라기보다는 덧.  

나는 그래서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솔직하지 못했다라기 보다는 사실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그래야 더 재미있고, 더 관객이 많이 들잖아요,라고 말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우리 이제 그런 정도는 '익스큐즈'할 수 있는 쿨한 관객이잖아요.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잖아요. (허지웅의 '정신승리하는 사회'라는 코멘트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그런 말은 적어도 영리한 멘트는 아니다. 그가 적어도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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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1-2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깐 라디오 방송에서 이 말 들었어요 ‘국제시장’ 영화 제목이었군요 부산 국제시장에 사람이 많이 와서 가기 어려워졌다는 말이었어요 영화 찍었다고 한 것은 들은 것 같은데 그 시장 이름이 영화 제목인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말했는데 제가 못 들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지는 게 좋은지 안 좋은지 이런 말도 한 것 같군요 그곳이 영화에 좋게 나왔나봐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가겠죠

영화 맥거핀 님 아버지와 함께 보셨나봐요 사우디아라비아, 저도 잊고 있었는데 삼촌이 거기에 갔다온 게 생각났습니다 삼촌이고 저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그랬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개인은 나라보다 자기 식구를 위해서 그렇게 다른 나라에 가지만, 실제 그렇게 만든 건 나라였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베트남 전쟁도 그렇죠 예전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서 일을 해서 나라에 도움을 주었군요 다음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생각나는군요

부모 (세대)가 애쓴 것을 자식은 잘 모르기도 해요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어봐야 안다고 하지만, 정말 다 알까요 이건 남을 알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군요 영화에서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않지만, 이것을 보는 사람은 그러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죠 좋게 나오면 나도 저렇게 해야겠구나 마음먹거나, 나쁘게 나오면 나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독일, 베트남에 갔다면 오랫동안 집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자식들과 잘 지내지 못했을지도...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희선

맥거핀 2015-01-21 21:18   좋아요 0 | URL
우리 아버지 뿐만이 아니고, 이 영화에서처럼 예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국에서 일하신 분들이 많죠. 그분들이 영화에서처럼 매우 고생하셨고, 가족들을 먹여살렸으며, 또한 그분들이 벌은 외화가 우리 경제발전에 기여를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국내에서 일하신 분들도 마찬가지구요.

다만 그것이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국가라는 단위 전체로 뭉뚱그려 이야기될 때 위험할 수 있다는 거죠. 뻔한 얘기지만, 국가는 결국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더구나 그것이 어떤 `희생`이라는 것으로 포장된다면 말입니다.

글쎄요. 소통을 원하는 영화라고 하는데, 소통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는게 우선이잖아요.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덕수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에게는 오로지 `가족을 지킨다`는 것만 있지, 사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 외에 설명하는 것이 잘 없기도 합니다. 사건을 그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 더 세심한 마음으로 영화가 그렸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도리어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되보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은 모른다고 하죠.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또 한편으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는 또한 한편으로 자신이 젊을 때의 마음을 또 너무 빨리 잊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15-01-24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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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정확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p.70)"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p.86)"실로 지금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p.168) 그리고 그의 고백.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p.27) 이 '정확하다'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글들에서 '정확'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어긋난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글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가진 어떤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 모든 이야기는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어떠한 수용자, 혹은 어떠한 해석자에게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영화를 자신의 느낌대로, 혹은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의 세계관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가 적어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나름의 이해나 해석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신형철도 잘 알고 있다("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책머리에') 이 '더 좋다'와 '덜 좋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이 '정확하다'라는 말을 책의 제목에까지 가져온 것은 두 가지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이 '정확하다'는 말이 수식하는 것에 대해. 단적으로 말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함'이란 정확한 해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괄한 정확한 사랑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작품에 대한 해석이란 작품에 대한 사랑의 하나의 형태임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해석 이상의 그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영화, 한 이야기를 보며 순간순간 그에 대해 반응한다.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때, 우리도 호의를 가지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도 상처를 받고, 다른 누군가를 증오할 때, 우리도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증오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순간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가질 때, 우리는 도리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즉 이 증오나 호의나 상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굴절되어 다르거나 비슷한 '무엇인가' 혹은 그 '무엇인가'들이 합쳐진 '거대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거대한 무엇인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어디에서와서 어떻게 만들어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이 순간, 나를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멍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를 때 때로 고통스럽다. 신형철의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무엇인가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며, 어떻게 분해될 수 있는지(혹은 분해가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히는 일. 그것을 위해서 신형철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단 하나다. 그것은 섬세하고자 하는 것, 혹은 섬세해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 즉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책머리에')) 많은 감상들이 '감동적이었다'라는 말로 뭉뚱그린 표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감동'이라는 녀석을 분해하여 들여다보는 것이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노력을 시도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가 해석자이고자 하기 때문에, 즉 그가 말한대로 해석이라는 '기술'을 가진 '비평가'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아마도 '정확하다'는 말을 책의 제목에 가장 처음 넣은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이것이 거의 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책머리에') 즉 그에게 있어서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 그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정확함'에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노력'에도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고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험은 무엇을 알고자하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들은 일종의 실험이 된다. 정확해지고자 하는 실험 말이다.

 

이것이 그런 실험이라면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확함'과 '실험' 사이에 있는 하나, 즉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라는 점. 그것은 물론 제목에 있는대로 '사랑'이다. 신형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견지하고 있는 자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각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말한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p.153) 실험이란 기본적으로 잔혹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험이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실험의 대상자들에게 계속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며, 그 텍스트가 결국 그의 생각에는 의도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텍스트였어도, 그것을 섬세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영화를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은 왜 거부감을 불러오는가. 예를 들어 영화를 일종의 커다란 시험지로 보고, 최선을 다해 정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같은 것. 시험의 모든 정답을 찾은 학생에게 시험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곧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실험은 결국 끝나지 않는 실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아까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기 때문이며,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정확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어떠한 문학도, 혹은 비평도 완벽한 정확함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한 정확함이 존재하는 순간, 그의 원본은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삶의 모사물인 문학, 작품의 모사물인 비평이 완전하다면 삶과 작품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p.27) 이 책은 우리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받는 고통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덧.

정확하게 말해서 책을 모두 읽지는 않았다. 중간에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은 건너 뛰었으므로 굳이 분량으로 말하자면 3분의 2정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없을까봐서였다. 단지 세심한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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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1-15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다가 한줄에 글자수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걸 알고 싶어하다니... 그것을 언제나 맞추어서 쓸까 싶기도 하군요 열줄이 넘을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잖아요 그때는 늘리거나 줄일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이상한 데 마음을 쓰는군요

저는 그렇게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모르면 모르는대로, 뭔가 떠오르면 떠오르는대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심지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쓰니까요(나는 별로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은 다르겠지, 하면서) 제가 보고 쓰는 건 거의 책이지만... 어쩌면 제가 제 마음을 잘 들여다보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을 글로 쓰는 것은 쉽지 않기도 하죠 그렇게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별로 애쓰지 않는군요

영화, 책은 다 정확한 답은 없겠죠 학교에서는 정해놓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다른 생각이 있어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죠 저는 다른 생각이 별로 안 떠오르지만... 새롭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네요

세심하게 보기 위해... 저는 그런 것도 잘 못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5-01-16 13:1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잡지에 연재했던 글이니 분량을 마출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뭐 아마도 그것도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의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겠죠. 내용을 훼손하지 않고도 분량을 적절히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반성을 조금 하기는 했습니다. 누군가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 정신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시간을 들여가며 노력하는데, 달랑 한 번 보고 뭔가를 알았다는 식으로 쓰는 게 너무 오만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죠. 신형철 씨만큼 보아도 그렇게 쓸 수 없을텐데 말이죠. 물론 신형철 씨가 처한 입장과 제가 처한 입장은 다르겠습니다만, 노력한다는 그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 말입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비평을 대하는 사람들의 어떤 냉소적인 자세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비평가들의 이야기를 일종의 답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말이죠. 그것이 답일 수는 없겠죠. 다만, 누군가가 그것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다면, 그 노력만큼은 적어도 진지하게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은 작품을 보는 수준과는 그렇게 크게 관련이 없을 겁니다.

2015-01-16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